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불안한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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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중학교로 가는 상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예정으로는 합격자발표를 보고 대학에서 오후강의를 한시간만 받고 4시에는 채남을 만나
영화구경을 가기로 되여있다. 봄날은 맑고 채남과의 약속도 있고 기뻐야 할 날이였다. 그러나 발걸음은 무거웠다. 갈 곳으로는 아니 가고 딴 곳으로
가고있는듯 한
가르친 아이의 입학이 그에게 지금 그다지도 관심사일가.
어찌 생각하면 아첨같기도 했다.
민녀인이 오늘 H중학교 운동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약속을 지켜서 가는것이지만 입학이 돼야 가정교사자리를 또 다른 곳에 구하느라고 애쓰지 않을것이며 등록금의 일부도 해결된다. 민녀인이 후하다든가 사람이 좋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였다. 상춘은 지금까지 세번이나 가정교사자리를 옮겨봤지만 집에 따르는 대우의 우렬을 론할바가 아니였다. 그들의 인품, 성격, 아이의 재질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요컨대 저쪽은 고용주, 이쪽은 피고용의 계선은 어디서나 명백했다. 그럴바에는 아무데나 낯익은 집에 있는것이 편하다. 민녀인은 아이가 입학되면 눌러있어달라고 했다.
지금 상춘은 그것을 바라고 가는것이다. 장자울사람들이 무엇때문에 집에 찾아와서 그렇게 분노를 하소연했을가. 상춘은 어머니의 시간 늦는다는 말이 아니였더라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을것이다. 물론 그들이 상춘에게 장자울로 가서 미군부대의 류치장 《몽키하우스》(원숭이집)에 갇히여있는 신랑이나 청년들을 빼내달라는 청도 아니했고 또 자기가 간들 별수도 없는것이다. 없기때문에 그는 지금 자기 무력을 느끼며 어딘가 자기의 갈길은 딴데 있다는 모색감에 걸음이 무거웠다.
운동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기다랗게 합격자명단을 써붙인 그아래에 사람들이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이름들을 찾고있었다. 상춘도 그곳을 향하여 급히 걸었다. 운동장 한쪽에 민녀인의 남편 조사장의 세단차가 놓여있고 흙받이에 한발을 걸치고 담배를 피우는 낯익은 운전사가 한팔을 들어보였다.
아이는 불합격이였다. 발표하는 날자와 아이의 수험번호와의 일치는 좋은 징조라고 하던 그 번호가 붙지 못한것이다.
민녀인내외는 스스로 현대인의 교양을 자처하면서도 이상스레 수자라든가 꿈이라든가 하는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 수자가 효험을 나타내지 못했다.
상춘은 긴장이 몸에서 쑥 빠지는것을 느꼈다. 올 날이 온것이다. 아이의 실력으로 봐서 당연한 일이였으나 그 부모들이 뒤구멍으로 운동을 한다기에 아니 와볼수도 없었다. 그러나 사태는 될대로 된것이다. 상춘은 민녀인과 아이가 거기 어디에 있는가 둘러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운동장 여기저기에 벌어지고있는 희비의 장면만이 눈에 들어왔다.
훌쩍거리며 우는 아이도 있다. 그옆에서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때문에 우는 아이가 더 가엾었다. 호사스럽게 차린 유한 부인들이 치마를 끌며 회유하듯 운동장을 거니는 바람에 아이는 붙었으나 등록금걱정때문인지 암담한 얼굴로 무엇인가 의논하고있는 초라한 중년부부의 모습이 더 딱해보였다.
해마다 봄이 되면 합격자를 발표하는 학교마당들에서 볼수 있는 광경이였다.
작년에는 어떤 어머니가 외아들의 입학금을 구하려고 부리나케 뛰여다니다가 마침내 《돈! 돈!》 하고 소리치며 거리로 뛰여나간 후로 영영 미친 사람이 되여버린 사건이 있거니와 올해는 또 뉘 집 어머니가 미치거나 자살을 하게 되려는지…
학교현관에서 민녀인이 회색장갑을 끼며 나왔다. 그뒤로 교장인지 교무주임인지 상당한 년배의 사람이 보이였다. 안에서도 용무는 충분히 이야기됐으련만 여러 사람들 보는 앞에서 학교당국자와 친히 담화를 나누는 장면이 무슨 특권이나 되는듯 한참동안이나 대화를 주고받은 다음에야 그는 아이를 앞세우고 계단을 내려섰다.
상춘은 례의상 인사는 해야 되였다.
《유감입니다.》
상춘을 보고도 못 본체, 인사도 못 들은체 하며 도도하게 자동차있는데로만 가던 녀인은 걸음을 멈추고 의외로 상냥하게 말했다. 변화무쌍한 표정의 꾸밈을 그 녀자는 풍부한 감정의 발로라고 내심 자랑한다.
《이따가 집으로 와요.》
《…》
그의 말을 들으면 등록금때문에 입학이 취소되는 학생이 있을것이라 한다. 그 보결시험의 출제범위를 나중에 사바사바하기로 했으니 며칠만 주야로 아이를 가르쳐달라는 명령이였다. 말하자면 입학협잡에 협력해달라는것이다.
상춘은 불쾌했다.
《한해 더 묵여서라도 실력으로 들어가는게 아이를 위해 좋지 않을가요?》
민녀인의 얼굴이 새파래지며 입술이 떨리더니 풍부한 표정은 금방 랭랭해지며 차겁게 말했다.
《아이를 가르치랬지 날 가르치래진 않았어요. 건방져요.》
《말 조심하십시오.》
《정말 말 조심해요.》
민녀인이 상춘에게 인사하려는 저의 아이의 덜미를 잡아 인사도 시키지 않고 가버렸다.
상춘이 무거운 걸음으로 대학에 오자 게시판앞에는 학생들이 모여섰다. 무슨 새로운 공시사항이 발표된 모양이였다. 새 학기 등록금을 언제까지 납부하라는것인가, 상춘은 학기마다 그것때문에 고생을 해오기때문에 공시사항이라면 먼저 그것이 머리에 떠오르기마련인데다 오늘 민녀인과 그런 일까지 있어서 자연 그런 생각도 하며 게시판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웬 일인지 학생들은 그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잠시 조용해졌다. 마치 상춘에게 책임을 묻는것 같이 말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는 얼굴들 같기도 했다.
공시사항은 놀라운 일이였다. 상춘은 피가 머리로 뻗치며 분노에 몸이 굳어졌다.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북받치는 감정그대로 한다면 공시문을 뜯어서 발기발기 찢고싶은 마음이였다.
준호를 그날 날자로 퇴학처분한다는 내용이였다.
그는 법률적으로만 보더라도 아직 유죄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학당국은 그를 퇴학시켰는가? 설사 백보를 양보해서 그가 유죄판결을 받는다 하더라도 학문적으로 진리를 외곡하지 않은 이상 학문의 전당으로 자처하는 대학으로서는 그를 퇴학시킬수 없는것이다.
상춘의 순진한 머리는 그렇게밖에 달리는 생각할수 없었다. 그런데 퇴학이라니 언어도단이였다.
다른 학생들도 모두 상춘과 같은 생각들인지 침통한 얼굴들로 서만 있었다.
교수들도 같은 심정같았다. 가방을 끼고 나가는 어떤 교수는 무겁게 머리를 숙이고 학생들의 인사도 받는둥마는둥 발부리만 내려다보고 걸었다.
준호의 문제를 가지고 교수회의를 여러번 열었다가 그때마다 휴회가 아니면 거수에서 기권이 많아서 지금까지 끌어온 사실을 학생들은 안다. 게시판의 공시문은 대학당국의 의사도 아니고 교수들의 의사는 더욱 아니다.
순전히 《정부》의 압력임에 틀림없었다.
대학교정에는 무거운 저기압이 조기처럼 드리워있다.
한왕렬이 와서 학생들의 어깨너머로 넘성거리며 공시문을 보았다.
《종착역까지 왔군.》
그는 어렵지 않게 한마디 던지고 돌아섰다. 상춘은 그를 불렀다.
《뭐가 종착역인가?》
《갈데까지 갔으니까 하는 말일세.》
《누가 갈데까지 갔냐 말야?》
상춘과 다른 학생들의 기세가 온건치 않은 눈치를 챈 그는 말을 돌렸다.
《학문의 자유도 갈데까지 갔단 내 말이 잘못인가?》
유들유들하고 넙적한게 어디 한군데 감정의 특징을 나타내지 않다가 화만 나면 얼굴전체가 그대로 불덩어리로 변하는 다혈질인 그는 바보처럼 돌아섰다.
그는 권세환의 지시대로 대학내에 돌아가는 기운을 탐지하느라고 학생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나 참여하여 한마디 던지고는 그 반응을 살피는것이다. 지금도 상춘과 이 짧은 《시비》에서나마 그의 기분을 충분히 알아내여 유쾌한 끝에 어깨를 채며 운동장 다른 곳으로 간다.
오후강의는 례의 그 원익홍박사의 로스토우학설을 소개하는 합동강의였다. 대학에서는 《반공리론》의 골자라 하여 그 강의를 특별히 열었으며 학생들의 출석도 엄격히 단속했다.
강의내용이 상춘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에는 그날 겪은 일들이 가득차있었다.
장자울에서의 미군만행, 민녀인의 오만, 준호의 퇴학, 원익홍박사의 지금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낱말들- 자유, 민주, 복지사회, 근대화, 그런 말들이 아무러한 표상도 없이 고막을 스쳐지나갔다.
백분강의 후반에는 학생들이 반이나 줄었다. 겨우 수강을 끝내고 운동장으로 나가자 경상도 어느 소도시 모직공장주의 아들 박석근이 상춘을 손짓해 불렀다. 그가 앞서는대로 상춘은 그를 따라 운동장 한쪽 잔디밭으로 갔다. 잔디밭에는 길어진 봄날의 해빛이 깔려 따스했다.
《토의할 일이 있습니다.》
석근이 잔디를 한웅큼 뜯어서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며 말했다.
《뭐요?》
대학앞 거리에는 어느 편인지 선거용방송을 장치한 자동차가 요란스레 지나갔다.
삐라를 뿌리고 새납을 불며 장고를 두들겨댔다. 누가 삐라를 밟아버리기라도 했는지 죽이라는 고함도 들렸다. 자유당의 선전이였다. 공포와 돈과 인기를 배합한 선전이였다. 상춘은 저절로 눈살이 찌프러졌다.
《공명선거운동에 적극 참여하자 그겁니다.》
박석근은 때마침 잘됐다는 식으로 밖에서 벌어지는 소란에 눈을 찌프리며 아무러한 전제도 없이 그런 제의를 하는것이였다.
《누가요?》
상춘은 물었다.
《대학신문이 선거기간만은 공명선거를 주장하는것으로 사회참여의 사명을 하자 그겁니다.》
대학신문도 편집국장과 기자들이 있어서 편집실무를 담당하고있으나 지면의 주도권은 학생이다. 하지만 그들사이에도 여러가지 분파와 모임들이 있다. 취미, 기호, 처지, 전공과목, 사상에 따라서 갈라지며 혹은 집합하며 일반사회의 축도 그대로의 현상을 나타낸다. 신문도 그것을 반영하여 《학문의 연구》, 《진리탐구》라는 커다란 테두리안에서 그때그때의 특색을 나타낸다.
최근에는 겨울방학에 흩어졌던 학생들의 현실을 연구한 론문들이 좋은 반향을 일으켰고 권세환이 격노한 XYZ의 필명으로 쓴 《맥분의 비극》이 많은 문제성을 제기했다.
박석근은 XYZ가 누구라는것을 알고있어서 지금 상춘을 잡고 《공명선거》운동을 대학신문을 통해서 전개하자는것이다.
상춘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사회참여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선거라는것이 무엇이라는것을 안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5. 10단독선거때의 형 상백의 사건, 그것으로 해서 선거라는 그말부터가 반발을 유발하는 개념이였다.
《학생들은 진리탐구로 사회참여와 정치참여를 해야지 선거운동으로는 어떨가, 난 잘 모르겠는데.》
《상춘형은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해. 사회는 한참 선거전으로 들끓고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어디서 진리를 찾겠느냐 말입니다.》
석근은 누워서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상춘의 이야기를 들었다.
상춘이 조금전에 만나고 온 민녀인의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박석근은 정신이 드는듯 일어나며 말했다.
《그건 매판자본가의 비게덩어리 유한마담이지 민주당이 아닙니다.》
《모빠쌍의 비게덩어리를 념두에 두고 말하지만 그 비게덩어리가 통곡을 하겠군요. 모빠쌍의 그 녀자는 썩어있는 부르죠아지들을 보았지만 내가 얘기한 녀인은 그자체가 바로 썩어있는 민주당의 마담입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건 석근형의 깨끗한 량심뿐이구.》
《민주당도 싫다 그 말인데 그러면 자유당과 리승만의 천하가 영구화되는걸 바란다는겁니까?》
《이거 아니면 저거, 단순하군요.》
상춘은 웃었다.
《론리가 그렇지 않으냐 말입니다.》
상춘은 언제나 그러한 경우에는
모색이라고 할가 머리에 가득찬 불만이였고 모순이였다. 쾅쾅 부딪치고싶은 마음-그것은 아직 사상은 아니였다.
홍인표가 두꺼운 안경알을 번쩍거리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의 말을 뒤에서 들었던것이다.
《이 정치의 포로들. 아, 정치병이여!》
《미친 친구 또 왔군.》
박석근이 자리를 내주었다. 상춘과 석근은 둘이서 론쟁도 아니고 이야기를 막다른 골목으로까지 단번에 몰아붙이여 어색하던 판에 인표의 출현은 오히려 다행이였다.
《그래 석근이는 민주당, 상춘인 무슨 당이야? 자유당은 아닐테고, 너들은 무엇인가 정치문제로 대립하고있는 모양인데 정치를 두고 말한다면 너들의 대립은 해소될 길이 없어. 영원한 평행선이다. 슬픈 일이 아닌가?》
거리에는 또 어느 편인지 선전차가 지나갔다. 아까는 새납을 불더니 이번에는 클라리네트(목관악기의 한가지)를 불었다.
《여, 석근이 저건 새납과 장고가 아닌걸 보니 아마 군의 민주당인가 봐. 가서 뛰여들게.》
《사람은…》
석근은 실소했다. 그 실소를 또 비웃듯 인표는 말했다.
《저건 똥만도 못한것들이야. 석근이 넌 거기 뛰여들어 스스로
《그럼 인표는 대체 무엇이야, 천사야, 신선이야?》
《날 그렇게 모욕하지 말게. 천사나 신선이 고민이 있나, 적어도 나는 고민하네.》
석근은 껄껄거리고 웃었다. 도대체 인표의 옷차림부터가 우스웠다. 프랑스학생들의 식이라 하면서 옷은 로동복같은 허술한것을 입고 다니면서도 구두만은 최신류행의 고급을 뽐낸다. 그는 국적없는 이방인같이 보이는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알았다.
《지성문제를 두고 고민하네. 과학적지성은 보편적인 세계문명을 건설했는데 륜리적지성은 아직 배타적인 민족주의굴레에 갇혀있어. 편협한 인종적편견의 사슬에 얽매여있단 말이야. 독선적이고 종파적의식의 작용으로 서로 무자비한 집단적리기주의의 이발을 갈고있어. 저기 저 새납소리와 나팔소리가 바로 그것이다.난 아마 군들이 무엇인지 몰라도 서로 대립하고있는걸 보고 그걸 느꼈네. 지금 감옥에 있는 준호나 너들같이 착하고 선한 사람들도 한번 거기 걸리면 그렇단 말이야. 파스칼의 말을 빌면 인간은 우주의 영광인 동시에 우주의 쓰레기라고 했는데 우리들은 영광이라기보다 쓰레기야. 그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는 프랑스문학과 학생으로서 어학에 재능이 있는 학생이였다. 지금 말한 파스칼과 같은 프랑스고전도 원서로 읽을만큼 외국어에 실력이 있다. 한때는 로어에도 관심을 가져서 쁠레하노브의 《예술론》을 사전을 찾아가며 읽다가 친공사상의 혐의를 받고 포기해버릴 정도로 그의 의지는 빈약했다.
상춘은 그의 말에서 일부 학생들사이에 류행하고있는 세계주의사상의 요소를 보았다. 협소한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적수준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그들은 명백히 민족허무주의자들로서 우리 민족의것은 무가치하며 외국의 특히 서유럽의것은 모두 훌륭한것으로 보았다. 홍인표의 복장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있었다.
그러나 상춘은 홍인표의 노력을 평가했다. 어학의 실력도 그 노력의 결과지만 그는 유럽학자들의 학문을 순전히 화제에 올리기 위해서도 때로는 한 보름씩 독서에 열중하는수도 있다.
아직 학문적체계가 선것도 아니고 다만 잡다한 지식이 머리에 차있을뿐이였다. 말하자면 그나름으로 무엇인가 진리를 찾고있는것이며 현실을 부인하고있다.
상춘은 그 노력이 아무때고 방향만 옳게 들어서면 그도 민족적량심에 눈뜰 날이 있을줄 믿는다. 상춘이 죽어라 하고 밤을 패서 독서를 하는것도 그들에게 지지 않기 위한 경쟁심이 없지 않기때문이였다.
《내 말이 어때?》
홍인표는 자기 말이 아무러한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고 공중에 날아가버리자 상춘을 보고 물었다.
《네가 말하는 지성을 바람이라 하자. 바람은 눈으로 볼수 없는것이고, 어떠한 물체, 가령 조그만 갈대라도 좋으니 거기 부딪쳐야 소리를 내는건데 그 물체를 넌 생각해봤나? 난 그 물체를 현실이라고 보네. 너나 내가 살며 호흡하는 우리 현실…》
인표는 깜짝 놀라며 일어서기까지 했다.
《그걸 어느 책에서 봤나?》
《현실에 관심을 가지면 할수 있는 말이지.》
《시같은 말이군.》
그는 상춘의 말을 그의 좋은 기억력으로 거의 틀림없이 반복할수 있었다.
《사람은 미쳤어.》
석근이 비웃었다.
《이 속물, 저 민주당으로나 가거라.》
운동장 한쪽에서는 조광래가 준호를 위해서 모금을 하고있었다.
그는 룡산제작소의 오랜 기계공의 아들로 력사학과에 다니면서도 아버지의 피를 받았는지 손재간이 있어서 라지오, 시계 같은 정밀기계를 곧잘 수리할만큼 찬찬한 맛이 있어 뒤에서 남이 미처 생각지 못하는 일을 잘한다.
찬찬한 성질만이 아니였다. 찬찬한 속에도 준호에 대한 대학당국, 문교부 처사에 대한 반항이 그것을 생각케 한것이였다. 대학에서는 쫓아내지만 학생들은 그를 놓을수 없다는 의사표시였다.
상춘이 옆으로 가자 광래는 모은 돈을 보였다. 의외로 적지 않은 돈이였다.
《많이 모았구나.》
《이런 돈이란 액수의 다과가 문제 아니야.》
《그럼?》
《낸 학생들의 머리수가 중요한거야.》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상춘은 감탄했다.
《몇사람이나 되게?》
《백명도 더 넘을거야. 적어보게, 이담에 다 쓸데가 있을테니.》
광래가 하나하나 기억나는대로만 꼽았어도 50여명이나 되였다. 그 이름들가운데는 한왕렬도 있었다.
그는 상춘에게 핀잔도 맞았고 또 학생들의 분위기로 보아서 저도 동정하는체 모금에 참가함으로써 정체를 숨긴것이나 광래나 상춘은 그 가면을 알지 못했다.
《돈은 못 내고 내 손만 잡아주고 간 학생들도 적지 않아. 학생들의 동향이 어디로 가고있다는걸 알수 있어.》
상춘은 어쩐지 그날 종일 집에서부터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은 트이는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