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국강상의 전설
제 2 장. 국강상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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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의 관문인 숙군성을 향해 진격하고있는 고구려군은 필사적으로 막아나선 후연군에 의해 저지되였다.
고구려군의 전군도독이며 평양성태수인 맹광이 이끄는 2만의 고구려군은 좌익을 감당해야 할 후군이 제시간에 전선으로 진출하지 못하다나니 홀로 고립된 처지에서 벌떼같이 반격해나선 후연군에 의해 많은 손실을 입고 숙군성 동쪽 100리밖까지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것은 고구려군의 차후 전투행동에 큰 영향을 주는것이 아닐수 없었다.
맹광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북방군 현무당을 주축으로 신라원정에서 승전하고 돌아온 부대들로 편성되여있었다.
전쟁에서의 강약은 군대의 통일의지와 엄격한 군률에 있는것이다.
개개의 군사가 용맹하고 창검의 수가 많다고 해도 이러한 요인이 부족하면 승전을 거두기 어려운 법이다.
옛 병법에 의하면 공격하는 측이 방어하는 측보다 3배이상의 병력이 있어야 공격이 가능하다고 하였지만 고구려정벌군은 굳센 의지로 전군이 하나가 되여 후연의 수십만대군과의 대격전에서 련승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있은 실패로 전전선이 무너질수 있는 정황이 펼쳐지게 되였던것이다.
사실상 후연군에 비해 매우 렬세한 무력으로 지금까지 련전련승한것은 상하가 하나의 마음으로 단결하여 싸운데도 있지만 영락태왕 담덕이 있는 한 싸움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굳게 믿고있는 군사들의 신뢰가 있었기때문이였다.
전군도독 맹광도 바로 그러한 군사들중의 한사람이였다.
후연은 고구려군이 물러서는것을 좋은 기회로 여겨 20만의 대군을 모두 내몰아 포위섬멸하려고 하였다.
맹광이 이끄는 고구려원정군의 전방부대는 후연군의 반격을 가까스로 물리치면서 숙군성 동쪽으로 천천히 이동하였다.
맹광은 태왕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것이라는것을 굳게 확신하고있었다. 하여 근 10배나 되는 적과 맞서싸우면서도 추호의 동요도 없이 침착하게 전선을 유지하고있었다.
고구려원정군의 전방부대가 후군이 제때에 좌익으로 진출하지 않아 많은 손실을 입고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이르렀다는 전령의 보고를
받은 영락태왕 담덕은 시급히 중군영에 있는 근위군의 무력으로 맹광을 지원하도록 하고
담덕은
후군이 제때에 전선좌익으로 진출하여 숙군성의 적을 견제만 해주었어도 형세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것이였다.
후군은 도성에서 모집해온 지원군으로서 5부의 귀족자제들과 조의 등 직업무사들이 태반을 이루고있는 전투력이 정규군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는 무력이였다.
고구려원정군의 후군은 태왕이 전쟁에 나가있는것으로 하여 국내성에 대신 남아 국정을 살피던 국상 연구흠이 도성안의 무사들과 5부귀족들의 자제들을 모집하여 이끌고온 지원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국내성에서부터 천여리 머나먼 료서땅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국상 연구흠이 로환과 오랜 병으로 쓰러져 후군의 지휘는 고추대가 고부진이 대신 맡게 되였다.
부군장은 제가회의 수장인 미추였다.
고구려후군의 지휘가 고추대가 고부진에게로 넘어가면서부터 후군의 전투력은 급속히 떨어지고 군률이 완전히 해이되였다.
제멋대로 군사들을 풀어놓아 점령지들마다에서 략탈에 미쳐돌아가는 5부귀족들을 부군장인 미추가 엄하게 통제하고 밤낮을 잊어가며 각 군영을 돌며 군기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후군은 군대로서의 존재를 끝마쳤을수도 있었다.
전선에 진출한 후군의 무력은 2만명에 달했다.
사실 이만한 무력이면 태왕의 명령에 따라 전선의 빈 공백으로 재빨리 진출하여 어려운 형편을 뒤집고 유리한 국면을 마련할수 있는 력량이 되고도 남았으나 후군의 군장인 고부진은 이러저러한 구실을 대여 전투행동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태왕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후군의 이러한 태만이 결국은 전전선에 걸쳐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으며 나중에는 후군마저 적기마대의 기습공격으로 괴멸될 위험에 빠지게 되였던것이다.
영락태왕 담덕은 한시바삐 후군으로 달려가 혼란된 군의 체계를 바로잡고 맹광이 이끄는 전군과의 협공으로 전쟁국면을 뒤집을 결심이였다.
담덕의 이번 후연정벌은 민족의 옛땅을 모두 되찾는 성전이였고 고구려의 오랜 숙원을 이루는 최후의 대격전이 될것이였다.
하지만 담덕은
언제나
안개낀 재빛어둠속에서 말탄 군사들이 갈팡질팡하고있었다.
말들이 네굽을 놓아 달리고 기마수들은 저저마다 앞서겠다고 마구 채찍을 휘두르고있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요란한 바퀴소리가 주변에서 철컥거리는 쇠붙이소리와 엇섞여 비명소리처럼 들려왔다.
어딘가 가까이에서 함성소리가 울려왔다.
당황하여 어둠속으로 마구잡이로 달리던 마차 한대가 나무그루터기에 걸려 벌렁 뒤집혔다.
《눈이 멀었는가… 왜 보지 못해?! 얼이 빠졌어?…》
누군가가 혼비백산한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후연군의 한개 기마집단이 전선을 뚫고들어와 고구려후군의 전초기지를 들이치고 가뭇없이 사라지는통에 이런 혼란이 일어났던것이다.
후군의 부군장 미추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기마군사들을 가까스로 천명가량 모아가지고 전초기지 한끝으로 인솔해갔다.
헌데 그쪽에서는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고구려군사들이 가득 밀려오고있었다.
《어디로 가느냐. … 돌아서라. 뒤로 물러서는자는 리유여하를 불문하고 베여죽이겠다.》
미추는 이렇게 소리치며 선두에서 도망치는자의 말고삐를 힘껏 움켜잡았다.
《놓으시오. 우린 배신행위때문에 이 꼴이 되였소. 태왕이 우리 귀족들을 미워하다못해 모두 죽이려고 이런 사지판에 밀어넣었다는것을 모르는줄 아는가. …》
비단전포에 으리으리한 철갑옷을 입은 모양으로 보아 필경 어느 모모한 귀족의 아들인듯싶은자가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비켜라. 우린 태왕이 일으키는 무모한 전쟁의 희생물이 될수 없다. 너도 귀족집안이라면 우릴 막을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기강을 바로세워라. …》
탈주병들이 저마끔 내뱉는 무엄한 소리를 듣고 미추의 분노가 드디여 폭발했다.
그는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들더니 방금전에 악을 쓰며 소리치던자들을 순식간에 베여버렸다.
감히 태왕을 헐뜯던자들을 사정없이 베여죽이고 말우에서 필사적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군사들, 물러서지 말라. 이제 곧 태왕페하께서 후군영으로 오시여 그대들을 승전에로 이끌것이다.》
흥분했던 군사들이 미추의 독려에 차츰 리성을 찾기 시작했다.
미추는 새벽이 가까와서야 흩어졌던 전초기지의 군사들을 모두 모아 적기마대가 다시 달려든대도 반격할수 있게 조치를 취할수 있었다.
검붉은 낯으로 땀에 흠뻑 젖은 미추가 피곤과 상처의 고통으로 비칠거리며 후군의 본영으로 돌아온것은 이미 날이 밝았을무렵이였다.
미추가 군영문앞에 이르자 파수장이 앞을 막아서는것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초기지를 향해 전령을 띄웠소이다. 국상어르신께서 급히 부르시오이다. …》
미추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오랜 로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여 국내성으로 돌아간것으로 알고있었는데 아직 후군영에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미추는 영문의 파수장을 앞세우고 국상의 장막으로 달려갔다.
미추가 장막문을 제끼고 들어서니 침상곁에 몰켜앉아있던 귀족들이 우르르 일어서는것이였다.
가죽을 두툼히 깐 침상우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국상 연구흠이 실신한 상태로 누워있는 모습이 눈에 뜨이였다.
《도대체 국상께서 이 지경이 되도록 여기 앉은 귀족들은 무얼하고 있은게요? 그대들이 군률에 복종하고 질서를 바로세웠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것이요. …》
미추가 지금까지 참고참았던 화를 쏟아내자 귀족들은 모두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들을 떨구었다.
《미추
순노부의 대가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변명을 하였다.
미추는 측은한 눈길로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조상의 뼈와 문벌만을 등대고 지금껏 호의호식하면서 나라와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제살궁리만 하여온 귀족들이였다.
입으로는 곧잘 충신인체 하면서도 전쟁에 충당할 한푼의 군비를 내는것조차 아까와서 벌벌 떨던 부패한 무리들이였다.
《국상께서 계속 미추
순노부의 대가가 미추에게 길을 내주며 하는 말이였다.
미추는 기력이 모두 진하여 마지막숨을 내쉬고있는 국상의 앙상한 손을 떨리는 손으로 잡아쥐였다.
일찌기 아버지 영무를 유주에서 잃고서 고아로 된 미추를 친아들처럼 보살펴준 연구흠이였다.
태학에 들어가 배울수 있도록 힘을 써주었을뿐아니라 전장에서 쓰러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당의
미추가 더이상
《미추
미추는 슬픔이 고인 눈을 들며 물었다.
《그래 국상께서 무슨 말을 남기시려고 날 부르셨소이까?》
순노부의 대가는 주위에 둘러선 귀족들을 휘둘러보고는 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국상은 날보고 미추
《고추대가 고부진이?!》
《그렇소. 지금 후군이 이 지경에 이르고 전선의 국면이 뒤집어진데는 분명 우리가 모르는 음모가 숨겨져있을것이라고 하셨소.》
순간 미추는 언제나 음흉한 미소를 짓고있는 고부진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려보았다. 평소에 왕족이랍시고 늘 사람들을 거만하게 대하며 누구든 엇나가는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해버리는 인간, 5부귀족들을 손안에 끌어당겨 심복으로 만들고서 조정을 좌우지하여 그 위세가 나는 새도 떨군다는 권력자였다.
과연 국상의 짐작대로 고부진이 태왕을 반대하는 그 무슨 음모를 꾸미는것은 아닐가?!…
국상의 말을 전해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확실히 고부진의 행동거지와 언행에서 수상한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5부귀족들을 부추겨 제마음대로 군률을 흐리게 한다든가, 우정 군무를 태만하여 군사행동에 지장을 주는 고부진의 모든 행동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지금까지 수세에 빠져 패주해 달아나기만 하던 후연군이 갑자기 고구려군의 이동경로와 전략을 낱낱이 파악하고서 반격으로 이행한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것인가.
태왕과 각 군의 군장들만 알고있어야 할 전략과 전술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흘리였음을 말해주는것이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추는 갑자기 등골로 식은땀이 줄지어 흘러내리는것을 느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영락태왕이 후군영으로 올것이다.
만약 국상의 짐작이 옳다면 상상하기조차 무서운 사태가 일어날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것을 막아야만 했다.
미추는 재빨리 허리에 찬 검을 눌러잡으며 5부의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제가평의회의 수장으로서 명령하노니 어서 자기 장막들로 돌아가서 그대들의 가병들과 군사들을 모두 영문앞에 집결시키시오.
고추대가 고부진이 눈치채기 전에 군사를 집결시켜야 하니 빨리 서둘러주시오.》
미추의 명령에 5부귀족들은 모두 놀란듯 웅성거렸다.
《아무렴 왕족인 고추대가가 그런 엄청난 음모를 꾸밀리 있겠소.》
《좀 더 두고봅시다. 자칫하면 제편사람들끼리 서로 죽기내기로 싸우는 류혈참극이 벌어질수도 있소.》
한때 고부진을 따라다니며 그의 령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듣던 5부귀족들이 저마끔 떠들어댔다.
5부귀족들이 옥신각신하는것을 듣다못해 순노부의 대가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다들 가만있지 못할가. …》
순노부의 대가는 이렇게 귀족들에게 소리치고나서 미추에게로 돌아섰다.
《미추
《무슨 소릴 하는거요? 이제 조금만 지나면 태왕페하께서 이곳에 도착하실것이요. 만에 하나 국상의 당부가 옳다면 우린 모두 대역부도죄를 짓게 될것이요.》
미추는 몸이 달아 순노부 대가의 팔을 으스러쥐게 잡으며 소리쳤다.
귀족들은 그제서야 펄쩍 정신이 들어 미추의 명령에 복종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다들 어디 갔는가 했더니 여기 모여있었군그래. …》
갑자기 장막안에 울리는 음흉한 목소리에 소스라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고추대가 고부진이 어느새 소리없이 들어와 서있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그의 좌우에는 심복들인 을문과 장대가 버티여 서있고 그뒤로는 무장한자들이 살기등등하여 쓸어들어왔다.
《미추
미추는 속으로 통탄하여마지않았다.
국상의 짐작이 과연 옳았구나, 내가 눈이 멀어 반역자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하여 천추에 한을 남기게 되였구나.
《닥치시오. 제가평의회의 수장은 바로 나요. 페하의 명령을 거역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밝히시오.》
미추가 두눈을 부릅뜨고 이렇게 다몰아대자 고부진의 심복들인 을문과 장대가 검을 빼들었다.
혼비백산한 5부귀족들이 그제서야 벌어진 사태의 엄중성을 깨닫고 미추의 주위에 우르르 몰켜섰다.
《이 무슨 행패요? 그 칼들을 치우지 못할가. …》
순노부 대가가 고부진의 앞을 두팔을 벌리고 나서며 소리쳤다.
《그만들 물러서라.》
고부진의 명령에 을문과 장대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고부진은 삵의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미추와 5부귀족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대들은 모두 어제날의 나의 심복들이 아닌가. 나는 단지 모든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싶었을뿐이네. 그러니 나를 믿고 그냥 따라나서주면 안되겠나? 이 자리엔 제가평의회의 귀족들이 모두 모였으니 어서 결정지어주게. 나를 따라 고구려의 새 하늘을 열것인가 아니면 이 자리에서 값없이 죽겠는가.》
《네놈이 감히 태왕페하를 모반하라고 부추기는거냐?》
미추는 성이 독같이 올라 소리쳤다.
《옳소.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지키고 받들어온 고구려인데 감히 태왕을 반역하라고 부추긴단 말이냐. …》
《지금껏 저놈의 꾀임수에 넘어가 청맹과니로 살아온것이 부끄럽다.》
《내 아들이 지금 군영의 파수장으로 있으니 이제 당장 불러들여 저 역적무리를 쓸어버리게 할테요.》
귀족들이 분이 치솟아 떠드는데 일이 기울어지고있음을 직감한 고부진이 황급히 좌우에 대고 눈짓하였다.
고부진의 심복졸개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덤벼들려는 순간이였다.
《그대들도 이 나라의 록을 먹는 신하라면 어찌 역적무리와 한하늘을 이고 살수 있는가. 고구려사람답게 죽기로 싸워라.》
모두가 호령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방금전까지도 의식이 없이 병상에 누워있던 국상 연구흠이 언제 앓았는가싶게 분노로 몸을 떨면서 고부진에게 다가서는것이였다.
《네놈은 왕족으로서 무엇이 부족하여 감히 태왕페하를 배반하는것이냐. 네놈의 그 더러운 정체를 일찌기 까밝혀놓지 못한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구나.》
고구려의 로신은 중병을 앓는 고령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허리에 찬 장검을 빼여들더니 고부진의 목을 바라고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심복졸개들이 재빨리 상전을 막아서며 칼을 맞받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칠거리는 연구흠을 장대가 달려지나가며 검을 휘둘러 베였다.
《국상어른!…》
국상 연구흠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5부귀족들은 분노하여 적수공권으로 고부진의 심복들에게 달려들었다.
《국상어른, 정신을 차리시오이다.》
미추가 달려가 국상을 안아들었을 때는 치명상을 입어 이미 가망이 없었다. 연구흠은 떨리는 손으로 미추에게 검을 넘겨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절대로… 태왕페하께… 해가 미치지 않도록 하여주게. … 어서!
자네 부친인 영무
국상 연구흠은 끝내 고개를 뒤로 떨구며 미추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미추는 검을 들고 일어섰다.
그의 두눈에서는 분노의 섬광이 무섭게 뿜어져나왔다.
《무엇들 하느냐. 저놈이 검을 들었다. 어서 저놈을 잡아묶어라.》
고부진은 자라목이 되여 황급히 비명을 질렀다.
미추는 주저없이 몸을 날리며 고부진의 머리를 힘껏 검으로 내리쳤다. 순간 쟁강 검이 맞부딪치며 요란한 쇠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장대가 미추의 공격검을 막았던것이다.
미추는 이를 사려물고 사방에서 달려드는자들과 필사적으로 싸웠다.
오래동안 왕당군의 장수로 복무해온 미추인지라 불리한 정황에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성난 범처럼 좌충우돌하였다.
그의 검이 지나치는 곳마다 피줄기가 일어서고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군 했다. 하지만 미추가 아무리 용맹하고 무예가 뛰여나다고 해도 스무명씩이나 덤벼드는 불리한 정황속에서는 오래 견디기가 어려웠다.
《미추
순노부의 대가가 가슴에 칼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웨치는 소리에 미추는 정신을 차리고 불꽃이 튀는 눈으로 고부진을 찾았다.
장대와 을문이 고부진을 부축하고 장막밖을 빠져나가는것을 띄여본 미추는 장검을 치켜들고 그들을 따라 달렸다.
장막밖에서 고부진의 수십명 호위무사들이 다가들자 미추는 검을 휘두르며 그속을 빠져나왔다.
저쯤에서 본영 왼쪽의 장막뒤로 달려가는 고부진과 심복졸개들의 모습을 본 미추는 더 생각할새없이 곧장 그쪽으로 뛰여갔다.
산발적으로 사방에서 뛰여나오는자들을 검을 휘둘러 베며 달리는데 순간 휘익- 소리를 내며 장검이 목을 바라고 곧장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숙여 칼날을 지나보내고 상대의 가슴을 힘껏 내찌르는데 그자는 날래게 허리를 뒤로 꺾으며 검을 간단히 피해버렸다.
보매 무예실력이 대단한자 같았다.
미추는 공격하는 기세를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검을 머리우에서 회전시켜 힘껏 내리쳤다.
상대는 이번엔 피하지 않고 검을 들어 맞받았다.
검이 상대의 검과 맞부딪쳐 머무르는새에 미추는 힘껏 발로 내찼다.
넘어진 상대는 틈을 보이지 않고 뛰쳐일어나 다시 맞받아 공격해왔다. 미추는 그자가 전에 고부진의 장막에서 여러번 본적이 있는 방주라는 검객임을 알아보았다.
고부진의 측근에 머물고있으면서도 언제 한번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보인적이 없는 정체불명의 사나이였다.
그들이 싸우고있는새에 달려온 무사들이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미추는 싸움을 오래 끌다가는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 역적들의 음모를 한시바삐 영락태왕에게 알려야만 했다.
미추는 곧추 찔러들어오는 방주의 검을 물리쳐버리고 서쪽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앞을 가로막아나서는 창검의 숲을 헤쳐버리며 서북쪽의 포위진을 뚫고나왔다.
이때 말을 탄 기마수가 곧바로 마주 달려오는것을 본 미추는 검을 던져 떨구고는 말을 빼앗아타고 달렸다. 뒤에 추격군이 꼬리를 물었다.
얼결에 앞을 막아서는자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으며 달리던 미추는 그만에야 몸을 비칠거리며 말등우에서 기울어졌다. 그의 등에 추격군들이 쏜 화살이 박혔던것이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왔다.
노랗게 느껴지는 눈앞에서 무수한 원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환영이 펼쳐졌다. 어디선가 힘을 내라고 안타깝게 소리치는 부르짖음이 귀전에 들려오는듯싶었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어렸을 때 헤여졌던 아버지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수많은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 하며 싸우던 옛 지기들의 웨침소리인가.
대대로 충의를 신조로 삼아온 충신의 가문에서 태여나 하마트면 역적들에게 롱락될번 하였다는 생각에 가슴은 미여지는듯 아팠다.
죽지 말아야 한다, 살아서 이 일을 영락태왕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내 어깨우에 무겁게 지워져있다.
가물거리는 의식속에서 미추의 뇌리에 한순간 맹광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옛 친우인 유주자사 진의 아들…
역적들의 꾀임에 넘어가 본의아니게 그를 죽음의 함정속에 몰아넣었던 미추였다.
미추는 맹광이 눈앞에 있으면 진심으로 사죄하고싶었다.
그를 시기하였던 지난날을 진심으로 빌고싶었다. 허나 이렇듯 생명이 경각에 이르러 한을 남긴다고 생각하니 가슴은 찢어지는듯 괴로왔다. …
미추로 인한 혼란은 한낮이 가까와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고부진은 장막에 들어박혀 잔뜩 오만상을 찌프리고 앉아있었다.
아까 미추의 무서운 공격에서 간신히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마음은 웬일인지 바늘방석에 앉아있는듯 두렵고 조바심이 갈마들기만 하였다.
아직도 분노로 불타던 미추의 두눈이 장막구석 어디선가 자기를 노려보는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미추에게서 생각지도 않던 불의의 타격을 받은것이 자기앞날에 어떤 무서운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가 생기는것이였다.
애당초 미추가 누구의 아들인가를 잊고있은것자체가 잘못이였다. 미추가 영무의 외아들이라는것을 잊고있었기에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하게 하였던것이였다.
20여년전 진과 영무를 죽음의 함정속에 밀어넣은것처럼 이번에도 그 아들들끼리 서로 싸우게 하여 손쉽게 제거하려던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권력욕으로 하여 고부진은 인간의 리성을 모두 잃었다. 오직 권력이라는 그것 하나만을 위해 죄과로 덧쌓아지는 인생행로를 쉬임없이 달려왔다.
인간이 권력욕에 환장하면 인간의 면모를 모두 버리고 추악하고 더러운 야심만이 남게 되는 법이다.
고부진은 그것을 위해 한때는 혈전장에서 함께 싸우기도 한 전 유주자사 진을 모함하였고 근위군의
그의 이러한 권력욕은 나중엔 자기를 낳아 키워준 고국인 고구려를 배신하는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고부진은 심복들이 장막안으로 우르르 밀려들어와서야 깊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어르신, 미추를 놓쳤소이다. 헌데 그놈이 서쪽으로 갔으니 살에 맞은 놈이 어딜 가겠소이까?…》
고부진은 두서없이 지껄이는 장대의 멱살을 죄여잡고 으르렁거렸다.
《내게 필요한것은 미추의 머리다. 사방에 무사들을 풀어서라도 반드시 그놈의 머리를 베여 내앞에 가져다놓거라.》
《저… 그런데 귀족들은 어떻게 하겠소이까? 다섯이 죽고 둘은 중상을 입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포박하여 장막안에 가두었소이다.》
을문의 말에 고부진은 두눈을 부릅떴다.
《아직은 살려둬라. 이제 그자들을 처치하면 그 자식놈들이 움직일수 있다. … 부하들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 이 사실이 절대로 밖에 새여나가게 해서는 아니된다. …》
장대와 을문이 황황히 뛰쳐나가자 이때까지 팔짱을 끼고 구석에 잠잠히 서있던 방주가 천천히 다가왔다.
《대인어른, 지금 도착한 길이오이다.》
《왜 이리 늦었느냐?》
고부진이 얼굴의 주름살을 반듯이 펴고 반가와하는데 방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르신을 해하려던 미추란 놈과 싸우느라고 좀 지체됐소이다. …》
고부진은 음을한 어조로 방주의 말허리를 잘랐다.
《갔던 일은 어찌 되였느냐?》
《모두 대인어른의 의도대로 되였으니 근심마소이다. 평주자사 모용귀어른께서 우리 일을 도와주겠다고 굳게 약조하였소이다.
평로절도사로 새로 임명된 모용선이 이미 저의 안내로 전선을 넘어와 저기 맥곡에 1만의 정예군사를 매복시켰소이다.》
고부진은 아직 석연치 않은지 고개를 한쪽으로 비틀었다.
《모든것이 척척 맞아떨어지니 어쩐지 가슴이 볼안하구나. 평로절도사 모용선이 1만의 군사로 우릴 도우면 연군의 전선에도 공백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놈들의 행동거지는 도무지 믿음성이 없거던. …》
《그들에게 왜 타산이 없겠소이까.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락태왕을 제거한다면 그깟 맹광의 군사야 있으나마나지요. 내 그래서 대인어른의 뜻을 평주자사 모용귀에게 전했소이다. 거사만 성공한다면 료서땅을 연나라에 넘기고 료동으로 모든 군사를 철수하겠다고 했소이다.》
방주는 랭소를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고부진은 한순간 예리한 검에 찔린듯이 흠칫 놀랐다가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마에 흥건히 내배인 땀을 소매로 훔치며 신음소리를 내였다.
《기다리던 때가 드디여 왔구나. 허나 내 야망을 이루는 길이 과연 이 길밖에 없단 말인가.》
괴롭게 신음소리를 내던 고부진이 별안간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여기서 내가 주저한다면 력사에 역적으로 남게 될것이고 이기면 천하를 얻게 된다.
고부진은 마지막 한쪼각 량심마저 스스로 짓밟아버리고나서 방주를 향해 소리쳤다.
《서둘러라. 이제 곧 담덕이 여기로 올것이다. 넌 맥곡으로 달려가 모용선절도사의 군사로 담덕이 골짜기로 들어서거든 빠져나갈수 없게 길목을 차단하라고 해라. 오늘의 거사는 전적으로 너의 역할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