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국강상의 전설

제 2 장. 국강상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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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광이 이끄는 3만 5천명의 고구려군과 1만 5천명의 신라군 도합 5만명의 대군이 전쟁의 종결을 위한 마지막총공격전을 개시했다.

성염성에 틀고앉은 수천의 왜군을 섬멸하고 포로로 붙잡혀있는 수백명의 고구려사람들과 천여명의 신라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싸움이기도 했다.

일부 고구려무장들과 신라장수들은 고립된 성을 포위하고 왜군이 항복할 때를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맹광은 이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어떤 대가를 치르어서라도 성염성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전쟁을 끝낼 결심이였다.

고구려군이 야밤삼경에 기습을 해온 아라인결사대를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천여명의 희생을 낸데다가 또한 아라인들이 깊은 산중으로 쫓겨갔으나 성염성의 왜군과 협공하여 고구려-신라련합군의 보급로를 공격할수도 있었던것이다.

한편 신라각지에서 왜의 패잔병들이 준동하고있는 때인것만큼 한시바삐 성염성을 타고앉아 왜군의 주력을 섬멸하고 전쟁을 종결짓지 않으면 소요가 끊기지 않을것이였다.

적정에 의하면 간신히 한수이북지역에서 고구려군의 공격을 막아낸 백제가 다시 무력을 동쪽으로 집결시킨다고 하였다.

전쟁이 종결되기도 전에 백제의 원군이 들이닥친다면 또다시 이 땅은 동족상쟁의 혈전장으로 화할것이였다.

어떤 희생을 내더라도 빨리 성염성을 함락시키고 왜군의 주력을 섬멸할뿐아니라 백제가 새 전쟁을 도발하기 전에 신라를 안정시켜야 하였다. 이것은 맹광의 결심이자 이 기회에 삼국통일을 앞당기려는 영락태왕의 뜻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였다.

천수백명의 가야군이 아라인결사대의 기습공격이 좌절되자 성문을 열고 항복하여왔으나 아직도 성염성안에는 수천명의 왜군이 우글거리고있었던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더는 갈데가 없는 왜군은 죽기로 싸우자고 할것이다.

속담에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았는가.

맹광은 소수의 병력을 내여 성염성을 건드려보았다.

예측한대로 왜군은 발악적으로 나왔다.

맹광은 마지막총공격전을 들이대기 위하여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모든 무력을 공격력량으로 편성하였다.

공성전에 쓸 무기를 주런이 일선에 배비한 고구려-신라련합군은 맹광의 령만을 기다렸다.

맹광은 마지막 한발자국을 앞두고 잠시 망설이였다.

일단 총공격전을 들이대자니 성안에 포로로 잡혀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걱정되였던것이다.

이들은 모두 고구려와 신라의 백성들이였다.

왜군에 포로로 붙잡혀 갖은 곤욕을 다 겪으면서도 고구려군이 구원해주기를 손꼽아기다리는 백성들이였다.

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된다면 고구려군의 이번 신라지원이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마침내 맹광은 마지막 최후의 싸움을 앞두고 왜군이 도사리고있는 성염성안에 사자를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누굴 보낼것인가?! 자칫하면 영영 돌아올수 없는 길이다. …

맹광이 자기 결심을 터놓자 신라의 볼모인 실성이 제일먼저 호응해나섰다.

《중리도독께서 참으로 옳은 결심을 하셨소이다. 이번 싸움에서 죄없는 백성들까지 해를 입게 해선 안되지요. 나 역시 중리도독의 의견에 찬성이오이다. …》

잠시 말을 끊고 혀로 마른 입술을 추기고난 실성은 이렇게 말끝을 맺았다.

《내가 사자로 왜군진영에 들어가겠소이다.》

맹광은 한참동안 실성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성대인의 뜻을 잘 알겠으나 대인어른께서 가셔서는 절대로 아니되오이다.》

실성이 얼굴을 붉히면서 한발 나섰다.

《나는 왜 안된다는것이요? 그곳에는 우리 신라백성들이 있소이다. …》

《대인은 신라의 왕족으로서 함부로 모험하여서는 안될줄 아오이다. 성안에는 고구려사람들도 있소이다.》

맹광은 실성이 무어라고 더 말을 꺼내려는것을 손을 쳐들어 막고 수하의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맹광의 의도를 깨달은 수하장수들이 앞을 다투어나섰다.

맹광의 시선이 제일먼저 소리치며 앞에 나선 도루와 수신에게 머물러섰다.

먼저 도루가 말을 꺼냈다.

장군, 소장을 보내주소이다. 소장은 아주 어렸을 때 량부모를 오랑캐놈들에게 잃고 포로로 붙잡혀있어 포로된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소이다. 이번길에 반드시 왜군의 항복을 받고 포로들을 구출해내겠소이다. …》

도루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수신이 불끈 성을 내며 앞을 막아섰다.

《왜 또 자네란 말인가. 이번에는 내가 나설 차례일세. … 장군, 소장을 보내주소이다. 장군도 아다싶이 이 몸은 원래 물에 익숙한 몸이라 륙전에서 별로 이렇다할 공을 세우지 못하였소이다. 도루는 용맹한 기마수이니 앞으로도 큰 공을 세울것이오니 소장을 보내주소이다.》

맹광은 수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10년전 수하의 일개 군사들이였던 그들이 오늘은 이렇듯 전장에서 한몫을 담당하고있는 유능한 무장들로 자라났다.

어제날의 평범한 사람들이 대고구려를 지키는 성벽으로 성장했던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맹광을 따라다니며 죽음의 전장에서도 두려움을 몰랐다. 허나 맹광은 가장 믿고 아끼는 부하들인 도루와 수신을 성염성에 떠밀어보낼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든 어차피 가야 할 길이였다. 설사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고구려를 위해,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가야 했다.

그들의 부모처자들이, 피를 나는 형제들이 그 손길을 애타게 바라고있는것이다.

맹광은 수신의 어깨우에 무거운 손을 올려놓았다.

《우리가 처음으로 거란원정을 떠나던 일이 생각나는가?》

맹광의 물음에 수신은 환하게 웃었다.

《생각나고말구요. … 고구려무사의 기개를 떨치고 포로로 끌려간 혈육을 구원하고서 개선한 자랑스런 그 나날들을 어찌 잊을수가 있겠소이까.》

《그때 나를 원정길로 떠나보내면서 태왕페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고구려사람의 기개를 떨치고 붙잡혀간 백성들을 찾아오라 령을 내리셨지. …》

맹광은 하던 말을 잠시 끊고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마저 이었다.

《그리고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라 당부하시였다.》

수신은 웃었다. 순박하기만 했던 어제날의 배사공은 맹광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향집에라도 가는 자세로 짐짓 웃음을 지어보였던것이다.

《나도 왕당의 군사이오이다. 부하가 사지판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던 페하의 모습을 늘 곁에서 뵈웠소이다. 장군, 걱정마소이다. 내 꼭 살아서 돌아오겠소이다. 빨리 이번 전쟁에서 이기고 페하께로 가사이다. 그때 소장이 장군께 펄펄 뛰는 숭어생선국을 푸짐히 대접하겠나이다. 반드시 이 손으로 잡은 생선을 말이오이다. …》

맹광은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돌려버렸다.

맹광뿐아니라 도루와 다른 장수들, 심지어 수신과 안면이 없는 신라장수들까지도 그의 비장한 결심에 감동되여 눈물을 흘렸다.

수신은 단신으로 군영을 떠나 성염성으로 말을 달렸다.

때를 같이하여 맹광은 전군에 공격준비를 끝내도록 하였다.

만에 하나 왜군이 조금이라도 불손한 태도를 보인다면 단숨에 짓밟아버릴 결심이였던것이다.

최후의 싸움을 앞두고 하늘과 땅은 정적속에 잠기였다.

성염성 상공에서는 바다에서부터 불어온듯싶은 사나운 바람이 울부짖었다.

눈보라에 휩싸인 성루의 합각지붕이 은백색을 띠며 번쩍이였다.

낮에 따뜻한 기운을 받아 녹아버렸던 눈석이물이 밤새껏 사납게 울부짖는 찬바람에 꼿꼿하게 얼어붙었으며 쌀알갱이같은 서리가 하얗게 성안을 뒤덮었다.

이날 밤 동쪽성문의 오물버리는 곳에서 참혹한 살륙이 벌어졌다.

백여명의 백성들이 왜인들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버티였다는 단 한가지 리유로 하여 팔을 뒤로 결박당한채 두명씩 비탈진데로 끌려가 참살당했다. 눈가루가 섞인 바람이 아츠러운 비명소리를 지워버렸다. …

한편 야수의 무리로 변해버린 왜장들은 사사히꼬의 장막에 모여들어 죽어도 항복을 할수 없다는 결론을 펴는 한편 포로로 붙잡은 고구려와 신라의 백성들을 내세워 고구려군의 공격을 저지시킬 무서운 흉계를 꾸몄다.

사사히꼬는 령을 내려 고구려군의 사자를 무참하게 베여죽이고 포로들을 끌어내여 성루에 올려세웠다.

맵짠 추위, 콕콕 쏘는듯 한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속에 왜병들은 성안을 뛰여다니며 전투서렬을 재정비했다.

왜장 사사히꼬는 끝까지 고구려군과 싸울 작정이였던것이다. …

소운은 성을 빠져나가다가 왜병들에게 붙잡혀 남쪽성문으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벌써 수백명은 실히 되게 고구려사람들과 신라사람들이 역시 결박된채로 끌려와있었다.

왜병들은 흉악하게 상통을 이그러뜨리고는 조금이라도 불복하는 기색이 보이면 무자비하게 두들겨패는것이였다.

붙잡혀와있는 사람들은 태반이 로약자가 아니면 녀인들과 아이들이라 왜병들의 행패를 그냥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왜병들의 행패가 그전과 달리 도를 넘는것이여서 포로들의 눈가에는 하나같이 공포와 불안이 비꼈다.

소운은 제 한몸의 신상보다도 상이(치희)에 대해 걱정하고있었다.

어제밤에 헤여진 이후로 지금까지 감감 무소식이여서 가슴이 졸아들고있었다.

소운은 고구려군이 성을 공격해오기 전에 상이와 함께 탈출할 결심이였다. 소운이 혼자서라도 탈출할 결심이였다면 기회는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어찌 상이를 두고 혼자 떠날수 있겠는가.

날이 새면 뒤따라오겠다던 상이가 한낮이 지나고 밤이 되여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상이가 불행을 당했는가싶어 가슴을 조이고있던 소운은 그만에야 성을 빠져나가지 못한채 왜병들에게 다시 붙잡혀 끌려왔다.

이제 탈출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왜병들이 삼엄하게 창검을 들고 서있는 속을 연약한 녀인의 몸으로 어떻게 뚫고나갈수 있겠는가.

《아버님, 저놈들이 우릴 무엇하러 여기에 끌고왔나이까?》

소운은 왜병들의 눈을 피해 나이지긋한 로인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로인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장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임잔 아예 그믐밤이군. … 이제 고구려군이 공격해오면 우릴 방패로 써먹는다네. 저 흉악한 놈들이 글쎄 이런 흉계를 꾸밀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명색이 사내라는것이 이렇게 당하구만 있으니 원통하기 그지없네. 일찌감치 죽어버렸더라면 차라리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걸… 고구려사람으로 태여나 어찌 자기 군사의 발목을 붙잡는 치욕을 겪을텐가.》

소운은 순간 아연하여 굳어져버렸다. 로인의 말을 도무지 믿을수 없었다. 그럼 내가 결국은 고구려군의 발목을 붙잡는 치욕스러운 존재가 되고마는가?

맹광을 다시 만나려고, 그와의 깨끗한 사랑을 지키자고 이날이때까지 모진 고초와 곤난을 이겨내였건만 그끝이 바로 이런것이란 말인가?!

날이 밝으면 고구려군이 공격해온다. 고구려의 존엄과 영광을 지키자고 최후의 섬멸전에 나설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던 맹광이 있을지도 모를 고구려의 장한 아들들의 발목을 내 어찌 붙잡으리오. …

죽음이 두렵다고 왜놈들의 강요에 굴복할수는 없었다.

소운의 두눈에서는 무서운 불빛이 이글거리며 지펴올랐다. 언제나 연약하고 부드럽게만 느껴지던 소운이 다시 억세고 강한 고구려녀인으로 되돌아간것이였다.

소운은 가슴에 품고있는 은장도를 꼭 그러쥐고 그 어떤 결심으로 가슴을 불태우고있었다. …

사나운 추위속에 태질하던 지루한 밤이 지새고 새날이 밝아왔다.

밤새껏 불어댄 눈보라는 새벽녘이 되자 언제 그랬던가싶게 잦아들고 대지는 해가 떠오르자 봄기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강기슭에 뿌리를 든든히 박고 서있는 버드나무가지마다 물이 오른것이 완연했다.

이제는 마지막추위마저 물러가버린듯이…

맹광은 마지막눈보라가 광란하는 긴긴밤을 새며 성염성에 들어간 수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저녁무렵이면 돌아온다고 하였던 수신은 장밤을 지새고 날이 밝은 지금에도 돌아올줄 몰랐다.

불안한 생각에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그는 수신이 성염성으로 떠난 시기부터 줄곧 무사히 돌아오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고있었다. 지금 이 시각까지 얼마나 많은 고구려의 군사들이 낯설은 타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가.

그들은 모두 고구려의 영광을 떨치기 위해 죽음도 서슴없이 맞받아나갔던것이다.

오래동안 자기와 피의 결전장을 헤쳐온 수신을 여기에서 잃고싶지 않았다.

차라리 맹광자신이 성염성에 들어갔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갈마들었다.

장군, 저기 성루를 보소이다.》

맹광이 부하들이 가리키는쪽을 바라보니 성루우에 왜군의 조잡한 기치들이 수풀처럼 일어서며 흰옷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눈에 띄였다.

왜병들이 무슨 음흉한 계략을 꾸미고있는것인가. 혹시 왜병들이 수신을 살해하였다면?…

성염성의 성문이 열리더니 주인없는 한필의 말이 구슬피 울며 고구려의 진영을 향해 달려왔다.

맹광은 그 말이 수신의 애마인 가라말임을 알아보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가라말의 안장에는 피묻은 수신의 머리가 매달려있었다. …

고구려의 군사들은 물론 신라군사들도 분노했다.

왜놈들의 배신적인 행위에 그들모두가 치를 떨었다.

전장의 례법도 갖출줄 모르는 미개하고 음흉한 야수의 무리를 한놈도 남김없이 쓸어버릴 증오로 고구려의 군사들모두는 가슴을 불태웠다.

맹광은 피흐르는 수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혈전장에서 10여년간 생사를 같이하였던 수신의 참혹한 모습앞에서 울분에 몸을 떨었다.

드디여 맹광은 눈을 들었다. 그의 두눈이 황황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수신의 복수를 해야 한다! 적의 칼날아래 쓰러진 수천수만의 고구려사람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

맹광은 천천히 장검을 빼여 성염성을 가리키며 노성을 터뜨렸다.

《공격하라!》

5만의 고구려-신라련합군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성염성을 공격했다.

왜인들의 발악적인 반항은 불과 반나절도 넘기지 못하였다. 수신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모든 군사들은 타오르는 적개심을 안고 불가항력적인 용맹으로 왜군을 무자비하게 짓뭉겠다.

고구려군의 무서운 공격에 수천명의 왜병들이 무리로 쓰러졌다.

사사히꼬는 성벽우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부하들의 시체를 굽어보며 이를 갈았다.

이제는 바다를 건너온 1만여명의 구노국군사가운데서 남은자는 수백명밖에 안되였다.

사사히꼬의 운명이 아니, 왜인들이 간신히 일으켜세웠던 야만인의 첫 국가라는것이 이렇게 멸망하고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야수는 포악해지기마련인지라 사사히꼬는 마지막 최후의 발악을 하기 시작하였다.

외성을 함락하고 내성을 향해 총공격전을 들이대고있던 고구려군은 뜻밖의 광경에 부딪쳐 전진을 멈추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는 오도가도 못하게 된 왜병들이 수백명의 고구려와 신라의 백성들을 성벽우에 한줄로 주런이 내세운것이였다.

매 사람들의 뒤에는 날이 시퍼런 피묻은 칼을 세워든 왜병들이 붙어있었다.

인질로 끌려나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늙은이이거나 아녀자들이였다.

《물러서라. 물러서지 않으면 이놈들을 차례로 베여 죽여버릴것이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수천수만의 함성과 죽어가는자들의 비명소리로 떠나갈듯 하던 전장이 불시에 정적속에 잠겨버렸다.

오직 들리는것은 왜병들의 단말마적인 악청뿐이였다.

수만의 고구려-신라련합군 군사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으면 좋을지 몰라 대장기쪽만 쳐다보고있었다.

맹광은 너무도 충격적인 현실앞에서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 공격을 들이대면 포로로 붙잡힌 수백여명의 고구려백성들이 참살되고말것이였다.

하다면 이대로 물러설것인가. 신라땅에 피묻은 발을 들여놓은 왜놈들을 고스란히 돌려보낼수는 없지 않는가.

왜놈들이 고구려군이 퇴군한다고 해서 포로로 붙잡힌 사람들을 순순히 놓아줄리 없었다. 공격할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물러설것인가?!…

수신이 자신의 생명까지 서슴없이 내대며 소원한것을 허망하게 저버릴수 없었다.

고구려군이 퇴군할 기미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자 악이 치받칠대로 치받친 왜장 사사히꼬는 제 손으로 검을 꼬나들고 뛰쳐나와 적아가 바라보는 속에서 무고한 포로들을 마구 베여버렸다.

순식간에 십여명의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성벽우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맹광은 분노로 온몸을 불태우며 저도 모르게 한발자국 내디디였다.

수하장수들이 뛰여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장군, 고구려백성들이 도륙당하고있소이다. 잠시 뒤로 물러섰다가 좋은 계책을 찾으시오이다.》

《죄없는 백성들이 참혹하게 화를 입게 하는것보다 차라리 왜병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달리 계책을 강구하는것이 어떻소이까?…》

맹광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을 들어 부하들을 꾸짖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우리가 물러선다고 해서 저들이 구원될수 있겠느냐?》

《달리 계책이 있소이까. 우리가 손에 검을 든것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자고 든것이 아니겠소이까.》

맹광은 손에 든 장검으로 성들을 내리치며 피의 절규를 하였다.

《아! 원통하구나. 간악한 적의 흉계앞에 이렇게 물러서야 한단 말인가?》

혼란된 고구려군진을 내려다보며 왜장 사사히꼬는 미친놈처럼 껄껄거렸다.

《물러서라. 물러서면 포로들을 살려보내겠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공격할 기미가 보이면 모두 죽여버리겠다. …》

바로 이때였다.

포로들속에서 웬 처녀 하나가 불쑥 나서서 성벽우에 올라서는것이였다.

머리는 풀어져 흐트러져있고 입고있는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모습이였지만 처녀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왔다.

그는 소운이였다.

그렇게도 애타게 그리워했고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맹광이 수만명의 고구려군사들을 이끌고 용맹하게 싸우고있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 소운이였다.

고구려군진의 선두에서 나붓기는 맹광의 대장기가 소운의 눈앞에 점점 크게 안겨왔다.

이제 무슨 말이 더 필요하며 무엇을 더 바라랴.

세상에는 이름이 같은 사람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아도 저기 진두에서 고구려군을 이끄는 장수가 맹광임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고 있는 소운이였다.

소운은 맹광의 장한 모습을 바라보는것으로만도 무한히 행복하였다.

다만 그를 만나 무정하게 끊어졌던 사랑의 금슬을 다시 잇지 못하는것이 원망스러울뿐이였다.

왜병들이 당황망조하여 황급히 소운이를 끌어내리려는것을 사사히꼬가 소리쳐 저지시켰다.

《그냥 놔두어라. 고구려놈들이 저년의 모습을 보고는 곧 물러가버릴것이다.》

소운이는 바람에 마구 흩날리는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고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성벽밑에서는 수만명의 고구려-신라련합군 군사들이 그 어떤 야릇한 마음으로 이름도 모를 미모의 고구려처녀를 올려다보고있었다.

맹광도 성벽우를 올려다보고있었다. 그의 심장이 흉벽을 뚫고 튀여나올것처럼 세차게 요동쳤다. 머리속에서는 피가 세찬 격랑을 일으키고있었다. 소운이가 아닌가. … 아니, 절대로 그럴수 없다. 내가 분명 착각하고있을것이다. 소운이가 어떻게 신라땅에 있을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부정을 해도 10여년전 가마지골에서 사랑을 약속했던 소운이와 몸가짐이 너무나도 꼭같은 처녀였다.

맹광은 그 처녀가 소운이가 아니기를 바랐다.

아무리 10여년간 전장에서 창검의 숲을 헤쳐온 무사일지라도 이렇듯 모진 운명의 충격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던것이였다.

두사람의 시선이 서로 부딪쳤다.

모진 세월의 풍파속에서 서로 안타까운 열망으로 모대기며 어느 한순간도 잊지 못하던 그들이 이렇듯 생사의 절정에서 만날줄이야. …

천만마디 말보다 그들의 눈은 더 뜨겁고도 열렬한 절규를 하고있었던것이다.

비장한 결심을 내린 소운이는 평온해진 마음으로 사랑하는 맹광을 바라보며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고있던 상봉의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피타게 부르짖었다.

(맹광오라버님, 공격해주세요. 저는 살아도 죽어도 언제나 오라버님의 곁에만 있을거예요. …)

소운이는 왜병들이 미처 손쓸새없이 서슴없이 성벽밑으로 연약한 몸을 던졌다.

공포와 전률의 한순간!…

적아가 모두 너무도 뜻밖의 광경에 넋을 잃고 굳어져버렸다.

그것도 잠시뿐이고 왜병들은 공포의 전률로 비명을 질렀고 지금까지 선뜻 발을 내짚지 못하고있던 고구려군의 머리우로는 커다란 파문이 훑어지나갔다.

함성이 일어났다.

수만명의 고구려군사들은 격분과 증오로 이를 갈며 일제히 노도와 같이 적진을 들이덮쳤다.

굳건한 성벽이 모래성마냥 무너져내렸다.

성문을 부시고 들어간 고구려군사들은 맞다드는 왜병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죽였다.

분노한 고구려군사들은 한놈의 왜병도 포로로 붙잡지 않았다.

온 성안이 죽어가는 왜병들의 비명소리로 떠나갈듯 하였다.

드디여 성염성은 함락되고 왜군은 전멸되였다.

전쟁은 끝났다. …

맹광은 가렬처절한 전장이였던 성벽밑에서 정신없이 헤매이고있었다.

적아의 시체가 산처럼 쌓인 곳으로 뛰여들어갔다.

아직까지도 맹광은 아까 성루에서 몸을 던진 그 처녀가 제발 소운이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있었던것이다.

제 눈으로, 두손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수가 없었다.

그처럼 모진 고초를 겪은 소운이가 행복을 눈앞에 두고 영영 떠나간다면 맹광은 더이상 지탱할수 없을것만 같았다.

지금 이 시각까지도 소운이와 줄곧 마음속으로 주고받았던 그 모든 애틋한 추억이 이렇게 참담하게 산산쪼각나야 하는가?!

아니다, 그는 죽지 않았다. 내가 너무도 소운이를 원하던 나머지 착각을 하였다면?…

맹광의 발걸음이 별안간 굳어져버렸다. 작고 부드러운 흰손에 은장도를 꼭 쥐고 고요히 누워있는 처녀! 분명 소운이였다.

전장의 살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

마치 조용히 자고있는듯 생시와도 꼭같은 소운의 모습이 맹광의 시야에 비껴든것이였다. 소운의 피기 잃은 얼굴은 몹시 창백하였지만 고구려를 위하여, 사랑하는 맹광을 위하여 자기의 한몸을 바친것이 긍지로운듯 평온함이 어리여 마치 따뜻한 온기를 내뿜고있는듯 했다.

맹광은 떨리는 손으로 그처럼 그리워마지않던 소운을 안아들었다. …

 

400년 전역에서 이룩한 고구려군의 성과는 대단히 컸다.

그것은 수만의 대군을 내여 신라를 구원하였다는데만 그치지 않는것이였다.

전쟁이 끝나 파멸의 위기에서 구원된 신라의 나물니사금은 너무도 감격하여 이전의 관례를 깨뜨리고 자기가 직접 고구려땅으로 찾아와 영락태왕에게 사의를 표하고 조공례물을 바쳤다.

전쟁후에도 고구려군은 2만명의 무력을 신라땅에 주둔시켜 신라의 요충지와 전방지대에 항시적으로 상주하면서 백제, 가야, 왜의 침공을 막아주었다.

400년 전역으로 고구려는 서로 흩어진 겨레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일하는데 한발자국 큰걸음을 내짚게 되였다.

또한 고구려의 동남방경계지대로 되였던 소백산줄기 북쪽지방에서의 령토완정을 공고히 하고 령토팽창에 미친 백제를 다시는 머리를 들수 없게 짓밟아놓는 계기로 되였다.

전쟁이 종결된 후로 가야, 왜는 물론이요, 대국이라 자처하던 백제도 다시는 고구려의 위력에 항거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영락태왕 담덕은 통일성업을 이루기 위한 길에서 멈춤이 없이 곧바로만 달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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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ger - - coder - 201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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