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불안한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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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관계란 그것이 원쑤이건 벗이건 아무때고 끝갈데까지 가고야마는것인가. 어머니는 경찰서에서 나와 집에까지 오는 동안 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왔다. 벗이라면 끝없이 아름다운 관계가 변치 않고 지속되기를 누구나 바란다. 원쑤라면 서로 생사를 판가름하는 극한 상태를 바라기도 하지만 저마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것도 아니고 하루바삐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싶은것이다.

어머니의 권세환에 대한 감정도 그런것이였다. 일체 그와의 왕래나 소식을 단절해왔다.

저는 저요, 나는 나였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 고향사람들이나 그의 조카 동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의 소식을 듣기는 해왔으나 그것은 세상의 일반소문을 듣는 식이였고 결코 자진해서 알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에게 온 협박장과 형사의 말을 들어서는 그가 경영하는 환평제분회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 모양이였다.

일제시기 권세환네 집은 장자울에서 오랜 지주였고 어머니네는 그 집땅을 소작하는 소작인의 집이였다.

만약 어머니의 남편 오원필이 량심적인 민족주의자로서 1920년대에 고향에서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학원을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였더라면 그 두집은 보통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넘지 못하는, 다시 더 이야기될게 없는 사이였을것이다.

그러나 권세환은 어릴 때 그 학원에서 공부를 한 학생이였고 따라서 어머니를 한 소작인의 안해로서가 아니라 모교 교장선생님의 사모님으로 보아야 했다.

오원필은 K군에서 3. 1운동을 조직한 사람의 하나였다. 경찰에 체포되여 5년 징역을 살고 나온 다음에는 학원을 경영하며 후대들을 교육하는 한편 신간회가 전국적으로 결성되였을 때에는 지회장으로 선출되였다. 학원출신의 청년들이 조직하는 농민조합운동에도 관계했으나 그는 주로 독립운동으로 국외와 무슨 련계를 맺고있다가 그것이 탄로되여 중국으로 망명하고말았다. 학원은 페쇄되고 교사는 권세환네 집 곡물창고로 변했다. 오원필은 1932년에 만주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국내로 압송되여왔다. 7년형을 받았다. 만기출옥을 1년 앞두고 병보석이 되여 십년만에 고향집 마당흙을 밟아보았다.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때 권세환은 일본에서 어느 사립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집에 돌아와있었다. 스승은 많은 풍상끝에 지금은 어쩔수없이 집에 연금을 당하고있는 몸이였고 제자는 어쨌거나 최고학부를 나와서 아직은 그 아비덕분에 세파를 모르는 순진하다고 할수 있는 식민지청년이였다. 그들사이에는 장차 민족의 운명에 관한 문제와 시국담이 자주 화제에 올랐다. 그러는 동안 권세환은 민족의식이 자기 체내에도 있는듯 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제국주의렬강의 모순이 제2차 대전과 태평양전쟁으로까지 격화되자 오원필은 경찰의 감시하에서도 비밀결사를 모색하며 징병반대운동을 준비하던 도중에 그것이 발각되여 국내와 만주로 피해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사건의 련루자로 처음에는 이십여명이나 되는 사람이 검거되여서 권세환도 그중의 한사람이였으나 그는 며칠만에 놓여나왔다. 그러나 일년후에 피해다니던 오원필이 잡히던 날에 같은 장소에서 그도 또 함께 잡히게 되였다. 막대한 국방헌금을 하고 겨우 빼놨노라고 그의 아비 권생원은 오원필을 칭원했으나 권세환 본인의 입에서는 그에 대한 일체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권세환의 밀고로 오원필이 잡힌것이다. 그가 며칠동안 경찰에 잡혀가있을 때 그것을 약속하고 말하자면 밀정이 되여나왔었다. 그 밀고를 감추기 위해서 그는 함께 잡히도록 연극을 꾸몄었다. 그 자세한 내용을 어머니가 똑똑히 아는것은 아니였다. 다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미루어 그렇다는 추측일뿐이였다.

또 아나마나 후에 권세환이 면경방단장을 지내면서 많은 사람을 징용으로 보냈을뿐아니라 자신이 순사들과 함께 기피자들을 잡으러 다니기까지 한 사실로 보아 어머니는 그를 용서 못할 민족의 죄인으로 점찍었다. 그의 손에 잡히여 징병이나 징용에 끌려나간 사람들가운데 얼마나 많은 불행이 생겼던가. 다만 남편에 대한 밀고 하나만을 가지고 그의 죄를 말할것은 아니였다.

8. 15후에 징병이나 징용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농악을 울리며 면서기들, 경방단 간부들의 집을 돌아가며 짓부셨다.

노한 군중의 심판은 그것이 자연발생적이였지만 참으로 금으로 그어놓은듯 공정했다. 악질적으로 일제에게 복무한 죄행의 경중에 따라서 어떤 집은 문만 부시고 어떤 집은 기둥뿌리까지 뽑아놓았다.

권세환의 집은 불을 질러놓았다. 밤이였다. 불타는 화광을 받아가며 울리는 농악은 자못 기세찼다.

징용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큰아들 상백도 그들 틈에 끼워있었다.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 불타는 집으로 달려가자 농악을 울리던 사람들은 좌우로 갈라져 어머니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권세환과 가장 깊은 숙원관계를 가진 사람은 어머니라는 뜻이였다. 어머니는 집으로 뛰여들어갔다. 그러나 권세환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권세환이 그때 어머니나 마을사람들에게 잡혔더라면 그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되였을지 모른다.

권세환은 서울에 가서 피해있다가 마을의 분노도 한풀 지나가고 미군이 진주하여 각 군마다 미국군인이 군정관으로 배치되여왔을 때 통역관이 되여 내려왔다.

그때 K군에 부임해온 군정관은 패틀리라는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중위였다.

미국에서 리승만이 입국하게 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탈을 쓰고 세상에 다시 나서기 시작하던 때였다.

권세환은 자기도 민족주의운동을 했노라고 목청을 높였다. 오원필선생에게 독립자금으로 막대한 돈을 비밀리에 제공했다는것이다. 그것은 어머니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오직 한사람, 아는분은 지금 지하에 누워계시는 오원필선생뿐이며 선생께서 해방을 보시지 못하고 돌아간것도 원통하려니와 자기의 공로를 알아줄 사람이 세상에 한사람도 없으니 은사죽음이 아니냐고 땅을 치며 한탄했다.

그 원통함을 참기가 어려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듯이 그는 오원필선생의 공적을 찬양하는 기념비를 지체없이 서울에서 주문해다가 읍에 세웠다. 제막식에는 군내 유지들을 초대해서 소를 두짝씩이나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다.

어머니에게는 비단치마저고리 한벌과 금가락지 한쌍 그리고 오원필의 사진을 한장 선사했다. 제막식에 걸기 위하여 K군경찰서 무슨 서류에 붙어있는 명함판사진을 용케도 들추어내다가 크게 확대한것이였다. 어머니는 치마저고리와 금가락지는 물리치고 사진만은 받았다기보다 빼앗아두었다.

권세환은 그 사진 한장으로 실로 많은것을 소유할수 있었다.

첫째로 명예를 얻었다. 《민족주의자》로 변신된것이다. 독촉 K군 지부장의 자리도 쉽게 얻었다. 말하자면 오원필의 생전의 공로를 권세환은 도용한것이였다.

그러면서 5. 10단독선거때에는 상백이 그것을 반대한다 하여 서북청년회를 풀어 그에 대한 테로를 가하게 하였으니 어디까지나 철저한 어머니의 원쑤였던것이다.

그는 타산에 밝은 사람이였다. 패틀리에게 녀자를 제공해가면서 재산도 많이 잡았다. 《신한공사》의 소유였던 수백정보의 산림도 불하받았고 토지도 그렇게 손에 넣었다.

오원필의 공로를 도용하는 식의 수완과 사기와 모략의 재능이 한껏 때를 만났던것이다.

그는 패틀리의 서울로의 영전과 때를 같이하여 서울로 이사를 했다. 많은 재산과 능란한 수완은 서울과 같은 광활한 무대가 요구되였다. 서울에 가서도 그는 패틀리를 끼고 무슨 회사, 무슨 건물과 공장을 불하받기도 하고 사기도 했으며 무슨 사장, 무슨 취체역 등 그의 사업규모와 범위는 크고 넓었다.

그 기업체나 상사들에 《환평》이라는 명칭이나 상호를 붙여서 그는 환평재벌을 꿈꾸었다.

《농지개혁》을 한다는 리승만《정부》의 시책을 탐지해낸 그는 대리인 장남술을 시켜서 웬만한 땅은 소작인들에게 외상으로 팔아버리게 하여 사채로 그들을 얽어놓게 하고 소위 닭알노란자위같은 땅과 산림만을 남겨두었다.

옛날부터 마을공유로 내려오던 보에도 약간의 투자를 해서 그것을 확장하고 《환평수리조합》이라는 간판을 붙임으로써 그의 명함에는 수리조합 리사장이라는 직함이 하나 더 늘었다. 그 사업은 적은 돈으로 실로 막대한 명예를 또 하나 얻게 하였다.

농민들에게 외상으로 땅을 주고 그우에 물까지 해결해주었다는 소문은 군내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환평육영회》라는 조그만 장학회도 하나 만들고 K군출신 학생 10여명에게 장학금을 제공하였다. 장학금을 얻어쓴 졸업생들을 여러곳에 골고루 취직시켜놓았다. K군에서 장차 그가 《국회》의원으로 출마할수 있는 지반을 닦은것이였다.

마침내 그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였다. 경제활동은 그후부터 더 본격적궤도에 올랐다. 이미 3억대에 오른 재산에다 정치적권력과 배경까지 소유하게 되였으니 말이다.

그가 10만의 선량으로서 첫번째로 한 사업은 장자울일대에 미군기지가 설치되던 때 농민들의 반대를 무마한 일이였다. 본국에 소환돼가서있다가 다시 미8군으로 부임해온 패틀리의 요청으로 그는 K군에 내려가서 농민들의 반대를 극력 무마했던것이다.

미군의 불도젤이 마을의 집들을 밀어낼제 농민들은 그앞에 무리를 지어 누웠었다. 권세환은 지금도 그때 일을 농민들앞에서 회고하기를 좋아한다. 만약 그때 자기의 힘이 아니였더라면 미군의 발포로 하여 사상자가 얼마나 많이 났을지 모른다는것이였다. 지나간 일이고 또 아무도 보지 못한 일이여서 사실유무는 모르지만 권세환은 그때 미군 대대장을 찾아가서 담판끝에 나중에는 멱살을 잡았다고 한다. 미군 대대장은 권총을 겨누었으나 권세환은 K군의 농민들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웠다고, 발포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전화통을 잡고 대굴대굴 굴었다고 하나 그 《용감한》 회고담이 그때마다 많이 달라지기마련이였다.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대는 말이고보면 그럴수도 있으려니 이쪽은 귀만 빌려주는데 권세환은 신이 나서 회고하는것이였다.

권세환은 농민들을 회유하고 무마한 공로로 하여 미국원조자금을 얻을수 있었다. 그 자금으로 영등포에 있는 제분회사를 입수했고 그때부터 미국에서 오는 물자를 불하받게 되였다.

그는 초기에 생기는 리윤의 대부분은 아낌없이 패틀리와 두 녀인들(프란체스카와 박마리아)의 치마밑에 찔러넣었다. 원조자금이 배정될 때마다 그는 그 특혜에서 빠지지 않았다. 자금을 딸라의 시장환률로 바꾸어 막대한 현금을 손에 넣을수 있었고 그것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지금은 영등포에 환평제분회사, 환평모직공장을 비롯하여 인천에 환평무역상사, 안양에 환평제약공장을 가지고있는 한편 H대학에도 투자를 하고있다.

자유당내에서도 돈과 튼튼한 선거지반을 갖고있는 존재라 하여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국회》 문교분과 위원이다. 교육에 조예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업에 관심을 가진듯 한 인상이 그에게 그 자리를 제공하게 된것이다.

《한국》은 그를 위하여 있는듯 부러울것이 없는 매판자본가요, 자유당소속 《국회》의원이였다.

권세환은 그렇게 출세와 치부를 따라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그후 두집은 각각 사는 길이 서로 같지 않았고 완전히 호상관계가 끊어지고말았으나 고향이라는 인연때문에 어머니는 좋건나쁘건 권세환의 소식을 듣기마련이였다.

장자울사람들은 서울에 오면 어머니네 집에 들려간다. 어머니가 고향에 살고있을 때나 전에 오원필이 생존해있을 때나 어머니네 집은 마을에서 여론의 중심이였다. 권세환네 집이 재산으로 마을의 명맥을 틀어잡았다면 어머니네 집은 정신적으로 그들에게 힘을 주었던것이다.

고향사람들이 서울에 오는 용건이란 거의가 권세환을 만나러 오는 일이였다. 그는 지금도 마을에 토지를 갖고있어 대리인 장남술을 시켜서 소작도 주고있으며 고리채도 펴고있다. 농민들과의 실무처리는 장남술이 담당하고있지만 옛 속담그대로 대리인이 어찌나 지독한지 농민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래도 높은 사람이니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권세환을 찾기마련이였다. 미군기지밑에 사는 마을은 미군의 만행이 그칠 날이 없어서 《국회》의원인 그를 찾게도 되는데 그럴 때마다 권세환은 한번도 농민들의 사정을 들어주거나 그들 편에 서본적이 없었다. 농민들은 그에 대한 욕과 분함을 어머니네 집에 와서 한바탕 털어놓고 가는게 하나의 습관으로 되여있다.

권세환은 고향으로 인하여 생기는 귀찮은 일이 어떤것은 어머니네 집에서 꾸며지지 않는가 의심하는수도 있다. 특히 그의 처가 그렇게 넘겨짚었다. 고향에 펴놓은 재산은 주로 그 녀자의 명의로 되여있어서 리해관계가 남편보다 더 깊기때문이다.

그 녀자는 때로 동일을 어머니네 집에 렴탐군으로 보냈다. 동일은 권세환의 사촌 영환의 아들이다. K대학 사회사업과에 다닌다. 조카자식 하나 공부시켜준다는것이나 그를 집에 둔 권세환부처의 태도는 서로 같지가 않았다.

권세환이 동일을 대하는 태도에는 별로 탓할데가 없었다. 너그럽고 방임상태에 가까웁도록 내버려두는편이다. 도리여 많은 경우에 린색하고 각박한 그로서 동일을 그렇게 대하고 공부시켜주는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였다.

그러나 권세환의 처는 그렇지가 않았다. 동일을 5촌조카로서가 아니라 무슨 심부름군쯤으로 알고있다. 아니 시키는 심부름이없다. 상춘의 집에 렴탐군으로 보내는것도 그 표현의 하나였다. 여기서 동일이 얼마나 그 심부름들에 충실하느냐 하는 문제는 말할바가 아니다.

동일도 사회와 인간에 대한 지식이 늘어감에 따라 고민과 고통도 그만큼 커가고있었다. 권세환의 분부로 어머니네 집에 오기는 하지만 도리여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하소연하기가 일쑤였다. 그것을 위해서도 자주 어머니네 집에 오게 되였다.

동일은 상춘과는 한마을에서 여라문살때까지 같이 자랐고 국민학교도 함께 다녔다. 그들은 만나면 허물없는 사이이기는 했으나 어머니집에 자주 드나드는 다른 학생들처럼 가슴을 터놓고 사회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일은 없고 그는 주로 고향소식에 대한 잡담을 하고 간다. 그럴 때마다 동일은 어딘가 렬등의식의 태도를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러한 동일을 동정했다. 권세환의 아들 륙군대위 권동진의 퇴물인듯 한 양복으로 비록 험하게는 입지 않았으나 그 표정과 태도에서 그의 아버지 영환의 고달픈 그림자를 보게 되였다. 권영환은 너무나 순박해서 권세환이 고향에 남겨둔 토지와 재산을 관리할 능력은 없고 그가 떼여준 여섯마지기 논에 목숨을 걸고 고향에서 가난하게 산다. 그가 혹시 돈푼이나 얻을가 하여 권세환에게 갔다가 자식 공부시켜주는것만도 하느님한테 렴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사촌제수의 푸념을 듣고 가는 날이면 동일은 어머니를 찾아와서 시름없이 말했던것이다.

상춘이 부럽다고 말이다.

어머니는 동일을 통해서도 권세환의 일을 가끔 듣게 되였다.

선규 어머니가 제분회사에서 기계에 치여 부상을 당하게 되였을 때도 회사에서는 치료비를 지불해야 된다고 한 모양이였으나 사장인 권세환이 거절하라는 호령을 전화로 내리였다는 말도 그에게서 들었다.

어머니는 경찰서에서 집에까지 오는 동안 권세환과의 관계를 이것저것 생각해보았으나 협박장에 대한 수수께끼는 좀체로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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