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국강상의 전설
제 2 장. 국강상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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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성으로 진격하던 고구려군은 뜻하지 않게 후연군의 배후기습을 받게 되였다.
평주자사 모용귀가 직접 3만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남쪽에서 고구려군의 익측을 타격하였던것이였다.
후연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력량을 보강하면서 전선을 넓혀나갔다. 자칫하면 고구려군은 후연군의 포위에 들수 있었다.
모용귀의 지원군까지 합한 후연군은 무려 10만의 대군이였다.
평주자사 모용귀는 평주의 모든 병력을 전선에 투입하고도 모자라 장성방어군의 주력까지 끌어들여 고구려군과 한바탕 대격전을 벌리려는것이였다. 아예 평주의 소재인 숙군성까지 비워두고 총공격을 들이대여 고구려군 주력을 소멸하고 료동지방까지 타고앉자는것이였다.
후연왕족의 한 성원으로서 천하에 없는 큰 공을 세워보려는 야심이 모용귀의 가슴속에서 화산처럼 타번지고있었다.
평생의 숙원인 고구려정복의 꿈이 그의 눈앞에 현실로 펼쳐졌던것이다. 고구려군의 맹공격에 질겁하여 숙군성에 틀어박혀 숨도 바로 쉬지 못하던 그가 갑자기 별안간 룡이되여 10만대군으로 고구려군을 기습공격한데는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오래동안 평주자사로 있으면서 수차례나 고구려땅에 침략의 발을 들여놓았던 모용귀는 고구려사람들을 원쑤처럼 대하며 항상 고구려정복만을 고대해왔었다.
그러나 고구려정복은커녕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평주까지 잃고 쫓겨갈 신세가 된 모용귀는 어떻게 하나 고구려의 료서진출을 막아보려고 미쳐날뛰였다.
바로 이러한 때 모용귀가 품들여 키워 10여년전에 고구려땅으로 들여보냈던 방주라는 세작이 그를 찾아왔다.
고구려의 왕족인 고추대가 고부진이 영락태왕을 제거하려는 반역음모를 꾸민다는 소식을 가지고온것이였다.
이 소식은 패전장 모용귀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소식중의 희소식이였다. 고구려내부에서 권력쟁탈을 위한 싸움이 벌어지면 모용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어부지리를 얻을수 있으리라 타산하였던것이다.
모용귀는 평로절도사로 파견되여온 동생 모용선과 함께 계책을 세운 후 이 거사를 계기로 그토록 고대하여온 고구려정복의 꿈을 이루리라 결심하였다.
뜻대로 영락태왕을 제거한다면 고구려땅을 정복할수 있으리라 타산한것이였다.
계획은 치밀하게 작성되였다. 평로절도사 모용선이 은밀히 전선을 넘어가 맥곡에 매복하고 고구려후군영안에서 변란이 벌어지길 기다리다가 불의에 기습공격을 진행하면 때맞춰 모용귀가 1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군주력을 소멸하고 곧바로 료동으로 쳐들어가는것이 바로 모용귀가 오래동안 구상한 전략이였다.
그러나 이 거사를 극비에 붙였지만 어느사이엔가 말이 새여 풍발을 비롯한 여러 출전장수들이 알게 되였다.
후연군 중위
그는 또한 천여명의 비밀부대를 따로 꾸려 수하에 두었는데 부대는 주로 후연에 있는 고구려사람들의 후손들로 꾸려져있었다.
풍발을 통해 모용귀형제가 꾸미는 음모의 내막을 알게 된 고구려의 전 유주자사 진은 고구려의 운명을 지킬 결심으로 전선을 넘어 맥곡으로 가게 된것이였다.
진과 자형을 비롯한 고구려사람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있어 모용귀가 품을 들여 꾸민 음모가 산산이 깨여져버렸다.
허나 제 동생인 모용선이 이미 황천으로 가버린줄 감감 모르고있는 평주자사 모용귀는 이렇듯 어리석게도 모든 력량을 다 긁어가지고 고구려군 주력을 기습공격하게 된것이였다.
고구려군의 전군도독 맹광은 언덕에 꽂힌 대장기아래 말을 세우고 전장을 둘러보고있었다.
뜻하지 않은 적의 반격에 전전선이 위험하였다. 력량상차이가 너무도 심했다.
맹광은 곧 량익측을 좁히고 본영에서 지원해준 강력한 철기군을 전면에 배치하여 적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도록 하였다.
하지만 후연군이 련이어 증원무력을 전선에 투입하고있어 결정적으로 불리한것은 고구려군이였다.
후연군이 력량상우세를 믿고 혼전을 벌리려고 하는 조건에서 이제라도 군사를 뒤로 물리면 전멸을 면할수 있었다.
허지만 맹광은 최후의 싸움을 각오하고있었다.
이제 또 피해서 물러서면 료서를 내여주게 되며 료서땅을 빼앗기면 지경안에 침략자들을 들여놓게 되는것이였다.
맹광은 죽어도 물러설수 없었다. 최후의 싸움을 치르어서라도 적을 격퇴하는 길만이 그가 선택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였다.
그가 품고있는 유일한 기대는 영락태왕이 후군을 거느리고 적의 배후를 공격할수 있다는 그것이였다. 그러나 전령을 사방에 보내였어도 영락태왕의 행처를 찾을 길이 없었다.
후군의 주둔지인 맥곡으로 보낸 전령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영락태왕이 뜻밖의 정황을 만났다면 어찌하는가? 애써 부정을 해도 가슴은 불안에 떨리고있었다.
영락태왕이 없는 고구려의 운명은 어찌된단 말인가.
맹광은 싸움의 흥분으로 갈개는 말을 다잡으며 급히 도리질하였다.
영락태왕은 천자다. 하늘이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않는 한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것이다.
후연군의 기세는 더욱 영악스러워졌다.
맹광의 대장기가까이에 화살이 비오듯 떨어졌다.
부하들이 여러번이나 자리를 옮기라고 간청하였으나 맹광은 거절하며 물리쳐버렸다.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흔들린다. 고구려사람에겐 죽음은 있을지언정 피해 물러서는 법은 없다.》
후연군은 전선을 넓히고 숙군성의 지원무력으로 고구려군대장기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맹광은 천천히 장검을 뽑아들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자기를 키워준 하평이 손수 벼리여준 장검이였다.
맹광은 이 장검으로 혈전장을 달리며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키웠고 고구려의 영광을 빛내여왔다.
10여년전 무예시합에서 장원을 한 이후로 오래동안 맹광에게 충실히 복무해온 장검이였으며 그래서인지 맹광은 이 검을 자기 몸의 한 부분처럼 여겨왔다.
마지막최후의 싸움을 치를 때가 왔다.
전장에서 먼저 떠나간이들이 창천에서 이 맹광을 굽어보고있을것이다.
맹광의 눈이 무섭게 불타기 시작했다. 화살같이 말을 타고 내달렸다.
맹광의 뒤를 따라 옛 신성의 오랜 군사들이 지축을 울리며 적진을 사납게 덮쳤다. 맹광은 장검을 좌우로 휘두르며 적진을 꿰질러 달리고 또 달렸다. 화살이 윙윙 바람을 헤가르며 귀전을 스치고 날아갔다. 단번에 여라문개의 창검이 맹광의 가슴에 날아들기도 했다. 무시무시한 백병전은 끝이 없이 계속되고있었다.
누가 누구를 하는 피의 격전이였다.
맹광은 한순간 료서의 이름없는 벌판에서 진행되였던 대격전을 생각하였다.
맹광이 군사가 되여 처음 치르었던 대격전이였다.
부루
북소리가 두리둥둥 싸움을 재촉하고 서로 맞부딪치는 창검의 현묘한 음향세계가 맹광의 몸을 감싸고있었다.
벌써 맹광의 몸에는 여라문대의 화살이 꽂히였다.
적의 창검에 여러번 찔리고 베이고 찢어져나간 다리는 등자를 짚지 못하고 건들거렸고 피가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맹광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쓰러지지도 않았고 또 쓰러져서는 안될 몸이였던것이다.
가물거리는 의식을 애써 다잡으며 손에 대장기를 휘둘렀다.
와- 함성이 일어나며 숲속에 매복시켜놓았던 마지막예비부대가 뛰쳐나왔다. 예비대는 량익측에 물러서서 전렬을 가다듬은 철기군과 협공하여 후연군에 무서운 공격을 들이댔다.
뜻하지 않은 고구려군의 공격에 기가 질린 후연군의 서렬이 차츰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결코 이것이 승전으로 이루어질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것은 후연군이 예비병력을 또다시 전선에 투입하는 경우엔 적아간의 력량관계로 기필코 패할 형세가 초래되기때문이였다.
맹광은 오직 영락태왕을 믿고 이런 결단을 내린것이였다.
바로 이때 후연군의 배후에서 무수한 기치창검이 솟았다.
후연군의 전투서렬이 순식간에 뒤죽박죽 혼란을 일으켰다.
살기등등하던 후연의 기마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말을 때려모는 광경이 눈에 뜨이였다.
맹광은 흐려지는 의식속에서도 적진속에서 기세좋게 나붓기는 기치를 똑똑히 보았다.
너무나도 눈에 익은 해와 달이 새겨져있는 고구려태왕의 기치였던것이다.
마치 양무리속에 맹호가 뛰여든듯 일월기가 향하는 곳마다 수만의 후연군이 추풍락엽이 되여 쓰러졌다.
맹광은 영락태왕이 평주의 후방인 숙군성을 장악하고 적의 배후를 치고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눈에서는 환희의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
맹광은 영락태왕의 품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주변에는 수만의 고구려군사들이 성벽처럼 둘러서있었다.
자기가 영락태왕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음을 깨닫고 급히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뼈마디를 쑤시는듯 한 아픔에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무리하지 말아.》
영락태왕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맹광은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페하, 다시 뵙지 못하는줄 알았소이다. 이놈이 무능하여 페하께 근심만 끼쳐드렸소이다. …》
《무슨 소릴 하는것이요? 경과 같은 충신들이 있어 짐이 든든하고 고구려가 강한것이요.》
영락태왕은 뜨거운 손으로 맹광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갈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영락태왕은 잠시 말을 끊고 맹광을 이윽토록 굽어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경은 어찌하여
맹광은 놀랐다. 아픔을 참고 가까스로 상반신을 쳐들었으나 이새로 신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떨구었다.
영락태왕이 그를 부축하여 일어나앉게 하여주었다.
《페하께서 어찌 그 일을… 페하, 신은 고구려를 빛내이기 전에는 그 사실을 입밖에 낼수 없었소이다. 유주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령전에 대고 참다운 고구려의 아들이 되겠노라 결심한 몸이나이다.》
영락태왕은 무거운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서쪽하늘 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두명의 왕당군의 군사가 들것을 들고 다가와서 맹광을 들것우에 눕혔다.
《페하, 이대로 떠날수는 없소이다. 간신들의 모함을 당하고 유주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업을 눈앞에 둔 이때 여길 떠날수는 없소이다. …》
맹광은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영락태왕에게 절절하게 말했다.
《어찌 경은 부친의 유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가. 진자사의 유업은 경에게 이어지지 않았는가. 충신의 넋은 천만년 빛나는것이다. 짐은 진자사의 유업을 지켜 우리 선조들의 땅, 조선의 옛땅을 수복하여 후세에 물려줄것이다.》
영락태왕이 격정에 차서 소리쳤다.
영락태왕은 맹광의 곁으로 다가와 한참이나 굽어보더니 갑자기 전포를 와락 벗어 그의 몸에 씌워주었다.
《그대의 부친이 짐을 반역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였다. 진자사는 오랜 세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갈망하며 고구려의 기개를 지켜왔던것이다. 짐은 새로 국도로 일어서게 될 평양성 남쪽지방에 진자사의 묘소를 크게 세워 후손들에게 충신의 삶이 어떻게 빛나는가를 알려줄 결심이다.》
영락태왕은 장검을 뽑아들고 수만의 고구려군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대고구려의 아들들이여! 고구려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때는 왔다. 짐은 여기서 선조들의 땅을 보고있다. 드디여 고구려의 영광을 떨칠 그날이 도래하였다. 이 길에 고귀한 삶을 바친 령혼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최후의 결전을 치르자!》
함성이 일어났다. 수만의 창검이 수풀처럼 일어섰다.
고구려군사들은 두눈을 열광으로 빛내이며 목청껏 함성을 질렀다.
영락태왕은 말에 올라 투구를 깊숙이 눌러쓰고 장검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순간 천만산악이 무너져내린듯 고구려의 용맹한 아들들이 적진을 향해 노도와 같이 진격하였다. 때는 영락태왕 12년인 402년 가을이였다.
아직도 음달에 녹지 않은 눈이 듬성듬성 남아있는 이른봄이라 하지만 겨우내 추위에 짓눌리고 시달려온 초목에는 봄기운이 완연하게 돌았다.
사방에서 애어린 새싹들이 머리를 쳐들고 새파랗게 물들어가는 초원우로 포릉포릉 종달새들이 날아오르고 남쪽에서 날아온 기러기들이 먹이를 찾아 점잖게 내려앉았다.
허나 연우의 인생의 갈피갈피에는 봄철의 불놓이로 다 타버린 초원처럼 새까맣게 재만 쌓였다.
그는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했던 모든것을 빼앗기고말았다. 인정사정 모르는 모진 세파는 그한테서 모든것을 앗아갔고 모든것을 마사버리고말았다.
이제 그에게서 유일하게 남아있는것이란 어디엔가 치희가 살아있지 않는가 하는 희망뿐이였다.
성염성에서 패전하고 중상을 입고 쓰러진 연우를 부조리가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때 고구려군 진영을 기습하였던 수천명 아라인들은 거의 전멸되고 남은자들이라야 백명도 안되였다.
그들은 사경을 헤매고있는 연우를 번갈아 업으면서 간신히 신라땅을 벗어나 백제로 들어올수 있었다.
그러나 패전한자에게 차례진것은 치욕뿐이였다.
백제에서는 그 누구도 그들을 돌아보는자가 없었다.
아신왕은 고구려군에 당한 패전으로 앙앙불락하다가 울화가 치밀어 심화병으로 병상신세에 들었고 백제조정내부에서는 다음왕위를 노리는 왕족들사이의 혈투의 조짐이 생겨나 귀족들사이에 끊임없는 모해와 중상이 벌어지고있었다.
이런 판에서 연우도 례외가 될수 없어 패전지장의 루명을 쓰고 내쳐진 몸이 되였다.
근 1년만에야 몸을 회복한 연우는 곁에 남아있는 아라인들과 함께 가야땅에 넘어갔으나 거기에서도 연우일행에 대한 랭대는 마찬가지였다.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기는 가야로서는 백제의 배척을 받은 연우를 중히 여길리 만무한것이였다.
아라에서조차 연우를 받아주지 않았다.
백제의 권력층이 지폈던 동족상쟁의 불길때문에 참혹한 화를 입은 아라의 백성들이
부모처자를 잃은 백성들의 원성소리에 연우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백성들은 걸코 동족상쟁을 바라지 않았다.
명분이 어떻든간에 연우가 추구한 전쟁은 명백히
이것은 오직 동족을 밟고서라도 대국이 되겠다는 백제귀족들의 어리석은 야망에 의해 강요된 어리석은 전쟁일뿐이였다.
귀족들내부에서도 이제 겨우 혼란을 가라앉히고 내부가 안정되여가는데 연우가 아라땅에 들어오면 또다시 피의 권력싸움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아 그를 질시하고 랭대했다.
여기저기로 정처없이 방황하는 과정에 부하들도 하나, 둘 죽거나 제갈대로 가버려 연우의 곁에는 부조리와 몇몇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연우가 아직까지 자결하지 않고 치욕을 감수하며 살아있은것은 오직 어디에서인가 치희를 만날수 있으리라는 유일한 희망때문이였다.
연우는 드디여 바다를 건너 산동의 제땅으로 건너갔다.
그는 제땅 백제군에서 3년간을 살았다.
백제군 태수 복신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땅으로 들어갈 작정이였다.
고구려땅으로 건너가는 문제는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다.
후연과 고구려와의 전면전으로 바다가 봉쇄되여 쉽게 배를 타고 건너갈수 없었던것이였다.
연우는 그곳에서 고구려가 료서땅을 회복한 사실을 알게 되였고 후연이 차츰 쇠퇴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후에도 후연은 고구려를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여러번 일으켰으나 그때마다 고구려군의 반격에 얻어맞고 쫓기군 하였다.
고구려는 료서의 평주를 회복하였기에 서해를 장악할수 있었고 배길로 군사를 날라 후연의 침략기도를 꺾어버리군 하였다.
백제의 쇠퇴몰락과 그 동맹국인 후연의 멸망위기는 산동 제땅에 위치하고있는 백제군에도 여파가 미쳐왔다.
백제사람들은 중원의 혼잡속에 말려들어가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연우도 할수없이 또다시 손에 검을 잡고 혈전장을 달리였다.
연우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나날속에서도 치희에 대한 생각만은 항상 간직하고있었다.
자기를 받아준 옛 친우에게 도리를 지켜 간혹 전쟁판에 나갈 때는 이러저럭 치희를 그리는 환영을 가슴속에서 지워낼수 있었으나 마가을의 궂은 날씨에 이어 겨울이 닥쳐오면 또다시 치희를 향한 마음은 밀물처럼 몰려들군 하였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조금이라도 한가해지면 소일거리로 하루종일 바닥에 주저앉아 나무를 깎아 자그마한 나무칼을 만들었다.
전장에서 칼을 다루는 일과는 달리 처음에는 몹시 서툴렀으나 차츰 익숙해져 나중에는 솜씨있게 손잡이를 물고기모양으로 부각한 나무칼을 제법 척척 만들어냈다.
그는 애써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나무칼을 만들 때마다 고국에 대한 향수와 치희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속 한귀퉁이를 뚫고들어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때마다 그의 량볼과 더부룩한 수염은 어느새 눈물에 젖어들군 하였다.
연우가 일생동안 적수로 삼고 싸워온 고구려는 점점 동방의 강국으로 찬란히 떠오르고 영락태왕이 즉위한 이후로 령토가 배로 확장되였다.
고구려는 영락태왕의 시대를 만나 옛 조선의 땅을 모두 수복하고 통일성업을 이룩하는 길로 줄달음치고있었다.
흩어지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새로운 력사를 창조하고있었다.
연우는 그 력사의 흐름을 되돌려보려고 모지름을 쓴
드디여 연우는 백제군을 떠나 고구려땅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였다.
이때껏 여러번 발을 떼려고 했으나 선뜻 내짚지 못했던것은 수많은 고구려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여버린 죄책감때문이였다. 그러나 연우는 죄를 받는다고 해도 치희의 곁에서, 죽어도 치희를 한번 보고 죽으리라 결심하고 고구려로 건너가는 상선우에 몸을 실었다.
연우는 이 길이 어떤 불행으로 이어지겠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몸을 실은 상선이 고구려땅을 가까이할무렵 수천의 왜군을 실은 선단이 고구려 대방땅(황해도일대)을 향해 은밀히 북상하고있었다.
해적선단의 두목은 구노국왜왕 사사히꼬였다.
…
연우는 고구려땅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모든것이 자기가 태여나서 자란 아라땅이나 젊은 시절을 흘려보낸 백제와 너무나도 흡사한데 놀랐다.
행길로 오고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나 밭갈이하는 농부의 일하는 모습이며, 집둘레를 돌아가며 세워놓은 울바자에 이르기까지 전혀 눈에 설지 않아 고향마을에 들어선것처럼 느껴지는것이였다.
연우는 발걸음을 옮길적마다 유심히 그리고 즐거이 고구려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집집의 처마마다 고드름처럼 드리워져있는 마늘타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고향땅의 모습과 같은것인지…
심지어 아낙네들이 밥을 짓느라 지핀 아궁의 불길에서 나는 연기마저도 고향의 연기처럼 연우에게는 달게만 느껴졌다.
연우는 자기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산동 백제군에서 지내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백제사람의 차림새를 갖추었다고는 하지만 이역땅에서 배인 때가 그대로 묻어있었다.
그는 어쩐지 고구려사람들속에 서면 백로무리속에 까마귀 한마리가 끼운듯하여 사람들을 피해다녔다.
연우의 목적은 치희를 만나는것이였다. 어디에선가 반드시 살아있으리라 확신하고 정처없이 고구려땅을 찾아헤매였다.
고구려땅에 발을 붙인지 열흘만에 치희 비슷한 녀인의 행적을 찾아내였다.
아니, 찾았다 하기보다 로련한 무사의, 련인의 감각으로 느꼈다고 해야 옳을것이였다.
신라에서 살아돌아온 고구려사람들이 대방땅에 정착하였다는 소식을 늦게야 알게 된 연우는 서슴없이 대방땅으로 들어섰다.
충실한 부하였던 부조리와도 백제군에서 헤여졌으니 지금 연우의 곁에는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방땅에 들어선 연우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길가에는 역병이 휩쓴듯 사람그림자를 보기가 힘들었고 심지어 아지랑이가 물결치는 풍요한 돌에도 밭갈이하는 농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연우는 필경 대방땅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것이라고 짐작하고는 영문을 알고싶어 맨 처음 맞다드는 부락으로 무작정 들어섰다. 부락은 몹시 소란스러웠는데 부락의 모임장소로 쓰이는듯싶은 우물가공지에 온 부락사람들이 다 모여있었다.
연우는 그쪽으로 선뜻 발을 내짚지 못하고 골목길에서 서성거리며 말을 붙여볼 상대를 기다렸다.
마침 저편에서 아이를 업은 아낙네가 종종걸음으로 가는 모습이 눈에 뜨이자 그를 급히 불러세웠다.
《아주머니, 부락에 무슨 큰일이 났는가요?》
녀인은 잔뜩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연우를 훑어보았다. 남쪽사람의 말씨에 검을 찬 차림새가 경계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였다.
연우는 우선 그의 놀란 마음부터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머리에 깊숙이 눌러쓴 삿갓을 제끼고 짐짓 온화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놀라지 마시우다. 신라에서 오래동안 군무에 종사하다가 돌아온지 며칠 안되였지요. 고향을 찾아가던 길에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는가싶어 들린 길이우다. …》
그제서야 아낙네는 안심하였는지 제꺽 입을 열었다.
《에그, 그러니 손님은 왜구가 대방땅에 침노했는줄 모르겠군요.》
《?!…》
《아, 글쎄 소소한 해적질이나 일삼던 놈들이 무슨 배심에서인지 대방땅에 배를 타고와 사람을 마구 죽이며 강도질을 벌린다고 하지 않아요. … 저것 보세요.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모여 왜놈들을 내쫓을 궁리들을 하는거예요.》
《아니, 고구려군은 모두 어디 가고 이렇게 마을사람들만 모여서 의논을 하는것이오이까?》
연우가 의아쩍은듯 이렇게 되물었다.
아낙네는 말문이 열린것이 기쁜듯 부지런히 주어섬겼다.
《말 말아요. 여긴 후방이나 다름없는 곳이라 군사들이 얼마 없다우.
그리고 젊은 남정들은 모두 북방오랑캐들과의 전쟁에 나갔구요. … 대방태수가 급히 전령을 평양성으로 올려보냈으나 지원무력이 당도하려면 시간이 걸린대요. 그래서 대방땅 각 현들에서 자체로 회합을 열고 의병을 초모하는거라구요. …》
연우는 그제야 깨도가 되였는지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의 뇌리에는 구노국왜왕 사사히꼬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성염성격전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구노국으로 도망쳤다더니 그 앙심을 버리지 못하고 또다시 고구려땅에 피묻은 발을 들여놓다니…
이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손님도 의병에 들어 왜놈들과 싸우겠지요?…》
연우는 아낙네의 질문에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다들 가는 길이라면 아니갈수 없지요. …》
연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마을과 이어진 행길우에 세명의 기마수가 불쑥 나타났다.
죽기로 말을 때려모는 기마수들의 뒤에서는 세줄기 누런 먼지구름이 타래쳐올랐다. 그들은 마을사람들이 잔뜩 몰켜서있는 공지에서 급히 말을 멈추어세웠다.
맨 앞장에서 《令》이라는 기발을 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나이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여러분, 나라가 어려움을 겪는 이때에, 그대들의 태가 묻힌 고향땅이 위험한 이 시각 여기서 무얼하고있는거요?》
《우리들도 전장에 나가겠소.》
마을사람들의 부르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마수는 말을 채쳐 몰아 공지 한가운데로 나섰다.
그는 마을사람들이 빙 둘러서있는 원안에서 흥분으로 갈개는 말을 다잡으며 소리쳤다.
《대방땅의 모든 마을들이 들고일어났소이다. 미개하고 악착한 왜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소멸하려고 손에 병쟁기를 잡고 전장으로들 나가고있소이다. 여기서 망설일것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고구려사람답게 들고일어나야 하오이다. 우리 고구려사람들이 자그마한 잔적에게 놀라서 무릎을 꿇을수 있겠소이까. …》
《옳소, 고구려사람의 기개를 떨치자!…》
기마수는 령기를 흔들다가 기를 들어 남쪽을 가리키며 웨쳤다.
《모두 나서시오. 고구려의 옛 군사들이여, 나이가 많다고 구들에 누워있지 말고 집안의 병쟁기를 들고 전장으로 나오시오. 병쟁기가 없으면 농쟁기를 들고서라도 싸워야 하오. 말이 있는 사람은 나를 따라 전장으로 나가고 말이 없는 사람은 대방성으로 들어가시오.》
열기띤 함성소리가 기마수의 웨침소리를 삼켜버렸다. 부락의 남녀로소 모두가 떨쳐나섰다.
연우는 그들을 더 지켜볼념을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부락을 빠져나왔다.
어깨를 축 떨구고 인적없는 길을 걷고있는 연우의 걸음걸이가 비틀거렸다.
정녕 이러한 고구려사람들과 싸워온 자기의 지난날이 떠올라 부끄럼이 또다시 가슴을 옥죄였다.
(아, 내가 어리석었구나. 승산이 없는 싸움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력사의 흐름을 바꾸려고 애써 노력하였건만 과연 내게 차례진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한갖 야망이나 이루자고 저지른 악행이 력사의 흐름을 멈추어세울수 있었는가. 력사는 언제나 정의의 승리자만을 기억한다. 영락태왕이 있는 한 고구려는 민족을 하나로 모으는 길로 꿋꿋이 걸어갈것이다. )
연우는 괴로왔다.
고구려사람들에게 저지른 죄로 하여 용서를 받을수도 없는 몸… 오직 치희를 찾아 그앞에서 속죄를 하고 단 한번이라도 그의 정겨운 시선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계속 방황의 길을 걸었다.
과연 치희가 이 연우를 용서해줄것인가.
설사 치희의 배척을 받는다 해도 그곁에서 죽는다면 원이 없을것 같았다.
대방땅 그 어디서나 고구려사람들이 삼삼오오 무기를 잡고 전장으로 나가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차마 그들을 마주 대할수가 없어 늘 사람들을 피해다니던 연우는 사흘만에야 지친 몸을 끌고 행길가에 외따로 떨어져있는 주막집에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그런데 먼데서 오는 길손인가요?》
주인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같았다.
로독에 지칠대로 지친 연우인지라 일일이 응대하기 싫어 적당히 얼버무렸다.
《신라에서 돌아온 길인데 고향으로 가는 길이요.》
《고향은?…》
주인은 버릇대로 이렇게 물어보다가 연우의 눈꼬리가 치째여올라가는것을 보고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아, 아… 너무 괴이쩍게 생각지 마시오. 요즘 왜란을 겪어 손님같은 무사들이 자주 들리기에 내 호기심에 실언을 했구려. 그렇지 않아도 왜인들과 싸우다 돌아오는 사람들이 저기서 술을 마시고있소. 저들과 같이 마시겠소?》
《난 몹시 피곤하니 혼자 있고싶소. 술이나 덥혀주오.》
주인은 뒤채로 돌아가고 연우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널직한 토방우에 앉았다.
토방우에 여러 컬레의 가죽신이 놓여있는것으로 보아 이미 방에는 손님들이 들어있는 모양이였다.
연우는 그들과 어울리기 싫어 토방우에서 한잔 걸치고 다시 길을 떠날 잡도리였다.
주인은 주안상을 갖다주고는 마치 희한한 일이나 겪은듯이 연우를 흘끔흘끔 뒤돌아보며 다시 뒤채로 갔다.
연우는 자작 술을 따르어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과 멀리 떨어져있어 몹시 한적한 곳이였다.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산천은 고향산천의 풍경마냥 아름다왔다. 하늘에서는 기러기떼가 날아가고있었고 좌우량옆 풀섶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물씬 코를 찔렀다.
이 모든 자연의 유정함은 방랑에 지칠대로 지친 연우의 몸을 슬며시 노그라뜨리고있었다.
며칠밤을 꼬박 밝히다싶이 한 연우에게 참기 어려운 순간이였다.
연우는 주막집기둥에 등을 기대고 솔곳이 잠이 들었다. …
연우는 방안에서 울려나오는 웃음소리에 언뜻 깨여났다.
잠을 자면서도 놓지 않은 장검을 내려다보다가 쓴웃음을 짓고나서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어렸을 때부터 전장에서 굴러다닌 몸이라 조그마한 인기척에도 놀라 깨여나는것이 이젠 습관으로 되였던것이였다.
주인을 찾아 토방에서 내려서려던 연우의 발걸음이 갑자기 굳어져버렸다.
방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그의 걸음을 붙잡았던것이다.
《그 처녀무사는 대체 어디서 왔다던가?》
《낸들 아나. 어디 남쪽에서 왔다고도 하고 또 멀리 북방출신이라는 말도 돌아갑데. 하여튼 대단했네. 무예가 어찌나 뛰여났는지 쌍검을 들고 왜놈들을 셀수 없이 베여죽였다네. 대방성에 쳐들어온 왜적을 물리치는데서 그 처녀무사가 큰 공을 세웠다네.》
《나도 대강 소문을 들어 알고있어요. 하지만 곁에서 싸운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서른이 다 된 처녀래요. 그의 오랍이 소문난 명장이라는가봐요. 그런데 전번 료서진격때 큰 부상을 입어 스스로 군직에서 물러났는가봐요. 처녀무사는 오라비를 찾아 여기 대방땅에 들어왔다가 란리를 겪어 전장에 나왔다더군요.》
《허, 역시 총각이 처녀에 대해 관심이 높은것이 당연하군. 언제 그런것까지도 다 렴탐해내였는가. … 헌데 여보게, 자네의 그 솜씨로 처녀무사의 곁에라도 갈수 있을가.》
방안에서는 여렷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연우는 숨이 막혀 하마트면 주저앉을번 하였다. 머리에 피가 솟구쳐오르는것 같았다.
치희다! 분명 치희가 아니고서는 처녀의 몸으로 전장에 나올수가 없다.
연우는 잡아뜯듯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뛰여들었다.
술상주위에 둘러앉은 다섯명의 사나이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그들은 심상치 않은 연우의 기상에 놀라 일제히 허리에 찬 검들에 손을 가져갔다.
연우는 거친숨을 몰아쉬며 그들을 둘러보다가 털썩 무릎을 꿇고앉았다. 어느새 그의 눈에서는 애원하는듯 한 눈빛이 흘러나오고있었다.
《밖에서 다 듣고 들어왔으니 무례를 범한것을 용서하시고 사실대로만 가르쳐주소이다. 그 처녀무사의 이름은 무엇이오이까?》
그제서야 저으기 눈빛들이 풀어진 사나이들이 입을 다시며 자리에 다시 앉는다. 그중 나이가 가장 년장자인듯싶은 중년의 사나이가 연우의 두팔을 잡아 일으켰다.
《나도 자세히 듣지는 못했어도 상 뭐라고 들은 기억이 있네. 임잔 그 처녀와 어떻게 되는 사이인가?》
중년사나이는 이렇게 무심결에 말을 붙이다가 환희로 밝아지는 연우의 얼굴을 보고서는 깨도가 된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참으로 장한 처녀일세. 처녀의 몸으로 전장에 나선다는것이 어찌 말처럼 쉬운가. …》
연우가 성급하게 그의 말꼬리를 가로채였다.
《어르신, 가르쳐주소이다. 그 처녀가 지금 어디에 있소이까?》
중년의 사나이는 딱하다는듯 입을 다시고는 슬쩍 동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동료들중에 한명이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서로 전장이 달라 그후 처녀무사가 어찌 되였는지 아는 사람은 없소. … 이렇게 말하기는 뭣하지만 소문에는 그가 잘못되였다고도 하고 포로로 붙잡혔다고도 하니 그 이상은 말해주기 곤난하구만. …》
굳어진 얼굴로 일어선 연우의 눈에는 례의 그 사나움이 어려있었다.
《가르쳐주어 고맙소이다. 여기 모인분들중에 왜군의 거처를 아는분이 계시오이까?》
중년의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딱히는 잘 모르겠으나 바다로 쫓겨났다고 하오. 주력은 이미 대방성에서 거의 전멸하였으니 패잔병들은 바다로밖에 갈곳이 없소. 소문에는 영락태왕이 왕당의 군사들로 적을 직접 들이치고있다 하오.》
…
구노국왕 사사히꼬가 누군가가 자기를 찾아왔다는 부하들의 보고에 며칠동안 꼬박 밝혀 충혈된 눈을 들어보니 제 부하들이 무지막지하게 사람 하나를 끌고들어왔다.
그 사람은 기진맥진하였는지 가쁜숨만 톺다가 스르륵 물러앉는데 머리는 풀어져 산발이 되였고 옷도 갈기갈기 찢어져있었다.
그 찢어진 옷자락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있었다.
사사히꼬는 짐짓 선하품을 하며 그의 행색을 곁눈으로 더듬어보다가 화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어느새 졸음이 말짱 사라졌는지 거적눈에 반짝반짝 생기까지 돌았다.
《이게 누군가? 고구려 대방땅에서 연우
연우는 숨을 돌리고나서 몸을 일으켜 장막 한구석에 놓인 물독에서 물을 퍼서 꿀꺽꿀꺽 마시였다.
사사히꼬가 몹시 흥미가 동하는지 팔짱을 끼고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성염성에서 헤여진지도 5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사사히꼬는 무엇이 좋은지 허리를 짚고 낄낄거렸다.
연우는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사사히꼬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깔막하니 물었다.
《어째서 고구려땅에 들어왔소?》
방금전까지 웃던 놈 같지 않게 사사히꼬의 눈에 표독스러운 기운이 비꼈다.
《뭐? 어째서 고구려땅에 들어왔는가구?… 흥, 이 사사히꼬가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설것 같은가. 난 피를 마시며 복수를 갈망했네. 아직도 내 귀엔 고구려놈들에게 맞아죽은 동생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네. 온 고구려땅을 피로 물들이지 않는 한 죽는다 해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아. …》
연우는 사사히꼬의 광기어린 말허리를 사정없이 툭 잘랐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돌아가오. 며칠만 더 지체하다가는 당신목이 그 어깨우에 붙어있지 못할것이요.》
사사히꼬는 코방귀를 뀌였다.
《누구 목이 떨어질지 두고보아야 할걸… 참, 당신은 치희를 찾아 여기까지 왔는가?》
연우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서리를 치고나서 언제 성을 냈는가싶게 히물히물 웃는 사사히꼬의 얼굴을 정면으로 무섭게 노려보았다.
설마했으나 역시 소문 그대로 치희는 사사히꼬의 손에 있었던것이였다.
《치희를 내놓게. 만약 치희에게 자그마한 불상사라도 일어난다면 내검이 용서하지 않을걸세. …》
《흥, 여기가 어딘줄 알아? 아직도 내가 당신 수하의 장수인줄 아는가. 좋다, 정 돌려받겠으면 내가 시키는 일을 한가지 해주어야겠네.》
사사히꼬는 턱을 살살 어루만지다가 차거운 말마디들을 내뱉았다.
연우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사사히꼬의 목을 치고싶은 생각을 가까스로 누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을 말인가?》
《뭐 내가 시키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닐세. 적정에 의하면 이제 영락태왕이 왕당군과 함께 여기 대방땅으로 내려온다고 하네. 난 영락태왕에게 미끼를 물리기 위해서 수천의 군사들을 잃었네. … 어떻게 하겠나. 나를 도와 담덕의 목을 가져올수 있겠나?》
연우는 분노했다.
《사사히꼬, 그건 미꾸라지가 룡과 싸우겠다는것만치나 어리석은짓이야. 어서 치희나 내놓아라.》
연우의 기세에 질겁한 사사히꼬는 비실비실 뒤걸음치다가 량옆에 눈짓하였다.
연우는 무지막지한 왜놈이 내리치는 칼등에 머리를 맞고 혼절하여 쓰러졌다.
사사히꼬는 흉악한 눈길로 쓰러진 연우를 굽어보며 이새로 으르렁거렸다.
《바보같은 놈, 마침 잘되였다. 네놈에게서 수모받은 분풀이를 실컷 하겠다. 너희 년놈을 바다속에 수장해버려 바다신에게 제를 지내는것으로 무공을 빌겠다.》
연우는 자정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일어서려고 안깐힘을 썼으나 온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그제서야 연우는
주위는 한치앞도 가려보기 힘든 어둠속이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파도소리로 미루어
갑자기 삐걱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선창으로 사다리를 타고내려오는듯싶었다.
홰불이 일렁거리며 축축한 어둠을 밀어내였다.
《치희!》
부지불식간 연우는 소리를 내질렀으나 입에서는 웅얼거리는 속삭임만이 간신히 새여나왔다.
왜병 두놈이 참혹한 모습의 녀인을 선창에 밀어던지며 말하였다.
《자, 소원대로 치희를 만나보라는 왕의 명령이요. 날이 밝을 때까지 뜻을 같이하겠다는 대답을 주지 않으면 당신들모두를 수장해버릴것이요.》
왜병들은 올 때와 같이 간다온다 소리없이 사라져버렸다.
연우는 상처의 아픔도 잊고 치희에게로 한치한치 기여갔다.
누르끼레하면서도 희미한 홰불빛에 드러난 치희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연우는 두팔이 결박되여 치희의 갈기갈기 찢겨진 몸을 품에 안을수없어 고통스러웠다.
연우는 밤마다 잠 못 이루고 꿈꾸어오던 소원이 이런데서 이루어진것이 정녕 믿을수가 없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치희, 내가 왔소. 이 연우가 그대의 곁으로 왔소. 어서 눈을 뜨오.》
연우가 안타깝게 소리쳤으나 치희의 의식은 돌아서지 않았다.
다만 봉긋한 가슴이 조용히 오르내리는것으로 아직 간간이 숨결이 붙어있음을 알리고있었다.
연우는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선체벽에서 끄물거리는 홰불에 시선이 갔다.
그는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려 홰불을 발로 차 떨구었다.
이를 악물고 몸을 굴리여 불우에 몸을 눕히고 결박된 손을 가져다댔다. 불기운이 온몸에 배여들었다. 불에 그슬리여 사람의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선창안에 퍼졌다. 연우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고통을 참아내였다. 정신이 아찔해지며 여러번 의식을 잃을번 하였으나 반드시 치희를 구원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고통을 물리쳐버리군 하였다.
줄을 끊고 일어선 연우는 치희에게로 달려가 그의 몸을 조심히 둘쳐안았다.
연우의 마지막희망의 불꽃인 치희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가고있었다.
한시바삐 여길 벗어나 치희를 구원해야 했다.
연우는 치희를 안고 일어서서는 한걸음한걸음 사다리를 짚고 올라섰다. 어찌된 영문인지 갑판우에는 왜병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연우는 서슴없이 갑판우에 올라서서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배가 기슭에 정박하고있음을 알고는 속으로 환성을 올렸다.
치희를 둘쳐업은 연우가 이물 덕판우에 올라서는데 별안간 왜병들이 불쑥 어둠속에서 튀여나왔다. 창졸간에 당하는 일이라 잠시 주춤하고 섰던 연우는 이를 악물고 뛰여나가며 앞선 왜병의 턱을 발차기로 올려찼다. 그다음 뒤에 서있는자가 힘껏 내지르는 창을 허리를 휘청 숙여 흘려보내고 헛찌르고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놈의 아래배를 무릎으로 올려찼다.
순식간에 두명을 꺼꾸러뜨린 연우는 치희를 업은채로 어둠속에서 몸을 날려 기슭에 정확히 뛰여내렸다.
하지만 기슭은 온통 왜군의 장막들로 뒤덮여있었다.
드문드문 지펴올린 화토불가까이에 왜병들이 무리지어 앉아있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어차피 조용히 빠져나가기는 그른것이였다. 연우는 자기 혼자라면 별로 지장없이 빠져나갈수 있었으나 몸을 움직일수 없는 치희가 있었다.
등에 업힌 치희가 가냘픈 신음소리를 내였다.
연우는 황급히 치희를 내려놓고 품에 안았다. 치희의 의식이 돌아섰다. 생기를 잃은 치희의 눈이 연우를 올려다보고있었다.
《치희, 내가 보이오? 나요, 연우란 말이요. …》
연우는 소리를 낮추어 부드럽게 말하였다.
치희는 그제서야 연우를 알아보았는지 일어나려고 안깐힘을 썼다.
다시 정기를 되찾은듯 맑고 그윽한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치희는 소리를 내여 말하려고 하였으나 피가 슴배인 입새에서는 가날픈 신음소리만 흘러나오고있었다.
치희의 의사가 전달되지 못했어도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있는 연우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치희, 기운을 잃어서는 안돼. 우리 함께 치희의 오빠를 찾아가야지. 이 연우도 치희의 곁에서 새 사람으로 살테야.》
치희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연우의 억센 손을 더듬어 찾아쥐고는 살풋이 두눈을 감았다.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사랑하는 연우의 품에 안겨있는 지금이 치희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였던것이다.
연우는 다시 치희를 업고 화토불을 에돌면서 조심조심 나아갔다. 오른쪽 장막끝에 매여져있는 말을 표적으로 삼은것이였다.
이때였다.
방금전에 연우가 빠져나온 배에서 무수한 홰불들이 치솟더니 괴이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는것이였다.
온 군영이 깨여나 설레이였다. 화토불가까이에 둘러앉은 왜병들이 창검을 들고 벌떡벌떡 뛰쳐일어났다. 연우와 치희가 배에서 도망쳤다는것을 알고 소동을 일으키는것이였다.
연우는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바에는 은밀히 군영을 탈출할수 없음을 깨달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잡혀서는 안되였다.
《잡아라! 멀리 가지 못했을것이다.》
어둠속에서 사사히꼬의 악청이 터져나오고 당황망조한 왜병들이 사방 흩어져 연우와 치희를 찾고있었다.
연우는 더이상 지체할수 없음을 깨닫고는 말들이 매여져있는 곳으로 뛰여가 치희를 등에 업은채로 말등에 날아올라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놀란 말이 땅을 차며 앞으로 내달렸다.
마치 교룡이 쇠사슬을 벗어나듯 왜병들이 우글거리는 군영을 뛰쳐나왔다. 말을 타고 달리며 허리띠를 풀어서는 치희의 몸을 단단히 비끄러매였다.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수십명의 왜병이 바싹 꼬리를 물고 쫓아왔다.
연우는 연신 채찍을 휘두르며 어둠속으로 말을 내몰았다.
화살이 획획 대기를 날카롭게 째며 귀전을 스치고 날았다.
연우는 화살이 날을 때 내는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와 비명소리처럼 길게 뽑는 웨침소리를 알아들었다.
《쏘앗!-》
순간 연우는 등뒤에서 자그마한 충격을 느꼈다.
등에 업힌 치희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짐을 느끼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치희, 다쳤어? 어디 말 좀 해봐, 엉?》
그러나 치희는 말도 없이 한옆으로 무겁게 기울어졌다.
허나 연우의 허리에 깍지낀 손만은 풀지 않았다.
얼마간 말을 달리는 속에 왜병의 추격이 멎은듯 하여 말을 멈추어세웠다.
연우는 치희를 안아 조심조심 땅우에 눕혔다. 치희의 등에 석대의 화살이 꽂혀있는것을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무너져내리였다.
연우는 피투성이가 된 떨리는 손으로 제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싸매려고 하였으나 그것이 소용없음을 이내 깨달았다.
피는 상처에서도, 방긋이 열린 치희의 입에서도 흘러나왔다.
치희는 마지막힘을 다해 연우의 얼굴가까이 손을 가져가다가 맥없이 뚤렁 떨구었다.
어느새 차겁게 식어가는 치희의 얼굴에서 순진한 미소가 사라져가고있었다.
그러자 연우는 공포에 정신이 아뜩해지며 모든것이 끝장이 났음을, 자기의 일생에서 있을수 있는 가장 무서운 일이 벌써 닥쳐오고야말았음을 깨달았다. …
연우는 치희를 무덤에 안장할 때 몸에 걸치고있던 자기의 옷을 벗어 그의 얼굴을 가리워주었다.
치희가 죽어서도 맑고 그윽한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연우는 치희와 오래 헤여져있지 않으리라 굳게 믿으면서 작별하였다.
그는 봉분우에 두손바닥으로 눅눅한 황토를 극성스레 보드랍게 주물러서 덮고나서 오래동안 무릎을 꿇고 어깨를 들먹이였다.
연우는 자기가 치희를 따라가기 전에 한가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소중한 치희를 자기의 곁에서 떼여간 야수의 무리를 징벌해야 했던것이다.
해살들이 하루밤새 하얗게 세여버린 연우의 술많은 흰머리칼을 은빛으로 빛내이며 무시무시하고 창백한 그의 얼굴우를 미끄러져갔다.
연우는 마치 괴로운 꿈에서 방금 깨여난것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해를 우러러보았다.
《치희, 그대는 야속하게도 재생의 기회를 한번도 주지 않는구려. 저세상에 가서도 절대로 날 용서하지 마오.
바로 치희 그대를 죽인건 저 미개한 오랑캐무리를 이 땅에 끌어들인 이 연우이기때문이요. 하지만 치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 해도 나는 반드시 그대의 곁으로 돌아오겠소.》
연우는 장검을 으스러지게 쥐고 왜병들이 몰켜있는 바다가로 말을 달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