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국강상의 전설
제 2 장. 국강상의 가을
7
력량상 우세한 적기마집단의 사나운 공격에도 당황함이 없이 침착하게 숙군성 동쪽 100여리 지점까지 퇴각한 맹광은 중군에서 지원군을 보충받고 력량을 재편성한 후 전선을 넓혀나갔다.
고구려군의 1군인 전군은 옛날 맹광이 직접 통솔하고있던 북방군의 군사들이 태반을 이루고있었다.
거란징벌과 관미성대격전 등 수십수백차례의 대소격전을 치르어 고구려의 자랑을 떨친 전통이 있는데다가 부대를 이끌고있는 수장이 맹광인것으로 하여 사기가 왕성하였다.
비록 뜻하지 않은 정황으로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였으나 매 군사들의 준비정도가 후연군에 비할바가 아니였던것이다.
필사적으로 싸워서 전선을 고착시키고 적을 격퇴한 후 다시 반공격으로 넘어가 숙군성을 함락하고 평주를 장악해야 했다.
여기서 패하고 물러서면 영락태왕이 있는 고구려 중군영이 위험하고 나아가서는 피로써 찾은 료서땅을 내놓아야 하였다.
맹광은 절대로 물러설수 없다고 결심하였다.
후연군은 처음과는 달리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다소 기가 질렸으나 절대로 물러설 잡도리가 아니였다.
고구려군을 붕괴시켜 료하너머까지 밀어내지 못하면 도리여 장성안으로 쫓길수 있었던것이다.
누가 누구를 하는 운명적인 대결이라고 할수 있었다.
맹광은 계속 피동적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릴것이 아니라 적의 주력을 포위섬멸할 대담한 전략을 머리속에서 무르익혔다.
력량상 후연군에 비해 렬세한 무력으로 적의 대군을 포위한다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였다. 자칫하면 전선을 련결한 고리가 돌파당하고 뿔뿔이 와해되여 전멸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맹광은 결심했다. 가능한껏 전선을 넓히고 적의 공격이 집중된 곳에는 제가 직접 북방군의 한개 부대를 이끌고 막아서며 량익측에는 강력한 기병부대들을 은밀히 전개하여 적이 포위권안에 들어오면 재빨리 우회하여 대포위환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운명을 건 모험이였다. 하지만 맹광은 자기의 이러한 전략이 영락태왕이 구상하고있는 전략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대격전의 서막이 서서히 올랐다.
…
담덕은 수십명의 호위군사만을 인솔하고 후군영으로 말을 몰아가고있었다.
지금의 대격전에서는 원활한 기동과 불의의 역습이 승전을 이루는 방도였다.
그러자면 후군의 행동을 바로잡아 전쟁국면을 뒤집어야 하였다.
이미전에 개마무사부대를 보내여 전선을 우회하여 숙군성 동남쪽으로 진출하도록 하였으니 영락태왕
일행이 맥곡에 채 못미처 자그마한 강을 건늘 때였다.
척후로 앞서갔던 기마군사들이 말을 채쳐 영락태왕에게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저기 큰길가에 미추
담덕은 박차를 질러 미추에게로 말을 달려갔다.
큰길가 풀섶에서 미추를 둘러싸고 서있던 군사들이 황급히 물러섰다.
담덕은 말에서 내려 미추에게 다가섰다.
풀섶에 가죽깔개를 깔고 그우에 미추를 반듯이 눕혀놓았는데 갑옷자락우로 검붉은 피가 짙게 내배이였다.
베개삼아 고인 안장우에 앉힌 머리가 맥없이 떨어질 때마다 입에서 피가 쏟아져나왔다.
《어찌된것이냐?》
영락태왕의 부름에 간신히 눈을 뜬 미추가 꺼져가는 생명의 한쪼각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페… 페하, 신이… 하마트면 대역죄를 범할번… 했소이다. 후군에는 가셔서는 아니되오이다. 고부진이… 페하를 해칠 음모를… 절대로 가셔서는 아니되오이다.》
담덕은 한순간의 충격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검을 잡은 손이 떨리였고 두눈에서는 불꽃이 튀였다.
미추가 마지막안깐힘을 모아가며 입을 열었다.
《페하께 이 사실을 알려드리지 못할가봐 괴로왔소이다. 어서 피하시오이다. 페하의 신임과 총애를 저버린 이놈을… 용서해주시오이다. …》
말끝을 맺지 못하고 맥없이 머리를 떨구는 미추를 바라보기만 하던 담덕은 인차
《고구려무사답게 잘 안장해주라.》
이 말을 남기고 시종이 끌어다준 말우에 오른 담덕은 애마의 비단결같은 목덜미를 한번 쓸어주고나서 고삐를 죄여잡았다.
어느덧 담덕의 눈에서는 수천수만의 적을 공포에 떨게 하던 증오와 분노의 섬광이 뿜어나왔다.
대모달 부연수가 다가와 조심히 물었다.
《페하, 어디로 가시려오이까?》
담덕은 추호의 동요와 주저도 없이 앞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후군본영으로 갈것이다.》
《페하, 페하의 어깨우에 고구려의 운명이 실려있소이다. 절대로 가셔서는 아니되옵니다.》
호위군사들이 일제히 꿇어엎드렸다.
대모달 부연수가 두팔을 벌리고 태왕의 앞을 막아섰다.
《페하, 절대로 아니되옵니다. 역적무리들은 신이 군사를 내여 징벌하겠으니 부디 중군영으로 돌아가주시오이다.》
《그대들은 평소에 짐을 보고 백성의 부모된자라 항상 말하였다.
자기 아이들이 잘못된 길을 가는것을 보기만 하는 부모들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듣거라. 나라가 위기에 처한 이때 고구려를 배반한 역적들에게서는 고구려사람의 성과 이름을 지워버려야 할것이다.
그러나 몇 안되는 역적무리에게 롱락당하는 죄없는 군사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비록 길을 잘못 들었다 해도 자기 잘못을 뉘우친 5부의 귀족들도 모두 짐의 신하이고 백성들이다. 짐은 그들도 모두 바른 길로 돌려세워 함께 고구려의 영광을 나눌 결심이다.》
고부진은 맥곡과 가까운 평지에 군사들을 둔치고서 영락태왕을 기다리고있었다.
마음을 모질게 도사려먹었으나 가슴은 계속 불안에 떨렸다.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부디 오늘 거사가 뜻대로 순조롭게 거행되기를 간절히 바라고있었다.
이제 담덕이 맥곡으로 들어서면 이미전에 산골짜기에 들어와 매복하고있는 후연의 평로절도사 모용선이 모든 길목을 차단할것이였다.
그다음 아무것도 모르고 군진안에 들어서는 담덕을 복병을 써서 사로잡으면 천하는 고부진 자기에게 돌아올것이였다.
그러나 고부진은 계속 가슴 한구석에 우엉씨처럼 달라붙어있는 불안을 털어버릴수가 없었다. 영락태왕의 존재가 계속 고부진에게 공포와 위압감을 주고있었던것이다.
권력에 대한 야망은 이렇듯 추악한 배신을 낳았다. 후연의 힘을 빌려서라도 영락태왕을 제거하겠다는 어리석은 야망이 결국은 고구려를 배반하고 민족의 꿈을 짓밟으려는 배신행동에로 그를 떠밀었던것이였다.
《영… 영락태왕이오이다.》
고부진은 심복부하 을문의 다급한 목소리에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손이 저절로 경련을 일으켰다. 모래알이라도 한줌 삼킨것처럼 목구멍이 알알했다.
방주가 헐레벌떡 뛰여들어왔다.
《모든 배치가 끝났소이다. 대인어른이 신호하면 복병이 일어날것이오이다.》
차츰 짙어가는 어둠속에서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방주의 흰자위가 살기를 담고 번뜩이고있었다.
고부진은 순간 이런 생각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내가 어떻게 이자를 수중에 거두었던가. 그렇지, 맹광에게 죽은 마고에게서 넘겨받았었지. 그후 이자가 후연의 세작이라는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않은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저놈이 연나라 세작이든 뭐든 내 목적만 이룬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고부진은 방주의 살기띤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치 개를 찾듯이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때는 지금이다. 너의 손에 든 검에 천하가 바뀔것이다.》
후연의 평로절도사 모용선은 고구려 영락태왕일행이 후군영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고 만족해서 두손을 맞비볐다. 하늘이 자기에게 천하에 둘도 없는 대공을 세우게 하는것만 같았다.
고구려 고추대가 고부진을 리용하여 영락태왕을 제거할수 있다는 보고를 오래동안 고구려에 세작으로 박혀있던 방주란 놈이 알려왔을 때 모용선은 이것이 꿈이 아닌가싶었다.
그 즉시에 왕성으로 보낸 전령들이 달려와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일이 뜻대로 되여 대사를 이루면 모용귀, 모용선형제를 높이 등용하겠다는 연왕의 회답이였다.
어쩌면 그들 형제가 천하를 호령할 날이 올수 있을것이였다.
이제 고구려후군영에서 거사가 이루어지면 방주가 불을 지필것이고 모용선은 곧장 짓쳐내려가 고구려후군을 격멸할것이였다.
평주자사인 모용귀와 좌우로 협동하여 고구려군을 모두 격멸한 후 혼란된 그 형세를 타고 전 고구려땅을 정복할것이였다.
모용선은 흥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 없는 기회였다.
이때 전령이 달려와 소리쳤다.
《절도사님, 원군이 당도했소이다.》
모용선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평주자사 모용귀는 숙군성에서 고구려군과 한창 싸우기에 여념이 없겠는데 무슨 병력이 있어 여기까지 보낸단 말인가.
《원군이라니, 도대체 어느 원군이란 말이냐?》
《저기 중위
전령이 서남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모용선은 모를 일이라는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풍발은 이곳에서 수백리 떨어진 유주에서 한창 지원군이나 모집하고 있을터인데 갑자기 원병을 보냈다는것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이틀전에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중대한 격전이 벌어질듯 하니 속히 군사를 거느리고 오라는 모용선의 전갈을 병을 핑게대고 뿌리치더니 그동안 생각이 달라졌는가.
이번 전쟁에도 마지못해 참가한 풍발이 이렇듯 큰 공을 세우려는 순간에 원군을 보내왔다는것이 어쩐지 뱀굴에 손을 넣은듯 께름직하였다.
《서뿔리 골짜기에 들여놓지 말고 정말 원군이 옳은지 확인해보도록 해라. …》
모용선은 전령들에게 이렇게 호령하였다.
모용선이 미처 말끝을 맺지 못했는데 갑자기 함성이 일어나며 화광이 충천했다. 부하장수들이 혼비백산한 얼굴로 뛰여왔다.
《고… 고구려놈들이… 연군의 기치를 들고 접근하여 골짜기에 불을 질렀소이다.》
《속았구나. 뭣들 하느냐, 빨리 나가 싸워라. …》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도처에서 삼단같은 불길이 치솟고 골짜기에 매복하고있던 복병들이 몸에 불이 달려 아우성을 치며 뛰여나왔다.
맥곡은 삽시에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화하였다. …
짐짓 태연한 기색으로 영락태왕을 마중하는 고부진은 다리가 후들거리자 심복 을문의 어깨에 잠시 몸을 기댔다.
어느새 식은땀으로 온몸이 화락 젖었다. 귀에서는 벌떼가 날개짓하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가까이 붙어서있는 장대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대인어른, 담덕이 진영안으로 들어왔소이다. 어서 방주에게 신호를 보내야지요. …》
고부진은 손을 쳐들 기운도 없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락태왕은 왕당의 호위군사들에게 옹위되여 성큼성큼 다가오고있었다. 산처럼 웅장한 체격에 번쩍번쩍 빛나는 은백색의 전포, 언제나
고부진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영락태왕의 모습이 주는 위압감에 질려 저도모르게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숨소리가 높아지던 고부진이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보았다, 무서운 불길이 이글거리는 영락태왕의 두눈을…
병영뒤에서 포소리가 울리면서 방주가 거느리는 수많은 자객들이 쏟아져나온것과 맥곡이 통채로 불에 붙는듯 화광이 충천한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였다.
호위군사들이 무섭게 노호하며 자객들을 사정없이 베여 쓰러뜨리고 영락태왕이 박차를 질러 질풍같이 달려오는것도 모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고부진에게는 마치 길고 긴 시간같이 생각되였다.
그러면 담덕이 이 모든것을 알고있었단 말인가?!
고부진은 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닌가싶어 넋을 잃은 놈처럼 맥을 놓고 앉아있었다.
불의에 기습을 당한것이 마치 고부진
온 진영이 찌렁찌렁 올리게 영락태왕의 웨침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군사들, 짐은 대고구려의 천자다. 그대들은 고향의 부모형제가 쥐여준 창검으로 누구를 겨누었는가. 그대들이 진정 고구려의 아들들이라면 나라를 배신한 역적들을 쳐라!》
고부진은 사냥군에게 쫓기는 맹수의 본능으로 이제는 모든 일이 글렀음을 깨달았다.
왕당군사들의 창검이 머리우에 번쩍이자 대다수 자객들이 창검을 버리고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자객들은 모두가 대체로 맹목적으로 명령에 복종하여나섰던자들인것만큼 영락태왕을 보는 순간 자기들이 역신들의 음모의 희생물이 된줄 깨달았던것이였다.
무모하게 반항해나서던자들이 왕당군사들의 창검에 무리로 쓰러지는 모습이 또한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고부진이 제 심복들에게 둘러싸여 도망치는 모양을 띄여본 영락태왕은 두눈을 부릅떴다.
채찍으로 말을 때려 노하게 하니 말이 살같이 달리였다.
영락태왕은 허둥지둥 달아나는 고부진의 등을 향해 천천히 강궁을 겨누었다.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자에게서 고구려사람의 성과 이름을 지워버리겠다.》
드디여 영락태왕의 손에서 쇠화살이 위-윙 대기를 찢으며 날았다.
고부진은 비명 한번 지르지도 못하고 화살에 맞아 말등에서 날아났다.
영락태왕은 추연한 기색으로 주위에 너저분하게 널린 반역자들의 추악한 몸뚱아리들을 굽어보았다.
력사는 언제나 곧바로만 전진하기마련이다. 그 흐름을 거꾸로 되돌려세우려는 반역자들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하게 종말을 고하는 법이다.
어느새 영락태왕의 주위에는 왕당의 호위군사들과 고구려후군의 군사들이 모여들었다.
영락태왕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모두 열광으로 불타는듯 했다.
누가 먼저 웨쳤는지 몰라도 군사들은 일제히 창검을 하늘높이 추켜들며 《부루
영락태왕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을 들어 화광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후연군사들을 노려보며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군사들이여, 보느냐. 짐이 가는 앞길, 대고구려의 영광은 누구도 막을수 없다. 짐은 그대들에게 명령한다. 저기 이 땅을 침범한 적군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라!》
수천의 고구려군사들은 노호하며 맥곡의 비좁은 골짜기에서 갈팡질팡하는 후연군을 향해 정면으로 짓쳐들어갔다.
후연군은 앞뒤로 얻어맞고 무리로 죽어너부러졌다.
설사 고구려군사들의 무서운 창검을 가까스로 피한다고 해도 온 골안이 통채로 불붙고있어 오도가도 못하고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고말았다.
영락태왕은 대장기를 세워놓고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전령들이 말을 달려왔다.
《중리도독 맹광
영락태왕은 싸움의 흥분으로 갈개는 말을 제어하며 좌우에 둘러서있는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누구들인가 맥곡에 불을 질러 아군을 돕지 않았더라면 짐이 어려웠을것이다. 그들을 찾아라.》
《그렇소이다. 페하,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적군에게 화를 당했을것이오이다. 신이 적군과 싸울 때 보니 복장은 후연군의 복장을 갖추었으나 우리 고구려사람들 같았소이다.》
영락태왕이 더 캐여묻지 않고 말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달렸다.
수백여명되는 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마주오고있었다.
《짐은 대고구려의 태왕이다. 그대들은 어디서 온 군사들인가?》
영락태왕이 급히 말을 멈춰세우며 이렇게 소리치자 그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꿇어엎드렸다.
머리에 두건을 깊숙이 눌러쓴 나이 마흔남짓한 사나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페하… 신들은 모두 고구려의 옛 백성들이옵니다. 모두 불행을… 당하여 중원각지에 흩어져 살고있었으나 페하께서 잔악한 무리를 토벌하고 옛땅을 수복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옛땅 수복의 기치밑에 모여들게 되였소이다.》
영락태왕은 감개무량한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실로 고구려사람임을 잊지 않으니 과시 대고구려의 장한 아들들이로다. 짐은 그대들과 같은 충의지사들이 보좌해주니 천하에 그 어떤 대적도 두려움이 없노라. 이런 충의의 백성들과 함께라면 무엇을 못해내겠는가. 모두 일어서라. 누가 그대들을 고구려의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단상우에 올려세웠는가? 짐은 그를 꼭 만나보아야겠다.》
두건을 쓴 사나이가 영락태왕을 간청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는데 그의 얼굴색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페하, 전 유주자사 진을 기억하고계시오이까?》
영락태왕은 억센 손으로 말을 제어하며 흥분된 어조로 부르짖었다.
《진?! 어찌 그를 잊겠는가. 짐은 세월이 흘러 진의 얼굴을 기억하고있지는 못하나 소수림태왕시절 큰 무공을 세운 명장인줄 잘 알고있다.
하지만 진이 애석하게도 전장에서 숨을 거두어 짐은 그의 보좌를 받지 못하는것을 한으로 여길뿐이다. …》
《페하!…》
두건을 쓴 사나이는 비통하게 부르짖으며 소리쳤다.
《진자사는 지금까지 살아계셨소이다. 20여년세월 간신들의 모함과 유주를 잃은 죄책으로 고구려에 돌아가지 못하고있었으나 반드시 제손으로 유주를 되찾고 떳떳하게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고대해왔소이다. 페하, 신은 진자사의 옛 부하인 유주 연군태수 자형이라고 하옵나이다.》
영락태왕은 말에서 뛰여내려 자형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진자사가 지금 어디 있느냐, 짐이 만날수 있느냐?》
자형이 혹 흐느끼며 몸을 돌리는데 그의 뒤에 섰던 군사들이 자리를 내여주었다.
영락태왕의 눈앞에는 들것을 멘 군사들이 나타났다.
영락태왕이 다가서자 군사들은 들것을 조용히 내려놓고 한옆으로 비켜섰다.
영락태왕 담덕은 옛 유주자사 진에게 몸을 숙이였다.
자형의 목소리가 담덕의 귀전에 돌려왔다.
《진자사는 20년전에 유주에서 두눈을 잃었소이다. 하오나 오직 페하께서 조선의 옛땅을 수복하려 군사를 일으키실 날만을 고대하며 연명하고계셨소이다.》
담덕은 참혹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고구려의 옛 무장의 모습을 굽어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진자사, 짐은 고구려의 태왕 담덕이요.》
담덕의 이 말이 진의 꺼져가는 생명에 약동하는 불꽃을 지펴주었다.
진의 두볼에서는 맑은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였다.
《페하, 꿈에서도 페하의 품에 안기고싶었소이다. 한번만이라도 고구려땅을 밟아보고싶었소이다. 미약하게나마 페하를 보좌해드렸으면 더 원이 없겠지만… 페하, 신이 불충하여 잃어버린 옛땅을 반드시 찾아 후세들에게 물려주소이다. 그날을 이 두눈으로 보지 못하고가는것이 한스럽소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짐이 불미하여 그대가 겪은 고통과 짐과 나라를 위해 바친 로고를 잊고 살았소. 절대로 맥을 놓아서는 아니되오. 짐과 기쁨을 나눌 날이 멀지 않았는데 먼저 가서는 아니될줄 아오.》
《페하!…》
이렇게 불러보고나서 진은 가까스로 호흡을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페하, 고구려백성들의 꿈이 이루어질 날은 멀지 않았소이다. 페하의 진격에 발맞추어 하북에서 고구려사람들이 들고일어날것이오이다.
연나라가 멸망할 날도 멀지 않았사오니… 부디 옥체보존하시와 고구려의 긍지를 계속 떨쳐주시옵소서. 페하께서 신의 미흡한 자식을 지금껏 거두어주셨사오니… 부디 신의 아들이 아비의 마지막유언을 지킬수 있도록 페하께서 잘 이끌어주옵소서. 간절히 바라오이다. …》
진은 잠시 말을 끊고 가쁜숨을 몰아쉬다가 이렇게 마지막말을 남기였다.
담덕은 추연한 얼굴로 일어섰다. 진의 죽음은 영락태왕에게 큰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선대태왕시절의 옛 영웅이 담덕 자기의 품에서 눈을 감았던것이다.
옛 조선의 땅을 모두 되찾아달라고 절규하는 진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전을 맴돌고있었다.
진이 불행을 당한 몸으로 고통과 괴로움으로 흘러보낸 20여년세월을 잊고있었다고 생각하니 담덕의 마음은 찢어질듯 괴로왔다.
그러나 충신의 넋은 꺼질줄 모르고 불타고있었다.
진이 절망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여온것처럼 담덕은 쉬임없이 달리고 또 달릴것이였다.
《진자사는 운명하기 전에 짐에게 아들을 부탁하였다. 진의 아들을 알고있느냐?》
담덕은 자형의 어깨우에 무거운 손을 올려놓으며 조용히 물었다.
자형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페하께서 늘 곁에 두고계시는 무장인줄로 아오이다. 신들은 그 사실을 얼마전에야 알게 되였소이다. 진자사는 20여년전 유주에서 아들과 딸을
잃은줄로 알고있었으나 영무
《과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군. … 그러니 진자사는 성장한 아들을 만나보지 못했느냐?》
《페하, 진자사는 페하의 곁을 떠났으나 그 아들을 통해 페하를 계속 보좌한다고 생각할것이오이다.》
자형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의 이름은 무엇이냐?》
영락태왕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맹광이라 하옵나이다.》
《뭣이?!… 맹광이 정말 진자사의 아들이였단 말이냐?》
영락태왕의 놀라움은 컸다.
영락태왕의 눈앞에는 10여년간 맹광이 이룩한 무공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영락태왕은 자기가 즉위하여 벌린 무예시합에 당당히 장원하여 자기앞에 서있던 맹광의 모습을 떠올렸다.
《충신의 넋은 언제나 빛나는것이로다. … 충의는 아무리 가리워도 빛을 뿜는 법이고 간특함은 그 무엇으로 치장해도 악취만을 풍기기마련이니라.》
영락태왕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잠시 말을 끊고 서쪽하늘을 무섭게 노려보던 영락태왕 담덕이 노성을 터치였다.
《짐은 반드시 대고구려를 위해 한목숨 서슴없이 바친 충신들의 넋을 지켜 우리 선조들의 땅을 되찾아 후세에 물려주겠노라.》
영락태왕은 장검을 뽑아들고 서쪽으로 질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