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국강상의 전설
제 1 장. 아침노을은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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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년 9월 어느날이였다.
국내성을 감돌아흐르는 경강(오늘의 압록강)은 고요한 정적속에 소리없이 흐르고있었다.
별이 총총한 하늘의 어스름빛을 반사하고있는 강물은 이따금 처절썩 물갈기를 날려 기슭을 깎으며 흐르고있었다.
강아래쪽에서부터 찬바람이 불어왔다.
불현듯 경강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더니 그리 크지 않은 중선 하나가 물결을 거슬러 국내성을 향해 오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중선은 돛을 모두 내리우고 바람을 맞받아 노를 힘껏 젓고있었다.
10여개의 노가 부지런히 규칙적으로 움직여 어느새 중선을 국내성나루터에로 접근시키였다.
《어디서 오는것이냐?》
중선이 정박장에 다가들자 나루터를 관리하는 도승이 네명의 군사를 데리고 기슭으로 나와 위엄있게 소리쳤다.
《예, 비사성에서 왕성으로 오는 공물배오이다.》
갑판우에서 키를 잡고있는 도사공이 공손하게 대꾸하였다.
《군령에는 한밤중에 정박장에 배를 갖다대지 못하게 되여있다. 그러니 강심에 닻을 내리우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거라.》
도승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중선을 훑어보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도사공이 정박장에 대고 다시 말을 던졌다.
《이밤으로 짐을 부리우고 돌아가야 하오니 어서 승인해주시오이다.》
도승은 잠간 생각하는듯 하더니 배를 정박장에 갖다댈것을 승인했다.
《좋다, 하지만 수상한자들이 숨어있을수 있으니 내가 직접 뒤져봐야겠다.》
중선이 기슭에 닿자 긴 널판자가 건너오고 도승이 군사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도승이 군사들과 함께 배에 오르고보니 짐배와는 너무도 다른 점이 많았다. 또한 갑판에서 어물거리는자들도 전혀 사공같아보이지 않아 도승은 검을 쑥 뽑아들고 통통히 호령하였다.
《모두 선미쪽으로 가섰거라. 꿈쩍하는 놈은 사정없이 벨테다.》
군사들이 도승의 령으로 갑판우를 뒤지고나서 선실로 들어서려는 찰나 선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험상궂게 생긴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자들의 손에 들린 병쟁기를 보고 도승과 군사들은 깜짝 놀랐다.
《이자들은 경강에 출몰하는 수적이 틀림없다. 사정없이 죽여라.》
도승이 부하들을 독려하며 선실에서 몰려나온자들에게 달려들었으나 칼 한번 어울려보지 못하고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도승의 부하들도 무참히 칼에 찍혀 갑판우에 나딩굴었다.
정박장에 남은자들이 혼비백산하여 뛰여달아나려는것을 수십여대의 화살이 날아가 그들의 팔다리를 꿰였다.
중선에서 무장한 무사들이 무려 20여명이나 배전을 넘어왔다.
맨 나중에 넘어온 보통의 키에 야멸차게 생긴자가 수하졸개에게 정박장바닥에 화살에 맞고 쓰러져있는 군사들을 턱짓하였다.
《숨통들을 끊어주라.》
병쟁기들이 희미한 달빛에 번쩍거리자 나지막한 비명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이젠 어찌하시려이까? 날이 밝으면 온 성안이 발칵 뒤집힐텐데. …》
도사공으로 가장한 사나이가 우두머리에게 소곤거렸다.
우두머리인듯싶은 사나이가 팔짱을 낀채 픽 비웃음을 흘렸다.
《흥, 그래도 한때는 신성의 태수로 수만군사를 호령하던 나다. 이깟놈들 몇을 베였다고 잡힐것 같으냐? 대인어른을 만나뵈온 후에 곧 뒤따를것이니 한발 먼저 배를 타고 내려가거라.》
우두머리사나이는 달빛에 두눈을 번뜩이였다.
《모두들 서둘러라. 시각이 급하다. 아민이는 어서 배를 타고 떠나고 시체들은 모두 물속에 처박도록 해라. 날이 밝으면 순라병에게 기찰당하게 된다.》
그는 다름아닌 옛 신성태수 마고였다.
영락태왕의 분노를 사서 신성태수직에서 쫓겨난 마고는 수배중이라 수년간 종적을 감추었다가 이렇듯 심복 아민을 앞세우고 경강의 나루터에까지 나타난것이였다.
마고는 아민이 배를 끌고 남쪽으로 떠나간 후 20여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황급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국내성의 서문거리는 주로 왕족이나 높은 급의 고위귀족들만이 살고있는 거리로서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어깨를 비비며 자리잡고있었다. 또한 이곳은 집집의 처마들사이로 골목길이 뻗어있어 대낮에도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미궁과도 같아 길을 찾아 나오기 어려운 곳이였다. 매 귀족들이 가신이나 호위무사들을 수십 또는 수백명이나 가지고있어 관청에서도 특별히 시선을 돌리지 않아 오히려 빈민가의 거리들보다 수상쩍은자들이 더 많이 오고가기마련이였다.
서쪽성문곁의 낮은 곳을 넘어들어온 마고와 그의 졸개들은 인적없는 서문거리에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하여 골목길을 가로세로 누볐다.
집집의 대문마다 내건 등의 빛을 피해 몸을 숨겨가며 드디여 목적하고있는 고추대가 고부진의 대문앞까지 다달았다.
사위는 괴괴한 정적속에 잠겨있었다.
《너희들은 여기 골목에 숨어있다가 내 신호에 따라 움직이거라. 절대로 순라병에게 들켜서는 안된다.》
마고는 제 부하들에게 이렇게 이르고는 제잡담 몸을 일으켰다.
살금살금 삵의 걸음으로 대문앞까지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청지기사나이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그전부터 마고와 안면이 깊은자였는지 얼굴을 보자마자 반색하는것이였다. 마고는 소리를 낮추어 청지기와 몇마디 주고받더니 열려진 대문안으로 새여들어갔다.
넓은 마당을 지나 중문을 벗어나니 커다란 사랑채가 자태를 드러냈다. 사랑채안에는 사람이 여렷 되는지 마루밑에 가죽신이 여라문걸레나 놓여있었다.
마고는 마루우로 올라서려는 청지기를 얼른 뒤로 끌어당겼다.
《저안에 지금 누가 있느냐?》
마고가 이렇게 소리를 낮추어묻자 청지기는 얼떠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대인어른의 수족되는 5부의 귀족들이 모였소이다.》
마고는 청지기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나서 바짝 귀를 강구었다.
이미 여러차례 격론이 오고간듯 문밖으로 새여나오는 말들은 어둡고 침침하기 그지없었다.
《…대인어른, 페하의 독단을 막아야 하오이다. 계속 이렇게 나가다가는 우리 5부귀족들이 문지기노릇밖에 하는것이 없을것이웨다.》
귀에 익은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마고도 안면이 깊은 순노부의 대가였다.
《페하께서 도대체 정신이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하루가 멀다하게 군비를 내라고 하시니 우리 귀족들이 금알을 낳는 닭이요, 뭐요? 어디 그뿐이요? 태왕의 몸으로 도성인 국내성에 머물지 않고 줄창 평양성에 나가있는 진의도가 무언지 모르겠소이다.》
절노부의 대가가 악에 받쳐 큰소리를 망탕 내뱉자 늙은이의 음침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태왕의 신하된 몸으로 아무 소리나 해서 쓰겠는가. 페하께서 젊은 혈기에 국내성에만 머물러있기가 갑갑하여 밖으로 나도는것이라고 생각하게나. …》
집주인인 고추대가 고부진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더는 참지 못하겠소이다. 가뜩이나 전쟁에 충당할 군비때문에 허리가 휘여들 지경인데 평양성을 건설할 인력을 내라, 물자를 내라 하면서 달달 볶아대니…》
절노부의 대가가 계속 불만을 터놓는데 귀족 한명이 나서서 조심히 말을 꺼냈다.
《대인어른, 그 소문이 사실인지 모르겠소이다. 태왕이 평양성에 아홉개의 대사원을 건설하고 평양성을 고쳐쌓는것은 멀지 않아 천도하려는 생각이 있기때문이라던데…》
《뭐요?! 아니, 그럼 우린 어찌된다는것이요?》
5부귀족중에 누군가 이렇게 놀라서 부르짖자 고추대가 고부진이 한마디 하였다.
《어찌되긴 뭐가 어찌된다고 왜들 호들갑인가. 이 고부진이 있는 한 천도같은 일은 없을것이니 그 입들을 조심하게. 그것보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것은 이런 때일수록 제각기 떠들것이 아니라 하나로 힘을 모으는것일세. 그대들이 내게 힘만 실어준다면 모든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네. …》
사랑채안이 부산스러워지자 마고는 청지기를 억지로 끌고 뒤채로 돌아갔다.
문이 벌컥 열리며 사랑채안에 가득 앉았던 5부귀족의 무리가 우르르 마루우로 쏟아져나왔다.
《그러게 제가 뭐랍디까. 대인어른께서 중요한 대화를 나누시니 객실에서 기다려달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청지기의 말에 마고는 입가에 차거운 웃음을 띄웠다.
《요즘 5부의 귀족들이 자주 대가어른의 댁을 찾는가?》
《말도 마시오이다. 문턱에 불이 날 지경이오이다. 내 청지기노릇 삼십년에 요새처럼 분주한적이 없었소이다.》
청지기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렇게 투덜거렸다.
마고는 머리속으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한때 상전으로 받들던 고추대가 고부진의 음험한 성정과 기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마고로서는 고부진이 무언가 큰일을 꾸미고있다는것을 직감했다.
그것이 무엇일가? 이미 막대한 재부와 광대한 토지를 점유하고 왕족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고부진이 노리고있는것은 과연 무엇일가?!…
《다들 돌아갔으니 대인어른을 뵈야지요? 어서 가시오이다.》
마고는 청지기가 잡아끄는 바람에 제정신으로 돌아와 사랑채로 다가갔다. 청지기는 마고를 힐끔 올려다보고는 사랑채에 조심히 올라서서 기침을 깇었다.
《거 누구냐?》
안에서 갈린 목소리가 새여나오자 청지기가 얼른 허리를 굽혔다.
《대인어른, 신성태수 마고
방안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일어서서 장지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마고는 사랑방에 들어앉은자들이 아직 여럿이 됨을 짐작했다.
문을 열고 어둠속을 주시하던자가 마루우에 내려서는데 마고는 그의 손에 들린 장검을 보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뻐젓이 찾아오느냐?》
그자가 불호령을 터뜨리며 장검을 머리우에 추켜드는것을 뒤따라나오던 고부진이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소란을 피울것 없다. 모두들 들어오너라.》
청지기는 행랑채로 물러갔고 널직한 사랑방에 모두 들어가앉았다.
맨 나중에 들어선 마고는 재빨리 사랑방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고추대가 고부진이 맨 웃자리에 다리를 포개고앉아 무료한듯 두눈을 감고있었고 각각 좌우에 좌정하고 앉은 무사풍의 사나이들이 잡아먹을듯 자기를 노려보고있었다.
마고는 왼쪽에 앉은자가 대당의 대형으로 있다가 지금 형벌을 맡아보는 형관부의 우두머리로 있는 장대이고 오른쪽에서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노려보는자가 방금 자기를 위협하던 을문임을 알아보았다.
마고는 비웃는 시선을 얼핏 을문에게 던지고나서 고부진을 향해 털썩 무릎을 끓고앉았다.
《지금 널 수배중이니 꿈쩍 말고 은신하고있으라고 그만큼 일렀거늘 여기까지 웬일이냐?》
고부진은 마고의 태도를 유심히 살피다가 문득 못마땅한 태도로 차거운 말마디들을 내뱉았다.
고부진이 음험한 눈길로 노려보고있는데도 마고는 태연하였다.
《아무리 숨어다니는 신세가 되였다고는 하나 한때는 고구려 북방군을 호령하던 몸이였사오이다. 설사 잡혀죽는다고 해도 꼭 복수를 하고싶소이다.》
《닥치시오. 당신의 무능함때문에 맹광이놈이 이렇듯 기세가 등등해졌소. 쫓겨다니는 처지에 이렇게 대인어른을 찾아와 보호를 청한다고해서 목숨을 건질것 같은가?》
마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을문이 이렇게 소리쳤다.
《내 처지나 네 처지가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난 그래도 맹광을 처리할수 있는 방책을 가지고왔다. 그래 네놈처럼 속수무책으로 앉아 뒤에서 고함이나 지를 그런 용렬한자가 아니란 말이다.》
마고가 을문을 무섭게 노려보며 맞받아 소리쳤다.
《닥쳐라!…》
을문이 미친놈처럼 울부짖으며 일어서려는것을 고부진이 소리쳐 말렸다.
《무슨짓들이냐? 감히 뉘앞이라고 망발들을 마구 내뱉는것이냐?》
고부진의 호령에 개와 고양이처럼 아옹다옹 다투던 마고와 을문은 찔끔하며 고개를 움츠렸다.
이때까지 잠잠하던 장대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 맹광을 처치할 방책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이요?》
《소인이 그동안 비사성에 은신해있으면서 중원에까지 사람을 파하여 맹광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애를 썼소이다. 얼마전에야 겨우 맹광의 출신을 알아냈지요.》
마고가 사랑방에 앉은 세 사나이를 둘러보며 이렇게 말하는데 고부진이 그의 말허리를 분질러버렸다.
《그래 맹광의 출신이 무엇이더냐?》
《유주자사 진
이야기가 왕청같이 딴 곳으로 가지를 치는것 같아 모두들 어리둥절해졌다. 유독 고부진만이 음험하게 두눈을 쪼프리고서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맹광은… 진의 아들이오이다.》
마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히 주어섬겼다.
갑자기 벼락이 들이닥쳐 사랑채지붕이 무너져내렸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것이였다.
고부진은 물론이요, 여기 모인자들은 전 유주자사 진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맹광이 진의 아들이라는것이 무슨 방책이 될수가 있겠소?》
잠시후 정신을 수습한 장대가 마고에게 물었다.
《진은 유주를 진나라에 잃은 패전지장이오이다. 그의 아들이 신분을 숨기고있는데 이 사실만 밝혀낸다면 어찌될것 같소이까? 고구려의 법은 엄하오이다. 패전지장의 아들이 어찌 왕당의 중리도독의 중책을 맡을수 있겠소이까?…》
마고는 교활하게 눈을 반짝이며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장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것만으로는 맹광을 제거할 리유가 못되오. 유주자사 진은 아직도 고구려백성들의 가슴속에 영웅으로 남아있소. 오히려 지금형편에서는 역효과를 낳을수가 있소.》
《그렇지요. 하지만 진을 죽음으로 몰아간분이 누구시오이까? 20여년전 조정에서 영무
마고의 빈정거리는듯 한 말투에 화가 치밀어오른 을문이 자리를 차고 일어서려는것을 고부진이 손을 들어 막았다.
고부진은 한손으로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네놈이 그동안 많이 컸구나. 그래서 바라는것이 무엇이냐?》
《대인어른, 어르신을 릉멸하는 저런 놈을 살려두어서는 무얼하오이까. 소장이 단칼에 베여버리겠나이다.》
을문이 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고는 을문의 발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부진을 바라보았다.
《대인어른, 대인어른을 곁에서 모셔온지가 이미 수십년이 되옵나이다. 어찌 소인이 어르신을 릉멸할리 있겠소이까. 제 말을 믿어주사이다. 소인은 아무것도 바라는것이 없소이다. 오직 맹광의 최후를 이 두눈으로 똑똑히 보고싶소이다.》
마침내 고부진은 고개를 끄덕여보이였다.
《좋다. 네가 바라는대로 다시한번 조정의 여론을 주도해보마. 하지만 그것이 꼭 성공하리라는 담보는 없다. 페하께서 맹광에게 기울이는 신임을 생각할 때 오히려 긁어부스럼이 생길수도 있다. …》
《제 그래서 이번 길에 무예가 뛰여난자들을 수십명이나 데리고왔소이다. 대인어른께서 그놈을 처리할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준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치우겠소이다. 어르신, 믿어주시오이다. 절대로 어르신께 불찌가 튀지 않게 제가 모두 맡겠소이다.》
고부진은 짐짓 만족한듯 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선선히 수긍했다.
《알았다. 당분간 내가 지정해주는 곳에 거처하고 기다리거라. 네가 바라는것을 꼭 알아봐주겠다.》
마고는 처음과는 달리 흡족한 표정으로 이마를 한껏 조아렸다.
《대인어른을 끝까지 섬기겠으니 믿어의심치 마시오이다.》
《잠간, 수년전 너에게서 무예가 아주 출중한 무사가 있다는 소릴 들었다. 그놈이 비록 거란땅에서 맹광을 습격했다가 실패하였지만 쓸모가 있다고 하였었지. …》
마고가 물러나오는데 고부진이 갑자기 이런 말로 그를 멈추어세웠다.
《방주 말이오이까?》
《그래 방주란 놈이 아직 네곁에 있느냐?》
마고는 어리둥절한듯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놈이 연나라출신의 무사라지?!》
《그러하오만…》
고부진은 마고가 뭐라 더 대꾸할새 없이 즉시에 결론을 지었다.
《좋다, 내게 보내거라. 내 반드시 쓸데가 있다.》
마고가 물러가버린 후 사랑방에는 잠시 정적이 깃들었다.
《대인어른, 저런 놈을 가까이하는것은 어딘가 께름하오이다. 차라리 단호하게 내치시는것이 어떻소이까?》
장대가 조심스럽게 사랑방에 서린 정적을 깨였다.
을문도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장대의 말이 옳소이다. 맹광이놈은 기회를 보아 소장이 처리하겠으니 마음놓으시고 우선 저 마고부터 없애는것이 옳다고 생각하오이다. 마고를 살려두었다가는 후날 화근이 될수 있소이다.》
《아직은 쓸모가 있는 놈이야. 그렇지 않아도 맹광이놈이 왕당의 중리도독이 되면서부터 우리 일이 온전히 펴이지 않는데 이번 기회야말로 그를 제거할 좋은 기회이다. 마고란 놈은 그다음에 조용히 처리해도 좋을것이다.》
고부진은 그들의 말을 이렇게 부정했다.
장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인어른, 맹광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면 방주인지 뭔지 하는 놈이 뭣에 쓸모가 있는지… 오랑캐출신이라 어딘지 께름하오이다.》
고부진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왜들 이리 어리석으냐. 그깟 맹광이란 놈과 마고가 서로 죽일내기나 벌리라고 해. 마고는 범을 잡으려고 내놓은 미끼나 같은 놈이야. 나의 목적은 그보다 더 큰것이다.》
장대와 을문이 영문을 몰라 서로 마주보는데 고부진은 여전히 두눈에 음흉한 미소를 담고 천정구석을 노려보고있었다.
그의 얄팍한 입술에서 기묘한 소리로 휘파람을 불듯 말마디들이 도간도간 새여나왔다.
《고구려의 운명을 새로 정할 일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 …》
고구려왕당의 일월수호당주 미추는 이제 서른다섯살의 젊은 무장이였다. 어려서부터 궁중의 시위무사들에게서 무예를 배워 고구려 최고의 검객으로 일러줄 정도로 무예실력이 비범하였지만 미추는 궁밖을 벗어나보지도 못하고 더우기 전쟁에 참가한 경험도 부족한 한마디로 험난한 세상사를 겪어보지 못한 무사였다.
미추는 유주에서 전사한 선친의 뒤를 이어 고구려왕당군을 통솔할 꿈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출신이 모호한 맹광이라는 인물이 왕당의 장수로 발탁되여 여러 전쟁에서 무공을 세우고 명성을 드날리게 되자 미추는 그 그늘밑에 가리워져버렸다.
더우기 시위무사로 오래 있은 미추가 이제야 일월수호당주벼슬에 올랐다면 맹광은 눈부신 출세를 거듭하여 왕당의 두번째 자리인 중리도독의 중책을 맡았던것이다.
맹광에 대한 영락태왕의 신임이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으니 비록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아도 미추의 가슴속에는 맹광에 대한 반감이 가득하였다. 더우기 맹광이 지금 맡고있는 중리도독은 비밀부대를 직접 관할하고있었는데 이것은 원래부터 대대로 고구려태왕의 동생이나 가까운 왕족이 맡게 되여있는 아주 중요한 직책이였다. 말그대로 맹광은 태왕의 다음가는 고구려의 실권을 쥐고있었던것이였다.
군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미추는 마중나온 청지기로부터 이미 오래전에 고추대가 고부진이 사랑채에서 기다리고있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평소에 왕족이라고 거만하게 코를 들고다니는 고부진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될수록 상종하기를 피했던 미추인지라 그런 고부진이 난데없이 찾아온것이 어쩐지 께름하기도 하였다.
미추는 급히 안채로 들어가 관복을 평복으로 갈아입고 사랑방에 나왔다. 미추가 퇴궐해오길 몹시 기다렸다는듯 초조한 기색을 띤자들이 반색하며 일어섰다.
미추는 날카로운 눈을 들어 얼핏 사랑방에 있는자들을 눈여겨보았다.
허연 수염발을 날리며 짐짓 다정한 웃음을 보내고있는자가 고추대가 고부진이였고 그뒤에 붙어서서 시답지 않은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자가 무술시합장에서 맹광에게 패한 을문임을 알아보았다.
미추는 을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못마땅한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을문의 인간됨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고있었던것이다.
비록 시합장에서 패자의 수치를 당했다고 해도 고구려의 무사라면 다시 일떠서기 위하여 노력하여야겠으나 타락하여 술과 계집질에 미쳐돌아간다는 소문때문이였다. 그래도 한때는 도성안사람들의 각광을 받던 뛰여난 무사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워야겠는데 병역을 기피하고 사냥이나 다니던 나머지 최근에는 무슨 목적에서인지 수많은 조의, 선인들을 규합한다고 하였다.
이러한자를 심복으로 두고있는 고추대가 고부진의 진의도가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미추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고부진에게 례를 표하였다.
《페하께서 평양성에서 방금 돌아오시여 군무에 바빠 이렇게 늦었으니 량해해주시오이다.》
《아, 무슨… 오히려 한가한 우리들이 부끄러울뿐이요.
고부진은 이렇게 인사말 비슷이 얼버무리며 미추가 권하는대로 자리에 앉았다.
하녀가 차잔을 들고 들어와 탁우에 조심히 놓고 물러가버렸다.
미추는 손을 들어 차를 권했다.
《이것은 수년전 연나라와의 전쟁때 로획한 전리품이오이다. 중원에서는 황제만이 마시는 차라고 하오이다.》
고부진은 뜨거운 차를 한모금 마시고나서 차탁우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아무리 차맛이 좋다고 해도 우리 고구려의 차보다는 맛이 떨어지는군. …》
고부진은 거적눈을 치켜뜨고 미추를 힐끔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참으로 류수같은 세월이요. 내
《선친과 대인어른이 이 집 사랑방에서 술잔을 나누던 일이 어렸을 때이지만 아직도 눈에 삼삼하오이다. 그때 대인어른께서는 저에게 검을 한자루 선물로 주셨지요.》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하고있소? 허… 그때 일을 추억할수록 감회가 깊소.》
그들이 이렇게 담소로 시간을 보내고있는데 을문이 슬쩍 미추의 기색을 살피며 한마디 끼여들었다.
《그렇소이다. 영무
미추가 골살을 찌프리며 못마땅해하는것을 본 고부진이 을문을 가볍게 꾸짖어 물리쳤다.
《사람이 참 경망스럽군. 좌석에 어울리지 않는 말은 왜 꺼내는건가?》
고부진은 이어 웃는 얼굴을 미추에게 돌렸다.
《너무 탓하지 마오. 오늘 이런 좌석에 어울리다나니 저 사람도 무사라 먼저 세상을 떠난 영무
좌중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참,
고부진이 먼저 침묵을 깨며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이렇게 물었다.
미추는 무거운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정의 명령을 받고 유주에 갔다가 진나라군사들과 싸우다 전사하셨다는 말만을 들었소이다.》
고부진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얼른 말을 이었다.
《허… 그러면 전 유주자사 진의 반역으로 영무
《무슨 말씀이오이까? 알아들을수 있게 이야기해주사이다.》
미추는 두눈을 똑바로 뜨고 고부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고부진은 딱하다는듯이 혀를 차며 을문을 돌아보았다.
을문이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자기가 나서서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유주자사 진을 아시오이까?》
《나의 아버지와 막역한 사이였다고 들었소. 내가 어렸을 때 일이지만 진
을문은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그렸다.
《바로 영무
《절대로 그럴수 없소. 유주자사 진
미추는 선뜻 믿을수 없는지 을문의 말을 맹렬히 부정했다.
을문이 입을 열려는것을 고부진이 손을 들어 막으며 이번에는 제가 직접 끼여들었다.
《이것은 숨길수 없는 사실이요. 20여년전 고구려조정에서는 남부전선의 공백을 메꾸느라 유주에 주둔하고있는 서북군의 무력을 철군시키려고
결정했었소. 이것을 루차 유주에 알렸으나 진자사는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반대해나섰지. … 하여 페하의 령을 받고 영무
고부진은 비통한 기색을 지으며 짐짓 땅이 꺼지게 한숨까지 내쉬는것이였다.
《그럼 왜 아직까지 반역자가 응징을 받지 않고있소이까?》
미추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성난 범처럼 으르렁거렸다.
고부진은 서둘러 미추의 옷소매를 잡고 늘어지며 그를 달래였다.
《고정하시오.
미추는 이를 부드득 갈며 손에 든 차잔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고부진은 자기의 의도가 실현된것으로 하여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젠 더 끌것없이 직접 본론에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허나 진은 이미 죽었지만… 그의 아들이?…》
고부진이 이렇게 말을 얼버무리자 미추는 두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가까이 나앉았다.
《그건 무슨 소리오이까? 소장에게 모두 말씀해주소이다.》
《이제 무얼 더 숨기겠소. 지금 왕당의 중리도독으로 있는 맹광이 바로 진의 아들이라고 하오.》
미추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두어걸음 물러앉았다.
《맹… 맹광도독이 진… 진의 아들이란 말이오이까?》
《그렇소.》
미추의 놀라움도 한순간이고 어느새 그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이였다.
《그런자가 어찌 페하의 곁을 지켜드릴수 있단 말이오이까? 소장이 그를 가만두지 않겠소이다.》
당장이라도 미추가 문밖으로 뛰여나가려는것을 고부진이 당황하여 어깨를 눌러앉혔다.
《
맹광은 관사에 밤늦도록 홀로 남아 각지에서 부하들이 올려보낸 보고문들을 읽고있었다. 그러한 죽간들을 읽을 때마다 맹광의 기색은 차츰 어두워졌다. 지금 고구려국내의 정세는 심상치 않게 번져지고있었다.
맹광은 산더미처럼 쌓인 죽간에서 신라에 잠입한 세작들이 보내온 보고문을 찾아내여 펼쳐들었다.
신라는 이미 오래전에 왕족인 실성을 볼모로 보내면서 고구려에 보호를 요청한 나라였다. 하여 고구려에서는 신라의 국력을 다지는 일에 아낌없이 지원하였었다. 신라의 수만대군을 무장시키도록 수많은 무기와 갑옷, 군마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세작의 보고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보내준 막대한 군품이 그 일부만 신라군을 무장시키는데 들어갔고 나머지는 유력한 귀족들이 뒤로 빼돌려 저들의 욕심만을 채우고있다는것이였다.
대부분 귀족들은 고구려의 발전된 무기와 식량, 군마를 왜에 팔아넘겨 치부를 하는데만 정신이 팔려있고 심지어 어떤자들은
전략적으로나 지형상으로 매우 유리한 곳에 자리잡고있어 언제 어느 시각에 적의 침략을 받을지 모르는 신라가 나라방위에 이렇듯 무심할줄은 맹광은 전혀 모르고있었다.
고구려가 사방에서 불을 질러오는 적들과 맞서 싸우는 그 어려움속에서도 힘들게 보내준 군품이 몇몇 귀족들의 치부에 돌려진다는것은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맹광은 한숨을 쉬고나서 이번에는 백제의 동향을 밝힌 문서를 집어들었다. 무심히 읽어내려가던 맹광의 눈동자가 대번에 커졌다.
맹광은 눈을 부릅뜨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자도 놓치지 않고 읽어내려갔다. 문서에는 그냥 스쳐지날수 없는 아주 중대한 기밀이 적혀있었던것이다.
백제와 후연이 서로 거래가 빈번하다는것, 백제와 가야접경지대에서 1만명의 백제군이 한창 조련을 다그치고있는데 한편 이들이 소비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전쟁물자들이 확보되여있다고 하였다.
더우기 중요한것은 이 1만명의 정예병을 직접 조련시키는 인물이 몇달전에 좌장으로 임명된 연우라는것이였다.
그 백제군속에는 가야출신의 군사 특히 아라출신의 군사들이 태반을 이루고있다고 하였다.
또한 얼마전에는 왜땅에서 북규슈소국련합체를 장악하고있는 구노국왕 사사히꼬가 비밀리에 한산성을 다녀갔는데 아신왕은 배편으로 수천명의 군사들을 무장시킬수 있는 전쟁물자들을 보내주었다고 하였다.
심각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고구려와의 변경지대에 대대적인 무력을 집결하여 허장성세하던 백제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아라인별동대를 따로 조련시킨단 말인가. 혹시 전면전을 피해 바다길로 고구려후방에 상륙하여 후방을 교란하려고 작정한것은 아닌지?!…
만일에 대비하여야 한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데…
맹광은 죽간을 내려놓고 손으로 얼굴을 여러번 비벼쓸고나서 도성안 귀족들의 동향자료를 손에 들었다.
오랜 원로이며 왕족의 일원인 고추대가 고부진에게서 최근에 주목할 점이 몇가지 나타났다는 보고서였다.
요즘 그의 집으로 유력한 무장들과 5부의 귀족들이 뻔질나게 자주 드나든다는것은 결코 간과할 일이 아니였다.
얼마전에 국내성의 나루터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도승과 여러명의 군사가 한꺼번에 참살된 때에 유력자의 집으로 사람들이 자주 드나든다는것은 결코 심상히 넘길 일이 아니였던것이다.
태왕의 즉위 초기부터 뒤에 돌아앉아 쑥덕거리던 5부의 귀족들이 요즘은 어벌이 커져 로골적으로 담덕이 실시하는 정책에 불만을 터놓고있는것이였다.
나라가 전쟁으로 위기를 겪고있을 때 내부의 숙청으로 분렬을 가져올것이 아니라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두 하나로 끌어안으려는 태왕의 도량에 5부귀족들은 눈앞의 리해관계만 추구하고있는것이였다.
맹광은 5부귀족들의 불만의 원인이 무엇인지 잘 알고있었다. 그것은 멀지 않아 옛 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으로 천도할것이라는 소문때문이였다. 만약 소문 그대로 태왕 담덕이 천도를 결정한다면 국내성에서 수백년간 온갖 특전특혜를 누려오던 5부귀족들이 지반을 잃게 될것이였다. 물론 천도한다고 해서 5부귀족들의 특권적지위가 달라지는것은 결코 아니였다.
그러나 도성주변의 광대한 토지와 전장, 수백년간 축적한 루거만의 재산을 5부의 귀족들이 모두 떠메고 평양성으로 이사할수는 없는 일이였던것이다. 바로 이러한 리해관계로부터 5부의 귀족들은 태왕의 뜻을 거스르고있는것이였다.
맹광 역시 영락태왕이 정말 평양으로 천도하려는 결심을 품고있는지 잘 모르고있었다.
하지만 태왕으로 즉위한지 얼마 안되여 국내외에 평양성을 웅장하게 일떠세우겠다고 선포한 담덕의 의지로 보아 천도에 대한 소문이 사실일수 있으리라 짐작하고있었던것이다.
갈라지고 흩어진 겨레의 나라들을 하나로 모으고 옛 조선의 땅을 모두 수복할 웅지를 가슴에 품고있는 영락태왕이라면 얼마든지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길수 있을것이였다.
평양은 태고적 단군이 도읍한 곳이니 여기에서 이 땅의 려명이 밝아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것이다.
옛 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때 빛을 잃었던 평양이 고구려의 출현으로 밝게 빛나고있었다.
동명성왕이후로 고구려의 태왕들은 중원의 한나라에 의해 멸망한 조선의 옛 땅을 모두 수복하고 동족의 국가들을 통일하기 위한 투쟁의 력사를 열었던것이다.
맹광은 영락태왕에 의해 그 위업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고구려백성의 한사람이였다.
한줌도 못되는자들이 자기의 리해관계로부터 력사의 도도한 흐름을 막으려 한다 해도 영락태왕 담덕은 단호히 이것을 박차고 앞으로만 나아갈것이다.
맹광은 인기척이 들려서야 깊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뜻밖에도 영락태왕 담덕의 모습이 시야에 안겨왔다.
담덕의 뒤로는 일월수호당주 미추가 서있었다.
맹광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태왕을 군례로 맞이하였다.
《페하, 페하께서 나오신줄 모르고 그만 무례를 범했소이다. 소장을 벌해주소이다.》
담덕은 호방하게 웃으며 맹광의 어깨를 눌러앉히고 자기
《그동안 밀린 결재를 하다가 바람을 쐬러 나온 길이다. 넓은 궁성안에 불이 켜져있는 곳이 여기뿐이여서 그대와 한담이나 하려고 들렸으니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도록 하라.》
맹광은 퍼그나 수척해진 영락태왕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페하, 평양성 순행에서 돌아오신지 며칠 안되는 때에 이렇듯 밤이 늦도록 업무를 보시면 옥체가 상하실가 두렵소이다.》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짐은 아직 힘과 기세가 충천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곁에 시립하고있던 미추가 담덕의 말에 볼부은 소리로 말하였다.
《페하, 부디 신들의 말을 흘려듣지 마시오이다. 전쟁판에 나가서도 늘 선두에 서시고 항상 위험한 곳에 남먼저 뛰여드시니 신은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있소이다.》
《그렇소이다. 페하, 페하께서는 이 하늘아래 고구려의 운명을 맡아안으시지 않으셨소이까. 일월수호당주의 말을 흘려듣지 말아주옵소서.》
《그대들이 짐에 대해 평소에 이렇듯 불만이 많은줄 짐은 미처 모르고있었구나. …》
담덕은 신하들을 번갈아보며 호탕하게 웃고나서 곧 정색한 얼굴로 맹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대에게 한가지 묻겠다. 죽음이 배회하는 전장으로 나갈 때 군사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느냐? 그대도 짐을 따라 료서의 전장으로 나간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때 과연 짐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였느냐?》
담덕의 이런 물음에 맹광은 한참만에야 대답할수가 있었다.
《신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오이다. 군사를 이끄는 장수에 대한 믿음, 자기들을 이끄는 장수가 반드시 승전을 가져올것이라는 믿음이 없이야 어찌 목숨을 내놓고 전장에서 싸울수 있겠소이까?》
《그대의 말이 옳다. 짐은 그래서 전장에 나갈 때마다 원칙으로 삼는것이 있다. 짐이 아무리 뛰여난 지략을 세우고 용맹하게 싸운다고 해도 군사들의 믿음과 신뢰를 잃게 되면 반드시 패한다는것을 말이다. 그대들도 수시로 전장에 출정하는 장수들인것만큼 짐의 말을 명심하거라. 장수된자는 자기가 거느리는 매 군사들의 운명을 하나하나 책임지고있다는것을 항상 가슴에 새겨야 한다.
그것을 잊으면 결국 군사들의 믿음과 신뢰를 잃게 되고 나중에는 백번 싸워 백번 패하게 될것이다.》
담덕은 이렇게 신하들을 신칙하고나서 맹광의 사무탁에 가득 쌓인 죽간들에 시선을 주었다.
《일감이 많으냐?》
《아니오이다. 그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좀 바빴을뿐이오이다. …》
맹광은 잠시 말을 끊고 망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페하, 지금 나라안팎의 정세가 심상치 않소이다. 이럴 때일수록 결정적인 대책이 필요할것이라 생각하오이다.》
미추도 이때라는듯 한발 나섰다.
《그렇소이다. 맹광도독의 말대로 정국이 심상치 않으니 페하께서 이번달에 계획하고계시는 평양순행을 다음해로 미루고 평양성건설을 잠시 중단하는것이 어떻겠소이까. 지금 천도에 대한 소문으로 조정안이 떠들썩하니 페하께서 우선 중신들과 귀족들을 다독여주신 후에 변경방위에 힘을 돌리시는것이 옳을가 하나이다.》
담덕은 신하들이 서로 아뢰는 말을 유심히 다 듣고는 안석에서 몸을 일으켜 아무말없이 뒤짐을 지고 대청안을 천천히 거닐기만 했다.
이것은 담덕의 심중이 매우 복잡함을 보여주는 행동이였다.
태왕을 여러해째 곁에서 가깝게 보좌해오면서 담덕의 이러한 모습을 처음 보는 맹광과 미추는 얼결에 시선을 마주쳤다.
별안간 담덕이 대청안을 오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신하에게로 돌아섰다.
《그대들은 천도에 대한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담덕의 이런 물음에 미추가 나서서 제꺽 대답했다.
《신은 그 소문을 믿지 않소이다. 아무렴 페하께서 수백년간 국도로 번성한 이 국내성을 버리고 이제 갓 성곽을 고쳐쌓은 평양성으로 천도하려 하시겠나이까. 누군가 민심을 혼란시키려고 내돌리는 랑설이라 생각하옵니다.》
담덕은 이번엔 맹광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대도 일월수호당주와 생각이 같은가?》
담덕의 물음에 맹광은 심각한 문제였기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담덕은 부리부리한 두눈으로 신하들을 굽어보다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천도에 대한 소문은 옳다. 짐은 앞으로 평양성을 국도로 선포할 생각이다.》
담덕의 이러한 말에 미추는 물론 맹광도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물론 아직은 천도를 서둘러 결정할 때가 아님을 짐도 잘 알고있다. 하지만 평양성으로의 천도는 짐의 꿈이자 선대태왕님들의 꿈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대태왕님께서 어찌 평양성에 9개의 사원건설을 유지로 남기시였는지 생각해보았느냐? 부왕의 시호가 고국양왕인것은 부왕의 못다 이룬 유업이 평양성에로의 천도였기때문이다. 그대들도 평양이 국양, 국천이라고 불리운다는것을 잘 알고있을것이다.
력대 고구려태왕들의 시호가 이렇듯 평양과 련관되여있는것은 바로 그분들이 옛 조선의 도성 평양을 언제한번 잊은적이 없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짐은 반드시 선조태왕들의 꿈을 이루려고 한다.
옛 조선의 영광을 떨치기 위해 평양을 국도로 정하고 삼국통일의 성업, 잃었던 고토수복의 길로 멈춤이 없이 곧바로 달려갈 결심이다.》
담덕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두눈을 열광으로 빛내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옛 조선의 백성들은 평양을 국강상이라고 불렀다. 국강상이란 말에는 나라의 가장 높고 신성한 언덕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얼마나 큰 뜻이 담겨진 말이냐? 짐의 뜻 역시 그렇다. 국강상에 민족의 꿈을 싣고서 갈라지고 흩어진 겨레를 하나로 모으고 내 나라의 영광을 떨치려는것이 짐의 의지이고 뜻이다.》
맹광은 태왕의 열광을 그대로 넘겨받은듯 흥분과 격정에 못이겨 고개를 숙이였다.
《페하, 페하의 경륜과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신을 용서해주소이다. 신은 페하의 그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이 한몸이 그대로 초석이 되고 주추가 되여 페하의 위업을 받들겠나이다.》
담덕은 웃으며 맹광과 미추의 손을 뜨겁게 잡아쥐였다.
《짐은 그대들이 곁에 있어 항상 마음이 든든하다. 지금처럼 언제나 짐의 힘이 되여주길 바라노라.》
이어 담덕은 먼저 미추에게 고개를 돌리며 이런 령을 내렸다.
《짐이 이전부터 생각해두었던것인데 그대가 제가회의의 수장직을 맡아주었으면 한다.》
태왕으로부터 뜻밖의 령을 받은 미추는 놀라서 두눈을 크게 떴다.
《페하… 제가회의 수장직이야 이미 고추대가 고부진이 맡고있지 않소이까. 신은 아직 나이도 젊은데 어찌 5부의 귀족들을 통제할 중임을 맡을수 있겠소이까?》
《고추대가 고부진은 념려하지 않아도 된다. 며칠전에 그가 상주문을 올리였다. 이젠 나이도 많으니 제가회의 수장직을 미추 그대에게 넘기겠다는 상주문이였다. 짐도 이미전부터 그대가 이 일을 맡으면 잘해낼수 있으리라 믿고 윤허하였으니 래일 고추대가에게 가서 인계받도록 하라. 5부의 귀족들도 짐의 신하이고 고구려의 백성인것만큼 그대가 그들을 잘 이끌어주길 바란다.》
《페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입으로는 이런 말을 하였지만 미추의 얼굴은 내키지 않는 일을 떠맡았을 때처럼 기색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담덕은 이번에는 맹광에게로 돌아섰다.
《짐은 그대에게 또다시 무거운 짐을 얹혀줄수밖에 없구나. 그대에게 평양성 태수직을 제수하노라.》
담덕의 말에 맹광은 물론이요. 미추도 깜짝 놀랐다.
영락태왕이 평양성으로의 천도를 결심한 때에 평양성의 태수로 맹광을 임명한것은 그에게 돌려진 신임이 그만큼 크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였다.
《그대는 평양성 태수로서 중임을 항상 잊지 말고 짐을 보필하라. 짐은 그대에게 평양성과 그 일대의 모든 군정, 민정을 맡기노니 한치도 소흘함이 없이 일해주길 바라노라.》
맹광은 굳어진 얼굴로 영락태왕 담덕의 앞에 부복하였다.
《페하, 날이 밝으면 곧 평양성으로 떠나겠소이다.》
담덕은 맹광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그의 두팔을 잡아 일으켜세웠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대에게 보름 말미를 주겠다.
다음달 초엿새까지 평양성에 도착하여 태수직을 인계받으면 될것이다.》
《페하, 지금 남쪽의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이제 곧 평양성으로 내려가겠소이다. 하루라도 빨리 페하의 웅지를 받드는것만이 신하된자의 도리라고 생각하오이다.》
담덕은 맹광의 어깨에 묵직한 손을 올려놓았다.
《짐이 시키는대로 하거라. 언제인가 그대는 부친의 고향이 신도현이라고 짐에게 말했던적이 있지 않느냐. 이제 멀지 않아 추석이니 신도현에 들려 조상의 묘를 찾은 다음 평양성으로 내려가거라. …
짐이 지금껏 그대에게 계속 일만 시키고 제대로 휴식 한번 주지 못했구나. 이번 추석날만이라도 고향에 한번 들려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