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일찍 집에 들어온 김경아는 방바닥에 조선치마저고리를 펴놓고 다리기 시작했다.
고성옥은 래일 공화국창건절을 맞으며 진행하는 예술공연에 출연한다는 기분으로 노상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있었다. 다림발이 잡혀가는 옷을 보며 잔소리 또한 많았다. 여기는 이렇게 해라, 저기에 주름이 잡히지 않게 해라. …
김경아는 딸애의 지청구를 웃음속에 넘겼다.
《아유, 무슨 애가 이렇게 말이 많담. 다 어련히 하지 않으리.》
부향녀가 평양에서 가져온 조선치마저고리이여서 더욱 관심이 많은 성옥이였다.
이때 하루에가 들어섰다.
《성옥아, 축하한다.》
《고모.》
고성옥이가 달려가 그를 반기였다.
《자, 이건 내 성의이니 받아둬라.》
하루에는 포장한 화장품곽을 내놓았다. 최근에 나오는 고급화장품이였다.
크림곽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던 성옥은 기쁨을 금치 못해했다.
《야, 향기롭네. 정말 고마워요.》
손에 다리미를 든채 그걸 들여다보던 김경아가 핀잔했다.
《아이구, 이젠 이 엄마의 화장품이 축나지 않게 됐구나.》
《아유, 어머닌 이 딸이 좀 썼기로서니 그리도 아까워요.》
고성옥은 김경아의 잔등에 매달리며 칭얼거렸다.
하루에가 기꺼운 목소리로 말했다.
《으음, 17살이나 된 처녀라는게 아직도 아이라니까.》
그래도 성옥은 제 엄마 잔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경아가 딸을 물리친다.
《됐다, 그만해라. 그러다 옷을 태우겠구나.》
하루에가 다리미를 넘겨받았다.
《성옥이 아버진 오늘도 안 들어오니?》
김경아는 엷은 한숨을 지었다.
《회사일이 잘되지 않은것 같애요.》
《하긴 요즘 그애한테 무슨 마음의 여유가 있겠니.》
갑자기 생각난듯 김경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시원한 도마도화채를 좀 잡수세요.》
하루에가 그를 만류했다.
《됐어. 난, 인차 가겠어.》
김경아가 곱게 눈을 흘겼다.
《누인 요즘 좀 이상해.》 하며 랭동기에서 음식그릇을 꺼냈다.
《방금전에 한것이여서 맛있을거예요.》
《일없다는데…》
김경아는 저가락으로 화채쪼각을 집어 하루에의 입에 가져다 댔다.
하루에는 별수없이 그것을 받아물었다.
《걱정말아요. 어머니몫은 따로 내놓았어요.》
김경아는 제 입에도 넣고 우물우물거리며 딸애가 있는가 보았다.
고성옥은 제 방에서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김경아는 심각한 기색으로 하루에에게 물었다.
《누이, 내 하나 물을테니 솔직히 말해주겠어요?》
하루에는 긴장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뭔데? …》
김경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바투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그 박사선생과의 관계는 어떻게 됐어요?》
하루에는 발깃해진 얼굴로 다리미질을 해나갔다. 이미전부터 김경아는 이에 대해 관심을 퍽 가지고있었다.
《으음, 어서 말해봐요.》
하루에는 다리미를 받치개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성옥이 엄마 생각은 어때? …》
김경아는 도마도화채를 씹으며 심중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그 사람이 우리 어머니를 모욕한걸 생각하면…》
《그러니?! …》
하루에의 낯색은 흐려졌다.
김경아는 그게 우습다는듯 히죽히죽거리며 팔굽으로 그를 툭 쳤다.
《어마나, 심각해지는걸 좀 봐.》
하루에는 억지로 입귀를 실룩거리며 연한 미소를 담았다.
김경아는 다시 도마도화채를 하루에의 입에 넣어주었다.
《난, 두사람의 마음이 서로 맞는다면 다른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도 종당에는 우리 어머님을 리해할거예요.》
하루에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였다.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어. 요즘 그도 생각이 많은것 같애. 몹시 수척해졌더라.》
《인제 보니 두사람사이는 거의 약속이 된것 같군요?》
하루에는 맥없는 웃음으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래, 우린 이미전부터… 문제는 어머니가 나의 친어머니에 대해 뭔가 숨기는것 같은게…》
김경아는 하루에의 두손을 맞잡았다.
《아무렴 어머니가 누이한테 뭘 숨기는게 있겠다구. 어쨌든 난 누이네 일이 잘되리라구 생각해요. 그러니 이젠 좀 웃으세요. 웃음이 웃음을 불러오고 슬픔이 슬픔을 낳는다고 하지 않나요.》
하루에는 진심으로 감복해하며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정말 고마워.》
이때 문소리가 나더니 부향녀가 들어섰다.
《오늘은 어떻게 된거냐. 다들 인차 집에 들어왔구나.》
김경아가 그의 손짐을 받아들었다.
《성옥이의 공연준비를 해주느라구…》
부향녀는 하루에가 옷걸이에 걸어놓는 조선치마저고리를 보며 내심 기쁨을 금치 못했다. 손녀가 무대에 나선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절로 흐뭇했다.
《참 하루에야, 방금 너희 집에 들렸댔다. 전번에 보니 음식감이 영 없더구나. 내 뭘 좀 사놓구 왔다. 혼자 산다구 살림살이를 대충 해버릇하면 못쓴다.》
《알겠어요, 어머니.》
이때 손녀가 제 방에서 나오며 부향녀에게 매달렸다.
《할머니, 인제 오세요.》
부향녀는 손으로 손녀의 머리태를 쓸었다.
《성옥아, 어서 옷을 입어라. 할머니하구 밖에 나갔다 오자꾸나.》
《예, 알겠어요.》
고성옥은 신이 나서 제 방으로 들어갔다.
김경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인차 날이 저물겠는데…》
《걱정말아. 오늘은 왜 그런지 성옥이와 함께 있고싶구나.》
부향녀는 차열쇠를 손에 쥐고 손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하루에와 김경아는 어안이 벙벙해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차고에서 승용차를 꺼낸 부향녀가 성옥이에게 일렀다.
《오늘은 네가 차를 몰거라.》
《예-에, 내가요?》
《그래, 이젠 네 혼자서도 차를 몰아야지. 아버지한테서 배우지 않았느냐.》
고성옥은 웃음을 방실 날리더니 운전좌석에 앉았다.
그들을 태운 승용차는 천천히 미끄러져나갔다.
《할머니, 어디로 갈가요?》
부향녀는 운전대를 능란하게 움직여가는 손녀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바다가로 몰거라.》
《알겠어요.》
록음이 짙은 해수욕장엔 아직도 사람들로 붐볐다. 바다바람의 시달림속에 비록 곧게 자라지 못한 나무들이지만 하나의 수림을 이루고있었다.
여기저기에 먹다남은 음식찌끼들이 지저분하니 널려있었다. 그늘진 음침한 곳에서 남녀들이 서로 추잡스러운 행동으로 히히닥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취기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왝왝 뭐라고 고아대는 사내도 있는가 하면 온몸이 빨개서 몸을 비칠거리며 실성한듯 웃어대는 젊은 녀자들도 있다. 말세를 추구하는 모습들로 하여 황혼이 깃들기 시작한 해수욕장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침침했다.
부향녀는 그들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내며 조용한 곳으로 손녀를 이끌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수영복을 꺼냈다.
《어서 입어라. 우리도 오늘은 해수욕을 해보자.》
고성옥은 놀라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할머니하구요?》
부향녀는 벌써 수영복을 입고있었다.
《왜, 이 할미가 그렇게두 미덥지 않느냐.》
여느때없이 흥분된 할머니를 바라보며 성옥은 한참동안 깔깔 웃어댔다.
해가 지기 시작한 수면은 잔물결에 금파도를 일으키며 모래불을 적시고있었다. 드넓은 대해는 넓은 자락을 확 펼쳐들고 그들을 그러안았다. 넘실넘실 밀려드는 물결은 가슴굽을 훑어올리며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러다가도 따스한 온기로 품안아 온몸을 둥실 떠올렸다.
부향녀는 늙은이답지 않게 물속에 온몸을 잠그었다가 솟구쳤다.
《성옥아, 오늘은 경기다. 알겠느냐?》
고성옥은 여전히 남실거리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알겠어요. 그런데 일없겠어요?》
《이 할미걱정은 하지 말라지 않느냐.》
부향녀는 마치 어린애가 되여버린듯 한손을 쳐들었다.
《자, 준비! … 시-작! …》
그들은 넓은 바다로 밀려드는 파도를 헤가르며 나갔다.
고성옥은 벌써 저쯤 앞에서 헤염치고있었다.
부향녀는 대여섯메터정도 나갔다가 일어서서 길게 호흡을 들이켰다. 이젠 생각과는 영 달랐다. 벌써 숨이 차고 팔이 매시시해났다. 그렇지만 마음은 즐겁기만 했다.
량팔로 물결을 가르며 앞으로 나가는 손녀의 모습은 볼수록 대견했다.
좀더 힘있게 팔을 휘둘러라. 지치지 말구 계속 앞으로… 그래서 어서 저 대양건너로 가거라. …
기슭으로 나온 부향녀는 모래불에 벌렁 누웠다. 식지 않은 모래불이 그의 잔등을 따스하니 지져주었다. 눈우에 펼쳐진 푸른 창공에는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날아예고있다.
아, 갈매기… 저 갈매기처럼 높이 날아오르면 대양건너 그리운 땅이 보일가?
《할머니, 무슨 생각을 하세요?》
성옥이가 도드라진 가슴을 할딱거리며 다가왔다.
《그저 하늘을 바라본다.》
《으음, 거짓말…》
성옥은 부향녀의 팔을 베고 누웠다.
부향녀가 질겁한듯 한 소리로 그를 일으켰다.
성옥은 퀭해진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왜 그러세요, 팔이 아프나요?》
부향녀는 대답대신 팔에 묻은 모래알들을 털어버렸다.
《됐다, 이제는 눕거라.》
할머니의 팔을 보는 성옥의 가슴은 쩌릿했다. 그는 조용히 팔을 쓰다듬었다.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오늘까지 자기의 베개가 되여주었고 안아준 팔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살이 빠지고 앙상했다. 저도 모르게 눈굽이 흐려졌다.
《어서 눕지 않구 뭘 하느냐?》
성옥은 팔베개에 머리를 살며시 기대며 누웠다.
할머니!-
부향녀는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준채 성옥에게 물었다.
《성옥아, 넌 이 바다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아느냐?》
《바다가요? …》
성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서서히 붉게 물드는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할머니의 물음에 정확한 대답을 드려 기쁘게 해주고싶었다.
《대륙과 잇닿아있지요 뭐.》
부향녀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바다! 저것은 어찌 보면 내 인생과 하나로 겹쳐 흐른다고 말할수 있다. 눈물을 삼키며 일본으로 건너온 그 인생의 그릇된 좌표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을 남겨주었던가. 바로 저 물결에 이 넋이라도 실어 그리운 고향으로 가고싶어 바다에 목숨을 던질 결심까지 하였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오늘의 바다는 나에게 무엇을 안겨주고있는가. 그것은 바로 귀중한 나의 땅, 뜨거운 숨결로 이 몸을 덥혀주고 포근한 자락으로 안아주는 어머니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겨주고있지 않는가. …
《그래, 그곳에는 바로 우리 조국, 공화국의 품이 있단다! …》
성옥은 그제서야 할머니가 무엇때문에 자기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 알수 있었다. 그는 다시 부향녀옆에 누우며 그를 꼭 껴안았다.
《할머니, 명심하겠어요.》
《성옥아!》
서로 부여안고 누운 그들을 금빛노을이 소리없이 감싸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