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리진미는 저녁밥을 지을 생각도 잊고 일찍 침대에 누웠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처음으로 자기의 집에서 숙식했다. 일본에 도착해서 호텔에 자리를 잡고 이곳에는 몇번 찾아보는것으로 그쳤다.
수십년동안 집은 옛 모습그대로 남아있었다. 미국이나 그 어데 있어도 항상 이곳에 마음을 두고있은 그였다. 혹시 철거되지나 않았는지, 누가 집안에 침범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수시로 알아보고 부탁하군 했다.
잠을 청하려고 누운것은 아니였다. 그는 지금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있었다.
그는 오늘 무로우 고이찌로를 찾아가 만났다.
《무로우씨, 난 당신에게 기자의 자격이 아니라 한 녀성으로서 묻고싶어요. 그래 당신은 하루에라는 녀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요?》
《기자선생, 내가 진심이라는 표쪽을 든다면 당신은 믿지 않겠지요?》
리진미는 깔끔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요. 당신은 여직껏 그와 사랑이란 기만극을 벌렸으니까요.》
무로우는 자존심이 머리를 쳐들었으나 쓰겁게 웃어넘겼다.
그가 아무 욕질을 한다고 해도 변명할수 없는 그였다. 결과물은 어디까지나 이 녀자의 판단에 더 치우쳤던것이다.
《기자선생은 모든것을 다 알고있는것 같은데 그건 왜 묻소?》
《당신의 목적을 알고싶어서예요.》
《나한테는 다른 목적이란 없소.》
리진미는 랭소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없다구요? 당신은 분명 위선적인 력사학자가 분명해요. TV에 출연하여 한 말도 그렇구 지금껏 써내는 글도 사실상 학문의 리념을 떠난 다른 목적의 변태적인 추구란 말이예요. 당신들은 무엇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연구론문에 그렇게 관심을 돌리는거예요? 몇달전에는 시마네현에 있는 력사학자의 귀중한 사료가 절취당하기까지 했어요. 그것은 부향녀선생의 론문에 절실히 필요한것이였어요. 한 늙은이가 당하는 고통을 보는것이 그래 당신들에게는 더없는 쾌락인가요?》
무로우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욕하지 마시오! 모함하지 말란 말이요. 당신이 탐방기자라지만 근거없이 사람을 헐뜯을 때는 무사치 못한다는걸 알아두시오.》
리진미는 코웃음을 쳤다.
《정말 일본의 사내답군요. 칼을 뽑아드는것을 피로 여기고 그것으로 야성을 이루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보라매>는 그따위 만용을 두려워 안해요. 알겠어요? 당신은 량심을 속이고 사는것으로 하여 지금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될거예요.》
《고맙소, 인생을 가르쳐주어서.》
… 리진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붙여물었다.
무로우! 그는 야마모도의 말처럼 그리 악한 사람은 아닌것 같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를 조종하는 후견인이다. 그 고위정객이라는자는 과연 누구일가? 구리시마 다께시… 아니면? …
리진미는 무로우의 후견인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는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사꾸라》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것 같았다.
그 시각 부향녀는 바로 리진미의 집으로 오고있었다.
그가 집에 있을것이라는 확실한 담보는 없었다.
그렇지만 한시바삐 그를 만나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그를 이렇게 기약없는 길을 걷게 했다.
《허 참, 진미 그애를 만나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웨다. 이전 집에는 영 발길질을 하지 않는것 같습디다. 그가 기사들을 보내주던 <민족시보>에도 알아보니 자기들도 그가 어디에 거처하는지 모르더란 말입니다. 이따금 나타났다가는 바람같이 사라진다고 하더군요.》
어제 김성진이 부향녀에게 한 말이였다. 그도 리진미가 병원에서 의식을 차리면 꼭 만나리라고 결심했었다. 모든 사연을 터놓고 그의 옹진 매듭을 풀어주고싶었던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몹시 바쁘게 지냈다.
부향녀는 손에 든 트렁크를 내려다보았다.
그속에는 연분홍천으로 만든 조선치마저고리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평양에서 별도로 준비해가지고 온 옷감으로 직접 만든것이였다.
그애가 이 옷을 받을가?
대학앞에 있는 교차점에서 남쪽방향에 있는 나까네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는 잠시 멈춰섰다.
20여년전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와보고는 처음으로 걷는 길이다.
그동안 리진미가 살고있는 집주변은 너무도 많이 변했다. 어디가 어딘지 쉽게 찾을것 같지 못했다.
잠시 지형을 살피고난 그는 다시 걸음을 뗐다.
《선생님!》
갑자기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부향녀는 얼굴을 뒤로 돌렸다.
뜻밖에도 숨이 턱에 닿은 조성호의 불깃불깃한 모습이 보였다.
《아니, 임자가 어떻게? …》
조성호는 대답대신 싱글벙글 웃으며 트렁크를 앗아들었다.
《선생님과 함께 가고싶어서 이렇게…》
부향녀는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간이면 지향숙이와 함께 론문자료들을 정리해야 할 그였다. 그런데…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줄 알구 같이 간다는건가?》
조성호는 뒤덜미에 손을 가져다대며 어색하니 웃음을 지었다.
《글쎄, 그건 알수는 없지만…》
《물론 이 늙은이를 생각하는 그 심정을 모르는건 아닐세. 하지만 난 임자가 날 진정으로 위한다면 자기 맡은 일에 전념했으면 하네.》
《아니… 그건? …》
《전번에 내가 대학에 들리니 향숙이가 혼자 방에서 울고있더구만.》
《예-에?! …》
《임자가 론문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종일 돌아다닐 생각만 하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속상했겠나. 듣자하니 요즘 자네들의 사이가 어성버성하다면서? …》
조성호는 그의 질책에 속이 찔리워 주눅이 들었다.
《무슨 일이나 서로의 마음과 정이 맞아야 잘될게 아닌가. 물론 젊은이들의 사랑에 왜 곡절이 없겠나. 그러나 임자야 남자가 아닌가. 녀자란 남자의 품에 안기면 백년묵은 얼음도 쉽게 녹는 법이야. 자,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돌아가라구.》
《알겠습니다.》
조성호는 어깨가 축 처져 기운없는 걸음으로 돌아섰다.
부향녀는 호화주택들의 뒤에 숨은 단층구역에서 리진미의 집을 찾아냈다. 김성진이 알려준 주소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옛 기억을 더듬어 찾으려면 밤을 새워도 찾을것 같지 못했다.
수십년전의 모습들은 가뭇없이 사라졌던것이다. 다만 진미의 집만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걸려있지 않은 대문을 보고 그는 안도의 숨을 지었다. 그러나 선뜻 대문을 두드릴수 없었다. 피를 토하며 숨졌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던것이다.
한참동안 주저하던 그는 조용히 대문을 두드렸다.
응답이 없었다.
부향녀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불이 켜진것으로 보아 분명 사람이 있어보였다.
《계십니까?》
이윽고 방안에서 녀인의 그림자가 언뜻거렸다.
울긋불긋한 서양식실내복차림의 리진미가 문을 열었다.
《아니?! …》
그는 잠시 주밋거렸다.
망연하게 서있는 진미에게로 부향녀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래, 상처는 일없나?》
리진미는 무의식중에 《예.》 하고 대답했다.
부향녀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어루만졌다. 무척 수척해진 얼굴이였다.
《싫던좋던간에 손님이 왔는데 안으로 청해야지.》
그제서야 리진미는 주밋거리며 한켠으로 물러섰다.
《이 집이 오늘까지 그대로 있다는게 믿어지지 않는구나.》
《선생님한테야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이것은 내 집이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숨을 거둔 집이지요. 저는 수십년동안 이 집을 지켜왔답니다.》
리진미의 무뚝뚝한 어조는 부향녀의 아픈 상처를 헤집고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방안에 들어섰다.
첫눈에 띄우는것이 여덟폭 병풍이였다. 바위와 소나무가 잘 어울려있는 높은 산이 그려져있고 그 기슭으로 강이 흐르고있었다. 하늘중천에 해가 밝게 비치고 흰구름사이로 학들이 날아옌다. 또한 산자락의 들판에는 방금이라도 튀여나올듯 한 열마리의 사슴이 그려져있었다.
리진미는 말없이 방석을 내놓았다.
《고맙구나.》
부향녀는 병풍에서 눈길을 떼며 방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옛시절의 자취는 흔적도 가려보기 어려웠다. 이어 벽면을 둘러보던 그의 눈길은 한곳에서 굳어진듯 멈춰섰다. 일본의 풍경화가 눈에 거슬렸다.
제 아버지의 태줄이 묻힌 독도의 그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바로 고베의 정묘한 밤경치를 그린 그림이 틀을 차리고있는것이였다. 고베에서부터 항구까지 가로등들이 은하계의 별들처럼 묘한 빛을 뿌리고있는 모습이다. 그곳 사람들은 이 경치를 자기네들의 자랑거리인 《100만엔짜리 밤경치》라고 부르고있었다.
리진미는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그의 행동만 지켜보았다. 부향녀한테서 언제 어떤 말이 나올지 가늠할수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부향녀의 입에서는 낮으나 엄한 소리가 울려나왔다.
《저 그림을 내리우거라!》
《예?! …》
리진미는 입안에서 맴도는듯 한 소리를 냈다.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집안의 분위기를 돋구게 하느라고 우정 사다가 걸어놓은 풍경화였다.
《네가 못 내리겠다면 내가 내리지.》
부향녀는 성큼 다가가더니 그것을 내리웠다.
리진미는 입만 벙끗할뿐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어쩌면 이리도 무례할수 있단 말인가.
그의 행동을 보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이 더 민망스러웠다.
부향녀는 긴숨을 들이키며 가지고 온 트렁크를 열었다. 그속에서는 수복한 수묵화와 함께 조선치마저고리가 나왔다.
아니?! …
리진미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자기가 그에게 보낸 그림이 새것처럼 되여 돌아온것이다.
부향녀는 수묵화를 다시한번 보면서 손바닥으로 액틀을 쓸었다. 이어 그는 그것을 벽에 걸어놓았다.
《못쓴다. 사람의 가죽을 쓰고서야 어찌 제 조상의 뼈가 묻힌 땅을 스스로 저버릴수 있단 말이냐.》
《?! …》
부향녀는 회억어린 눈빛으로 한동안이나 그림을 바라보았다. 꼭 기쁨에 젖어있던 남편의 모습을 보는것만 같았다.
《여보, 이 그림을 보면 리민수 그 사람이 얼마나 좋아하겠소.》
제 친구의 기쁨을 그려보며 빙그레 웃던 남편, 그는 바로 그 리민수에게서 배신을 당했고 바로 이 방바닥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힘겹게 내리눌렀던 아픔이 다시금 괴여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한계선을 넘어서고있었다. 부향녀는 목구멍으로 끓어오르는 오열을 억제하느라 입을 옹다물었다. 참아야만 했다. 파렬구를 찾는 피눈물, 북받치는 분노를 이겨내야만 했다.
그는 애써 자신을 지탱하며 조선치마저고리를 진미앞에 밀어놓았다.
《이건 내가 네 몸을 눈짐작해서 만든 옷이다. 마음에 들겠는지 모르겠구나.》
리진미는 여전히 차거운 표정을 허물지 않고있었다.
《그 옷이 저한테 꼭 필요할가요?》
《강요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서양의 옷가지들로 육체를 휘감는다 해도 네 몸에 흐르는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사람의 피라는것을 명심하거라.》
문지방쪽으로 몇걸음 걸어가던 부향녀는 다시 돌아섰다.
《새겨두어라. 너는 조선사람이다, 조선사람! …》
리진미는 세찬 충격을 받은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혼미한 의식속에 무엇인가 세차게 날아다닌다. 처음에는 그 실체를 알수 없었다. 그런데 점점 그 모습이 또렷해지며 온 육신을 세차게 두드려대고있다.
조선사람!
부향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채 대문밖으로 벗어났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자기가 어떻게 되리라는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남편의 죽음, 제 넋을 저버린 진미…
금시 심장이 터져 당장 길바닥에 쓰러질것만 같았다. 휘청거리는 다리로 얼마나 걸었는지…
주위는 벌써 어둠에 잠겨있었고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골목길을 희미하니 비치고있었다. 오고가는 행인들도 보기가 힘들
었다.
갑자기 심장에서 찢어지는듯 한 동통이 일었다. 참고참았던 아픔이 드디여 동이를 터친것이다.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두손으로 심장부위를 짓눌렀지만 발작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정신이 가물가물 흐려지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호주머니에 있는 약을 찾으려고 손을 넣는 순간 그는 의식을 잃고말았다.
부향녀를 바래운 리진미는 마음속 깊은 골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 놀라며 쫓기우듯 방안에 들어섰다. 무엇인가 부정하려고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눈앞으로는 억울하게 숨진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만 겹쳐진다. 다가올듯 하면서도 멀어지며 무엇인가 말할듯 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서글픈 표정만 짓고있다.
아, 너무해요. 이 딸의 운명을 지켜주지 못할바엔 무엇때문에 저를 낳았는가요. 어째서 지금 같은 자리에서 바른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는가 말이예요.
생각할수록 부모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들은 나에게 이름 석자밖엔 남겨준것이 없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리진미라는 이름으로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하는 허무한 인생이란 말인가. 나도 인간이 아닌가. 그 어떤 정신에 의지하고싶고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세계에서 살뜰한 목소리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살고싶은 녀성이다. 언제까지 얼음처럼 차디찬 심장을 안고 살아야 하는가. 과연 누가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이는 나에게 생명수를 주겠는가. 물론 바라지 않는 행운이다. 그것은 막연한 공상이고 현실이여서 생존공간만을 비좁게 해준다. 허나 나도 인정에 갈증을 느낀 생명체인것으로 해서 그 어디엔가 기대고싶은 마음은 버리지 못하지 않는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얼음처럼 되여버렸던 이 가슴을 녹여버리게 하는가.
리진미는 지금 자기의 체온이 변하는것을 느끼고있었다. 그것은 이상야릇한 무서움까지 불러왔다. 떨떠름해진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다 바닥에 떨구었다. 초점을 이룬 시야가 회오리치며 흐려났다. 더워나는 심장이 눈앞을 확 메웠다. 오른쪽볼이 축축해지자 그는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더듬거리던 두손이 부향녀가 두고 간 조선치마저고리를 쓰다듬었다. 마침내 가슴속에서 어린시절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엄마, 나 색동저고리 입고 학교에 가고파.》
그것은 죽지 않은 넋의 순결한 약동이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리진미는 책가방을 한쪽구석에 훌 던져버렸다. 그길로 얼굴이 새파래서 방안웃쪽에 벌렁 누웠다.
저녁식사를 하던 리민수가 웬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을 안했다.
리민수는 숟가락을 놓고 진미에게로 다가왔다.
《어이구, 우리 진미가 왜 삐쭉했나. 또 사내들하구 싸웠나?》
리진미는 눈과 입을 봉한채 아무 말도 없었다.
방안에 들어서던 안해가 푸념했다.
《여보, 놔두라요. 그까짓년 밥을 먹겠으면 먹구 말겠으면 말구…》
《어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 진미야 이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인데…》
리민수는 안해에게 눈을 끔벅거렸다.
어머니의 지청구는 끊기지 않았다.
《그래두 계집이라구 벌써부터 이걸 사내라, 저걸 사내라 하니 그 성화에 어디 견디겠어요.》
리진미는 상반신을 반쯤 돌려 새파래서 내쏘았다.
《색동저고리 해달라는것두 맵시보는거나요?》
리민수는 그저 허허 웃기만 했다.
《인제 보니 우리 진미가 노할만도 했구나. 암, 조선처녀라면 제 나라의 치마저고리를 입어야지… 걱정말구 어서 밥이나 먹자구나. 이제 아버지가 네 소원을 꼭 풀어주마.》
《흥, 아버지의 그 고문서장에서 무슨 돈이 나온다구…》
딸애의 말은 리민수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았다.
《허허, 그건 모르는 소리다.》
아버지는 엇드레질을 하는 진미를 안아일으켰다.
《진미야, 지금은 살림이 어려워 커가는 네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지만 앞으로 꼭 좋은 날이 있을게다. 아무렴, 이 애비가 딸자식의 소원을 못 풀어주겠냐.》
《…》
리민수는 진미를 꼭 껴안았다.
《참, 우리 진미는 옛이야기를 좋아하지. 내 옛말을 해줄가?》
리진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정말이나요?》
《그럼. 자, 저 그림을 좀 보거라.》
리민수는 벽에 걸린 수묵화를 가리켰다.
《넌 저게 무슨 섬인지 아니?》
《우리 나라의 섬인 독도가 아니나요.》
《그래, 이 아버지의 고향이지…》
리민수는 축축히 젖어드는 마음을 억누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래에서처럼 우리 나라 동해바다에 있는 외로운 섬이 바로 독도란다. 옛적부터 그곳은 고급어족이 많은 어장으로 손꼽히웠지. 그러나 그곳에는 먹을 물이 바르고 돌투성이 섬이여서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울릉도에 살림들을 펴고 드나들었구나. …》
해마다 5~6월이면 범선을 끌고 독도에 며칠씩 나가군 하던 울릉도사람들은 이날도 차비를 갖추고 바다로 나왔다. 그들중에는 결혼한지 1년도 못되는 한 젊은이도 있었다.
그가 문을 나서려는데 해산이 림박한 안해가 부득부득 따라섰다.
《아니 여보, 그 몸으로 어딜 따라간다고 그래?》
남편은 만류했지만 안해는 막무가내로 제 먼저 범선우에 올랐다.
《아이, 일없어요. 아직 스무날정도는 더 있어야 한댔어요. 그리구 집안에 혼자 있자니 갑갑해서 못 견디겠어요.》
남편을 따라가서 그의 일손을 거들어주고싶었던것이다.
그때 어부의 가족들은 남편들과 함께 독도에 자주 나가군 했다. 그들은 잡은 물고기를 손질하여 돌우에 펴놓고 말리우기도 하고 초절임하기도 했다.
안해는 며칠새에 무슨 큰일이 있겠는가고 하며 굳이 남편을 따라섰다. 하지만 이틀째 되는 날에 그는 심한 진통을 겪었다. 당장 해산할것만 같았다. 이제 다시 울릉도로 간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함께 온 아낙네들이 이 소리 저 소리를 합쳐가며 끝내 아이를 받아내고야말았다.
《그때 태여난 아기가 바로 나란다.》
《그러니 독도는 바로 아버지의 고향이군요.》
리진미는 그림을 의미깊은 눈빛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래, 아버지의 고향이지…》
《아버지, 나도 조국이란데 가면 항상 조선치마저고리를 입을수 있나요?》
《그렇지 않구. 아마 그땐 어머니가 네가 시집갈 때 입을 옷까지 다 장만해줄게다.》
… 이렇게 가정의 약속이 얽혀있는 수묵화와 조선치마저고리였다. 바로 그때 리진미의 나이는 열살이였다. 그렇지만 2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단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독도였고 입어보지 못한 조선치마저고리였다.
그런데 오늘 부향녀가 그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연분홍색비단으로 지은 조선치마저고리였다.
가슴 뭉클 젖어드는 뜨거움을 금할수 없었다. 더 차겁고 랭정하게 대해야 할 부향녀이다. 그런데 오히려 얼음으로 빚은 이 심장이 스르르 녹아지는듯 한 느낌이다. 암울한 세상살이에 산전수전의 고비를 넘으며 어머니라는 부름조차 기억에서 지워버린 그였다.
량부모를 잃은 어린 가슴에 자리잡은 의혹과 원망은 까닭없이 한 녀성 부향녀를 저주하며 방황하였다. 그 발자국은 뉴욕의 거리들에도 찍혀있고 마닐라와 시드니, 몽떼까를로와 바이루트의 밤길에도 비껴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생의 타락이였고 지옥의 대문을 넘어서는 시각에도 바래워주는 손길조차 없을 몸서리치는 고독이였다. 가진것이란 부모가 물려준 유산인 두뇌가 전부였고 천행으로 조선학교에서 배운 글이고 작은 지식이였다. 그것으로 오늘을 이루었고 오직 한가지의 목적 《동양의 사꾸라》를 세상에 고발하자는것이다.
리진미는 조선옷의 고운 바탕에 떨군 자기의 눈물방울을 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낮으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서! … 나는 결코 그것을 바랄수 없는 인생이다. 단지 내가 누구인가를 그들이 알게 하리라. …》
그것만이 선량한 사람인 부향녀에게 하자는 속죄가 아니란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