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청춘의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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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사령부에서는 탄압과 회유로 정세가 다소 안정되여가는 느낌을 주는 24일에 휴교중인 중학교는 27일, 고등학교와 대학은 29일까지 각각 개교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다.
학생들에게 《슬기로운 자률정신》으로 질서를 유지할것을 요망하고 마치 학원의 자유와 신분을 보장하는체 약속하면서 계엄령하에 시위는 있을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보다 하루 앞선 23일부터는 통금시간을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로 단축했다.
이날 5시를 기하여 서울을 제외한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4개 지구에 비상계엄령을 해제하고 경비계엄령으로 한단 낮추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회유에 지나지 않는것이고 그들이라고 하여 정세를 락관하는것은 아니였다.
가령 어느 한사람이 있어 서울에 한발자국만 들여놔보라. 서울은 4.19의 전적으로 가득차있음을 보게 될것이다.
거리와 골목의 요소요소마다에 설치되여 시민의 자유의 발걸음을 묶어놓던 파출소들이 재더미로 되여 앙상한 골격만 남은 앞에 《국군》과 경찰이 총을 겨누고있음을 볼것이다.
경찰서들, 서울신문사, 반공회관 같은 큰 건물들의 타다남은 잔해와 관청이란 관청마다 깨진 유리, 거리마다 벌렁 자빠져 네바퀴가 허공에 떠있는 경찰찦차, 붉은 소방차들의 몰골사나운 파철들을 볼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4.19전적의 전부로 봐서는 안된다.
이제는 눈물을 넘어 그들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결의를 다지기 시작했다.
《쓰러져가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하여 일어난 청소년학도제군들에게 사람들이여! 다같이 감사와 치하의 꽃다발을 보냅시다.
사랑스럽고 용감한 청소년학도들이 우리들 목전에서 애처롭게 쓰러졌습니다.
가두에서 박수로써 성원을 보내던 시민들이여!
이 나라 앞길을 걱정하시는 우국지사 여러분들이여!
가만히 보고만 있으렵니까?
그네들은 무엇을 위하여 쓰러졌으며 무엇을 위해 부상을 입었습니까?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남겨두는 선물이 죽음과 아픔이나이까?
고요히 눈감고 이 나라의 앞길을 걱정합시다.
새 세대의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말고 광명을 줍시다.》
어느 한 시민의 호소의 글이다.
서울시민 누구나 가슴을 두드리며 웨치고싶은 이 호소에 대답이나 하듯 25일 오후 5시, 27개 대학교수 사백여명이 《4.19의거에 쓰러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들고 비상계엄령하에 있는 서울에서 가두시위를 결행해나섰다.
물론 그것은 교수
왜냐하면 인민의 지향과 열망에 보답하는 이상으로 더 고귀하고 값있는 일은 없기때문이다.
또 하자영교수의 검거와 어머니들이 어용학자들의 밀담장소를 습격한 사실이 교수들의 계획을 더 서둘렀다고 해도 좋을것이다.
교수들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거리에 나선것이였다.
시위선두에는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프랑카드를 륙순이 넘는 머리 흰 늙은 교수 두사람이 량쪽에서 들고나갔다.
그들의 걸음은 학생들같이 빠르지는 못했으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생의 무게로 땅을 든든히 밟고 나갔다. 그뒤를 따르는 사백여명의 늙고 젊은 교수들.
프랑카드가 교수회관을 나서자 대학구내에 박혀있던 학생들이 뛰여나와 교수들의 뒤를 따랐다. 그것은 제자들이 스승들의 행렬을 호위해가는것이였다. 그러나 스승들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가는것 같이도 보였다.
《리승만<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며 교수단시위가 대학가를 거쳐 종로5가쪽으로 빠지자 뒤따르는 학생들의 행렬은 더욱 길어졌고 연도의 시민들도 열광적인 박수를 보낸다.
이 나라의 지성은 그 폭압하에서도 죽지 않았던것이다. 그들은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실로 많은것을 가르쳐왔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국가의 독립과 주권을 배워주었다. 그러한 고귀한 나무들은 오직 피를 거름으로 해서만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는 진리를 고금의 력사를 실증해가며 강의했다.
그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거리를 그들은 행진하고있다. 그들은 제자들의 신성한 피를 함부로 밟을수 없어서 발끝을 조심스럽게 내려다보는듯 고개를 숙여 묵묵히 걸었다. 혹은 연도에 나온 제자들과 눈이 마주치면 울음이 터질가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가는지도 모른다.
늙은 교수들은 혹은 지나간 그들의 학생시절을 회상하는지도 모른다. 종로는 무수한 이 나라의 민중들의 피가 흐른 싸움의 거리였다. 일제를 반대하던 3.1운동당시 그 늙은 교수는 어린 학생의 몸으로 그 거리를 달리던 자랑스러운 기억을 회상하며 행진하는지도 모른다. 그와 류사한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을수 있다. 6.10만세, 광주학생사건때에 그 거리에서 일제경찰과 격투한 기억을 가진 교수, 최근년간에는 《국대안》반대를 하다가 미군《엠피》의 방망이에 머리가 터진 기억을 가진 신진교수도 있을수 있다.
교수단이 을지로입구를 지날무렵에는 이미 수만명의 행렬이 뒤따르며 호위했고 교수, 학생, 시민이 완전히 한덩어리가 되고있었다.
4월 19일 분화구를 열었던 서울은 이제 또 용암을 토하기 시작한것이다. 사람들이 계속 쏟아져나온다. 계엄령하에 일시 막혔던 울분이 다시 폭발한것이다.
지성이 인민들의 지향을 반영했을 때 그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것은 교수들도 미처 몰랐을것이다. 상아탑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면 그다지도 넓은 광장이 있다는것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저마다 교수들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한다. 손을 흔든다.
교수들도 손을 흔들어보인다. 교실에서 볼 때에는 교수나 학생이나 피차에 하나의 인간이라 이러저러한 장점과 단점을 가지는 존재였지만 이 항쟁의 거리에서는 어찌 그렇게도 신뢰에 가득찬 제자와 스승의 사이로만 되는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은 값있는 존재로 변한다. 그 시점에서부터 출발한다면 그들이 못할 일이 없을것 같았다.
리승만의 타도가 하상 그 무엇이랴!
행렬은 《국회》의사당앞으로 육박해갔다. 상춘의 입원실에 있던 학생들도 모두 거리로 나와서 교수들의 뒤를 따라왔다. 채남은 교수들의 행렬에 아버지가 없는것이 분하고 또 걱정도 되였으나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교수들을 여러명 볼수 있었다.
을지로입구 반도호텔앞에서 대렬이 주춤거릴 때 아버지와 친한 어느 언어학자가 채남을 알아보고 손짓해 불렀다.
《아버진 걱정말아라. 구속된 교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러 갔으니까.》
교수들이 회의를 하기 전에 한편으로는 구속된 7~8명 교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러 간것이다. 채남은 처음 듣는 말이였다. 기대를 걸면서도 《그래도 이 대렬에 함께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요?》하며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여기 계시지 않니? 저기도 너희 아버지, 여기도 너희 아버지…》
언어학자는 교수대렬의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채남은 그것이 물론 상징적인 표현인줄은 알면서도 언어학자가 손짓하는 곳을 보았으며 정말 아버지가 보이는것 같기도 했다.
교수들이 의사당앞까지 가서 다시한번 그들이 채택한 《시국선언문》을 랑독하려고 할 때에 여러 학생들과 몇사람의 교수들에게 떠받들리듯 하며 군중속을 헤치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수와 환호가 그들을 맞이했다. 구속되였던 교수들이 석방되여오는것이였다. 하자영교수도 거기 있었다. 그는 메고 갔던 넥타이도 없이 앞을 풀어헤쳐 가슴을 드러내고 팔을 높이 들어 환호하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인사를 표시하며 의사당문앞 층계로 올라섰다.
채남은 아버지를 알아보고 그곳으로 가려 하였으나 도저히 군중속을 빠져나갈수가 없었다. 먼발치에서 발돋움을 해가며 아버지에게 손짓을 할뿐이였다.
교수는 하루밤사이에 젊어진듯 한 인상이였다. 경찰은 교수들의 움직임을 짐작하고 주동분자로 지목되는 사람들가운데 7~8명을 구속하였으나 교수단시위가 일어나자 구속의 의의도 없어졌고 또 말썽만 될는지 몰라서 석방하고말았던것이다. 교수들은 류치장까지 들어가지 않고 대기실에 하루밤 있다가 나오게 되였다.
교수단시위는 동료들의 석방까지 보게 되여 예기치 않았던 대성공이였다. 그들은 경찰의 저지를 예상하고 학생들의 시위때와 같은 투석전이나 최루탄발사 혹은 총탄발사까지도 각오하였던것이나 경찰의 저지도 없이 행진을 할수 있었으며 거기에 동료들의 석방까지 보게 되였다. 요컨대 경찰도 이제는 다시 일어나는 군중의 기세앞에 한풀 꺾인것이다.
교수들은 《시국선언문》랑독을 하자영교수가 하도록 했다. 그는 아사원에서 돌아오던 날 밤에 앞으로의 교수회의를 예상하여 그들이 표명할 태도를 서술해놓고 수정가필을 하다가 련행을 당한것이다. 그 초고를 채남이 교수들에게 전했고 《시국선언문》준비위원들은 그 초고를 참고하여 작성하였기때문에 그 선언문은 그의 주장이 많이 반영되여있었다.
하자영교수의 선언문랑독이 끝나자 군중들과 학생들은 환호하고 뛰며 어깨를 겯고 돌아갔다. 광화문네거리와 시청앞 넓은 광장을 메운 군중은 저끝까지 너울지며 서울전체가 난파에 흔들리는 느낌이였다.
하자영교수는 그 성난 파도너머로 누렇게 들어선 《국군》을 보았다. 광화문네거리에는 경기관총을 놓고 이쪽 군중을 향하여 총신을 묘준한채 배를 깔고있는 사병들도 보였다. 집총을 하고 이쪽을 노리고있는 일렬로 늘어선 전투모의 사병들, 그앞뒤로 뛰여다니며 그들을 지휘하는 하사관.
교수의 머리에는 순간 병원으로 상춘을 위문갔다가 학생들이 정능리 산속에서 《국군》을 두고 토론했다던 말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국군》이란 무엇인가? 정능리에서 학생들은 《국군》의 본질을 옳게 파악했고 사병들의 사회계급적처지도 바로 분석했었다. 그들이 예상했던 사태-학생과 《국군》과의 충돌은 목전에 닥쳐왔다.
교수의 《정당론》강의가 S대학에서 시위의 계기로 되였다고 한다. 분에 넘치는 영광이지만 지금 교수는 《국군》앞에 선 학생들을 싸움에로 호소할 힘이 있는가?
사병들은 머리에 철갑모를 쓰고 총을 들고있으니까 어느 정도 위엄도 있어보이며 또 학생들을 겨누고있기때문에 미움도 가는게 사실이지만 그들에게서 철갑모를 벗기고 총을 놓게 하면 그들의 대부분은 경상도, 전라도 어느 농촌의 빈농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군대에 들어가기 전에도 고향에서 가난으로 하여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군대에서도 인간이하의 생활을 한다.
그들이 과연 학생들이 왜 시위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모를것인가.
어느 외국혁명가의 글에서 《병영이야말로 혁명의 근거지》라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교수는 그앞에서 환호하는 학생들에게 《국군》의 본질을 이야기해주고싶은 충동을 누를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럴 겨를은 없다. 학생과 군대는 지금 맞서고있다. 그는 용기를 내야 했다. 《국군》들이 당장 학생들에게 총을 겨누고있기때문이다.
《학생제군들!》
그는 팔을 들어 학생들의 진정을 바랐다. 학생들은 조금씩 진정되여갔다.
《경찰은 군들에게 총을 쐈지만 <국군>은 만약 그들이 우리가 궐기한 뜻을 안다면 총을 쏘지 않을것을 나는 확신한다. 대담하게 행동하라!》
하자영교수
《와아-》
함성과 함께 군중들은 의사당앞에서 광화문네거리로 앞을 다투어 혹은 천천히 달려갔다.
교수도 뛰여갔다. 학생들앞에 서야 된다는 책임감이 무작정 앞으로 달리게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힘을 따를수가 없었다. 뒤처지는 교수들이 하자영교수주변에 모이고 채남이 그 틈에 뛰여들어왔다.
《아버지!》
교수의 손에 매달렸다.
《날 끌고 저 <국군>앞으로 나가자.》
《아버지가 어떻게?》
《끌기만 해라.》
채남이 교수의 손을 끌고 그 둘레에 교수들이 일군이 되여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어느 틈엔지 학생들이 교수들을 포위하듯 빙 둘러서서 자꾸만 길옆으로 밀어내준다. 그들은 교수들의 안전을 말없는 가운데 수호해주는것이였다.
《국군》들은 아연긴장하여 대렬을 산개하여 저지선을 넓힌다. 멀리에 있던 대오가 급히 달려왔다.
앞에서 뛰던 속도는 떠지며 뒤에서는 밀고 하여 군중들은 압착되면서 한걸음한걸음 《국군》과 거리를 압축해갔다.
계엄군사령부에서는 사태가 긴박해짐을 느끼고 땅크의 출동을 명령했다. 중앙청쪽에서 육중한 땅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아스팔트를 물어뜯으며 달려왔다. 그것은 군중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군중들은 땅크를 맞받아 우르르 몰리기 시작했다.
군대가 일제히 착검을 하고 강제해산의 태세를 취해오자 군중들은 오히려 칼끝앞으로 바짝바짝 다가선다.
최루탄이 터졌다.
해가 지고 황혼이 짙어가는 때에 최루탄연기는 안개같이 군중들속으로 흘러들었으나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군중들은 늘어만 갔다.
《국군》은 군중의 수효를 당하지 못해서 뒤로 물러나지 않을수 없었고 땅크를 더 동원했다.
여섯대의 땅크가 군중을 밀어내며 전조등불빛으로 쓸듯이 군중속을 비치며 허갈을 했으나 군중들은 한걸음한걸음 밀고들어가며 드디여 중앙청앞에까지 이르렀다.
4.19 그날 가장 처참한 비극은 바로 그곳에서부터 일기 시작했던것이다. 아직도 피자국이 있는듯 했다.
군중들의 원한과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경무대로 밀고 갈 기세였다.
《국군》은 그 본성을 또 나타냈다. 사격을 퍼부어 학생들을 쓰러뜨린 다음 공중에 대고 일제사격으로 군중을 위협했다.
경무대로 가지 못하는 군중들은 방향을 바꾸어 서대문 리기붕의 집으로 몰려갔다.
《리기붕이 나오너라!》고 웨치며 집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대문을 뛰여넘으려고 했다. 헌병과 경찰관들로 혼성되여있던 경호대는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군중들은 일단 후퇴했다가 다시 몰려들고 그때마다 경호대는 총을 쏘고 서대문일대의 밤하늘에는 총성이 요란스럽게 울려퍼졌다.
이날 밤 서울은 어디서나 늦게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그렇게 벌어지고있었다.
K대학생들을 습격했던 깡패두목 림화수와 리정재의 집으로 밀려가 가재도구를 끌어내다가 불살라버렸으며 림화수가 경영하는 평화극장의 내부를 산산이 파괴해버렸다.
일부 군중들은 청파동에 있는 《국회》부의장 한희석과 내무부 장관 최인규의 집을 습격했다. 시위군중의 아우성과 그들이 불질러놓은 화광으로 25일의 서울밤은 깊어갔다.
비상계엄령하에서, 그것도 통행금지시간이 넘어 다음날 새벽까지도 식을줄 모르고 계속된 시위로 학생들은 그들의 요구조건의 하나였던 구속학생전원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허강은 밤에 경찰서에서 놓여나왔다. 그는 4.19 그날 내무부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였다.
고향이 마산이라고 하여 경찰은 터무니없이 그에게 마산사건의 책임을 덮어씌워 갖은 고문을 가했던것이다. 그렇게 잘 뛰던 그의 다리도 고문으로 힘을 쓰지 못하게 되였다.
그는 경찰서에서 나오는 길로 사방에서 들리는 아우성소리와 불타는 불빛에 기운을 내서 절룩거리며 《국회》의사당앞으로 갔다. 거기에는 수백명 학생들이 아스팔트에 앉고 눕고 노래를 부르며 롱성을 벌리고있었다. 그는 그들 틈에 끼여들어 상춘과 선규, 윤도, 광래 등 아는 이름들을 불러보았다.
《선규야!》
그는 선규가 이미 죽은줄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