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부향녀는 어슬녘이 되여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은 흥성이고있었다. 며느리와 하루에가 음식준비를 하느라고 법석이였다. 회사에서 해고당한 후부터 하루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일하고있었다.
《지금 오세요?》
시어머니를 반갑게 맞으며 김경아가 들뜬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성옥이의 공연을 축하해서 본가에서 오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성옥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예, 아직… 아마 오늘 같은 날에야 제 동무들과 함께 시간을 좀 보내겠지요 뭐.》
《하긴 그래…》
부향녀는 자기 방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약함에서 진통제를 꺼내 먹었다. 오늘 그는 공연관람을 마치고 이미전부터 잘 알고있는 일본력사학자를 만났었다. 석상에서 그는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접하였다. 그래서인지 심장에 더 부담이 오는것만 같았다. …
《원장선생님, 이걸 좀 보십시오.》
일본인력사학자는 3장의 지도를 그앞에 꺼내놓았다.
부향녀는 그것이 일본국립고문서관에 보관되여있던 옛 지도의 사본이라는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원장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다니다가 겨우 얻은 사본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따위짓을 했는지…》
나이가 지숙한 력사학자는 불만스러운 태도로 지도들을 펴놓았다.
《이건 제가 알고있던 지도와는 다릅니다.》
그러면서 그는 독도로 표기되였어야 할 봉우리가 글자로 되여있는 곳을 손으로 짚었다.
《이미전에 제가 본것은 여기에 자그마한 섬봉우리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독도가 말입니다.》
부향녀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끼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들여다보았다.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분명 독도가 있어야 할 위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력사학자는 그의 말을 대신했다.
《그렇습니다. 지금 보시는바와 같이 이 지도에는 봉우리가 없고 대신 이렇게 우정 우산도에서 <우>자를 <집 우>자로 고쳐서 표시했습니다.》
부향녀는 의문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 책상우의 한켠에 있는 확대경을 집어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혹시 선생이 잘못 복사한것은 아니겠지요?》
《허, 원장선생님은 절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력사학자는 오히려 제켠에서 섭섭한 인상을 지어보였다.
《그럼, 그새 누가 이 지도에 손을 댔다는게 아닙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유치한노릇을 했을가요?》
부향녀의 물음앞에 력사학자는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바로 조선의 령토인 이 독도를 넘보는자들이 그런짓을 했겠지요!》
부향녀는 너무도 억이 막혀 뭐라고 말이 다 나가지 않았다. 얼마나 력사를 외곡하는데 피눈이 되였으면 이렇듯 력사문서인 지도까지 이렇게 마구 수정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잠겨 방에 앉아있는데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부향녀는 얼른 송수화기를 들었다. 혹시 도이췰란드에서 걸어오는 한스 베르메트의 전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여보시오, 전화받습니다.》
한스의 웅글고 뜨직뜨직한 목소리를 그리며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거기가 지성병원 원장선생네 댁이 옳소?》
수화기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너무 거칠어서 전혀 가늠이 없는 낯선 목소리였다.
《네, 제가 원장입니다. 그런데 뉘신지?》
그의 물음에 차겁고 적의를 느끼게 하는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허, 나 말이요? 나로 말하면 이 도꾜는 물론 온 일본땅이 다 무서워하는분이시오!》
《?! …》
부향녀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오싹하면서 등골로 식은땀이 흐르는듯 한감을 느꼈다.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승냥이와 맞다들렸을 때의 기분이였다. 모든 세포들이 팽팽해졌다.
《원장선생, 여느때는 혀바닥을 참새처럼 잘 놀리시더니 오늘은 웬 일이시우? 갑자기 요조숙녀가 된건 아닐테지요?》
부향녀는 마음을 다잡고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이 나 같은 늙은이를 만나자는것은 아닐텐데?》
《허, 그렇게 력사에 밝으신분이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이시우? 내가 이렇게 모처럼 전화를 걸었을 때야 무슨 일인지 짐작하고있어야지. 내 오늘 원장선생에게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손녀의 고운 목청을 들려주고싶어서 그러오.》
순간적으로 심장이 떡 멎는것만 같았다.
그럼, 성옥이가 유괴되였다는 말이 아닌가! …
《그… 그럼?! …》
목구멍으로 말이 나가지 않았다. 너무도 무서운 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것만 같았다.
도꾜에서 유괴범죄는 각이한 목적과 형태로 감행되는 조직범들의 만행이다. 설사 요구조건을 들어준다 할지라도 시체가 차례지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인간성을 상실한 폭력배들에게는 잔인성이 체질로 되여있는것이다.
부향녀는 간신히 육신을 지탱하고있었다.
《허, 아직 잘 믿어지지 않은 모양이구만. 야, 그년을 여기에 끌어와!》
아마 송수화기를 든채 다른 놈에게 이르는 말같았다.
아니기를 바라고바랬지만 화근은 이미 닥쳐들고말았다. 수화기에서는 고성옥의 째지는듯 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놔라, 이 쪽발이놈들아! … 할머니! … 절대로 이놈들의 요구에 응해서는 안돼요.》
틀림없는 손녀의 목소리였다.
《성… 성옥아!?》
이번에는 그자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울렸다.
《허, 요년이 제 할미를 닮아서 사냥개처럼 사나운데… 야, 그년에게 맛을 좀 보여줘라.》
부향녀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안된다, 안돼! 이놈들아, 내 손녀는 절대로 다치지 못한다!》
《허, 원장선생님이 안된다면 안되는거지요. 그래, 손녀를 구원하고싶겠지?》
《그래, 뭘 요구하느냐?》
《흐흐흐… 응당 그렇게 나와야지. 난 쪼박지돈 같은것은 요구하지 않아! … 글쎄 지금 조선대학교의 젊은 년놈들이 쓰고있다는 력사자료라면 몰라두! … 어때, 수지가 맞는 일이 아니요? 그새 그 론문에 숱한 기여를 했다는데 손녀의 몸값보다야 비싸진 않겠지? …》
부향녀는 전화기를 든채 쏘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서였구나!
부향녀는 심장의 아픔을 짓누르며 힘주어 말했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거절?! … 흥, 그러면 결과야 뻔하지 않아. 이 도꾜바닥에서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고 죽은 손녀를 보는것밖엔… 그렇게 되면 아무리 능한 외과선생님이시래도 다시는 그 목숨을 구원하지 못할걸… 하하하…》
부향녀는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기의 결심에 성옥의 운명이 달려있었다. 눈앞에는 피흘리며 쓰러질 손녀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격한 목소리를 듣고 방안에 들어선 김경아와 하루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 서있었다. 거멓게 죽은 부향녀의 얼굴색에 속이 철렁해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머니!》 하며 다가드는 하루에를 부향녀는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수화기에서는 그자의 살기어린 목소리가 다시 울려나왔다.
《로친네, 빨리 결심해.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요년의 노래를 영영 듣지 못한다는걸 알아라!》
그제서야 하루에와 김경아는 성옥이가 랍치되였으며 어머니가 지금 협박당하고있다는것을 알았다. 모두가 굳어진듯 움직일줄 몰랐다. 며느리는 후들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폴싹 쓰러졌다.
《성옥아! …》
하루에가 그를 진정시키고있었다.
부향녀의 생각은 복잡했다. 손녀와 남편의 모습이 엇갈려 떠올랐다.
이런 땐 어떻게 결심해야 하는가. 과연 성옥이의 목숨을 저 악귀들에게 내맡겨야 하는가?
이때 수화기에서 성옥의 목소리가 울렸다.
《할머니, 절대로 력사자료들을 이놈들에게 주어서는 안돼요! 제발 부탁이예요.》
《이 쌍년이 아직도 아가리질이야.》
《철썩!》 하고 뺨을 치는 소리와 함께 성옥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부향녀는 지금껏 지탱하여오던 의지를 끝내 잃고말았다. 생명의 연장이나 같은 손녀를 잃을수 없었다. 가슴을 찢으며 귀전을 허비는 손녀의 비명소리앞에 자신의 의지가 무너지는것을 그는 감득했다. 제 피줄의 생사를 앞에 둔 사람의 힘이 이리도 무능해질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의 손에서는 전화기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어머니! 어머니! 정신차리세요!》
하루에가 달려왔다. 그는 안타깝게 부향녀를 흔들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송수화기에서는 사나이의 목소리가 새여나왔다.
《흥, 이 로친이 벌써 뒈진게 아니야? 야, 다 산 송장과 흥정할새 없다. 어서 그년의 옷을 벗겨라!》
하루에가 얼른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는 이미 끊긴 뒤였다.
《할머니!》
고성옥은 손전화기를 든자에게 달려가며 웨쳤다. 분명 할머니가 자기 일로 심장쇼크를 일으키며 쓰러졌을것이다.
사나이가 그를 밀쳐버렸다.
《이년, 얌전하게 있지 못하겠어.》
《할머니!?》
성옥의 눈가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솟구치고있었다. 그는 동무들과 헤여져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자들에게 덮치워 이렇게 골목
으로 끌려왔던것이다. 아무리 목터지게 소리쳤지만 행인들은 동정어린 눈길만 던질뿐 어쩌지 못했다.
《비켜요! 난 집으로 가겠어요!》
고성옥은 두눈을 똑바로 뜨고 그자들을 쏘아보았다.
얼굴에 칼자리가 난 놈이 히물히물거리며 씨벌였다. 방금 부향녀에게 전화를 한자이다.
《집으로 가?! … 누가 보내주겠대? 이제 넌 이 골목의 귀신이 될텐데 어디로 간다는거야. 네 할미도 이젠 심장이 터져서 죽었을지도 몰라. 그러니 그 로친과 함께 손목잡고 나란히 저승으로 가기나 해.》
《이 비렬한 인간추물들! 너희들이 그런다구 우리 할머니가 허리를 굽힐것 같으냐!》
《허, 요년이 제법 주둥이질을 잘하는데… 그래, 우리 일본땅에서 조선치마저고리를 너풀거리면서 우릴 욕질하는 네년을 가만둘것 같애.》
한발두발 다가서는 그자에게 밀리워 성옥은 뒤걸음쳤다. 그러나 더 갈데가 없었다. 벽체가 막아섰던것이다. 그는 두손으로 가슴을 가리운채 놈을 쏘아보았다.
《이년! 내 오늘 네년의 몸뚱이에서 그 조선옷을 벗기고 우리 일본의 기모노를 입혀주마. 어때? …》
그자는 성옥에게 다가와 저고리를 와락 잡아당겼다. 대번에 저고리의 고름이 떨어지고 가슴이 드러났다.
《하, 형님! 그년의 살결이 꽤나 고운데요. 한번 맛보지 않겠나요?》
《이봐, 어르신은 이년을 죽이라고 했어!》
《체, 재미를 보고 죽이면야 누이좋구 매부좋은 격이 아니겠나요.》
옆에 있던 다른 놈이 또 한마디 덧놓았다.
《아, 요게 사내맛을 보기나 했겠나요. 죽기 전에 섭섭치 않게 그 맛을 실컷 보게 하자요. 그렇게 해줘야 저승에 가서도 우릴 원망하지 않을게 아닌가 말이예요.》
《하긴 우리가 아무리 모진 놈이기로서니 사람이 태여나 꼭 누려야 할 그 재미를 주지 못하고 죽인다면 너무하지.》
둘러선 사내들은 좋아라 너털웃음을 지었다.
두목놈이 히죽히죽 웃으며 다시 다가들었다.
《그래, 오늘 네년에게 우리 사무라이의 피를 섞어주지.》
무작정 뛰여든 그자는 성옥을 그러안고 그의 저고리를 와락 벗겼다.
《놔라, 이놈아! 안된다, 안돼!》
한참 옷을 벗기느라 용을 쓰던 그자가 갑자기 《아이쿠!》 하며 한길이나 올리뛰였다. 이어 아래도리를 움켜잡고 뱅그르르 굴렀다.
《형님, 왜 그러시우?》
놈들이 그자에게 눈길을 돌리는 순간 고성옥은 이때다 하고 《사람 살려요!》 하며 옆으로 달렸다.
그것도 한순간이였다. 한놈이 그의 발을 걸었던것이다.
《이년, 어디로 달아나려구.》
그자는 성옥의 팔을 잡아 일으키더니 귀쌈을 후려쳤다.
처녀는 다시 담벽에 가붙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다. 손에는 아까 두목놈을 찔렀던 옷빈침이 꽉 쥐여져있었다.
드디여 자리를 털고 일어난 두목이 품에서 시퍼런 칼을 꺼내들었다.
《정말 조선계집들은 듣던바 그대로 악종이구나. 좋다. 내 네년을 칼탕쳐죽일테다.》
그자가 휘두르는 칼날은 고성옥의 치마자락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허벅지까지 드러나게 찢겨진 옷을 부여잡고 성옥은 구석에 폴싹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놈들을 쏘아보는 눈길만은 떨구지 않
았다.
《독종같은 년! 아직도 굽어들지 않을테냐?》
《이놈들아, 내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네놈들에게 머리를 숙일줄 아느냐!》
《그래? 좋다. 야! 이년을 갈기갈기 칼탕쳐버려.》
옆에서 때를 기다리던 졸개들이 너도나도 칼을 빼들고 다가들었다.
성옥은 비장한 결심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사 죽어도 할머니를 욕되게 하고싶지 않았다. 그는 앞에서 다가들며 자기를 부여안으려는자의 배를 힘껏 옷빈침으로 찔렀다.
《아이구 배야, 이년이 바늘을 들고있었구나.》 하며 그자는 배를 그러안고 주저앉았다.
이때 두목놈이 《쌍년, 어디 죽어봐라!》 하며 옆으로 다가들어 그의 옆구리에 칼을 박았다.
고성옥은 눈앞이 아찔했다. 비록 이역땅에서 살아도 조국의 참된 딸이 되라고 이야기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정녕 그 다심한 손길을 잡아보지 못하고 그 정깊은 목소리를 영영 들어보지 못한단 말인가.
순간 돌발적인 일이 벌어졌다. 세명의 사나이들이 뛰여들어 폭력배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던것이다.
《이 더러운 놈들! 어디 죽어봐라.》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그들의 손놀림과 발놀림은 기계처럼 빨랐다. 폭력배들은 비록 칼을 들었지만 어쩌지 못하고 씩씩대기만 했다. 한 사나이의 주먹에 아래턱이 돌아간 두목놈은 그 자리에 개새끼처럼 찔 늘어졌다. 그는 또 재빠른 련결타격으로 칼을 들고 다가드는 두놈을 강타하여 쓰러뜨렸다.
그런데 이때 대여섯이나 되는 사내들이 흉기들을 들고 또 나타났다. 아마 어느 놈이 구원을 청했는지, 아니면 주변에 대기하고있던 작자들인지도 모른다.
싸움이 더 크게 번져지리라는것은 너무도 명백했다. 그럴수록 불리한것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성옥의 생명이였다.
《선생님, 저희들이 이자들을 맡겠으니 어서 피하십시오.》
그러나 이미 폭력배들은 그들이 빠지지 못하게 둘러싸고 조여들었다.
그때까지 벽체에 기대여 겨우 몸을 지탱하던 고성옥은 《아저씨!》 하고는 정신을 잃었다.
두목놈을 비롯해서 여러 놈을 쳐갈긴 사나이는 다름아닌 조성호였다.
그들은 성옥이를 에워싸고 놈들과 대치했다.
수적으로 엄청난 대결이였다. 싸움판에서 이미 찌들어진 놈들의 손에는 각종 흉기가 쥐여져있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허우대가 큰 사나이 세명이 폭력배들의 뒤를 덮쳤던것이다. 그들의 몸동작은 날래기 그지없었다. 교예사처럼 허공을 날며 놈들을 요정냈다. 그런 속에서 한 사나이가 소리쳤다.
《빨리 환자를 데리고 빠지시오!》
조성호와 동행했던 두 사나이도 간청했다.
《선생님, 어서 가십시오.》
조성호는 성옥을 들춰업었다.
《성옥아! 성옥아! 정신차려라, 응. … 넌 죽으면 안돼! …》
복면을 한 사나이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경찰들이 오겠는데 빨리 병원으로 가시오.》
그들은 폭력배들을 거꾸러뜨리며 조성호에게 길을 개척해주었다.
《고맙소.》
… 조성호가 업어온 성옥을 맞이한 사람들은 어쩔바를 몰라했다. 응급처치는 하였지만 피는 여전히 멎을줄 몰랐다. 갈기갈기 찢어진 치마저고리는 붉은 피로 화락 젖어있었다. 죽은듯 아무 움직임도 없는 성옥이다. 생각은 뻔했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했다. 차디찬 서리에 시들어가는 꽃송이앞에 눈물만 뿌려줄뿐이였다.
《전, 못하겠어요. 이애의 몸에 어떻게 수술칼을 댄단 말이예요.》
김경아는 성옥을 부여안고 절망으로 몸부림쳤다. 온몸이 분쇄기안에서 갈기갈기 찢어져나가는것만 같았다.
시간을 다투며 요구하는것은 수술이다. 출혈은 심했지만 심장은 뛰고있었다.
김성진이 나직이 딸에게 일렀다.
《그렇다구 손도 써보지 않고 이렇게 있으면 어떻게 한다는거냐?》
《아버지! 전 못해요. 난 저애에게 두벌죽음을 줄수 없단 말이예요.》
모두가 엷은 한숨을 내쉬기만 했다. 마지막숨을 몰아쉬는 생명앞에 누가 감히 수술칼을 내댄단 말인가.
흑빛으로 변한 그들의 얼굴들에는 차거운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고성옥의 혈압은 급격히 떨어졌고 맥박조차 거의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심한 출혈로 해서 수술을 한다 해도 전혀 소생할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옆구리를 찌른 칼로 하여 장이 파괴되지 않았다고 장담할수도 없었다.
수술준비를 갖춘 간호원들은 안타까와 어쩔바를 몰라했다.
웃음을 주고 기쁨을 주며 조국의 고마움을 노래하던 그가 이렇게 죽어가다니…
침침한 기운에 눌린 수술장에 무겁게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네가 칼을 못 들겠다면 내가 하겠다.》
《?! …》
모든 시선이 목소리의 임자에게 쏠렸다.
다름아닌 부향녀였다. 그는 이미 모든것을 결심한듯싶었다.
놀라운 눈빛들이 그에게 날아왔다.
친어머니도 거절하는 일을 그가 맡아나서다니… 두벌자식을 눈동자처럼 아끼며 사랑하던 그가 손녀의 몸에 설마 칼을? …
김경아가 그에게 매달렸다.
《어머니, 제발 빌어요. 그애가 마지막길을 편히…》
부향녀는 그의 팔을 뿌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해라. 성옥이는 그렇게 쉽게 죽을 애가 아니다.》
김성진도 자기의 불안을 터놓았다.
《일없겠습니까?》
《성옥이를 살려내지 못하면 나도 없어요. …》
드디여 수술이 시작되였다.
부향녀는 성옥의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귀여운 애인가. 인생의 행복과 기쁨을 맛보게 하여준 사랑하는 손녀였다. 대학생이 되였다고 그토록 기뻐하며 노래를 불러도 조국을 그리는 동포들의 노래를 부르겠다던 성옥이였다. 진종일 맺힌 고달픔이 바로 저애가 있어 녹아내리고 육신이 거뜬해지군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며 두눈을 감았다. 수술장에 들어서기까지 이미 몸에 익은 수술공정들을 수십번이나 반복해본 그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것들을 되새기였다.
드디여 결심을 내린 부향녀는 《메스!》 하고 말했다.
손에 쥔 수술칼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있다. 저도 모르게 흘러간 날들이 피뜩피뜩 스쳐갔다. 자기의 목숨을 끊어버리려고 하던 그 칼, 죽음의 수천리길을 헤치고 찾아온 남편의 다리를 자른 그 칼이였다. 오늘은 바로 이 칼날에 손녀의 운명이 매달려있다.
살리느냐, 죽이느냐! …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이러다가 혹시 이애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순간 폭력배들에게 구타를 당하면서도 자기에게 간절히 웨치던 성옥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히 들려왔다.
《할머니, 절대로 력사자료들을 넘겨주어서는 안돼요! 제발 부탁이예요!》
그래, 해야 한다!
그는 상처자리에 수술칼을 대고 힘을 주었다.
다행히 복강내출혈은 없었다.
어떻게 시작되고 봉합까지 끝냈는지 알수 없었다. 극상해야 한시간이나 걸렸을 시간이 천년인생살이나 한것처럼 길었다.
《어머니!》
경아가 다가와 부축했다.
부향녀는 굳이 그를 밀어냈다. 그는 혼자서 수술장밖으로 걸어나갔다.
긴장된 눈초리들은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후들거리는 걸음을 옮겨짚는 부향녀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옥아, 이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눈을 떠야 한다. 살아야 한다! …
그는 자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우에 쓰러졌다. 꼭 강인하게 자신을 지탱하던 기운이 깡그리 진해버리고만것이다.
《어머니,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예, 어머니!》
경아가 그를 부여잡고 애타게 불렀다.
부향녀는 두눈만 물끄러미 떴을뿐 대답이 없었다. 자기의 인생이 너무도 허무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지금까지 모진 아픔과 괴로움을 참고 이겨내며 살아왔다. 식민지 조선사람이라는 수모를 당할 때에도, 《똥벌레》라는 별명으로 갖은 인격모욕을 당할 때에도 그랬다. 지어 제손으로 애인의 다리를 자를 때에도, 피를 토하며 쓰러진 남편의 죽음앞에서도 참고 다시 일어난 그였다. 일본반동들의 갖은 음해와 책동속에서도 조국을 그리며 지치지 않고 앞으로만 걸어온 그였다. 허나 오늘만은 도저히 자신을 이겨낼수 없었다.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손녀의 목숨앞에 자신을 일으켜세울 힘이 없었다. 이대로 영영 한줌의 흙으로 변해버릴것만 같았다.
모두들 안타까운 시선으로 부향녀를 내려다보고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를 부를념을 못했다. 아픔중에서 가장 큰 아픔을 당한 늙은이를 뭐라고 위안할수 있단 말인가.
이때 김성진이 양복을 단정히 입은 중늙은이를 앞세우고 들어섰다.
그는 어지간히 흥분된 표정으로 부향녀의 머리맡에 다가왔다.
《아주머니, 부의장동지가 찾아왔습니다.》
《?! …》
부향녀는 흐리마리한 눈길을 그에게로 돌렸다. 정말 낯익은 총련중앙상임위원회 부의장의 얼굴이 보였다. 일어서야 하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고명철과 김경아가 그를 도와주었다.
부의장은 그들을 만류하며 오히려 제손으로 부향녀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원장선생님,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게다가 오늘 이런 불행을 당하셨으니…》
그는 부향녀의 두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신심을 잃지 마십시오. 선생님은 꼭 다시 일어나셔야 합니다. 방금전 조국에서 전문이 왔는데 오늘 위대한
모두들 놀라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위대한 장군님께서 말입니까!》
부향녀는 두손으로 부의장의 팔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부의장은 그를 안정시켰다.
《그냥 누워계십시오. 오늘 아침 일군들을 부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지금 재일조선인동포들에 대한 일본극우보수세력들의 모독과 중상, 탄압이 그 어느때보다도 로골화되고있다고, 그속에서도 우리 총련의 동포들은 조선민족의 넋, 애국의 넋을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다고 하시면서 친히 원장선생님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답니다.》
《예, 저에 대해서 말입니까?!》
부향녀는 믿어지지 않는 사실앞에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습니다. 그이께서는 몇달전에 일본에서 사는 칠십고령의 재일동포녀성이 남편의 뜻을 이어 과거 일본이 비법적으로 날조한 <을사5조약>의
무효성을 론증하는 론문을 완성하여 조국에 왔다고 하는데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고, 자신께서는 그 소식을 듣고 그를 한번 만나보려고 했지만
지방현지지도에 나가있어 만나지 못한것이 못내 아쉽다고 하시였답니다. 위대한
부향녀는 목이 꽉 메여왔다. 한미한 늙은이에 불과한 자기의 자그마한 행동을 두고 그렇듯 과분한 평가를 주시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니 북받치는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 고맙습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고명철은 코마루가 찡해옴을 금할수 없었다. 지금껏 그는 이국땅에서 어머니가 겪는 고충과 아픔이 무의미한것으로만 생각해왔다. 조국과 멀리 떨어져 사는 자기들에게는 그 품의 손길이 너무도 멀리에 있는것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친자식인 자기도 불만스럽게 여겨오던 어머니의 고행에 찬 길을 바로 위대한 장군님께서 헤아려주시고 세상에 더없는 최상의 믿음으로 안겨주시지 않는가.
아, 정녕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품은 우리 해외동포들모두가 안겨살 위대한 품, 영원한 삶의 품이였구나!
고명철은 비로소 어머니가 왜서 그토록 조국을 그리워하고 그 품을 위해 자기의 마지막숨결까지 깡그리 바쳐가려 하는가를 깨닫게 되는것 같았다.
부향녀는 부의장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부의장동지, 저는 일어서겠습니다. 아무리 모진 아픔과 슬픔이 가로놓인대도 다시는 쓰러지지 않겠습니다. 우리 조선민족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며 스승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이 저를 지탱하여주는데 제가 어찌… 그이의 뜨거운 정과 사랑을 저의 자양분으로 받아안고 애국의 한길에 영원히 청춘으로 살겠습니다.》
《원장선생님!》
《부의장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