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국강상의 전설
제 1 장. 아침노을은 붉다
3
모용운(고운)은 나이가 젊고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말은 별로 하는 법을 몰랐으나 매 말마디가 무게가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고화라는 고구려사람이였다.
고화가 어떤 경로를 통해 모용선비족의 일원으로 되였는지 기록에 남은것은 없다.
옛날 전연이 고구려를 기습공격하여 부수도성을 파괴략탈하고 태왕의 시신까지 략취하여 돌아갔을 때 포로로 붙잡혀간 귀족중의 한사람이라는 소문도 있고 억울한 루명을 쓰고 조정의 정쟁에서 밀려난 중신의 한사람이라는 말도 돌아갔다.
어쨌든 고화는 자기의 능력과 고국 고구려에서 떨쳤던 명성을 가지고 모용선비족의 인정을 받아 크게 출세하였다.
고운은 이러한 할아버지의 영향력으로 비록 적국인 고구려의 출신이였으나 후연에서 무시할수 없는 지반을 가지게 되였다.
고운은 젊은 사람치고는 성격이 침착하고 신중하여 사람들에게서 호평을 받고있는데다가 어려서부터 군무에 종사하여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무예가 뛰여났다. 하여 당시 후연왕 모용보의 측근심복인 급사시동궁, 시어사 등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모용보의 특별한 신임을 받다가 나중에는 그의 양자로까지 된것이였다.
모용선비족의 태생이 아니면서도 이민족성원으로는 감히 생각도 못할 태자까지 되였다.
고운은 가슴속에 큰뜻을 품고있었다. 그는 야심이 컸고 지향하는 생각이 남달랐다. 몸은 비록 머리를 숙여 모용씨를 섬기고있지만 그에게서는 고구려사람의 피가 흐르고있었다. 하지만 고운은 후연조정내부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풍발과 같은 변방무력의 자사, 절도사 등과 손을 맞잡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는 그 힘이 너무도 미약했다.
비록 태자의 자리에는 올랐으나 후연왕실의 정통을 잇지 못한것으로하여 조정대신들의 반감도 사고있었다.
한편 모용보는 고운을 총애하여 특별한 신임으로 태자로까지 책봉하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것을 후회하는 정도였다.
그것은 후궁소생의 아들이 태여났기때문이였다.
만약 모용보가 고운을 양자로 들인것을 후회하고 태자책봉을 바꾼다면 반드시 조정내부에서는 피바람이 불것이였다.
말그대로 고운은 후연의 정쟁에 말려들어갈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모용보의 소생이 아직 강보에 싸여있는 상태라 아직까지는 피비린내나는 정쟁이 그 징조만 보이고있었다. 하여 고운은 자기 보신책을 세우느라 멀리 변방의 림치에 머물고있는것이였다.
당시 후연조정내부에서는 동방의 강국 고구려와의 전면대결을 주장하는 주전파와 그와는 정반대로 동쪽의 령토를 고구려에 일부 사양하고 남쪽으로 중원통일부터 이루어야 한다는 화평파가 서로 대립하고있었다. 그런데 문제로 되는것은 후연조정내부에서는 거의 모든 대소관료들이 고구려를 원쑤취급하는 반면에 오히려 변방에서 직접 고구려군과 싸워본 자사, 절도사 등은 화평으로 기울어지고있는것이였다.
그들은 고구려군과 오래 싸우는 과정에 고구려군의 위력과 기질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지라 고구려와의 어리석은 전쟁으로 후연의 전력을 헛되이 허비할것이 아니라 중원의 령토쟁탈전의 불길부터 먼저 제압하여야 한다고 완강히 주장하고있었다.
허나 조정내부의 오랜 문벌관료들은 옛날의 고구려와 적대관계만을 그냥 고집하면서 어리석기 그지없는 《고구려정복》이라는 환상에만 매달려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고운은 주전파와 심히 대립되여있었던것이다.
고운은 중앙정계의 우두머리들보다 풍발과 같은 지방의 자사, 절도사들과 친교를 맺고 고구려와 화친할것을 주장하는 인물이였다.
고운이 화평파의 주요인물이 된것은 그가 단지 고구려사람의 후손이라는 조건보다도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는것이 어리석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기때문이였다.
모용운태자일행이 림치성에 도착한것은 다음날 정오무렵이였다.
모용운이 자그마한 계지방으로 간것은 별로 이렇다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였다. 계는 후연국 중위장군 풍발의 막사가 있는 곳이였다.
모용운과 풍발은 서로의 관계가 매우 깊었다.
그들은 막역한 벗이면서도 철저한 주종관계를 맺고있었다.
어떻게 되여 모용운과 풍발이 의기가 합치되였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그러나 어쨌든 후연의 변방무력을 쥐고 흔드는 세력가인 풍발이 모용운의 인간됨에 감복하여 그를 상전처럼 떠받드는것이였다.
그러한 사정이 있어서인지 고구려인을 대하는 풍발의 태도는 다른 후연사람들과 판이했다.
모용운이 조정에 있을 때는 변방장수들과 접촉이 너무 잦다는 조정대신들의 비난도 있고 해서 풍발과의 접촉을 될수록 삼가했으나 이렇게 림치에 내려와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있으니 래왕이 잦았다.
그들은 친교나 두텁게 하자고 서로 접촉이 잦은것은 아니였다.
모용운과 풍발은 무엇인가 큰것을 노리고있었다.
림치성으로 돌아온 태자일행은 모두 관사로 들어갔으나 일행중에 남녀 두사람만은 따로 떨어져 관역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바로 몇해전에 풍발의 막하에 떨어졌던 하평과 소운이였다.
하평은 그동안 풍발의 객으로 지내였다. 객이라는것은 권력자의 수하에 몸을 붙이고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객은 엄연한 의미에서는 권력자의 부하가 아니였다.
우선 그들은 신분상 그 어떤 직책도 맡지 않는다. 다만 먹여주고 입혀주는 대가로 요긴한 때에 한모퉁이를 몸으로 막는다. 때에 따라 공을 세우고 정식으로 출세하지만 대체로는 자기스스로가 등을 기댈 주인을 찾아 천하를 방랑하군 하였다.
하평은 소운을 위해서 하는수없이 객이 되였으나 풍발의 인간됨을 직접 가까이에서 목격하면서부터 그를 성의껏 받들어주었다.
풍발은 주위사람들과 품고있는 뜻과 생각이 확실히 남달랐다.
또한 행동거지와 언행이 점잖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했다.
하평은 이러한 풍발을 도와 객으로 지내면서 그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여러번 승전하도록 힘과 지혜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하평을 풍발은 제 눈동자처럼 아껴왔다.
하평은 여러번 소운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풍발의 만류도 있고 또 정세가 심상치 않은것으로 해서 이때까지 차일피일 미루지 않으면 안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 후연은 고구려와의 모든 교역을 끊고 나중엔 해상교역로까지 막아버렸다.
하평은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수 없었다.
하평은 바다까지 차단된 지금에 와서 밀선을 구하여 위험한 길을 가기보다 차라리 좀 에돌더라도 신라로 가는 배편으로 가려고 작정했다.
림치는 하평이 여러번 다녔던 고장이라 안면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엔 신라로 가는 대상단이 머물고있었다.
관역안은 사람들로 붐비였다.
하평과 소운을 방으로 안내해준 심부름군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강남지방의 상인일행이라고 하였지만 하평은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행동거지가 매우 낯익어보였던것이다.
강남지방의 상인들이라고 했지만 전혀 한족사람같지 않고 어딘지 동족같이 보였던것이다.
하평은 속시원히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느라 소운을 방에 혼자 남겨두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침 저편에서 이미전부터 안면이 있던 서영이라는 사인이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띄웠다.
하평이 소리쳐 부르자 서영은 반색하며 뛰여왔다.
《하평대인이시군요. 그러지 않아도 관사에 들리니 대인어른이 태자전하와 함께 림치에 왔다고 하오이다. 여긴 어인 일로 오셨소이까?》
《신라로 가는 상단이 여기에 머물고있다는 소릴 들었네. 바로 저들인가?》
서영은 하평이 가리키는쪽을 힐끔 보고나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요. 저들은 어제 림치로 온 상인들이랍니다. 신라로 가는 상인일행은 관사에 머물고있지요. 아마 저녁때쯤이면 떠날것이오이다.》
하평은 저도 모르게 조급해져서 서영의 팔소매를 붙들었다.
《그들을 좀 만나게 해주게. 긴한 부탁을 하려는것이야.… 내 일을 도와주게나.》
하평이 청을 들이며 손에 은자를 들려주니 서영의 입이 단번에 뒤로 돌아갔다.
《말만 떼시우다. 여긴 풍발장군의 세력권인데 아무렴 관청의 일을 보는 내가 하평대인의 청을 거역하리까. 그 상단의 행수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지요. 설사 안면이 없다고 해도 내가 찍어주는 관인이 없이는 한발자국도 움직일수 없소이다.》
하평은 우선 숨이 나갔다. 이젠 신라를 거쳐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이였다.
하평은 급한 마음에 서영의 등을 떠밀며 발걸음을 내짚다가 문득 멈추어섰다. 무엇때문에 방을 나서게 되였는지 그제야 생각이 미쳤던것이다.
《잠간, 자네에게 하나 물을것이 있네. 여기 관역에 머물고있는자들이 백여명은 실히 될듯 한데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서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하평의 귀가에 입을 가져다댔다.
《절대로 발설하지 말아주시우. 대인이 풍발장군의 수하에 있으니 믿고 말하는것이웨다. 이들은 모두 고구려사람들이오이다.…》
하평은 깜짝 놀랐다.
그는 한동안 아연해서 서영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 가소이다. 신라로 가는 상단의 행수를 만나야지요.…》
《고구려사람들이 여기 림치성엔 어인 일로 오게 되였소?》
서영이 옷자락을 잡아끌어서야 자기를 수습한 하평이 이렇게 다그쳐 물었다.
서영은 두려운듯 좌우를 둘러보더니 낮게 속삭였다.
《글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태자전하를 뵙게 해달라고 내게 청을 드립디다요. 하지만 나같은 놈이 무슨 수로 태자전하를 알현시켜준단 말이웨까. 혹 대인어른이 힘써준다면 모르겠소만… 여하튼 신라로 가는 상단의 행수부터 만나보소이다.》
서영은 이러면서 제 먼저 관역밖으로 발을 내짚었다.
하평은 앞서가는 서영을 뒤따르며 머리를 기웃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과연 그들이 고구려사람이겠는가.
아무리 동족이라도 그들에게서는 고구려사람의 면모가 보이지 않았다. 설사 그들이 고구려사람들이라고 해도 이렇듯 산동의 림치성에서 만난것이 가슴에 걸리는것은 무슨 영문에서인가.
낯설고 물설은 타국에서 고국의 사람들을 만난것이 무엇보다 반갑고 기뻐야겠으나 웬일인지 가슴은 천근 추를 달아매놓은것처럼 무겁고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은 처음 작정한대로 신라로 가는 상단의 행수부터 만나본 다음 속이 시원하게 고구려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보리라 결심했다.
하평의 가슴은 그 어떤 불안감으로 거칠게 뛰고있었다.
…
겨울이 되면 황하주변산악의 가파로운 비탈우에 흔히 배군들이 말하는 《룡머리》라는 내리받이의 두두룩한 등성이우에서 겨울의 설한풍이 향방없이 불어대며 울부짖었다.
바람은 그런 속에서도 언덕우로부터 눈가루를 긁어모아 군데군데 물결모양의 눈무지를 쉬임없이 쌓아놓고있었다.
몇해를 두고 이 눈무더기처럼 원한서린 감정을 차곡차곡 가슴속에 쌓아온 소운은 서글픈 눈길로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란인들에게 붙잡혔던 때로부터 어언 수년간의 세월이 흘러갔다.
하평과 함께 거란땅을 탈출하여 류랑하다가 후연군 군영에 머물고있는지도 어느덧 세해라는 세월이 류수같이 흘러지나갔다.
이 나날 소운의 머리속에는 맹광에 대한 생각이 한시도 떠나본적이 없었다. 지금도 맹광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소운은 날이 저물 때까지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다가 이윽고 부어오른 눈을 감추기 위해 급히 눈물을 훔치고 재빨리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이제 잠시후면 관사로 갔던 하평이 돌아올것이였다.
소운은 하평과 함께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설레이는 가슴을 진정할수 없었다.
소운은 이날이때까지 하평의 앞에서는 절대로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 맹광을 그리는 심정을 내비치지 않았었다.
그러지 않아도 하평은 긴긴 수년세월 소운의 일로 줄곧 스스로 괴로움에 시달려왔던것이다.
후연의 무장 풍발의 객으로 지내면서 여러번 죽음의 고비를 넘겨온것도 모두 소운이를 위해서였다.
소운의 신변에 자그마한 불상사도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언제한번 편히 발을 펴고 쉬지도 못한 하평이였다.
진정 하평은 소운에게 있어서 비명에 돌아가신 친부모, 삼촌과도 같은 존재였던것이다.
언제나 머리우에 어두운 구름만이 짙게 드리우던 하평과 소운에게 밝은 해빛이 빛을 뿌렸다.
소운이가 그처럼 그리워하면서도 생사를 알길 없던 맹광이 지금 고구려의 명장으로 일어섰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던 꿈과 같은 현실인가.
한시바삐 맹광의 곁으로 가고싶었다.
소운은 하평이 돌아오면 저녁을 직접 제 손으로 차려주기 위해 뒤채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식은 국을 덥히고있던 소운은 부엌과 잇닿은 뒤채에서 두런두런 울려나오는 말소리에 문득 손을 멈추었다.
한어도, 선비족의 언어도 아닌 너무도 귀에 익은 동족의 말이였다.
그러나 남쪽사람의 억양이 진하게 나타나는것으로 보아 고구려사람들같지 않았다.
소운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허탈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림치의 성안에서, 그것도 관역의 뒤채에 동족의 사나이들이 자리잡고있는것이였다.
반가움보다도 불안이 가슴에 먼저 깃드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소운은 우선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가 들어보기로 하였다.
방안에서는 두명의 사나이가 어성을 낮추어 주고받는 말소리가 새여나오고있었다.
《…서영의 말에 의하면 모용운은 우릴 만나기를 꺼려한다누만.… 이젠 하는수없이 래일 밤 관사를 습격하는 수밖에 없네. 만약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도 고구려인들이 연나라태자를 습격하였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목적은 달성되는셈이야.…》
《그런데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될가?… 어쨌든 여긴 림치성일세. 자칫하다가는 되려 우리가 잡힐수 있지.》
상대가 이렇게 걱정스러운 어조로 되뇌이자 처음에 말을 한 사나이가 안심시켰다.
《걱정할것 없네. 자네야 백제군의 태수가 아닌가. 미처 자네에게 알리지도 않고 내 부하들을 시켜 백제군에서 날래고 무예가 뛰여난자들을 수백명 데려오라고 보냈네. 좀전에 림치성을 돌아본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성안에 수비병이 불과 오륙백명뿐이라더군.
모용운의 호위무사도 수십명밖에 안되네.
내가 백제에서 데려온자들은 여러번 전쟁을 겪은 로련한 무사들이라 사실 그들만 가지고도 쉽게 거사를 치를수 있지.》
상대는 아직도 안심치 않는듯 하였다.
《그래도 심사숙고해야 하네. 절대로 우리 백제군이 개입하였다는것을 이곳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되네.…》
소운은 더이상 듣고만 있을수 없어 밖으로 뛰여나왔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여나올듯 세차게 요동쳤다.
소운은 그들이 꾸미고있는 음모의 내막을 다는 알수 없었으나 백제사람들이 고구려사람으로 위장하고 후연태자를 해치려고 하는것이 필경 좋지 못한 일을 벌리려 한다는것을 깨달았다.
소운이 급히 거처로 뛰여오는데 귀에 익은 하평의 발자국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아저씨, 이제 오세요?》
하평은 새파랗게 질린 소운의 낯색과 평상시 그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는 그의 행동거지를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깨닫고는 소운의 손목을 잡고 급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소운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참을성있게 다 듣고난 하평은 벽우에 걸린 장검을 벗겨들며 짧게 말하였다.
《소운아, 이젠 떠나거라.》
소운은 소스라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무슨 말씀이오이까. 그럼 소녀 혼자 떠나야 한단 말이오이까?》
하평은 괴로운듯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너와 함께 떠나고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줄이야.… 신라로 가는 상단의 행수와 다 약조를 해놓았으니 신라도성인 서라벌가까운 곳에 있는 고구려사람들의 마을까지 무사히 널 데려다줄것이다. 거기에서는 고구려와 래왕이 잦다니 고국으로 돌아갈수 있을것이다. 먼저 떠나거라. 내 곧 뒤따라가마.》
《아저씨와 함께 가는 길이 아니라면 싫소이다.》
소운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듯 말했다.
하평은 표정을 바꾸었다.
《백제사람들이 고구려를 반대하여 무언가 일을 꾸미려는것 같다. 그런데 고구려사람인 내가 이것을 외면해서야 되겠느냐. 연태자 모용운의 실지이름은 고운인데 고구려사람의 후손이다. 그가 연나라를 장악하게 되면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자고 하지 않을것이다. 어떻게 하든 그를 살려내야 한다. 널 떠나보낸 후 나는 곧장 풍발장군에게 달려가 사태를 수습하고는 곧 뒤따라가겠다.》
하평은 소운의 검은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소운은 하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옷매무시를 바로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아저씨, 그럼 소녀도 아저씨를 따라가겠나이다.》
하평은 소운의 손목을 잡으며 격하여 소리쳤다.
《소운아, 너는 안된다.》
《왜 소녀는 아니되나이까?》
하평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당부했다.
《너는 맹광을 만나야 한다. 언제까지나 널 이 험한 적국에 둘수 없느니라. 가거라, 떠나야 한다. 넌 꼭 맹광을 만나야 한다.》
하평은 소운의 작은 어깨를 잡아흔들며 거칠게 소리치고는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려는듯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작별은 짧았다.
연우는 성을 돌아볼 생각으로 방에 복신만 남겨두고 홀로 관역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쥐죽은듯 조용했다. 아까는 인총으로 몹시 붐비였으나 해가 일찍 떨어지고 어둠이 다가들자 사람들이 모두 잦아들었는지 인적기 하나 볼수 없었다.
그제야 연우는 북위와의 전시상태라 저녁이면 여기 림치에도 통행이 금지되였을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류달리 달이 밝았다.
또다시 연우의 가슴에는 왜땅에 가있을 치희에 대한 걱정이 머리를 쳐들었다.
어느새 환한 보름달이 치희의 맑은 얼굴로 바뀌는것이였다.
치희는 이 연우가 어떤 일을 벌리려고 여기까지 온것인지 알고있을가. 만약 치희가 지금 곁에 있다면 나를 두고 뭐라고 할것인가.
연우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관역으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렸다.
관역의 대문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문이 찌쿠덩 조심히 열리면서 남녀 두사람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연우는 재빨리 본능이 가리키는대로 캄캄한 옆골목에 몸을 던졌다.
그러니 저기 관역안에는 우리들 말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단 말인가? 어쩐지 그들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워 부쩍 의심이 일었다.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연우가 몸을 숨기고있는쪽으로 다가오고있었다. 남자는 나이가 마흔이 넘어보이는데 달빛에 드러난 얼굴에서 연우는 왼쪽볼에 난 칼자리를 보았다.
그들은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섰다.
《아저씨, 이젠 그만 가세요. 관사에는 소녀 혼자서 찾아가겠소이다.》
《아니다. 그래도 너부터 보내고나서 떠나겠다. 신라로 가는 상단이 삼경무렵에 길을 떠난다니 안심이 되지 않는구나. 풍발장군에게 가는것은 그다음에도 늦지 않다.》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무심히 듣던 연우는 순간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기에도 동족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저들은 무엇때문에 이렇게 관역을 바삐 떠나는가. 혹시 저들이 우리 내막을 눈치챘다면?…
연우의 손이 어느새 허리에 찬 검에 올라가붙었다.
문득 연우는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녀인의 모습을 보았다.
순간 연우는 가슴이 차겁게 얼어붙는감을 느꼈다.
녀인의 몸매며 류달리 흰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어쩌면 치희와 저리도 같을수 있을가. 내가 너무도 치희를 생각하다보니 착각을 일으켰는가? 연우는 이새로 신음소리를 내였다.
그러나 단지 착각으로만 여기기엔 녀인의 정열이 불타는 눈동자는 분명 치희의 두눈동자를 방불케 했다.
연우가 잠시 감았던 눈을 떠보니 어느새 그들 남녀는 저만치 멀어져간 뒤였다. 하지만 연우는 그 녀인이 그 자리에 서서 자기를 바라보고있는듯 한 환각에 빠져있었다.
간신히 자기를 되찾은 연우는 곰곰히 생각을 굴려보았다.
어떻게 할것인가. 그들이 설사 동족이라고 해도 불안의 싹을 제거해버리기 위해 검을 빼들어야 하겠는가?
아니다, 연우는 확신이 없이 동족을 향해 검을 빼들 자신이 없었다.
전장에서 수천수만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내가 지금은 어찌된것인가.
연우는 이젠 단념하였는지 어깨를 축 떨어뜨리고 관역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정오무렵에 중위장군 풍발이 거느리는 2천명의 기병이 림치성에 들이닥쳤다. 연나라 태자 모용운이 있는 관사에는 이미 수비병들이 물샐틈없이 지켜서있었다. 풍발은 관역에로 기병들을 파한 후에 하평과 함께 모용운의 처소로 들어갔다.
서재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있던 모용운이 웃는 얼굴로 일어서 마중나왔다.
《별치않은 일로 장군을 번거롭게 하는군. 어서 들어오시오.》
《전하께 해가 미치지 않았으니 다행인줄 아오이다.》
풍발은 두손을 마주잡고 읍을 하며 재빨리 대꾸했다.
풍발은 역시 무장이라 자기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으나 모용운이 무사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니 그제서야 안심하는듯 하였다.
모용운이 호탕하게 웃으며 풍발의 손을 잡아쥐였다.
그리고는 풍발의 뒤에 서있는 하평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엇보다 난 저기 하평에게 사죄부터 해야겠소. 장군이 하평을 굳이 수중에 두었을 때 고구려사람을 곁에 두고있다고 못마땅해했던 내 편협함을 빌고싶소.》
그들이 한창 이런 말을 주고받는데 관역으로 갔던 풍발의 부하들이 뛰여들어왔다.
《보고하겠소이다. 상인으로 가장했던 백제사람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소이다. 사인으로 있는 서영이란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성으로 진입하자 재빨리 남문으로 달아났다고 하오이다.》
《뭣들 하느냐? 감히 태자전하를 해치려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수 없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것이다. 그들이 갈 곳이란 필경 백제군밖에 없을것이다.》
풍발이 두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부하들에게 호령하였다.
이때 모용운이 손을 들어 풍발을 제지시켰다.
《그자들이 순순히 물러갔으니 구태여 뒤쫓을 필요가 없네.》
《이대로 방임해둘수 없소이다. 백제군에 쳐들어가서라도 이 한을 풀겠소이다.》
모용운은 처음과는 달리 낯색이 몹시 어두운 모습이였다.
그는 풍발의 어깨를 눌러앉히며 나직하게 말을 뗐다.
《나도 생각같아서는 백제인들에게 죄를 따지고싶지만 곰곰히 되새겨보니 그들이 이런 일을 꾸민 리면에는 보다 복잡한것이 있는듯 하네. 아마 조정내에서 나와 대립된자들이 백제를 끌어들였겠지.…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닐세.》
모용운은 이어 서재구석에 조심히 서있는 하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대에게 하나 물을것이 있소. 어찌하여 고구려사람인 그대가 연나라태자를 구원할 결심을 내렸소?》
하평은 그의 앞에 머리를 가볍게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태자전하가 고구려의 후손이기때문이오이다.》
모용운은 하평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요?》
하평은 풍발에게 얼핏 시선을 주었다가 이어 고개를 들어 모용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젠 그만 날 놓아주길 바라오이다. 고국으로 돌아가겠소이다.》
풍발이 와뜰 놀라 성급하게 다가서는것을 모용운이 손짓으로 물리쳐버렸다.
모용운은 풍발과 하평만을 남겨두고는 모두 밖으로 내보낸 후 서재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드디여 모용운은 하평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나서 그의 어깨에 묵직한 손을 얹었다.
《어떻소? 다문 서너해만이라도 나와 함께 지낼 생각이 없소?》
《저를 믿어주시니 감사하오나 이 가슴에는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차있소이다. 그러니 태자전하께서 고국으로 보내주시면 좋겠소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고구려를 위한다면 내 청을 굳이 뿌리치지는 않을것이요. 여기에서도 능히 고구려를 위해 일할수 있으니까.…》
모용운은 갑자기 소리를 낮추어 하평에게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그래 중원에 여러해나 있었으니 화성교에 대해 들은 소리가 있겠군.…》
《화…화성교라면 한족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연나라의 통치를 부정했던 비밀결사가 아니오이까?》
하평은 머리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고 오히려 풍발이 성급하게 소리쳤다.
고운은 풍발을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나라의 근간은 선비족이 아니라 한인이요. 장군도 지금 고구려의 후손인 나를 섬기고있지 않소.》
모용운은 하평에게 얼핏 시선을 주었다가 풍발에게로 상반신을 기울였다.
《한인이 주도하던 화성교는 이미 종말을 고한지 오래되오. 지금은 화성교가 연나라에 망명하고있는 고구려사람들의 조직이 되였소.》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실수 없겠소이까?》
하평은 모용운의 입에서 나오는 전혀 뜻밖의 사실에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풍발 역시 소스라치게 놀란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모용운은 그들의 기색을 일별해보고는 부지중 입가에 웃음을 담았다.
《그대들은 고구려와 인연이 깊으니 고구려 유주자사 진에 대해 알고있겠구만.…》
《어찌 모를수 있겠소이까. 진은 고구려의 영웅이오이다. 저도 한때는 진과 같은 특출한 무사가 되기를 열망했소이다.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아마 천하를 놀래울 공적을 쌓았을것이오이다.》
하평은 여전히 긴장한 시선으로 모용운을 바라보고 서있는데 풍발이 대신 대답했다.
《고구려의 옛 유주자사 진은 살아있소.》
모용운은 풍발의 열기띤 대답을 다 듣고나서 정색하여 말하였다.
순간 풍발과 하평은 깜짝 놀라 서로 마주보았다. 그중에서도 하평의 놀라움은 형언할수 없이 컸다.
《절대로 그럴수 없소이다. 나는 그때 진자사가 최후의 싸움을 치르는 모습을 직접 이 두눈으로 본 사람이오이다.》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소. 그러나 화성교에 고구려사람들이 침투한것도 사실이고 진이 살아있다는것도 사실이요. 소문에는 그가 두눈을 잃었다고 하오. 아직은 내곁에 있어주시오. 진을 찾아주시오. 나는 그를 꼭 만나야겠소.》라고 모용운은 하평의 손을 잡고 진정으로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