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굽이치는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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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을 랍치하여 학생들의 계획을 알아내려다가 살해직전에 그만 놓치고만 《HKP》에서는 왕렬을 시켜 기어이 민통련의 배후를 탐지해내도록 했다.

그러나 왕렬은 학생들이 판문점으로 갈 날자밖에는 알아내지 못했다.

5월 20일!

그 날자는 지체없이 권세환에게로, 그에게서 다시 패틀리에게로 알려졌다.

패틀리는 ORS(미중앙정보국 남조선지부)시절부터 첩보활동을 하던 CIA 지부책임자이며 장면의 정치수석고문인 드날드 워터커에게 매일같이 제가 수집한 새로운 정보를 보고했다.

워터커는 또 워터커대로 매일 매 시간 워싱톤으로 타전을 했다. 케네디행정부는 이미 대책을 취하고있었다.

《한국》에서 통일기운이 격앙된 5월에 들어서면서 케네디는 CIA국장 알렌 델레스를 여러번 불러들였다.

《한국》사태에 대한 국무성, 국방성, CIA고위보좌관들의 구수밀의가 거듭되였다.

알렌 델레스는 이 구수밀의들에서 이미 준비된 CIA의 계획안을 케네디에게 보고했다.

케네디는 꾸바에서의 참패가 《한국》에서도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가 걱정을 하면서도 CIA의 계획을 승인했다.

드디여 CIA본부로부터 서울로 날아가는 전파암호 《5. 16》.

1961년 5월 16일.

그날의 워싱톤의 날씨는 유난히 맑았다. 한낮도 기울어 오후 4시 30분이 되였다.

미국무성 대부분의 관리들은 퇴근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극동담당 차관보실을 중심으로 6층사무실 《한국》과 직원들만은 백악관의 지시밑에 초조히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극동담당 차관보실에는 4. 19당시 주《한》미국대사로 있다가 귀임한 맥코노이도 책상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그는 책상에 턱을 고이고 앉아있다가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서 넓은 방안을 뒤짐을 지고 왔다갔다해보기도 한다. 무엇인가 골똘하게 기다리는것이다.

그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5월 16일 워싱톤시간으로 오후 4시 30분.

한강변에서 울린 요란한 총성이 드디여 날아든것이다. 서울시간으로는 5월 16일 새벽 3시 30분이였다.

《<한국>에서 군사쿠데타》, 이 급보는 극동담당 차관보실에서 백악관지하실에 있는 안보담당 보좌관실을 통하여 케네디에게 보고되였다.

케네디는 아무것도 모른다는듯이 안보담당 보좌관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힐문을 하였다.

그의 힐문은 다시 국무성으로 전달되였다.

서울로부터는 계속 급보가 날아든다.

《쿠데타참가한 병력 3천명.》

케네디가 작성한 각본대로 백악관도 CIA도, 국무성과 국방성도, 서울의 주《한》미대사관도 긴장속에서 주시하는 가운데 연극은 진행되고있었다.

5. 16군사쿠데타.

분계선의 장벽을 허물고 조국통일을 하고저 달려가려는 학생들의 길을 총검으로 가로막았으며 또다시 땅크와 대포의 포신으로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와 통일의 절규를 질식케 한 군사쿠데타는 이미 오래전에 CIA가 작성한 음모에 따라 수행되였던것이다.

세계제패의 야망을 품고있는 미국에 있어 남조선은 아시아의 발판이고 늙은 독재자 리승만은 가장 믿음직한 노복이였다. 그러나 모든 매국노가 그렇듯이 리승만은 인민의 원한의 대상으로 되였고 남조선에서는 통일의 기운이 성숙되여갔다. 미국은 불안하였다.

남조선을 잃는다는것은 곧 아시아를 잃는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이 위기를 모면하며 남조선땅에서 식민지통치를 유지할것인가.

미국은 전전긍긍하면서 그 출로를 찾아 골을 싸쥐고 모대기였다.

그러던차에 1958년초 미국의 극동전문가로 알려진 캘리포니아대학 교수에 의하여 남조선에서의 《정권》은 《군사정권》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계획이 미국무성에 정식 제출되였고 그것을 기화로 1959년 봄부터 미국회에서 절박한 실천문제로 론의되기 시작하였다.

1958년말에 미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플브라이트도 어느 한 보고에서 《<한국>에서의 정치적위기는 점차 커가고있으며… 민주주의제도는 시련을 겪고있고 정치적불안정과 위협이 커가고있다.》고 하면서 《리승만<정권>의 정당정치가 실패할 경우에 군인정치에 의한 교체를 생각해야 된다.》는것을 정식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미국의 정치가라는자들에 의하여 《한국》을 무대로 가장 교묘하게 위장된 군사쿠데타각본이 완성되였다.

쿠데타음모는 1960년초부터 CIA에 의해서 실천에 옮겨졌다. 이 음모에 동원될 남조선의 반동군인들이 극비밀리에 선정되였으며 《거사》의 기본계획이 작성되여갔다. 미국의 비밀정보원의 하나였던 박정희와 김종필은 서울과 부산에서 CIA의 지시에 따라 이른바 동지규합운동을 은밀히 진행해왔다.

그러나 미국의 이 계획은 CIA의 음모보다 앞선 4. 19봉기때문에 기회를 잃었으며 다음번 기회를 노릴수밖에 없게 되였다.

미국은 4. 19후에 와서 이 계획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시켰다. 196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케네디의 정책작성자들도 한결같이 남조선에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다는것을 강조했다. 케네디의 아시아정책수립에서 큰 역할을 논 라이샤원은 《<한국>의 미래를 계승할 사람들은 전쟁마당에서 자라난 새로운 젊은 군인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것을 기대하는 사람의 하나이다.》라고 말했으며 역시 케네디의 대외정책수립에서 큰 발언권을 가지고있는 마이켈몽그교수도 거듭 《기근과 분렬에 골몰하는 <한국>과 급속히 발전하며 단결되고있는 북한과를 접촉시켜서는 안된다는 필요성》과 《<한국>정치를 위탁할수 있는것은 우의 독재체계밖에 없다는 확신》을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해외활동 즉 타국에 대한 침략, 파괴활동의 기본력량을 꾸바에 대한 무력침공과 남조선에서 군사쿠데타를 추진시키는데 집중했다.

남조선에서의 쿠데타조작을 위해서 당시의 CIA 차관이였던 리챠드 빗세르가 이를 책임지고 추진시켰으며 서울에서는 CIA 《한국》지부 책임자 워터커와 미8군정보부장 쿨대령 등이 지휘했다. 패틀리는 그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은 직접 박정희나 김종필 등과 련계를 가지고 일선에서 지휘하던자들에 불과하다.

쿠데타추진의 총책임자는 미8군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미국대사 마샬 그린이였다.

이렇게 준비해오던 미국은 드디여 거사일을 4. 19 1돐이 되는 날로 예정했으며 거사방도로서는 장면《정부》가 인민들의 투쟁을 무력으로 진압할 목적밑에 꾸며낸 비둘기작전에 끼여들기로 했다. 그것은 이 작전이 쿠데타에 필요한 군대의 동원을 쉽게 해줄뿐아니라 장면《정부》의 있을수 있는 반발도 막을수 있기때문이였다. 한편 매그루더는 비둘기작전에 동원될 제6관구사령부의 참모장과 작전참모로 쿠데타음모에 선발된 김재춘과 박원빈을 배치했으며 제1공수전투단 단장과 제33사 련대장들도 박치옥, 리병엽 등과 같은 인물들로 바꾸었다.

이와 함께 미국은 저들의 충복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지휘하는데 편리하도록 주의를 돌렸다. 박정희는 제2군 부사령관으로 배치되였다.

비둘기작전의 주동병력은 영등포주재 제6관구사령부산하 부대였다.

이 제6관구사령부는 후방부대의 총괄사령부로서 대구주재 제2군사령부의 지휘를 받게 되여있다.

미국은 4. 19후 최영희중장의 후임으로 륙군참모총장으로 있던 최경록을 제2군 사령관으로 배치했다. 제2군 사령관으로 있는 장도영을 륙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하고-

이 인사이동에 최경록은 불만이였다. 이것을 포착한 미국은 그를 즉시 류학시키겠다고 워싱톤으로 데려갔다.

결국 제2군 사령관의 자리가 비게 되여 부사령관인 박정희가 제 마음대로 쿠데타군을 지휘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1961년부터 남조선에서의 쿠데타준비는 4. 19 1돐이 되는 날을 목표로 진행되였다. 미국은 1961년 2월초까지 기본적으로 쿠데타참모부격인 중앙조직을 완성하고 2월 중순부터는 륙군본부세력과 지방군을 유인하는 길에 달라붙었다.

CIA의 지시를 받는 박정희와 김종필은 먼저 제2훈련소의 최홍해를 통해서 륙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끌어들이고 4월 10일에는 미국의 승인을 얻었다. 장도영을 나꾸는것으로 하여 《국군》내에서의 쿠데타의 조직은 기본적으로 완성되였다.

미국은 남조선땅에서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다른편으로는 박정희, 김종필이 실패할 경우 대신할수 있는 예비부대를 직접 미국에 데려다가 양성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송요찬, 정일권, 최영희 등 퇴역장성들을 워싱톤에 불러다가 《대학연구생》이란 이름밑에 쿠데타에 대한 전략전술과 군정기관이 실시할 정책문제 등에 대해서 연구하게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조선내 각 《정부》기관들로 하여금

① 쿠데타를 성공케 하며

② 계엄령기간 진보세력을 철저히 탄압구축하고

③ 군중의 지반을 공고히 할수 있는 진압대책 등을 강구케 했으며 이러한 집행기관으로서 남조선에 중앙정보부를 설치할 안을 3월까지 완성하게 했다.

이와 같이 CIA에 의하여 추진돼오던 서울에서의 음모는 마지막단계에 이르렀다.

한편 4월 14일 서울 약수동에서는 쿠데타에 동원될 군인들의 마지막회의가 열리였다.

그러나 쿠데타의 거사일은 예정된 4월 19일이 아니라 무기연기로 되였다가 5월 16일로 바뀌였다. 워싱톤의 지시였다. 그것은 4. 19정세가 뜻밖에도 너무나 조용했기때문에 소란을 피울수 없는데 원인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학생들의 침묵시위로 통일의 기운은 더욱더 거세차게 높아가고있으므로 쿠데타음모자들은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학생들이 판문점으로 가는 날을 탐지한 끝에 5월 16일로 정해놓은것이다.

이와 같이 5. 16쿠데타는 박정희나 김종필이 일으킨것이 아니라 바로 미국의 흉책으로 생긴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미중앙정보국장은 CIA 텔레비죤방송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재임중 CIA 해외활동에서 가장 성공한것이 이 혁명(5. 16쿠데타)이였다. 미국의 일부 지도자가 지지한 장면내각은 부패하고있었으며 리승만<정권>을 타도한 민중의 기대에 응해주지 못하고있었다. 위험한 일이였다. 만일 미국이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있었더라면 민중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걸려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학생)들을 지원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미국은 5. 16쿠데타음모의 장본인이며 조직자이다.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 미국은 교활한 수법으로 자신을 위장하기에 급급했다.

5월 16일에는 주미대사 장리욱박사가 국무성을 방문하여 《장면<정권>에 대한 지지성명을 즉각 발표해달라.》고 애원했으나 국무성은 침묵을 지킬뿐이였다. 주《한》 미대리대사 마샬 그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과 24시간 련락교환을 하고있던 케네디정부는 벌써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고있었기때문이다.

국무성관리들은 《장총리는 앞으로 정치적장래가 없다.》는 극비보고를 케네디에게 전했다.

케네디는 국무성, 국방성, CIA의 고위보좌관들과의 밀회를 거듭한 끝에 《윤보선<대통령>과 협의하여 장면내각의 조속한 사퇴와 신혁명내각을 구성》할것을 서울에 급전했다.

이 급전은 CIA 《한국》책임자이며 장면의 정치수석고문인 워터커에게 날아갔다.

워터커는 즉시 장면에게 《사퇴결의서》를 내도록 했다.

한편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은 쿠데타군에게 제30사단, 제33사단, 공수부대와 5개 전방 헌병중대의 작전통수권을 넘겨주었다.

또한 매그루더는 쿠데타군에게 반항할 기세를 보이고있는 제1야전군의 서울에로의 진출을 막기 위해 미아리고개일대에 미군을 풀어놓았다.

때를 같이하여 이전 미제8군 사령관이였던 《한》미재단 리사장 밴플리트는 《<대한민국 국군>의 성의를 가진 국민의 대표로서 지지한다.》고 공공연하게 성명했다.

진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쿠데타의 모의사실을 《전연 모르고있었다.》고 딴전을 부렸다. 심지어 그들은 정변발생후 오래동안 군사쿠데타를 지휘한 사람이 누구이며 쿠데타의 목적이 무엇인지 또는 그것이 앞으로 정치적으로 어떤 방향을 취해나갈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고 발뺌을 했다.

미국은 일단 쿠데타를 일으켜놓고는 이처럼 바보임을 자칭해나섰을뿐아니라 심지어 매그루더와 마샬 그린을 시켜 쿠데타를 반대하고 장면《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까지 내게 했다. 또한 그린은 16일 저녁 사람을 시켜 윤보선을 찾아가 《왜 <대통령>의 이름으로 쿠데타에 참가한 반란군을 진압하지 않았는가?》고 꼬집기까지 했다.

그러나 워싱톤은 이것으로써 안심할수는 없었다. 쿠데타의 배후조종자들인 마샬 그린, 매그루더, 워터커를 남조선에 그대로 두면 후일에도 그 사실이 루설될 우려가 있기때문에 케네디는 마샬 그린을 소환하고 그 후임으로 쌔뮤얼 버거를 그리스의 아테네로부터 소환하여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했으며 매그루더의 후임으로 멜로이를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패틀리는 정체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아직 둬두기로 했다.

장면의 정치수석고문 워터커의 소환문제를 둘러싸고 워싱톤은 비상한 《재능》을 발휘했다.

쿠데타는 박정희가 단독으로 일으킨것이 아니고 그것도 반미적인 쿠데타인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워터커에게 《용공분자》라는 상표를 붙여 《추방》하는 연극을 꾸몄던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로버트 케네디가 말하는것처럼 박정희에게 《민족적구호와 독자적로선을 표면에 내걸》게 했다.

그래도 또 미국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5. 16후 근 두달이 가깝도록 이미 오래전부터 5. 16배후의 강자로 믿어온 박정희가 아직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장도영이 최고회의의장으로 있는 사실로 해서였다.

케네디정부는 장도영이 초기에 동요했다는것, 쿠데타저지를 청원했다는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장도영의 처리문제를 신임 주《한》 미국대사 버거가 케네디로부터 위임받았다.

6월 28일 서울에 날아든 버거는 즉시로 박정희와 몇번이고 밀회를 거듭했다.

워싱톤의 정보망 특히 CIA는 7월초에 남조선에서 또다시 일대 변화가 있으리라는것을 행정부담당 관리들에게 사전에 통보했다.

버거가 온 후 중앙정보부가 강화되고 군내부의 《반혁명》에 대한 일대 숙청이 벌어졌다.

7월 3일-

전 륙군참모총장이며 최고회의의장 장도영을 비롯한 26명의 장성급군인들은 《혁명과업을 방해했을뿐아니라 반혁명을 모의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였다.

이때에야 비로소 케네디행정부는 물론 CIA, 주《한》 미대사관에서는 《한국》군사쿠데타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배를 들었으며 안도의 숨을 쉬였다.

이제야 박정희에게 실권이 장악된것이다.

검은색안경을 낀 메마르고 작달막한 무명의 장성 박정희는 CIA의 줄을 잡아타고 4. 19의 피로 물든 옥좌에 몸을 파묻고 총칼을 휘두르며 민중의 머리우에 군림했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미국은 쿠데타조직의 장본인으로서의 자기의 정체를 이처럼 가리우려고 애를 쓰는가? 왜 미국은 저들이 쿠데타를 조직하고도 그것을 반대하는 성명을 낸다 어쩐다 하고 소란을 피운것일가?

그것은

① 만약 미국이 군사정변을 지지한다면 내정간섭의 책임을 면할수 없으며

② 미국이 조작했다고 스스로 증명하는것으로 되며

③ 만약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에는 꾸바에서 실패한 수치에 새로운 수치를 거듭하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이 해답만으로써는 사태의 내막을 다 말했다고 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때문에 미국이 《한국》에서의 반동적인 군인들의 쿠데타를 필요로 했는가 하는것이 다 밝혀지지 못했기때문이다.

미국 UPI통신은 미국의 표리부동한 태도가 어디에 근원하고있는가를 잘 말해주고있다.

《… <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기아를 볼수 있었고 학생들은 계속 불안상태에 있고 기업은 몰락일로를 걷고있었다. 분명 마지막수단은 분렬된 반도의 회담에 의한 통일을 지향하는 놀랄만 한 경향이였다.》

사실 남조선정세는 문자그대로 위기일발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처해있었다.

장기간의 폭압과 극심한 빈궁에 시달려온 국민들은 더는 참을수 없었다. 4. 19봉기가 일어났고 인민대중은 리승만《정권》을 거꾸러뜨렸다.

장면이 《정권》의 뒤를 이었으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새 사회를 요구하는 인민대중의 파도와 같은 진출을 억제하지 못했다. 인민들의 반《정부》투쟁은 분명히 반미운동으로 타번졌으며 실력으로 남북교류와 남북통일을 실현하려는데까지 이르렀다.

학생들은 북의 학생들과 만나고저 판문점으로 달리고있었다.

만일 미국이 이러한 《한국》사태를 보고만 있으면 그들의 말대로 《수십억딸라의 미국돈이 뿌려진 <한국>땅을 잃을것만은 명백》한 일이였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일본의 고립을 촉진시키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언권과 동맹국을 몽땅 잃게 될》 사태를 조성하게 되는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미국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한국>을 종전처럼 확보하기 위해서》 날뛰는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민중의 반미구국투쟁을 무력으로 진압할 방침을 결정하고 장면《정부》에 이른바 비둘기작전이라는것을 작성케 했다. 이 탄압계획에 의하면 장면《정부》는 인민들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헌병 5개 중대와 전방부대 13개 사단을 동원하기로 예견하고있었다.

미국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이 계획을 작성하기는 했으나 이 계획의 실행을 주저했다. 사실상 이 계획은 민중의 노여움을 더 자아낼수 있으며 사태를 악화시킬뿐이다. 더욱 꺼림직한것은 장면《정부》의 취약과 무능이 이 조치를 감당할수 없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은 다른 방법 즉 《민중의 투쟁진출에 편승해서 스스로 장면<정부>를 붕괴시키고 공고한 반공세력체인 일부 신임할수 있는 군부세력에 <정권>을 넘기는 <예방혁명>을 조작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던것이다.

5. 16쿠데타를 전후해서 미국이 보여준 연극은 실로 일등가는 명배우의 연기를 방불케 하고있다.

우선 미국은 쿠데타모의의 첫 과정에서 박정희, 김종필 같은 극히 적은 인원만 상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박정희, 김종필이 골라서 나꾸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것을 극히 회피했다.

심지어 CIA는 CIC 서울지부에 지시해서 박정희에게 미행까지 붙이는 연극을 놀았으며 박정희에게 주는 일체 지시는 장대화라는 CIA 고급특무를 시켰다.

그것은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하고 조작한 사실을 가리우고 남조선인민들뿐만아니라 쿠데타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박정희의 독자적인 행동이라는 환상을 조성할 타산에서 그러한것이다.

이와 같은 음모와 모략, 용의주도한 비밀과 연극으로 직접 음모에 참가한 본인들조차 모르게 진행된 5. 16의 정체를 학생들이 알수는 없었다.

《라침판》도 그것을 몰랐다.

상춘과 준호는 그들의 정치적감각으로 미국이 관계했으리라고 추측만은 굳게 가졌으나 어디까지나 추측일뿐 증거는 갖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우의 사실의 일부만이라도 알았더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재빨리 내막을 폭로하는 조치를 취했을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5. 16쿠데타의 배후가 누구냐고(그것은 지독한 분노였지만) 몹시 알고싶어했기때문이다. 대중이 알고싶어하는 문제에 해답을 주는것은 《라침판》의 임무이기도 하니 말이다.

《라침판》에서는 앞에 닥쳐온 새로운 엄중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대책작성에 바빴다. 경찰과 군인들의 추적을 받으면서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며 조직을 수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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