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영락

제 1 장. 391년 여름

5

 

소금기가 어린 바다바람은 알지 못할 타향의 냄새를 기슭으로 날라오듯 불어치는데 기슭의 바위들에서는 거품이는 초록색파도가 끓어오르고있었다. 차겁게 식어버린듯 한 해가 구름사이에 숨어서 대지를 내려다보고있었다. 정박장에 몰켜있는 크고작은 수십척의 배들이 파도가 들고나는대로 흔들흔들 오르내렸다. 불길한 정적이 정박장을 휩쓸고있었다.

연우는 지금 이또지마의 바다가기슭에 서서 아득한 저 멀리 고국땅을 바라보고있었다. 바다를 건너 이또지마의 왜땅에 발을 붙인지가 불과 이틀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10년세월을 보낸듯 한 느낌이였다.

여기 이또지마는 백제보다 오히려 자기의 고국인 가야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어 쉽게 정을 붙일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 온 느낌은 좀처럼 털어버릴수가 없었다.

하늘도 바다도 땅도 고국과 너무도 흡사한 고장이였고 심지어 생활풍습이나 쓰고사는 집에 이르기까지 고국인 가야와 다를바 없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처음 륙지에 발을 붙일 때부터 타향의 애수가 가슴을 찌르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그래서 옛사람들이 고향은 연기도 달다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연우의 얼굴에 갑자기 괴로운 빛이 어리였다.

내게 고향이 과연 있긴 있는가. 어려서 가문의 버림을 받고 쫓겨나 고역의 방랑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 아니였더냐. 누구에게나 다 있는 고향과 나라가 왜 나에게만은 없는것일가.

아라땅이 고향이 아니고 가야가 내 나라가 아니라면 난 어디를 고향으로 또 나라로 여겨야 하는가.… 지금 발을 붙이고 사는 백제를 내 나라로 여겨야 한단 말인가?

연우는 이렇게 가슴이 찢기는듯 한 괴로움속에서 스스로 자기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옛 성인들이 이르기를 제 나라가 없는 사람은 어머니를 잃은 아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오랜 세월 방황하며 내가 모질게 갈망해온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백제를 등에 업고 가야땅에 강력한 하나의 왕조를 세우는것…

물론 이것은 내가 속에 품고있는 경륜이고 빛을 잃은 가야를 크게 일떠세우려는 안타까운 모대김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아! 과연 내 고향, 내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운명의 곡절을 겪으며 이 세상에서 제 손에 든 검만을 믿고 의지해온 연우는 이렇듯 자기가 내짚어야 할 길을 찾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고있었다. 연우는 부지중 한숨을 쉬며 천천히 기슭을 따라 걸었다.

진무나 아신의 야망을 지켜주기 위한 한갖 검으로 살고있는 자기자신이 가련하게만 느껴졌다. 또다시 길 잃은자의 방황이 거듭되였다.

백제의 리익을 위하여 새로 즉위한 아신은 진무의 사촉하에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천하의 패권을 다투려고 하고있었다.

백제에 비해 국력이 강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가야세력은 물론이요, 바다건너 왜까지 끌어들이려는것이였다.

하여 연우는 진무의 령으로 이렇게 바다건너 왜땅으로 찾아온것이였다. 이것이 옳은 길일가.

백제가 신라나 가야 그리고 왜세력까지 끌어들인다고 해서 고구려를 통합하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합칠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런 력량은 고구려에 있다고 할수 있다.

이것은 천하의 패권을 쥐고 자기의 리속이나 차리자는 백제의 무분별한 처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연우 나자신은 무엇인가.

어렸을 때 겪은 경난과 원한으로 하여 자기를 낳아준 고향땅을 짓밟으려고 하지 않는가.

연우는 그게 아니라고 황급히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산산이 쪼각난 가야땅을 하나의 강대한 국가로 통합하고 가야를 백제나 신라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것이다.

또다시 마음속의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그렇다면 다시 지난 시기로 돌아가지 않는가.

서로 세력을 넓히고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고 싸우고… 언제면 동족이 모두 하나로 모여살면서 더는 피를 흘리지 않을것인가.

연우는 귀를 막았다.

이겨야 한다! 나자신을 이겨내야 한다! 그 어떤 리유도 정의가 될수 없다. 뒤돌아보지 않고 줄달음쳐가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자만이 정의이다. 연우는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더이상 방황하지 말자!

지금까지 손에 피를 묻혀온 세월이 얼마인데 하루아침에 그것을 모두 포기할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일시 몸을 굽혀 백제를 섬기지만 때가 되면 백제와 신라를 누르고 가야를 대국으로 일으켜세우겠다!

이것이 연우가 남몰래 갈망해온 꿈이였다.

연우는 등뒤에서 가벼운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덧옷을 손에 들고 치희가 다가오고있었다.

연우와 시선을 마주치자 쑥스러운듯 고개를 떨구는데 손에 든 덧옷이 파르르 떨었다. 연우는 치희의 모습을 보며 심한 자책에 시달렸다.

바다를 건너오면서 배멀미를 겪어 객사의 골방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치희였다. 연우는 치희의 손에서 덧옷을 나꾸어채여 그의 어깨우에 씌워주었다.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주자고 입을 벌렸는데 생각과는 다른 질책이 튀여나왔다.

《내 그만큼 누워있으라고 일렀거늘 처신이 이렇게까지 부족하단 말이냐. 어서 객사로 돌아가거라.》

치희의 검은 눈에 맑은 눈물이 고이자 연우는 더이상 마주볼 용기가 없어 그만 등을 돌리고말았다.

《이 천한 몸은 백번 죽어도 장군의 몸이 상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옛날처럼 항상 곁에서 모시게 해주사이다.》

치희의 청아한 목소리를 들으며 연우는 두눈을 감았다.

가슴속에서 격정의 회오리가 타래쳐올랐다.

불행한 처녀! 이 처녀는 나의 검은 속심을 그렇게도 들여다보지 못한단 말인가. 나는 치희의 고국인 고구려를 피묻은 발로 짓밟으려고 하지 않는가. 아주 어렸을 때 헤여졌다는 치희의 오빠와 전쟁판에서 죽기로 싸울지도 모른다.

처녀의 고향사람들과 가족들을 이 손으로 죽일지 그 누가 알겠는가. 연우는 몸을 획 돌리며 치희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린이의 눈동자처럼 맑고 순진한 눈에 비낀 제자신의 포악하게 이지러진 모습을 찾아보고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며 두눈을 감았다. 연우는 치희에게 반드시 어렸을 때 헤여진 오빠를 찾아주고 끊어진 혈맥을 이어주겠다고 굳게 약속했었다.

그 약속이란것이 이런것이였단 말인가.

왜까지 끌어들여 백제와 야합하고 아무런 원한도 없는 고구려를 공격하는것이 치희의 소박한 꿈을 이루어주는 길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처녀의 단순하고 소박한 꿈마저 짓밟는 배신행위인것이다. 그런것도 모르고 치희는 연우 나를 따르고있다.

불현듯 연우의 뇌리에는 치희와 함께 료서땅에 가서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후연군사들과 고구려인들의 시체로 두텁게 쌓인 료서의 전장…

그 처참한 시체더미속에서 숨이 붙어있는 고구려군사를 발견했을 때 연우는 치희의 간청에 못이겨 바쁜 길이지만 걸음을 멈추고 그 고구려군사를 구원해주었다. 정신을 차린 고구려군사는 자기 이름은 맹광이라고 하며 통성을 요구했었다.

연우는 그때 보았던 치희의 반응을 지금도 잊지 않고있었다.

치희의 눈에는 경악과 비애, 공포와 기쁨의 착잡한 가지가지 표정들이 모두 비꼈던것이다.

연우는 치희를 단호하게 밀어내였다. 아마도 치희는 생면부지의 고구려군사를 어렸을 때 헤여졌다는 오빠로 착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이러한 반응은 연우에게 불쾌감과 이루 말할수 없는 불안감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연우는 고구려군사의 청을 매몰스럽게 거절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왔던것이다.

그날 치희는 끊임없이 흐느끼며 제 오빠의 이름도 맹광이였다고 몇번이나 뇌이는것이였다.

연우는 그제서야 후회를 거듭하며 왜 그때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는가고 치희를 나무랐었다.

그때 치회는 이렇게 말했다.

《두려웠나이다. 어디선가 오라버님이 꼭 살아 저를 찾고만 있을거라고 생각한 확신이 깨여질가 두려웠나이다. 만약 그 무사가 그렇게 꿈결에서 찾던 오라버님이 아니라면… 저의 마음은 지금보다 더 괴로울것이오이다.》

연우는 혀를 깨물며 후회했었다.

왜 그때 더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을가. 너무도 우연한 일치가 이루어질가 믿지 못했던 그때가 정말 한스러웠다.

상념에서 깨여난 연우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였다.

《바다바람이 차니 이젠 그만 돌아가자.》

 

닭이 두홰째 울었다. 어둠의 장막을 밀어내며 새벽이 소리없이 다가오고있었다. 분합문이 내려진 굴속같은 어두운 방에 두 사나이가 마주앉아있었다. 희미한 초불이 안깐힘을 쓰며 어둠을 몰아내고있었다.

그러나 자그마한 골방에 틀고앉은 사나이들의 몸이 우람하여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어둠은 그속에 편안히 자리를 잡고있었다.

음모군들처럼 바싹 붙어앉은 사나이들은 침묵만 지키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연우와 이또가야소국의 대인 시마였다.

먼저 연우가 무겁게 주위를 감도는 침묵을 깨였다.

《그러니 외삼촌은 나를 따라주실수 없단 말씀이오이까?》

《내 몇번이나 말했느냐? 너의 구상이란 전혀 실현불가능한 일이다.》

연우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한걸음 다가앉았다.

《외삼촌만을 믿고 바다를 건너온 길이오이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가는 이 일에 달려있소이다.》

시마는 입귀를 실룩거리며 거적눈을 치뜨고 연우를 의아쩍게 바라보았다.

《참 세상일이란 모를 일이다. 어렸을 땐 순박하기에만 힘쓰던 네가 어찌된 일이냐. 진무를 오래 따라다니더니 황제가 될 룡꿈을 꾸는게 아니냐?》

연우는 격하여 소리쳤다.

《그만하소이다. 그래 벌써 잊으셨소이까? 외삼촌은 어찌하여 이 왜땅으로 쫓겨왔소이까. 왜 나의 어머니가 비명에 돌아가셔야 했으며 지금쯤이면 아라의 왕이 되여야 했을 이 몸이 아직도 깃을 들이지 못한 새처럼 방황하고있소이까? 그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었기때문이오이다.》

시마는 연우의 사나와진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부지중 한숨을 내쉬였다.

《새는 붙잡혀도 나는것을 잊지 않고 명마는 매여놓아도 초원을 달릴 생각만 한다. 너를 보니 그 말이 하나도 그른데가 없구나.

넌 확실히 아라왕족의 피를 이어받았다. 하긴 그것도 그리 나쁠것은 없다.… 네 어미나 내 전철을 밟지 말고 꿋꿋이 네 길을 가거라.》

《외삼촌, 고맙소이다.》

시마가 손을 들어 연우의 말을 밀막았다.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 내가 래일 평의회에서 이 일을 상정시키겠다만 성사되겠는지는 장담 못하겠다. 김지수라고 나와 앙숙인 대인이 있는데 그가 이또가야국의 병권을 수중에 장악하고있다.》

연우는 저도 모르게 허리에 찬 검을 꾹 눌러잡았다.

《나한테는 아신왕의 친서가 있소이다.》

《하여튼 래일 김지수를 만나보자.》

시마는 잠시 말을 끊고있다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만약 김지수가 끝끝내 고집을 부리며 응해나서지 않으면 다른 방편을 취해야 한다.…》

연우가 성급하게 손바닥을 펴서 제 목에 갖다대자 시마는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은 생각은 거두어라. 김지수는 금관가야의 왕족과 인척관계에 있는자다. 그뿐아니라 이 섬나라에서의 그의 권력은 네가 상상도 못하게 강하다. 그를 서뿔리 건드렸다가는 큰 물의가 일어나게 된다.》

《그럼 어떤 계책을 세우려는지요?》

《넌 옆에서 내가 하는 일을 두고보거라.》

이른새벽에 평의회에 나갔던 시마가 정오가 훨씬 지나서야 객관으로 들이닥쳤다.

간을 조이며 이제나저제나 시마를 기다리던 연우는 반색하며 마중나가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마의 뒤에 낯이 전혀 생소한 두 사나이가 붙어있었기때문이였다.

둘 다 키가 형편없이 작았는데 하나같이 얼굴색이 까무잡잡하였고 입술이 두툼하고 코가 납작한것이 전혀 호감이 가는 얼굴이 아니였다.

연우는 그들이 말로만 들어오던 원주민 왜인임을 짐작하였다.

시마는 왜인들에게 잠간 밖에서 기다리라고 이르고는 연우와 함께 객관의 처소로 들어섰다.

《갔던 일은 어찌되였소이까?》

연우가 성급하게 묻는 말이였다.

시마는 골살을 찌프렸다.

연우는 시마의 기색을 보고는 대뜸 일이 틀려졌다고 생각하였다.

이제는 하는수없이 자기가 나서야 하였다.

연우는 자기가 직접 김지수와 대면할 생각이였다. 연우가 부쩍 몸을 일으켜세우자 시마가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딜 가려는것이냐? 어서 앉아라.》

《직접 김지수를 만나겠소이다.》

시마는 혀를 끌끌 찼다.

《기다리라고 하지 않더냐. 강이 깊어야 물이 조용히 흐르는 법이니라. 네가 덤빈다고 될 일이 아니다.》

연우의 눈에 노기가 서려올랐다.

《다음달엔 군사를 일으켜야 하오이다. 정 김지수가 응하지 않으면 외삼촌이 거느리는 군사만이라도 출병시켜야 하오이다.》

시마는 로회한 책략가답게 두눈을 쪼프리고 활로 겨냥이나 하듯 연우를 노려보며 낮게 속삭였다.

《나를 믿어라. 김지수가 없이도 수천의 병력을 출병시킬 계책이 있다.》

시마는 말을 끝내고는 손벽을 마주쳐 소리를 내였다.

기다렸다는듯 장지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작달막한 왜인이 들어왔다.

장지문이 그자가 들어올 때처럼 소리없이 닫겨졌다.

아마 다른 왜인은 문밖에서 지켜서있는 모양이였다.

연우는 왜인의 눈섭우에 콩알만 한 사마귀가 붙어있는것을 보았다.

《연우야, 인사하거라. 구노국의 왕 사사히꼬다.》

시마가 왜인을 손으로 가리켜보이며 연우에게 말하였다.

구노국은 이또가야국에 복속하고있는 순수 왜인들이 사는 소국이였다. 구노란 개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곳 왜인들은 개를 조상으로 받든다고 한다. 바다를 건너온 가야계통의 이주민들은 이 소국을 손아래 끌어들이면서 나라이름을 구노라고 지어 붙여주었다. 한마디로 개가 사는 땅이라는 뜻이였다. 구노국 왜인들은 왜종자중에서도 그중 포악하고 흉맹한데 일찌기 이주민들에게 복종하여 문명을 전수받아 차츰 세력이 강해졌다.

비록 이또가야국에 복속하고는 있으나 령토나 인구수에 있어서 이또 가야국보다 크면 컸지 못하지 않았다.

사사히꼬라는 왜인은 교활한 웃음을 흘리며 연우에게 한발 다가섰다.

《에돌것 없이 직방 말씀드리겠소이다. 장군이 요구한다면 기꺼이 어디라도 따라갈수 있소이다. 내 요구를 하나만 들어주시오이다.…》

연우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사사히꼬를 건너다보며 침묵만 지켰다.

사사히꼬의 표정이 삽시에 달라졌다.

《장군의 이번 걸음이 우릴 끌어들여 고구려를 북으로 올리밀고 계림을 들이치기 위함이라는데 강대한 고구려와 싸워 피를 흘리는 대가로 얼마간이라도 땅을 떼여주시오이다.》

연우는 소스라쳐 놀랐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던 그였지만 왜인의 요구에는 가슴이 후드득 뛰였다. 손이 저절로 허리에 찬 검에 올라가붙었다.

연우는 차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기 왜땅이 작으냐?》

《나라고 늘 야만인이라고 멸시를 받으며 한생을 살수야 없지 않소이까.》

연우는 끝내 사사히꼬의 요구에 한마디 말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왜인들이 돌아가버린 후에도 연우는 한자리에 그린듯이 앉아 곰곰히 되새겨보았다. 그놈들이 바라는것은 과연 무엇일가.

왜인의 청으로 땅을 떼여주는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사실 연우는 왜인들의 청을 들어줄수도 없고 또 거절할수도 없는 처지에 있었다.

연우는 시마의 말이 귀전을 때려서야 깊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어찌 결심하였느냐?》

《외삼촌의 생각은 어떠하오이까?》

시마는 공허한 눈길로 천정구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의 청병요구는 너무도 무리한것이다. 강대국 고구려와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내라고 하면 누가 선뜻 나설것 같으냐. 내 그래서 너와 토론도 없이 저 사사히꼬에게 고구려군과 싸운다는 소릴 피하고 기본은 계림을 치기 위해 군사를 내라고 했다. 어차피 고구려와도 싸우고 계림과도 싸워야 하지 않느냐. 이또가야국은 그 갈래가 여러개로 구분되여있다. 내가 이끌고있는 아라계통의 이주민들과 김지수의 금관 가야인들 그리고 구노국의 야만인들이 있다. 내 그래서 구노국의 사사히꼬를 네 일에 끌어들이기로 하였지.…》

연우는 창백해진 얼굴을 들었다.

시마를 노려보는 연우의 눈길이 어느덧 사납게 번뜩였다.

《그것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니오이까. 계림의 땅도 동족의 땅이오이다. 아무리 눈앞에 어려움이 닥쳤다고 해도 야만인에게 땅을 떼여줄수는 없소이다. 죄를 지은자는 처벌을 면한다고 해도 그 처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수 없는 법이라 나는 동족의 심판까지 받고픈 생각이 없소이다.》

시마는 몹시 놀란 기색이였다. 두눈을 부릅뜨고 나앉아 연우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대사를 눈앞에 둔 때 여기서 멈출셈이냐? 그까짓 땅이나 조금 떼여준다는 약속이 무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사사히꼬만 손아귀에 넣고 잘 부리면 여기 왜땅을 네 뜻대로 움직일수 있다. 그러면 네 꿈을 앞당길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뜻을 꺾이우고 빈손으로 바다를 건너가면 아신과 진무가 돌아볼것 같으냐?》

연우는 아까보다는 침착하게 대꾸하였다.

《질러가는 길이 위험하다면 에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하겠지요.

새것을 만드는것이 낡은것을 부셔버리기보다 더 힘들다는 말이 있지 않소이까.》

시마는 팔소매를 떨치고 일어서서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마루우에 서서 잠간 하늘을 쳐다보다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난 더 널 도울 힘이 없다. 김지수를 만나서도 일이 안되면 다신 나를 찾아오지 말아라.》

시마가 가버린 후 연우는 방에 들어가 벽을 마주하고 앉았다.

가슴이 답답하여 옷깃을 잡아제꼈다. 이젠 모든 일이 틀렸단 말인가. 왜인들을 끌어들이려던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단 말인가.

이제라도 생각을 돌려 사사히꼬의 청을 들어준다면?…

연우는 황급히 도리질하였다. 절대로 그럴수 없었다.

비록 왜인이 한두고을을 요구한다고 해도 승낙할수 없는 일이였다.

연우가 이렇게 마음속으로 말을 주고받고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백제에서 오신 연우장군이 여기 드셨소이까?》

연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장지문을 열어제꼈다.

《내가 연우다. 무슨 일이냐?》

키가 작고 몸이 몹시 여윈 사내가 허리를 갑삭거렸다.

《김지수대인어른께서 연우장군을 뵈우려고 오셨나이다.》

연우는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쳤다고 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것이였다.

나이가 예순이 다된 늙은이가 천천히 다가오며 눈짓으로 심부름군 사내를 물리고는 제잡담 방안으로 들어섰다.

김지수는 제 손으로 방석을 끌어다앉으면서 사람좋게 웃었다.

《백제의 장군이라 하기에 년치가 나와 비슷한줄 알았더니 이렇게 젊은분이였구려. 어서 여기에 나앉으시오.》

김지수는 연우와 마주앉아 그의 둥그스럼한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참으로 좋은 관상이로군. 초불은 달빛보다 밝지 못하지만 방안의 어둠을 몰아낸다고 하오. 그대의 기상은 비록 겉으로는 웅장하지 못하나 안으로 강한것이 내비치고있으니 필경 제왕의 상은 못되여도 영웅의 기상은 부족함이 없을것이요.》

《과찬이오이다. 곤경에 들어봐야 용렬한것을 알수 있다고 하였소이다. 그런데 저는 지금 큰 곤경에 들어섰어도 어느것 하나 똑똑한 결심을 못 내리고있소이다. 대인어른께서 말씀하신바와 전혀 다르오이다.》

연우는 쓰겁게 웃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김지수는 전혀 개의치 않은듯 손으로 허연 구레나릇을 다스리다가 문득 이런 물음을 던졌다.

《그대가 여기에 온 목적은 이미 알고있는것이고… 나의 확답을 기다리는것이겠지?》

연우는 눈을 들어 김지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저는 무장이라 에도는것을 좋아하지 않소이다. 만약 대인어른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이 검으로 베여서라도 뜻을 이루려고 생각하였소이다.》

연우가 얼음장같은 말들을 내뱉는데도 김지수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 속에서도 김지수의 기색은 여전하였다.

드디여 김지수는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장지문에 손을 대고 문을 열려다가 문득 생각이라도 난듯이 고개를 돌렸다.

《내 듣기엔 장군이 아라출신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소?》

연우가 덤덤히 침묵만 지키고있자 김지수는 말을 계속했다.

《출신은 다르지만 같은 가야사람으로서 하나 묻겠소. 우리가 백제를 도와 출병하면 무엇을 얻게 되오?》

연우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앞서 사사히꼬도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 하긴 그들의 립장으로서는 충분히 그럴수 있었다.

아무 미련도 없이 죽을 길을 가라고 하면 누가 선뜻 응해나서겠는가.

《가야의 앞날을 위해서오이다.》

연우를 지그시 노려보는 김지수의 눈에서 파르스름한 불꽃이 튀였다.

《좋소, 내 힘자라는껏 그대를 돕겠소. 허나 백제의 요구에 내가 응했다고는 생각지 마오. 난 당신을 위해 출병하기로 결심했소.

분렬된 가야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강력한 하나의 왕조를 세우려는 그대의 꿈이 나와 하나로 통했기때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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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ger - - coder - 201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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