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백합꽃은 태양의 빛을 받다
젊음의 노래
오다까 요시꼬는 생각깊은 눈으로 문예봉을 바라보고있었다.
조국의 시련을 함께 겪으며 조국을 위하여 헌신한 그의 생이 감동적이였고 그만큼 부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요시꼬가 보건대 조국의 운명속에 자기의 운명도 있다는것이 문예봉의 인생관이였다.
조국의 기쁨이자 그의 기쁨이였고 조국의 슬픔이자 그의 슬픔이였던것이다.
이것은 문예봉에게 자연스러운 생의 리치이고 인생길인것 같았다.
요시꼬자기와는 너무도 대조되는 인생길이라 할수 있었다.
요시꼬의 후반생에서 조국이라는 좌표는 없었다.
오직 가혹한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고독한 독전만이 있었을뿐이였다.
실력과 노력의 세계라고 하는 무대에서 기어코 성공하려고 대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넘나들며 독창무대에서 연극무대에로 그리고 또다시 영화에로 전전하면서 무진 애를 다 썼으나 결국은 쓰디쓴 실패의 고배를 마시지 않으면 안되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것이 소위 성공의 철학이라지만 그 《성공》을 위한 지속적인 압박감과 벼랑끝을 걸어가는것과 같은 긴장감을 그는 도저히 이겨낼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항시적인 고독이 자기 생의 길동무였다. 그는 언제나 외로왔고 고독하였다.
그러나 문예봉은 다르다.
그는 언제나 자기혼자가 아니라 조국이라는 거대한 세계와 함께 있었다.
그의 노력을 온 나라가 뒤받침해주었고 그가 성공하면 온 나라가 기뻐하며 사랑스러운 조국의 딸로 높이 떠받들고 추켜올려주는것이다.
참으로 그가 부럽다. 그런 긍지로운 생을 누려가기에 로년에도 문예봉은 저렇듯 젊음에 넘쳐있는것인가.
요시꼬는 아직도 아름다움과 젊음이 사그라지지 않은 문예봉의 수려한 모습을 찬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참으로 기적이 아닐수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는 고령의 로인이 아니라 아직도 청춘기의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한 미모의 녀인이였던것이다.
《문선생은 아직도 젊습니다. 성공의 희열로 생을 장식하다나니 늙음도 찾아들수가 없었는가봅니다.》
요시꼬의 말에 우리 셋은 다같이 웃었다.
내가 보기에도 문예봉은 너무도 젊어보였다. 최근에는 어머니역으로 많이 분장하지만 화면에서보다 실물은 비할바없이 젊어보이는것이였다.
《제가 듣기에는
그의 젊음에 대한 말이 나오자 언제인가 들었던 말이 떠오르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옳아요.
우리의 이야기는 뜻밖에도 문예봉의 젊음에 대한 화제로 번져진듯 하였으나 그것 역시 그의 한생을 수놓아가고있는,
1954년은 예봉에게 있어서 특별한 흥분의 해였다. 전쟁의 총포성이 멎은지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전후의 첫 예술영화로 제작된 《빨찌산처녀》의 주인공 영숙이 역을 훌륭히 성공시켰던것이다.
모든것이 다 파괴된 페허속에서 미국놈을 이겨낸 영웅적인민의 억센 기개인양 《빨찌산처녀》가 태여나자 온 나라 인민들의 환호는 그야말로 열광적이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적후에서 용감히 싸우다 영웅적으로 희생된 조옥희영웅을 원형으로 한 작품이여서 영화는 상영되자마자 사람들의 마음을 틀어쥐였다.
특히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강의한 성격을 잘 살린 문예봉의 연기형상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고 작품의 품위를 훨씬 높이였다. 사람들은 문예봉이라는 이름보다도 영숙이라고 사랑스레 불렀다. 전국각지에서 매일과 같이 문예봉에게로 편지들이 비발치듯 날아왔다. 처음에는 일일이 회답을 해주다가 너무도 밀려드는 편지사태앞에서 그만 손을 들고말았다.
그가 받은 편지들에는 이런 구절들도 있었다.
《백두의 밀림속에서 축하를 보냅니다. 영숙동무의 영웅적인 투쟁모습을 그려보며 우리는 오늘도 계획을 120% 완수하였습니다.…》(혜산림산사업소 로동자들로부터)
《전연초소의 전호가에 들국화가 붉게 피여 우리 전사들의 가슴마다에 행복의 미소를 보내고있습니다. 그 들국화를 볼 때마다 우리들은 선생님을 생각하며 선생님을 생각할 때면 들국화를 련상합니다. 선생님의 귀중한 서신과 글월을 육친의 정으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우리 구분대전우들은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빨찌산의 딸-영숙이의 모범을 따라 영웅적으로 투쟁할 결의들을 다졌습니다.》 (전방초소의 군인들로부터)
《영숙동무, 왜 우리 공장에는 오지 않으세요. 우리들이 얼마나 영숙동무를 만나보고싶어하는지 아세요. 영숙동무를 꼭 기대앞에서 만나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청진방직공장 로동자들로부터)
《영숙동무, 우리의 농업협동조합생활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지 보여드리고싶습니다. 수많은 영숙이들이 지켜낸 우리의 귀중한 조국땅이 아닙니까.
문예봉을 배우로가 아니라 조국을 위하여 한목숨 바친 조국의 장한 딸-영숙이로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진심이 그대로 비낀 글들이였다.
조옥희영웅을 잊지 않고 길이 추억하는 인민들의 애국적감정과 함께 처녀영웅의 모습을 생동하게 형상해낸 문예봉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감정,
문예봉을 빨찌산처녀 영숙이처럼 보고있는 인민들의 소박한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져있었다. 인민들의 마음속에서 예봉이
참으로
인민들이 자기를 영숙이로 보고있는 이상 자기도 영숙이처럼 살아야 하는것이였다.
빨찌산처녀 영숙이! 그는 얼마나 훌륭한 처녀였는가. 처녀의 몸으로 빨찌산에 입대한 그는 미국놈들을 족치는 싸움에 한몸을 내댄다. 마을에
내려가 놈들의 다리공사를 지연시키고 적들을 유인하여 요새를 점령할수 있게 한다. 또한 다리를 폭파시켜 수많은 애국자들을 감방에서 구원한다. 이
전투에서 체포되여 놈들의 온갖 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고 떳떳이 맞서싸운다. 사형장에 끌려나와서도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
우리 나라 농촌마을 그 어디서나 흔히 만날수 있는 수수한 농촌처녀이면서도 결코 평범치 않은 영웅적인 처녀가 바로 영숙이였다.
바로 그러한 처녀영웅의 정신세계에 내가 과연 도달할수 있을가?
예봉의 고민은 사실 깊었다.
그 영웅처녀의 고결한 정신세계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자각과 아직은 그에 따라서지 못하는
배우들이 흔히 하지 않는 이런 진통을 안고 모대기는 여기에 벌써 예봉의 남다른 인간상이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온 나라를 들썩하게 한 《빨찌산처녀》의 열풍속에서 1954년도 저물고 1955년 새해가 밝아왔다.
문예봉에게 또다시 영광의 시각이 도래하였다.
신년연회에는 당과 국가의 책임일군들과 사회단체 및 근로단체일군들, 로력혁신자들, 각계층의 대표들이 수많이 와있었다.
복구건설의 노래 우렁차던 54년을 보내고 더욱 보람찬 투쟁의 새해를 맞이하는 뜻깊은 시각을
연회가 거의 끝날무렵 허정숙 문화선전상이 활기있는 걸음으로 예봉의 좌석으로 다가왔다. 그는 예봉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이였다.
《
《!…》
예봉은 튕겨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히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그는 허정숙 문화선전상을 따라 어느 한 방으로 들어섰다.
그 방에서는
허정숙과 함께 방에 들어서는 예봉을 보시자
문예봉은 허리굽혀 설인사를 드리였다.
그의 눈가에는 어느덧 뜨거운것이 고이였다.
그러시다가 문득 올해에 몇살이 되는가고 물으시는것이였다.
《38살입니다.》
예봉의 대답을 들으신
대사들의 박수에 예봉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표하였다.
친딸을 내세우고싶어하시는 아버지의 심정그대로이신
그의 눈가에는 어느덧 고마움의 눈물이 또다시 방울방울 맺히였다.
감사의 정에 울먹이는 예봉에게
축배잔을 받아안은 예봉은 너무도 황송하고 감격에 겨워
문예봉은 너무도 미숙한 자기의 연기를 이토록 치하하시니 더욱 송구해지는 마음을 걷잡을수가 없었다.
그러는 예봉을 대견스레 바라보시던
예봉은 눈앞이 뽀얗게 흐려졌다.
(
수난의 그 시절 녀배우들의 재산은 미모와 젊음이였다. 젊음이 넘쳐나고 아름다움이 꽃피는 한창시절의 녀배우는 값이 나가는 상품이라 할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은 어길수 없어 어느덧 청춘이 사라지고 아름다움이 시들기 시작하면 아무리 명성을 떨쳤던 왕년의 녀배우라도 사정없이 밀리는것이 은막과 무대의 랭혹한 륜리였다.
사람이란 늙기마련이니 그 늙음과 더불어 예술인으로서의 생명도 끝장이 나는것이 녀배우의 어쩔수 없는 숙명이였던것이다.
녀배우들이 락화되여 진흙탕속에 나딩굴고 구겨져도 누구 하나 동정하거나 애석해하는 일이 없었다.
한철 폈다 지는것이 녀배우들의 운명인데야…
그런데 지금
단순히 육체적으로 늙지 말라는 말씀이시였던가.
아니였다. 그것은 오늘도 래일도 언제나 처녀와 같은 싱싱한 마음으로 예술창조사업을 열정적으로 해나가라는 격려의 말씀이시였다.
영원한 젊음-그것은 청춘의 열정으로 높뛰는 심장에 있는것이다.
예봉의 심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심장, 그 열정으로 온넋을 불태운다면
* *
그때로부터 몇년세월이 흐른 어느날 예봉은 또다시 국가신년연회장에서
연회가 한창 무르녹을무렵
예봉이 올리는 새해인사를 받으신
예봉은 너무도 당황하여 고개를 푹 숙이였다.
아마도 어느 한 예술영화에서 로인역을 한것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신듯 하였다.
그 영화에서 예봉은 팔순이 된 할머니로 분장하였던것이다.
처녀역만을 하라고 하시던
잊지 못할 그날에 하셨던 말씀을 잊지 않으시고
이때 예술부문의 한 일군이
성인이 된 아들딸들이 있는 나이든 배우라는 말이였다.
순간 예봉은 펀뜻하고 튕겨지는 세찬 불꽃을 의식하며 머리를 버쩍 들었다.
배우로서의 한창시절인 20대의 청춘기를 수난의 그 세월에 다 흘러보내고 30대고개에야
진정한 예술활동은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창조의 청춘시절인것이다.
예봉의 심장은 격동의 불꽃으로 튀여오르고 얼굴은 흥분으로 하여 붉게 상기되였다.
그럴수록 예봉을 소중히 여겨주시고 앞날까지 축복하여주시는
얼마나 다심하고 뜨거우시면서도
영원한 젊음으로
불타는 맹세로 가슴을 끓이며 예봉은 새해를 맞이하였고 예술창조의 개화기인 1960년대에 들어섰다.
문예봉에게 있어서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그야말로 예술창조의 나래를 활짝 펼친 개화기라고 할수 있었다.
전후 사회주의기초건설시기와 우리 조국력사에서 천리마시대라고 불리우는 격동적인 시기에 문예봉은 천리마를 타고 질풍같이 내달리는 조국과 숨결을 같이하며 자기의 재능을 깡그리 조국에 바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신혼부부》, 《춘향전》, 《금강산처녀》, 《붉은 꽃》, 《다시 찾은 이름》, 《성장의 길에서》 등 수많은 예술영화들에 출연하여 조선영화사의 한페지를 빛나게 수놓았다.
1960년대에 중학시절을 보낸 나의 기억에도 그 당시 영화화면에서 가장 많이 본 녀배우의 얼굴이 문예봉이였던것이다.
너무도 친숙한 그의 모습이 비낀 영화화면과 함께 우리 세대는 꿈많은 중학시절을 보내였고 랑만으로 부푸는 청춘의 대문을 열어제끼였던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화가 평생 떨어질수 없는 생활의 길동무라고 한다면 문예봉은 바로 우리 동시대인들의 영원한 길동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백화만발한 꽃밭에도 그것을 가꾼 원예사의 남모르는 수고가 있고 오곡백과 주렁진 풍요한 가을에도 그 가을을 안아온 농민들의 노력과 땀방울이
스며있듯이 활짝 피여난 문예봉의 예술적재능뒤에도 그것을 꽃피워준
나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문예봉이 맞이한 예술창조의 개화기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