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영원한 4 월

8

 

시간도 공간도 완전히 차단된 굴속, 광선 한가닥 새여들지 않았다.

동공은 확대될대로 되였지만 어둠이 쏟아져들어올뿐이였다.

상춘은 시각보다도 후각과 촉각이 더 고마운 감각기관이였던가 생각해본다. 평상시에야 후각이나 촉각쯤 그 존재를 의식해보는 일이 없지만 그는 지금 갇히여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그것으로밖에는 달리 판단해볼 아무런 수단도 없었다.

시간이 어느때나 됐는지 모른다.

《배꼽시계》라는 속어가 있다. 허기증으로 때를 짐작한다지만 그것도 정상적으로 세끼를 먹을 때 이야기다. 허기를 지나 벌써 공복감도 마비돼버린지 오래였다.

해가 졌는지, 날이 밝았는지, 외계와 완전히 차단된 그 형편으로써는 아무것도 알 도리가 없었다. 답답한 심리로 말하면 벌써 며칠도 지났을것만 같았으나 그것도 짐작에 지나지 않았다. 또 여기가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다만 한가지 굶어서 예민해진 코에 점점 강하게 풍겨오는 생흙내로 보아 이곳이 땅속지하실이라는것만을 알수 있었다. 상춘은 그속에서 얼마를 지냈는지 모르지만 그속의 형편만은 알대로 알아두었다.

벽은 돌이였다. 넓이는 두칸가량의 장방형, 높이는 서서 발돋움을 하면 손끝이 날카로운 돌의 모서리에 닿는다. 암벽을 뚫고 만든 지하실인가. 생흙내만이 계속 머리가 아플 지경으로 풍긴다. 어느 산속이라고 판단해본다.

상춘은 랍치돼온것이다.

놈들은 상춘을 그속에 쓸어넣고는 한번 와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민통련의 배후와 앞으로 무엇을 하느냐 물었다. 그것만 말하면 당장이라도 놓아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상춘은 모른다고 잡아뗐다. 사실 민통련의 행동계획은 전국학생련맹이 결성된 후에야 수립되는것이다. 《라침판》이나 전국학생련맹결성위원회에서도 여러가지 계획을 세우고있지만 어디까지나 복안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할수 없다. 더구나 랍치해다가 묻는 마당에 있어서야, 묻는 놈들이 어리석었다. 놈들은 때리고 위협했다. 여기는 지옥문턱이니 살고싶거든 말하라고, 상춘은 일체 함구로 대답을 했다. 대답을 거절했으니 그와의 대화가 이제는 소용없고 다만 그의 생명만을 빼앗아 지옥으로 호송하겠다는 뜻인가, 그것도 총으로 쏜다든가 얼마든지 방법이 있으련만 그 캄캄한 지하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통을 받다가 제풀에 지옥으로 가라는 가장 잔인한 살인방법을 적용하는것인가, 놈들로서는 넉넉히 함직한 잔인성이였다.

채남과 함께 효창공원근처에 누구를 찾아갔다가 당한 일이였다. 밤에 주소만 가지고는 찾을수가 없어서 채남이 어느 가게에 집을 물어보러 가고 상춘은 어두운 길에서 그를 기다리던 잠간사이의 일이였다.

상춘의 옆구리에 별안간 칼이 들어왔다. 미군의 예리한 단도였다. 상춘은 그 순간 정신이 아뜩했다. 어떻게 손쓸 사이가 없었다. 상춘은 지금도 그것을 죽도록 후회한다. 자기의 정신력이 그렇게도 보잘것없었던가, 자신이 극도로 미웠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대항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찔려죽였었든가 또는 랍치만은 당하지 않고 이 욕된 감금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춘은 그때 아뜩했었다. 순간이였다. 놈들은 상춘의 입을 솜뭉치로 틀어막으며 몸을 들어 차에 싣고 밤거리를 달렸다. 자동차에는 그런 장치가 되여있었는지 관같은 궤짝속에 상춘을 쓸어넣고 뚜껑을 닫아버렸다.

상춘은 캄캄한 굴속에서 빠져나갈 방법만을 찾았다. 아무데도 그럴만한 틈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느때나 됐는지 잠간 잠이 들었을 때 발자국소리가 나고 쇠문창살사이로 새로운 공기가 밀려드는 감촉을 느꼈다. 철문을 두드린다.

상춘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낮추는것 같아서 싫었다.

철문을 걷어찬다. 그래도 상춘은 모르는체 했다. 놈은 전지를 비치였다.

《자식, 죽지도 않고 송장노릇을 하는구나. 이거나 처먹어라.》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무엇인가 던졌다.

《빵이다. 처먹엇…》

《불을 켜라. 그리고 날 내놔라.》

《나가는 열쇤 네가 가졌지 우린 안 가졌다.》

《…》

《네스스로 열쇠를 찾을 때까지 몸을 돌보며 그거나 처먹고 생각해라.》

《날 어떻게 하자는건지 말하기 전엔 먹지 않는다.》

《여긴 지옥문턱야. 어제 한마디만 바른대로 말했더람 나갈수도 있던걸 넌 벌써 인간명부에서 지워진 놈야.》

《비겁하다.》

《그건 다 인간사회에서나 써먹는 말이구 지옥에선 사치스런 말이다.》

놈은 가버렸다. 상춘은 허망치고 손에 닿는대로 빵덩어리를 집어던졌다. 동굴의 어딘지 그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릴뿐 또다시 암흑이 그를 압착했다.

상춘은 자기가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기에는 너무나 인생이 짧았고 한 일이 너무나 없었다. 그렇다 하여 산다는 담보도 따로 없었다. 신경만 자꾸 날카로와왔다. 다른데 굴이 또 있어 상춘외에도 랍치돼온 사람이 있는지 지심깊이서 울리는듯 한 신음소리가 가끔 들렸다. 제일 괴로운것은 정지된 시간관념이였다. 짐작에는 이틀밤과 이틀낮을 지낸것 같았으나 놈의 말을 미루어보면 어제 들어온것 같기도 했다. 괴로운 공복감도 몇고비 넘겼다.

정신만 맑아왔다. 앞으로 닥칠 사태에 대해서도 초월하는 심경으로 단념하려들었다.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최후순간까지 대항하리라고 마음다지였다.

어머니를 줄곧 생각했다. 어머니의 생애가 바로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락망하지 않고 살아온 그것이였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제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도 그는 생각했다. 한편 그는 고등학교 한문시간때에 배운 《조문도석사가》(아침에 진리를 깨달았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는 뜻)라는 선규가 죽을 때 말했다는 구절도 회상했다. 그만치 진리를 깨닫는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상춘은 이미 학생들과 자기가 나가야 할 길을 알았다.

통일하는 길, 민족전체가 다 함께 잘살아갈수 있는 길, 그는 구태여 다른것을 생각하려들지 않았다. 초월해서가 아니였다. 하도 많이 밀려드는 일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정신을 집중시켜 보았다.

통일된 강토, 북에 건설된 공업력과 튼튼한 자립경제의 힘으로 남의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려는 설계도-그는 작년 2월 공화국북반부에서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더욱 촉진시킬데 대한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8차회의에서 채택한 《남북조선의 경제문화교류와 협조를 실현하며 남조선에서 민족경제의 자립적발전을 도모할데 대한 의견서》를 기억에 더듬어보았다.

남조선의 농업을 부흥발전시키고 인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며 민족공업을 건설하고 주택건설을 대대적으로 진행한다. 남북간의 경제협조와 통상을 실현할뿐아니라 과학, 문화, 교육, 보건분야에서 서로 교류하고 협조한다. 한마디로 북에 건설된 강력한 자립경제에 토대하여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 원대한 설계도였다.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제안이였던가. 상춘은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흥분한다. 한편 여러가지 추억과 상념도 조수같이 밀려들었다. 채남도 그리웠다. 그렇게 사랑하면서 한번도 마음놓고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 일이 없었다. 상춘이 랍치되는 장면을 그가 보았을가, 목격하고서 자동차를 소리치면서 따라오다가 기절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혹은 가게에서 찾으려는 집을 알고서 길까지 와서 보이지 않는 상춘의 이름을 부르며 밤새도록 효창공원을 헤매다가 집에까지 가서야 비로소 행방불명인줄 알고 소동을 일으키지나 않았을가, 그도 상춘과 꼭같이 며칠밤을 자지 못해서 상춘보다 더 얼굴이 상해다닐지 모른다.

고향사람들도 생각해본다. 지지리도 가난하기만 한 남조선의 농촌, 그들이 살아나갈 길은 이미 작년 2월에 최고인민회의의 의견서 그것으로 활짝 열렸던것이다. 봉건의 멍에를 부시고 농민을 해방하는 토지문제의 정확한 해결, 공화국북반부의 원조로 농촌을 구제하고 건설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설계도.

이 땅의 산과 산이 새로운 단장을 하고 현대적인 공장들이 일어서고…

전지불빛을 번쩍거리며 누구인가 굴속을 들어오다가 철문가까이 와서 질겁을 하며 놀랐다.

상춘이 집어던진 빵덩어리를 캄캄한 속에서 밟고 제풀에 놀랐던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가두어놓고 제놈들스스로가 겁에 질려있는것이다.

상춘은 정신적으로 모멸이 가는것이였다.

《불을 켜라.》

여전히 불을 요구했다.

《불?》

《불을 켜주마.》

두놈이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놈 다 색안경을 꼈다. 철저히 자기들의 정체를 위장하는 모양이였다.

《오늘은 너와 이야길 해보겠는데 그동안 잘 생각했나?》

《난 나갈 생각밖에 한게 없다.》

《좋은 생각을 했다. 그래 나가기 위해서 뭘 생각했나 들어보자. 자 불을 켜주마.》

두놈중의 땅딸보가 상춘과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앉으며 제 앞가까이에 전지를 놓았다. 광선은 상춘에게로만 쏟아져 그의 표정과 동작을 비치며 그자들의 모양은 반사되는 빛으로만 희미하게 드러냈다.

《얘기를 하자. 바깥은 정향꽃이 한창이다. 계집들의 옷은 얇아만 가고.》

《난 나갈것밖엔 생각한게 없다.》

《네가 이렇게 허세만 부리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먼저 네게 알려줄건 널 살려주기 위해 얘기하자는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젠체 주둥이만 깐다면 네편에서 이 지옥의 문을 굳게 닫는것으로 된다.》

《그래, 나한테 요구하는게 뭐냐?》

《인제 와서보니까 네 정신력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지옥삼정목에서 벌써 혼이 빠져서 기억력도 없어졌니?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민통련의 배후와 계획을 알자는거다.》

《모른다.》

《죽음앞에선 알겠지?》

《그따위 유치한 위협은 걷어치워라!》

《위협?》

한놈이 벌떡 일어나며 상춘의 목을 조른다. 상춘은 반항을 하다가 기절하고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겨우 의식이 회복되여 손을 더듬어보았을 때 한놈이 말했다.

《정말 너 이래기냐?》

《구데기같은 놈들!》

《나종에 후회하지 말아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통일되는 날 이 땅이 넓다 해도 네놈들의 설자리는 한치도 없을 때 후회는 누가 하나 두고보자.》

《닥쳐, 이 새끼야.》

놈들의 발길질이 마구 상춘의 몸에 가해졌다.

상춘은 실신한 다음 또 며칠을 지났는지 몰랐다. 밤과 낮의 구별이 없는 암흑이 지속되였다.

어느때 그들이 들어왔다.

《너 정말 죽구싶으냐 살구싶으냐. 바른대로 말해라.》

《너 같은 인간쓰레기들과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좋다! 흥, 그래두 빵은 먹었구나. 처음엔 생불이 될듯 던지더니, 요컨대 큰소린 치지만 너도 한개 인생이야. 살고싶겠지. 인젠 나와 얘기가 통한다. 자, 배후가 누구라는것과 접선의 련락망을 여기다 적어라.》

땅딸보는 미국제만년필과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상춘에게 내밀었다. 상춘은 그자의 손을 혼신의 힘을 주어 쳤다.

《아무리 개짓을 해도 인간의 가치를 알아라.》

땅딸보는 그래도 만년필을 거두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네 만용을 누가 보고 박수쳐줄 사람도 없다. 그러지 말고 살구멍이나 찾아라. 인간으로 돌아가란 말이다.》

《더럽다!》

상춘은 침을 뱉었다.

땅딸보는 손수건으로 제 얼굴의 침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널 살려주겠다는 사람을 네가 아무리 모욕하려들어도 그건 모욕이 되지 않고 난센스(리치에 맞지 않거나 평범하지 않은 말 또는 일)로 된다. 허지만 우리도 인간이야. 참는것도 한도가 있지. 이 자식아.》

그는 벌떡 일어나며 상춘의 뺨을 치고 가슴을 발길로 질렀다. 그리고 껄껄거렸다.

《자식이 굶더니 검불같구나. 동정한다. 생각해봐라. 채남이가 누구냐?》

상춘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땅딸보를 보았다. 그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입안이 대번에 말라드는것 같았다. 혹시 그도 랍치돼와서 여기 어디 굴속에 있지나 않는가.

《널 기다린다. 아까운 청춘이. 봄이 무르익는데도 으시시 추워서 땅만 보고 다녀.》

《듣기 싫다.》

상춘은 채남이 모욕을 당하는것만 같아서 소리를 질렀다. 몸은 떨렸다.

《왜 내 말이 거짓말같니? 사진을 보여줄랴?》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에 싼 사진을 꺼냈다.

《보고싶으냐?》

《악마!》

《솔직히 보고싶다고 해라. 난 너의 그 약한 인간적인 면을 사랑한다. 그러나 몸에 해롭다. 여기서 사진을 보는건. 배후와 접선자만 대면 나가서 만날걸. 밀회하는 장면을 사진찍어주마.》

사진이 정말 채남의 사진인지 그놈은 펴보이지는 않고 도로 주머니에 넣고 나가버렸다.

놈들은 외람하게도 인간적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들이 뜻하는 인간이란 관능적인 생명을 위하여 무슨짓이라도 감행하는 동물적인 면을 말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상춘은 그것을 인간이라고는 알지 않았다. 인간의 고귀한 사명을 위하여 생명을 기꺼이 버릴줄도 아는 존재가 비로소 인간이라고 믿었다.

상춘은 놈들의 요구와 유혹을 모두 거절해버렸다. 무엇인가 마음이 깨끗하고 개운했다. 그러나 죽음이 각일각 다가오고있다는것을 심장으로 의식했다. 그리고 죽어서는 안된다는것을 스스로 자신에게 깨우쳐주듯 그는 중얼거렸다.

《살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또 어느때나 됐는지 구두발이 머리우에 와서 툭툭 건드린다. 그는 어둠속을 노려보았다.

《일어나라.》

전지불빛이 그의 몸을 더듬었다. 검정안경을 낀 땅딸보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술내가 지독하게 풍긴다.

《나가자.》

반가와서 상춘은 몸을 일으켰으나 사지에 맥이 빠져서 운신할 힘이 없었다. 겨우 일어나 앉았다.

《어디로 가는거냐?》

《잔소리말고 나가기나 해.》

한놈이 상춘의 겨드랑이를 끼여들었다.

《어디로 가는거냐?》

그러나 땅딸보는 대답이 없이 끌기만 했다. 상춘은 본능적으로 최후의 순간이 오고있다는것을 느끼며 몸이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놈들은 강제로 끌었다.

상춘은 몸을 가볍게 일으켰다. 어디서 그런 힘이 별안간 솟는지 몰랐다. 놈들앞에서 죽음에 당황하지 않겠다는 자존심이였는지 모른다. 놈들은 상춘의 손목을 노끈으로 묶었다.

《어디로 가는거냐?》

또 그 말을 물어본다. 놈들은 대답을 주지 않고 발길질로 밀기만 했다.

굴속에서 나왔다. 어두운 밤이였다. 공기는 페부가 메여지도록 신선하며 산다는것의 귀중함을 그 공기의 신선함보다도 더 느끼게 한다. 찬란한 별들, 어디서 불어오는지 그윽한 꽃냄새 향기롭구나 하는 말이 저절로 가슴을 차고 나온다.

놈들은 상춘을 죽이러 가는것이다.

민통련의 배후와 자금관계, 조직체계를 상춘이 실토한다면 《변절자》로 후대해서 내놓을 예정이였으나 그것이 가망없는줄로 알게 되자 암살해버리자는것이다. 지하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가서 칼로 찌른 다음 묻어버릴 작정이다.

상춘은 죽음을 생각한다. 스물셋의 나이를 세여본다. 죽음이 도무지 실감으로 오지 않았다. 꿈이 너무나도 컸기때문에 그 꿈이 아직은 하나도 실현을 보지 못한 지금에 죽음이란 조금도 상상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죽음은 오고있다.

상춘은 되도록 천천히 걷는다. 어디 가서 죽을지 모르나 단 한초의 시간이라도 눅잦히며 죽음이 아니라 살길을 찾아야겠다는 본능이 그렇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뒤에서는 연방 떠민다.

《어디로 가느냐?》

자주 그 말이 입에서 나온다. 놈들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칼만을 칼집에서 뽑았다 꽂았다 한다.

나무가지를 쳐서 베여보기도 한다. 상춘은 6. 25때 귀선이 경찰에 잡혀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이야기를 책에서 읽듯 더듬어본다.

귀선은 끌려가던 때의 주위와 형편을 어떤것은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하고 어떤것은 전혀 잊어버리고있었다. 상춘은 되도록 모든것을 기억해두려고 한다. 어머니의 나이를 생각해본다. 어머니가 슬퍼할것을 생각한다. 채남은 미칠것이다. 통일이 되는 날 더욱 그럴것이다. 상춘이 선규를 그렇게 생각하듯이 말이다. 하늘의 별들이 총총하다. 류성이 흐른다. 상춘의 동갑내기들인가. 그는 등에 땀이 물흐르듯 하는것을 느끼며 화가 치밀었다. 역시 죽음을 겁내는가?

《어디로 가느냐?》

큰소리로 물었다.

《이 자식이 헛소리를 왜 이렇게 해. 죽기가 그렇게도 싫으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상춘의 눈앞에는 별안간 통일된 조국의 판도가 하늘의 별보다도 더 찬란하게 보인다. 그것을 보지 않고 자기가 죽는다는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옆의 놈들에 대한 증오가 불같이 치민다. 칼을 든 놈이 칼로 나무가지를 치는 순간 그는 조금 앞으로 달리다가 뒤따라오는 그놈앞에 납작 엎드렸다. 놈이 상춘의 허리에 발을 걸채 넘어지는 순간 상춘은 몸을 솟구쳤다.

놈은 보기 좋게 넘어진다.

상춘은 발로 놈의 대가리를 짓밟고 날쌔게 칼을 잡았다. 칼로 자기의 손목을 자르듯 노끈을 끊었다. 팔은 허공에 자유롭게 놀며 도망을 치려는 놈의 등을 겨누며 달린다. 하늘의 별들이 모두 상춘에게 쏟아져내리는 기분이였다.

상춘의 랍치사건과 관련해서 학생들은 경찰에 그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경찰은 이러저러한 구실로 추호의 성의도 보여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경찰과 테로패가 한계렬이라는것을 모르는바 아니였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민통련사업을 적극 추진시키는것만이 반동들의 공세를 격파하는 유일한 수단이였다. 그 일에 더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사이의 긴밀한 련계는 물론 지방대학에도 이내 사람들이 내려갔고 또 그곳에서도 대표들이 속속 올라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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