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리진미는 꼭 3일만에야 의식을 회복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머리맡에서 점적관을 손질하는 간호원에게 물었다.
《안심하세요. 여긴 지성병원이랍니다.》
《예?! … 아니, 그럼 내가…》
그 녀자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짙게 서렸다. 안도의 감정이 적멸해버렸다. 오히려 불안감이 가슴굽을 뻐근하게 긁어내렸다. 몸을 일으키려고 침대에 두손을 뻗치던 그는 인차 이마살을 찌프렸다. 왼쪽옆구리가 쇠꼬챙이로 쑤시는것만 같았다.
남달리 두눈이 큰 간호원처녀가 포근한 입김이 서린 속삭임으로 그를 안정시켜주었다.
《언니, 움직이면 안돼요. 수술효과가 좋으니 인차 회복될거예요. 아이, 이 정신 좀 봐, 환자가 의식을 차리면 식사시키라는걸 깜빡 잊었군요.》
간호원은 자신을 질책하며 얼른 옆에 있는 죽사발을 집어들었다. 처녀는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리진미의 입에 갖다댔다.
《어서 좀 드세요. 이건 찹쌀죽이여서 새살이 돋아나게 하는데 좋답니다.》
어린애같이 천진스러운 표정에 박힌 머루알같이 까만 눈동자가 간청하고있었다. 자그마한 가식도 꾸밈도 찾을수 없는 간호원의 얼굴은 투명하고 순진해보였다. 머리맡에 놓인 꽃묶음의 그윽한 향기처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처녀의 살뜰한 미소가 체내에 흘러들었다. 그것은 혈관마다에 뜨겁게 굽이쳐 가슴을 뭉클하게 했고 코마루를 찡하게 해주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인정미였다.
리진미는 간호원이 떠넣어주는 죽을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받아넘겼다.
《내가 어떻게 이 병원에 입원했는가요?》
간호원은 쌍까풀진 두눈을 깜빡거렸다.
《도로바닥에 피흘리며 의식잃은 언니를 우리 경아선생님이 업어왔어요.》
놀라운 충격은 가슴을 뜨겁게 적셔주었다.
그러니 명철오빠의 안해가 나를 구원해주었단 말인가?
리진미는 간호원이 떠주는 죽을 다시 받아넘겼다.
《고마워요.》
《아이,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원장선생님은 환자들의 건강을 회복시켜주는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강조한답니다.》
저도 모르게 속이 뜨끔했다.
《그래, 원장선생님은 내가 여기에 입원한것을 알고있는가요?》
《그럼요. 수술을 마친 언니의 몸에 묻은 피를 우리 원장선생님이 다 닦아주셨답니다. 그리구 의식을 차릴 때까지 계속 여기에 계시다싶이 하셨는걸요. 방금전에도 여기서 언니를 지켜보다가 돌아가셨어요.》
리진미는 괴롭게 두눈을 감았다.
남편의 시신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던 그의 모습이 안겨왔다.
《은혜는 갚지 못할망정 죄되는 일은 하지 말랬는데… 아, 어쩌면 사람이 몇푼의 돈에 량심과 의리를 팔아버릴수 있는가 말이예요. …》
간호원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혹시 상처자리가 또 아픈게 아니예요?》
《괜찮아요. 그저 좀 혼자 있고싶군요.》
간호원은 빈 죽그릇을 들고 입원실에서 나갔다.
리진미는 이 병원에 누워있는 자신이 밉살스러웠다.
생활이란 이렇게도 야속한가. 어이하여 인생의 파도는 나를 이곳으로 떠밀었단 말인가.
살아있어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운명으로 살아온 그였다. 지금껏 곡절많은 인생길을 헤쳐오면서 숨이 가빴고 온몸이 나른했다. 오직 복수심만을 안고 허위단심으로 걸어온 길이였다. 그 길에서 육신의 피는 차겁게 식어갔고 인정은 메말라 때이른 강대로 변해버린 자신이였다. 길바닥에서 칼에 맞아 쓰러져도 누구 하나 동정의 눈물을 흘려줄 사람이 없었고 무주고혼의 봉분에 꽃 한송이 가져다 줄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부향녀의 가족에 의해서 구원을 당했던것이다. 이것은 막대한 돈을 지불한다 해도 얻을수 없고 맛볼수 없는 인정미였다.
그가 내 몸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머리맡에 앉아있었다고 했지. 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가? 자기의 집안을 파멸에로 몰아간 사람의 자식을 내려다보며 제 남편생각을 했겠지. 아무리 수십년세월이 흘렀다 해도 그날의 아픔은 생생할것이다. 더우기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무섭게 키워오지 않았던가. 아, 괴롭구나. 언제까지 이 병원에서 그와 얼굴을 맞대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아무리 천사라고 한들 나에게 진실한 성정을 베풀수 있겠는가. 나는 그런 동정은 받고싶지 않다. 속에 없는 웃음앞에 몸을 맡길수는 없어.
어디선가 귀에 익은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려왔다.
《오 전능하신 주님, 이 죄많은 어린 양안에 숨어있는 악마를 불태워 없애주소서.》
그러자 성가대가 우르릉 웨쳤다.
《아멘!-》
소녀시절의 리진미는 뜨거운 혀바닥을 널름거리며 게걸스럽게 얼굴을 밝히는 불길에 질겁하여 어머니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러면서도 목사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서있는 제또래 소년의 앙상한 잔등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목에 십자가를 건 목사가 다시 웨쳤다.
《이 죄인이 악마를 몰아내도록 도와주소서. 오 주님, 저희도 악마를 끌어내여 불태울수 있도록 기도하겠나이다. 악마를 물에 빠져죽게 하겠나이다.》
소년에게로 다가온 목사는 별안간 찬물이 가득 담긴 나무통에 그의 얼굴을 처박았다.
리진미는 터져나오는 비명소리를 참느라 이발을 옹다물었다. 다행히도 어머니가 손으로 두눈을 가리워주었다.
성가대가 입을 모아 주님을 찬송하며 회개를 간청하는 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소년은 목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며 물을 꼴깍꼴깍 들이켰다. 얼마나 지났을가. 아이의 몸부림도 진해가는데 목사가 손을 놓으며 선언했다.
《사랑하는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으로 아이가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리진미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간청했다.
《엄마, 어서 집으로 가자요. 난 무서워요.》
목사의 검은 손은 어느덧 리진미의 머리우에서 번뜩이고있었다.
《예수님의 은총을 바라지 않는자 천벌을 면치 못할지어다.》
리진미는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싫어요. 난 예수도 회개도 다 싫단 말이예요.》
소스라쳐 두눈을 뜨니 온몸이 땀에 화락하니 젖어들었다.
필생을 머리 조아리며 용서를 빈다고 지나간 인생을 어이 수정할수 있단 말인가?
머리를 뻐근하게 하는 생각을 털어버리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직 자기의 숨소리만 들렸다.
소란스러운 외부세계와 너무도 거리가 멀어 꼭 천국에 온듯싶었다.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공기에 그는 어둠을 헤집고 주변을 둘러봤다.
하나와 같이 정결하고 깨끗했다. 반쯤 열려진 창문가로는 신선한 꽃향기와 함께 절로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참대숲의 설레임이 흘러든다. 그너머 휘영청 하늘중천에 여느때없이 밝은 달이 비껴들었다.
새벽하늘이 동터올무렵 간호원이 다시 들어왔다.
《아이, 깨났군요. 언니, 어서 체온과 혈압을 재보자요.》
리진미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가 움직이는대로 몸을 내맡겼다. 길다란 속눈섭을 내리우고 일을 하는 그를 바라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오열이 북받쳤다.
아마 이 처녀도 부향녀를 존경하고 따르겠지. 내가 어릴 때처럼…
《어디 불편한게 아니예요?》
리진미의 색다른 표정에 간호원이 묻는 말이였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요.》
리진미는 자기의 나약함을 가리우며 물었다.
《참, 내가 하나 물어도 일없을가요?》
《어서 말씀하십시오. 기자선생님들이야 원래 호기심이 많은분들이 아니나요.》
처녀는 보조개를 살짝 내보이며 방긋하니 웃어보였다.
《내가 보기엔 아가씨가 원장선생을 무척 따르는것 같은데? …》
간호원은 혈압계의 눈금을 근무일지에 써넣으며 대답했다.
《저만이 아니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존경한답니다.》
《모든 사람들이?! …》
《녜, 도꾜에서 사는 우리 동포들은 물론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일본사람들도 말이예요.》
리진미는 못 미덥다는듯 다시 물었다.
《그렇다구 누구에게나 다 그런건 아니겠지요?》
《예, 물론 그렇답니다. 인간이란 다 자기의 감정을 가지고있지 않나요.》
리진미는 한쪽볼을 실룩거렸다.
《그래요, 아마 그럴거예요!》
아무리 부드러운 성정을 지녔다고 한들 어찌 만사람을 한웃음속에 담을수 있단 말인가.
간호원은 두손을 모아잡고 자기의 심정을 계속 이야기했다.
《저도 처음엔 어떻게 마음이 저렇듯 비단결같을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내면서보니 원장선생님에게는 남다른것이 있었답니다.》
《남다른것… 그게 뭔데요?》
리진미는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바로 동포애와 애국심이랍니다.》
《그거야 총련계사람들의 신앙심이나 같은게 아니나요.》
간호원의 밝은 인상은 대번에 흐려졌다.
《어쩌면 그렇게 말할수 있나요? 신앙이라는것은 허황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가장 고상한 감정이 아니나요.》
그제서야 리진미는 자기가 실언했다는것을 느꼈다. 이들에게 자기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것을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씬 증오가 없는 인간이 사랑의 감정을 분출시킬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간호원은 그의 말뜻을 리해하지 못한듯 두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 원장선생님은 조국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안고있답니다. 몇달전 평양에서 가져온 수예품을 집에 걸어놓고 매일 들여다본다나요.》
《어떤 수예품이예요?》
간호원처녀는 량볼을 발기스레하게 태우며 주접이 든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저도 모른답니다. 솔직히 나도 한번 보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어서… 다들 그 수예품이 원장선생님의 정신이구 육체라고들 말한답니다.》
리진미는 속으로 쓰겁게 웃었다.
세상에 그런 수예품이 어데 있다구…
간호원은 갑자기 시무룩해서 낯색을 흐렸다.
《왜 그러나요?》
《요즘 우리 원장선생님이 이 병원을 판다는 소문이 나돌고있어요.》
리진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설번 했다.
《병원을 팔다니요, 그건? …》
간호원은 근무일지를 두손으로 꽉 말아잡았다.
《저-어, 저도 원인은 모르겠습니다.》
리진미는 그가 비록 말은 안했지만 모든것이 짐작되였다. 분명 아들의 회사를 살릴 결심을 했을것이다.
그는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니 정녕 그를 돌려세울수 없단 말인가?
며칠후 리진미는 퇴원을 결심했다. 입원치료를 받은지 꼭 한주일만이다.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그를 만류했다. 그렇지만 그는 굳이 거절했다.
야마모도의 도움으로 현관으로 나오던 리진미는 주춤 멈춰섰다.
부향녀와 김경아가 앞에 서있었던것이다.
리진미는 머리를 숙였다. 그들이 없는 사이에 조용히 퇴원하려고 했던노릇이다.
부향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서둘러 퇴원하겠다는거냐?》
리진미는 얼굴을 쳐들었다.
《전 이곳에 누워있기가 막 괴롭습니다.》
리진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고 딱딱했다.
부향녀의 표정은 흐려졌다.
《난 네가 이 늙은이에 대해 원망이 많다는것을 알고있다. 그렇다구 채 낫지도 않은 상처를 가지고 퇴원하는건…》
《물론 선생님의 정성이면야 다 낫겠지요. 그렇지만 가슴속의 상처는 더 깊어질거예요.》
그 녀자는 부향녀의 옆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진미야!》
리진미는 흠칫 멈춰섰다. 그러나 몸만은 돌리지 않았다.
《넌 오늘도 이렇게 떠나겠다는거냐?》
괴로움에 지친 부향녀의 목소리였다.
리진미는 두눈을 감았다.
그래, 그때도 난 저 녀자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댔지. 그런데 또… 아니, 난 절대로 부향녀의 사랑을 받아들일수 없는 몸이야. 또 그도 이전처럼 날 대해주지 않을게구…
《아, 선생님! 제가 미처 인사를 못했군요. 저를 구원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부향녀의 외마디소리가 들렸다.
《뭐라구?! …》
리진미는 두눈을 꾹 감았다.
《아, 불쌍한 어머니가 그립구나.》
그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병원을 벗어났다. 승용차를 타고 거리로 나가면서 단 한번도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