34
부향녀는 병원에 출근하는 길로 손녀의 입원실에 들어섰다. 뜻밖에도 나이가 지숙한 여러명의 사람들이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성옥이를 근심어린 눈길로 지켜보고있었다.
김성진과 고명철, 김경아도 함께 있었다.
《원장선생님!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많으십니까?》
한 중년의 사나이가 그에게 다가왔다.
《아니, 전번에?! …》
사나이는 부향녀의 손을 부여잡고 기뻐했다.
《예, 그렇습니다. 선생님에게서 담낭수술을 받았지요.》
부향녀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몸을 내리훑었다.
《원장선생님, 걱정마십시오. 이렇게 건강해서 앞에 서있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부향녀도 마음이 놓인다는듯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들? …》
김성진이 어리둥절해하는 부향녀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이분들은 상공련과 조신협에 소속되여있는 동포기업가들과 은행가들입니다. 모두들 성옥이 아버지의 회사를 돕겠다고 이렇게 왔습니다.》
《아니, 그럼! …》
부향녀의 눈가에는 뜨거운것이 핑하니 돌았다.
머리희슥한 늙은이가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원장선생, 이 늙은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찾아뵙습니다. 선생의 소행을 위대한 장군님께서 높이 평가해주시였다니 머리가 숙어집니다. 나같이 제 근심에 옆사람을 돌아볼념도 못할 때 조국에서는 또다시 교육원조비를 보내왔습니다. 우리 장군님께서 보내주셨단 말입니다. 조국을 어떻게 안고 살아야 하는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담낭수술을 했던 사나이가 부향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선생님, 면목이 없습니다. 제 목숨을 구원해준 은인의 집에 불이 붙었다는것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앉아있은 저였습니다. 옆집 불난데 물을 아끼지 말라고 했는데 난 제 집 우물에 자물쇠를 잠그어놓았으니… 용서하십시오.》
그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에 잠겨 부향녀의 손에 은행권을 쥐여주었다.
《아니, 이러시면? …》
《성의이니 물리칠 생각은 마십시오.》
이어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이 담긴 은행권들을 내놓았다.
부향녀의 눈굽은 뜨거워졌다.
《정말, 정말 고맙…》
《받아드십시오. 아무리 숲이 무성한 산도 개척하면 길이 나지기마련이 아닙니까. 힘들어도 용기를 내십시오. 이 성옥이와 같은 후대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길을 내야 할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구요. 사람이 쓰러지기는 쉬워도 일어서기는 힘든 법이지요. 정의란 언제나 부정의와의 첨예한 대결에서 빛을 내는 법이지요.》
부향녀는 그들의 뜨거운 성의에 목이 꽉 메였다.
《제게 이렇게 힘을 주시니 정말…》
일본반동들의 갖은 모략과 방해책동으로 자기들의 기업도 지탱하기조차 힘든 그들이였다. 그러나 다 같은 조선동포라는 의무감에 부향녀가 겪고있는 난관을 외면할수 없었다. 어떻게 하나 그앞에 막아선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성의를 고여가는 동포상공인들이였다.
《아니웨다. 고맙다는 말은 오히려 우리가 위대한 장군님께 드려야 합니다. 일시나마 난관앞에 주저하며 애국의 넋을 잊을번 했던 우리들을 일깨워주시고 손잡아 일으켜주신 위대한 그이께 말입니다.》
부향녀는 눈굽을 흐렸다. 해외동포들에 대한 장군님의 한량없는 믿음과 사랑이 수많은 동포들을 애국의 참된 길로 불러일으켜주었던것이다.
《고마워요. 여러분들의 성의를 전 언제나 잊지 않겠어요.》
《허, 여직껏 우린 원장선생님을 메스와 같은 사람으로 여겼는데 오늘 보니 약솜이나 다름없구만요.》
그들은 너나없이 롱질을 한마디씩 해가며 웃었다.
부향녀도 눈굽을 찍으며 따라웃었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가. 힘을 주고 웃음을 주며 떠밀어주는 저 깨끗한 마음들이…
고명철은 지금 바늘방석에 앉은것만 같았다. 동포들의 도움으로 자기의 회사가 구원될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였다.
중년의 사나이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이보라구, 명철사장! 우리모두 조국의 품에 자기의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서로 힘을 합쳐 보란듯이 허리를 쭉 펴고 살아갑시다.》
곁에 있던 사람이 한마디 덧붙였다.
《임잔 정말 훌륭한 어머니를 모시고있네. 저렇듯 굳센분을 잘 모시라구. 그가 지닌 사랑과 넋이 어디서부터 오는건지 잘 알아야 하네!》
《저를 일깨워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명철은 일시나마 그릇된 생각을 가졌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머니처럼, 이들처럼 티없이 순결하고 변함없는 마음을 간직하고싶었다.
《여보!-》
김경아가 그에게 다가왔다.
거치른 일본땅의 모진 풍파에 부대끼면서도 오염되지 않고 고마운 조국을 위해 푸른 잎새를 펼친 거목으로 서있는 그들의 모습이 가슴뿌듯하니 안겨들었다.
부향녀는 이들의 믿음과 기대에 꼭 보답해야겠다는 의지를 가다듬으며 그들을 바래웠다. 다시 손녀에게 다가온 그는 성옥이의 머리를 살며시 쓸어주며 속삭였다.
《성옥아! 너도 저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지? 그들처럼 강해야 한다. 네 할아버지도 비록 다리를 잘리웠지만 꿋꿋이 일어났단다. 왜 그랬겠니? 그것은 바로 다시는 허리를 굽히고 살아서는 안될 조선사람이기때문이란다.》
부향녀는 김성진을 찾아 그의 사무실로 갔다. 그는 책상우에 자기가 지금까지 보관하고있던 일기장을 꺼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김성진은 침통한 표정을 하였다.
《그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부향녀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비록 결심하고 온 걸음이지만 정작 모든것을 터놓자니 마음 한구석이 묵직했다.
다미꼬가 날 원망하지 않을가? 아니, 더는 이대로 묻어둘수는 없어.
《부위원장동지, 전 결심했습니다.》
김성진은 그의 두손을 꼭 잡았다.
《아주머니, 정말 힘든 결심을 하셨습니다.》
《전 다미꼬의 비참한 죽음이 하루에의 마음속에 더 큰 상처를 남겨두는것만 같아 며칠동안 주저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애를 위하는 진정한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눈먼사랑이 그애의 눈을 내 손으로 가리우는짓을 한셈이지요. 녀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수치가 뭔가를 알기에 녀자로서 동정했단 말입니다. 전, 하루에에게 친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렵니다. 그애만이 아닌 무로우 고이찌로도 저들의 일본이 과거 우리 조선녀성들에게 얼마나 귀축같은 만행을 저질렀는가 하는것을 알게 하렵니다. 그들을 위해서, 일본녀성들을 위해서, 이 지구상의 성노예피해자들을 위해서 비록 늦은감은 있지만 이 일기장을 세상에 공개하렵니다.》
《옳습니다. 자기가 알고있는 과거를 사람들앞에, 세계앞에 꺼내놓지 않는것은 일본의 력사외곡책동을 반대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유해로운것이지요.》
김성진은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아주머니도 잘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력사란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다리라는것을 말입니다. 더우기 지금 우리 조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 일제의 성노예행위를 최대의 반인륜적인 행위라고 규탄하며 이를 사죄하고 배상할것을 강력히 요구하고있지 않습니까.》
부향녀는 이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1990년대초 남조선에서 살고있는 일본군성노예의 피해자인 한 할머니가 첫 공개증언을 하면서부터 이 문제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그는 일본정부를 상대로 태평양전쟁과 그 이전시기 조선인희생자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고 일본법정에서 성노예피해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온 세계가 이 문제를 국제법의 란폭한 위반으로, 세계최대의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로 락인하고있지 않는가.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목소리들은 한결같이 웨치고있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지금껏 그것을 품고 주저하지 않았는가. 저 일기장을 공개해서 그들을 매춘부라고, 돈벌이를 위한 성적행위를 했다고 망발을 줴쳐대는 이 일본의 비렬한 행위를 까밝히려고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자식앞에 얼굴을 들지 못한 어머니의 아픔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무로우와 같은 력사가들이 진실을 알게 해야 한다. 늦게나마 정의로운 세계민심에 내 목소리를 합쳐야 한다.
김성진은 갑자기 생각난듯 한 소리로 말했다.
《참, 때마침 오셨습니다. 내 진작 그 말부터 했어야 했는데… 허 참, 이 건망증이란…》
김성진은 자기의 행동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책장을 열고 그속에서 뭔가 꺼내들었다.
두눈에 의혹이 짙게 실린 부향녀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헤덤비는지 알수 없었다.
이윽고 국제우편봉투를 책상에 내놓는 김성진은 전에없이 밝은 기색이였다.
《이것 보시우. 도이췰란드의 한스 베르메트선생이 아주머니앞으로 초대장을 보냈습디다.》
갈증이 나도록 기다리던 소식이라 부향녀는 몸을 일으키며 다가갔다.
《그게 정말이세요?》
김성진이 내미는 봉투를 받으니 안도의 숨이 나갔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몇달동안 흘러가는 시간의 분과 초를 쪼개가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제나저제나 기다린 소식이다.
《이제 며칠후에 베를린에서 세계력사학자들의 모임이 있는데 거기에 참가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구 또 부탁한것도 얻었답니다.》
부향녀는 봉투를 열고 초대장과 함께 한스의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그의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서렸다.
《이젠 됐어요.》
김성진은 더없는 기쁨속에 싸여있는 그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언제쯤 떠나시겠습니까?》
《려권수속이 끝나면 인차 가야지요.》
심상스럽게 말하는 그를 보며 김성진은 심중한 기색을 지었다.
《요즘 병도 심한데 비행기를 타고 그 먼곳에 갔다온다는게 어쩐지…》
부향녀는 괜한 걱정이라는듯 그를 나무람했다.
《원, 별걱정을 다하십니다.》
그날 저녁 부향녀는 하루에를 자기 방에 조용히 불렀다.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진실을 말 못했다.》
《어머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부향녀는 한숨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너의 친어머니 다미꼬는 폭격으로 죽은게 아니다. …》
부향녀는 그에게 유끼오에게서 들은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하루에는 놀란 눈길로 부향녀를 바라보았다.
《?! …》
부향녀는 《동양의 사꾸라》의 일기장을 꺼내놓았다.
《똑똑히 읽어보아라. 이 책은 바로 너의 어머니를 강간하고 학살한 그 원쑤놈의 일기장이다. 여기에는 지난 시기 일본이 감행한 반인륜적인 만행이 그대로 적혀있단다.》
온밤 하루에의 방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새날이 밝아오는 창가에 하루에가 그려놓은듯 서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린아이의 옷이 쥐여져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하루에의 눈가에는 물기가 맺혀있었다. 어린시절엔 이 옷에 담겨진 의미를 모르고 입었다. 수십년세월이 흐른 오늘날 그 옷은 너무도 엄청난 사실과 하많은 사연을 말해주고있었다.
《어머니!-》
입가에서 흘러나온 말이였다. 기억에조차 떠오르지 않는 친어머니의 모습으로, 따스하고 포근한 사랑으로 여겨지는 유물이였다. 아니, 자기가 당한 수치와 모욕, 일본인으로서 이 땅에 던지는 어머니의 피의 절규가 그대로 응축된 력사의 증거물이였다.
부향녀가 문을 열었다. 그는 하루밤사이에 달라진 딸의 표정과 자태를 보며 나직이 찾았다.
《하루에야… 내가 너무 모질지 않았느냐? …》
하루에는 부향녀에게 돌아섰다. 눈가에는 물기가 핑하니 돌았다.
《전, 이 모든것을 몰랐더라면 어머니를 리해하지 못했을거예요. 오늘에야 어머니가 어떤분인지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루에가 두손을 모아잡고 무릎을 꿇었다.
부향녀는 《내 딸아! …》 하며 그를 품에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