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국강상의 전설
제 1 장. 아침노을은 붉다
2
동쪽에서 세찬 돌풍이 불어왔다.
모래섞인 먼지의 검붉은 구름이 지평선을 뒤덮고있었다.
바다우에는 지척을 가려보기 힘든 자욱한 안개가 드리워졌다.
높이 회오리치는 먼지구름에 가리워 해빛도 어슴푸레 빛을 잃고있었다. 바람에 일어난 거세찬 파도는 사나운 기세로 기슭으로 달려들어서는 성글게 늘어서있는 나무숲을 쥐고 흔들며 애솔가지들의 비명소리를 멀리까지 날라가고있었다.
바다가기슭을 향해 그리 크지 않은 중선 한척이 파도에 들까불면서도 한치한치 모래불로 전진하고있었다.
연우는 중선의 고물에 서서 10여년만에 보는 백제군을 바라보고있었다.
백제군은 연우와 인연이 깊은 고장이라고 할수 있었다. 한때 백제의 좌장 진무가 여기서 태수를 할 때에 연우도 수년간을 백제군에서 살았던것이다. 백제군을 다시 찾느라니 새삼스럽게 감회가 끓어올랐다.
업성에서 어린 치희를 안고 백제군으로 말을 달려올 때가 떠올랐다.
연우는 그때일을 생각하며 부지중 피곤이 가득 어린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아마 고비사막에서부터 불어오는 황사가 여기까지 미쳤는지 바다기슭은 지척을 가려보기 힘들게 먼지구름으로 자욱하였다.
아직 기슭에 발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떠나온 아라땅이 몹시 그리워졌다. 연우는 지금까지 불운한 방랑생활을 겪느라 아라땅에 깃을 들이지 못했었다. 고구려-백제전쟁시기 왜땅에 병력을 청하러 오고갈 때 잠간 들렸을뿐이고 어렸을 때 떠난 그 땅을 항상 가슴에 품고있을뿐이였다.
연우는 향방없는 방황에 지쳐갈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묻혀있는 향수를 조용히 꺼내여보군 하였다.
연우처럼 깃들일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자만이 고향의 물 한모금이 꿀보다 달다는것을 진정으로 깨달을수 있는것이다.
불현듯 연우는 한산성으로 들어가려는 자기를 따라가겠다고 간청하던 치희의 하얀 얼굴이 눈앞에 생시처럼 밟혀와 쓸쓸한 고독속에 또다시 잠겼다.
몹시 그리웠다.
연우는 치희와 리별할 때 그의 오빠가 살아있다는것을 끝내 알려주지 못한것을 깊이 후회하고있었다.
어째서 치희와 헤여질 때 그 사실을 숨겼던가.
치희의 오빠가 엄연하게 살아 존재하며 고구려의 명장으로 자신의 적수가 된것이 두려웠기때문이였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자기 심중에 나타났던 그 변화를 어찌하는수 없었다.
다시 만나기 어려운 생사기로의 길우에서 굳이 치희에게 맹광의 소식을 감추게 되였는지 그 대답을 연우는 지금도 찾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에 치희가 있다면 말해줄수 있겠는가?
연우는 죽는 날까지도 그 말을 해줄수 없을것이였다.
연우가 걷는 이 길은 치희의 고국 고구려를 반대하는 길이였다.
어쩌면 연우가 치희의 오빠를 제 손으로 죽이게 될지 모르는 일이였다. 너무도 가혹한 운명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쳐졌다.
연우는 한숨을 무겁게 내쉬며 허리에 차고있는 장검을 무의식적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젠 그만 쉬고싶었다. 모든 원한과 야심을 잊고 치희와 함께 과거로 돌아가고싶었다.
전쟁도 권력싸움도 없는 깊은 산골에 들어가 조용히 살고싶었다.
연우는 제 손을 펴보았다.
이제 더는 동족의 피를 손에 묻힐수 없지 않는가.
그러나 연우는 자기가 이런 용단을 내리지 못할줄 잘 알고있었다. 이것이 바로 연우 자기에게 차례진 운명이였고 또 그만이 겪을수 있는 고뇌였으며 끝없는 방황이였다.…
연우는 사공의 웨침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멀리 기슭에 사람들이 모여서있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백제의 기치가 바람에 나붓기는것으로 보아 아마 미리 련락을 받고 마중나온 백제 태수 복신장군일것이였다.
연우는 다시 모진 현실세계에로 돌아갔다.…
산동 비래지 백제군 태수 복신은 연우와 소꿉동무라고도 할수 있는 막역한 벗이였다. 연우가 10여년전 백제군 태수로 부임되였던 진무를 따라 이곳에 와있을 때 그들 둘의 우정이 깊어졌던것이다.
복신의 아버지 우태는 젊어서 여기 중원땅에 이주하여 일찌기 군무에 종사해왔는데 백제장군 진무가 태수직을 지낼 때 그 수하의 용장이였다. 말그대로 복신은 백제땅이 아니라 낯설은 타향에서 태여나 성장한 인물이였다.
진무가 태수직을 벗어놓고 귀향한 뒤 우태가 태수직을 물려받았다가 세월이 흘러 복신이 병으로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제군 태수가 되였다.
백제군은 단순한 고을이 아니라 방대한 하나의 옹근 국가체계를 갖춘 땅이였다. 어찌 보면 백제와 별개로 독립적인 지위를 가진 소국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혼란된 중원의 정세를 리용하여 여기에 군을 설치한 백제는 치렬하게 물고뜯는 혼잡탕으로 되여버린 중원의 정치무대에서 큰 역할을 놀기 시작했다.
지형상의 유리한 조건 즉 바다를 면하여 백제의 힘을 배경에 둔 백제군은 중원땅에 발을 든든히 붙이고 세력권을 차츰 넓혀나갔다.
중원의 어느 한 나라와 동맹을 맺고 싸움을 벌리기도 하고 또 맹렬한 외교공세를 펴서 자국의 리익을 도모하기도 하면서 수십여년을 내려왔던것이다.
백제는 이곳에 수만명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3만명의 정예무력을 주둔시켰으며 중원의 동란을 피해 류랑하는 수십만의 한인들을 받아들여 정착시켰다.
광대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하고 중원과 백제의 문화가 뒤섞인 문명의 시대를 열어 방대한 부를 축적했다.
백제의 위신은 차츰 높아졌고 나중에는 북중국의 여러 유목민족국가들과 남중국 한족국가들사이의 싸움을 조정해오는 지위에까지 올라섰다. 실질적으로 화북지방과 료서일대를 통제하고있는 북방유목민들의 국가인 후연, 북위 등은 서로 치렬하게 령토쟁탈에 피눈이 되여 날뛰면서도 감히 백제군만은 서뿔리 건드리지 못하고있는 형편이였다.
만약 그들중 어느 한 나라가 백제군을 침범하게 되면 백제군은 그와 대치한 다른 나라와 즉시 동맹을 맺고 곧바로 전쟁에 진입할것이기때문이였다. 하여 백제군과 이웃하고있는 여러 나라들은 괜히 백제와 맞서싸워 피를 흘릴것이 아니라 그를 동맹의 형식으로 끌어들여 외응을 삼으려고 하였다.
백제는 이러한 위신과 체면때문에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리는 그 어려움속에서도 바다건너 백제군의 력량을 보존하고 유지해왔던것이였다.
어찌 보면 산동의 백제군은 백제 아신왕의 마지막도박밑천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아신왕은 다시한번 고구려와 나라의 운명을 거는 대격전을 치르기 위해 아라인출신의 백제장수 연우를 이렇듯 비밀리에 바다를 건너 떠나보냈던것이다.
…
연우는 복신과 함께 백제군 관사에서 만났다.
세월은 그들 두사람을 몰라보게 변모시켜 마주세워놓았다.
파란곡절많은 세월의 풍파에 씻기운 두 사나이는 한동안 마주보며 인사말조차 꺼낼념을 하지 못하였다.
한동안이 지나 연우가 먼저 말을 꺼내였다.
《자네가 태수가 되였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듣고서도 축하인사 한마디도 보내지 못한 나를 용서해주게.》
복신은 웃었다. 웃는 얼굴에 어렸을 때처럼 보조개가 깊숙이 패이는것을 본 연우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참으로 오랜만일세. 이젠 헤여졌던지도 어언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군.… 그래도 그때는 좋은 세월이였네.
함께 의지할 친구가 있어 좋았고 또 자네의 아버지와도 같은 진무장군이 있었으니까.》
복신은 연우의 얼굴이 차츰 어두운 기색을 띠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었다.
복신은 화제를 다른데로 돌렸다.
《참, 그런데 치희는 어떤가. 이젠 처녀꼴이 다 잡혔을테지. 아직도 내 눈엔 녀동생이 생겼다고 기뻐하던 자네의 모습이 선하네그려.…》
《치희와는 헤여졌네.》
연우는 한층더 어두운 얼굴로 괴로운듯 중얼거렸다.
《아니, 어떻게 말인가?…》
《한산대격전때 외숙부 시마에게 치희를 부탁했지. 지금쯤 살아있으면 왜땅에나 가있을거네.》
복신은 혀를 끌끌 차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거 참 안됐네그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왜땅으로 보낸단 말인가. 소문에는 왜땅에서 불길한 일이 벌어졌다고 하네만…》
연우는 불의의 역습을 받은 사람처럼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글쎄…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네. 얼마전에 왜인들과 교역할 물건을 가지고갔던 상단이 돌아왔는데 이또가야국을 쥐락펴락하던 김지수가 구노국 왜놈들에게 맞아죽었다더군.
하여튼 세력균형이 이주민소국들로부터 구노국의 원주민들에게로 돌아간것 같애.…》
연우는 허탈감에 스르륵 물러앉았다.
복신이가 한 소리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일이 정말 그 지경으로 굴러떨어졌다면 시마나 치희는 어찌되였을가.
얼핏 한번 대면했던적이 있는 구노국왕 사사히꼬의 흉맹한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군. 내가 백제를 떠나오기 전만 해도 태자 전지가 그 땅에 가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감히 구노국 왜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복신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연우의 어깨우에 손을 올려놓았다.
《자세한것은 모르지만 백제국 태자의 일이라면 마음을 놓아도 될것일세. 구노국 왜인들이 아무리 미개한 야만인이라고 해도 대국 백제의 태자를 해치지는 못할걸세. 상단의 상인들이 가져온 소식에 의하면 단지 세력균형이 바뀌였을뿐 별로 달라진것은 없다고 하더군. 왜인들이 백제와 등질 필요는 없을것일세. 오히려 백제의 립장에서 보면 가야사람이 왜땅을 다스리는것보다 미개한 야만인들을 휘여잡는것이 더 편리할지도 모르니까.…》
연우는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그건 자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일세. 난 구노국 왜인들을 직접 만나본 사람이야. 분명 그놈들은 우리에게 큰 화를 미치게 될것일세.》
복신은 연우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무슨 연유로 백제군으로 왔나? 전쟁이 끝난 후 고국에서 여러번 사신을 보내왔지만 자네처럼 무장이 직접 바다를 건너온것은 처음일세.》
《아신왕의 친서를 가져왔으니 좌우를 물리쳐주게.》
복신은 연우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낯색이 창백해졌다.
시종들과 호위무사들이 모두 밖에 나간 뒤에 복신은 연우가 가슴에서 꺼내준 아신왕의 친서를 펼쳐들었다.
입을 우물거리며 글줄을 읽어내려가던 복신의 표정이 차츰 굳어졌다.
《페하께서는 자네에 대한 기대가 크시네. 어떻게든 이 일을 성사시킨다면 우리가 바라는것을 얻을수 있을것이네.》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릴세. 연과 동맹을 맺기 위해 그 나라 정쟁에 우리 백제군이 끼여들다니… 난 찬성할수가 없네.》
복신은 아신왕의 친서를 탁자우에 내려놓으며 황급히 도리질을 했다.
연우는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가. 연나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는다면 백제군의 세력이 더욱 뻗칠것이 아닌가.》
복신은 쓰거운듯 비웃음을 흘렸다.
《한산성에서는 여기 실정을 너무도 잘 모르는군. 그래 연이 고구려를 이길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더우기 연내부에서는 고구려와 대립할것이 아니라 화친하고 중원통일을 이루자는 세력이 대등했거던. 이러한 연에 힘을 기대하는건 망상일세.》
연우는 묵묵히 대청안을 거닐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복신을 바라보았다.
《자네 말이 모두 옳네. 우리 역시 연내부의 갈등이 심하다는것을 간자들의 보고에 의해 알고있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연승상 모용가의 청을 받고 이렇듯 비밀리에 백제군으로 오게 된것일세.》
《정말 연나라와 결탁하려는것인가?》
연우는 한참이나 천정구석 어딘가를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복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백제가 연나라와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 고구려에 들어가면 어찌될것 같은가?》
《아마 료서방면으로 무력을 돌리겠지.…》
《바로 우리가 노리는것이 그것일세. 우린 연나라와 진정으로 동맹을 맺자는것이 아닐세. 자네가 이자 이야기했듯이 연나라는 고구려의 적수가 못되네. 설사 그럴 력량이 있다고 해도 오랑캐와 힘을 합쳐 동족을 칠수야 없지 않는가. 아신왕은 고구려가 백제변경에 집결한 무력을 료서에로 돌리기만을 기다리고있지. 고구려가 우리의 전략에 넘어간다면 백제는 다시 일어설수 있네. 내 그래서 연승상 모용가의 청을 받고 이렇게 바다를 건너온것일세.》
《어떤 일을 벌리려는가?》
연우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낮게 속삭이듯 말하였다.
《모용가는 백제와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태자 모용운을 없애달라는것일세.…》
《엇?!…》
복신은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섰다.
연우의 말이 꿈만 같아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연우는 복신의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도와주게. 이번 일만 성사되면 아신왕이 날 아라가야의 왕으로 내세워주겠다고 약속했네. 난 어떤 일이 있어도 모용운을 제거해야 하네.》
복신은 고개를 수그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이렇게 물었다.
《자넨 연태자 모용운에 대해 알고있는가?》
《그렇네. 그가 고구려사람의 후손이라는것도 알고있네.》
산동의 백제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림치라는 대도시가 자리잡고있었다. 림치는 한때 중원최대의 대도시라는 평판을 들을만치 오랜 력사와 번영을 자랑하고있었다. 전성기에는 인구도 무려 35만이라는 그때시기로선 찾아보기 드문 대도시였다.
수백년전 전국시기에 소진이라는 명사가 있었다.
일개 방랑객으로 6개국을 유세하여 진나라에 대한 동맹을 맺게 한 소진은 중원대륙에서 종횡학이라는 변술의 학문을 만든 조상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세치 혀로 천하를 움직이는, 당시로선 상상할수 없는 일을 해낸 중원의 명사였다. 그러한 소진이 당시 제나라의 수도 림치에 찾아와 그 성의 번화함을 이야기하면서 그 인구수를 《7만호》라고 하였다고 《사기》에 명백히 밝혀져있다.
또한 소진은 《림치는 물산이 매우 풍부하고 번영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피리를 불고 비파를 타고 축을 두드리며 거문고를 튕기면서 잘 놀고있다. 그밖에도 닭싸움, 개싸움을 자주 벌리며 도박을 즐겨한다. 거리는 수레와 사람들로 붐비고 마차는 충돌할듯이 래왕하고 사람들은 어깨를 스치면서 오가고 보고있으면 서로 소매로 막을 치는듯 하였으며 서로의 땀으로 비가 내리는듯 하였다.》고 마치 눈으로 보듯이 실감있게 글을 썼다.
그때 당시 발전된 제나라의 농경과 대표적인 소비도시로서의 모습을 방불하게 그려볼수 있게 하는 글이라고 할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4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중원의 동란을 겪어 경제도 문화도 활기도 모두 쇠퇴한 도시로 전락되고말았다.
연우는 백제군 태수 복신과 함께 이 림치를 향해 백제군을 떠났다.
림치에 후연왕 모용보의 양아들인 태자 모용운(고운)이 머물러있다는 소식을 들었기때문이였다. 물론 그들은 신분을 감추고 큰 상인행렬로 위장하고있었다.
일행은 북쪽으로 꺾어져흐르는 황하의 물결을 거슬러올라 림치를 가까이하고있었다. 그곳의 기후며 풍토는 백제와 너무도 흡사하였다.
산동의 제땅은 황하를 중원과의 경계로,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고있다. 림치에 가까이 갈수록 황하의 흐름은 더욱더 장관을 이루었다.
드디여 연우일행의 눈앞에 진흙벽돌로 높이 쌓아올린 림치의 성벽이 솟아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림치성의 관사에 들려 상인이라고 신분을 밝히고는 관리의 지시에 따라 관역(관가에서 운영하는 려관)에서 려장을 풀었다.
관역은 관사와 조금 떨어져 서쪽성문곁에 자리잡고있는데 전국시대 제나라때에는 림시궁전으로 쓰던 건물이라고 했다.
바닥은 서역의 교역물건인 양털로 짠 주단을 쭉 깔았고 벽에는 비단을 둘러쳐놓아 여간 호사스럽지 않았다.
아마 해당 관리에게 많은 뢰물을 찔러준 덕택인듯 하였다.
연우와 복신은 한인의 풍습과 문화에 어지간히 익숙되였지만 신을 신은채로 방에 들어가는 중원의 생활환경만은 마음에 들지 않는듯 별로 내키지 않는 태도였다.
그도 그럴것이 옛적부터 한인의 생활방식이나 풍습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인들의 생활방식과 완전히 딴판으로 달랐기때문이였다.
연우와 복신이 로독을 풀고 목욕을 마친 후에 관역까지 친절히 안내해주었던 서영이라는 하급관리가 찾아왔다.
서영은 손님접대를 맡은 사인이라는 하급관리로서 입이 수다스럽고 척 보기에도 욕심이 매우 많은자인듯싶었다. 아마 연우와 복신을 진짜 상인으로 알고 술값이나 받아낼 잡도리인것 같았다.
연우는 복신과 시선을 주고받고나서 서영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렇게 환대해주어서 감사하오. 늘 떠돌아만 다니다가 이렇듯 호화스러운 객관에 드니 로독이 일시에 풀리는듯 하오.》
연우가 이렇게 인사말 비슷하게 던지니 서영의 입귀가 벙긋 들리웠다.
《보매 큰 상인인듯 하니 어찌 푸대접하오리까. 내 그래서 힘을 좀 썼지요.…》
연우는 두말 않고 묵직한 은자를 꺼내여 탁자우에 놓았다.
서영은 거북한듯 헛기침을 깇고나서 슬그머니 은자에 손을 뻗쳤다.
《무엇이든 말만 꺼내시우. 내 기꺼이 살펴주겠소이다.》
서영이 은자를 품에 쑤셔넣으며 두서없이 지껄이는데 연우가 복신에게 넌지시 눈짓하였다.
이때까지 수염만 다스리며 끼여들지 않고있던 복신이 서영에게 다가앉았다.
《그대에게 하나 물을것이 있소그려. 여기 림치성에 모용운태자전하가 계신다는 소릴 들었는데 맞는지요?》
순간 서영은 대뜸 눈꼬리가 꼬부장해졌다.
《태자전하의 거처지를 알아서는 무얼하자는것인가?》
복신은 일어서려고 상반신을 쳐드는 서영의 어깨를 눌러앉히였다.
《그리 경계할 필요는 없소, 불손한 뜻이 있는건 아니니까.…》
《난 관청의 하바닥관리인지라 그런건 모르오.》
연우가 탁자우에 그리 크지 않은 함을 소리나게 놓았다.
서영이 잔뜩 겁을 먹고 물러서려고 하자 연우는 함을 열어보이였다.
서영의 두눈이 삽시에 휘둥그래졌다.
함안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금편들이 들어있었던것이다. 눈짐작으로도 금편이 여라문개는 될듯싶었다. 어느새 서영의 두눈이 탐욕으로 불탔다.
《그… 그런데 태자전하를 뵈… 뵈우려우?》
《그렇소.》 복신이 잘라말하였다.
서영은 괴로운듯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금이 담겨진 함에서 떼지 않고있었다.
《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연우가 서영의 귀가에 대고 낮게 속삭이듯 말하였다.
《우린 장사군이 아니라 고구려사람들이요. 태자전하를 뵈우러 바다를 건너 여기 림치성까지 온것이요.》
그제서야 서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팔소매로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꾹꾹 찍어내며 가냘픈 신음소리를 내였다.
《글쎄 어쩐지 한족상인들같지 않다 했더니 고구려사람이였구만.… 헌데 여기서는 당신들이 고구려사람들이라는것을 로출시켜서는 아니되오. 태자전하는 바로 고구려와 화평하자고 주장한것때문에 페하의 노여움을 사 여기 림치성으로 오게 된것이요. 명색은 여기 산동땅을 순무한다고는 하지만 조정에서 밀려난셈이지.…》
연우가 금이 든 함을 서영에게 넌지시 밀어주며 짐짓 고개를 끄덕여보이였다.
《역시 당신은 지금처럼 있기는 아까운 인물이로군. 우리가 태자전하와 시급히 만날수 있도록 힘을 써주시오. 아마 태자전하는 일후 당신에게 추궁이 아니라 상을 내리실것이요.》
《내 어떻게든 일이 성사되도록 노력하겠소. 태자전하는 지금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시오.》
서영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금함을 집어들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어디 계시오?》
연우는 흥분을 감추고 침착하게 물었다.
《계라는 고장이요. 래일 정오에는 돌아오실것이니 늦어도 모레 아침에는 기회를 마련해드리겠소.》
서영이 돌아간 후 복신이 의아한 시선을 들었다.
《왜 하필 우리가 고구려인으로 위장해야 하는가. 그저 상인이라고 해도 될터인데…》
연우는 묵묵히 창문가로 다가가 문발을 걷고 관역밖거리의 풍경을 한참이나 내다보다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여기 림치는 어쩐지 한산성과 너무도 흡사하군. 저기 저자거리로 가는 녀인들을 보게. 어쩌면 저렇게 한가하고 또 안락함이 어릴수 있는가.… 지금도 매일, 매 시각 전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있는데도 저들은 그것을 모르고있는것 같군. 하긴 지금쯤이면 한산성의 녀인들도 태평스레 저녁거리를 사러 저자거리로 나돌고있을테지.… 한산의 치욕을 겪은지 3년이 못되였는데도 말일세.》
《무슨 나약한 소릴 꺼내는가. 전장에서 걸음마를 익힌 자네가 이렇듯 나약해졌는줄 모르고있었군. 무사는 항상 쇠덩이같은 심장만을 가져야 하네. 오직 손에 든 검만이 그의 전부일세.…》
복신이 얼굴을 찡그리며 거칠게 소리쳤다.
연우는 공허해진 시선을 들어 복신을 바라보았다.
벗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보려고 하였으나 얼굴이 저절로 이지러지는것을 막을수 없었다.
《지금 천하는 무정하게도 새로운 전쟁을 또 요구하고있네.
나는 눈만 감으면 무수히 떠도는 외로운 령혼들이 보이는것만 같네. 무주고혼이 되여 하늘을 이리저리 방황하며 아마도 잃어버린 넋을 찾고있겠지.… 아니, 그것들은 피를 요구할걸세. 어째서 자기들만이 피를 흘려야 하는가고 절규하며 산 사람의 피를 요구할테지. 아마 나의 붉은 피도 요구할걸세.…》
복신이 연우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넨 지쳤군. 그러다가는 얼마 가지 못하고 쓰러지고말걸세.
내 친구로서 권고하네만 이젠 쉬는것이 어떤가. 그까짓 아라의 왕이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이전으로 돌아가게.…》
연우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이지러진 미소가 비껴있었다.
《그러기엔 이젠 너무 늦었네. 내 손에는 너무도 많은 피가 묻어있네. 그리고 또 나에게 모든것을 의탁한 수천의 아라사람들을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수도, 쉴수도 없는 몸일세. 김지수가 내게 해준 말이 생각나는군. 운명이 나를 아라인으로서의 존재감을 안겨주어 죽을 때까지 쉴수 없게 만들었다고 하였다네.…》
연우는 잠시 말을 끊고 천정구석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제는 가야-왜를 내세워 신라를 병합하려고 하고있네. 그렇게 되면 내 꿈이 이루어질수도 있을걸세. 그때는 백제사람의 탈을 벗고 아라사람으로 돌아가겠네. 아라를 가야국의 맹주로 크게 일떠세우려네.
아니지.… 그저 옛날처럼 6가야국이 화목하게 사는것을 보는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하겠네. 허나 고구려가 계속 승승장구한다면 백제도 가야도 모두 존재를 끝마치고말것이네. 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걸 막아야 하네.》
연우의 말을 듣고난 복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썩 내키지 않는군. 나라를 창업하신 온조대왕께서 창천에서 우릴 굽어보고계실것일세. 야망이나 이루자고 사막의 유목민인 연과 결탁하여 머릴 숙인다고 생각하니 백제사람의 자존심이 꺾이는것만 같네그려. 더우기 우리 백제는 고구려와 원래 한뿌리에서 나온 동족이 아닌가.》
《나도 내자신이 지금처럼 가련하게 여겨진적이 없었네.
하지만 지금은 날 도와주게. 고구려의 후손인 모용운이 연의 조정을 장악하기 전에 제거하도록 도와주게.》
연우는 복신의 손을 더듬어잡으며 간절하게 간청하였다.
연우는 아무리 벗이라도 복신에게 그 이상 더 털어놓지 않았으나 사실 그가 맡은 사명은 매우 중요하였다.
백제는 오래동안 남몰래 준비해온 전쟁준비를 이미 모두 끝냈던것이다.
백제의 전략은 이러했다.
먼저 가야-왜의 무력을 선봉에 내세워 신라를 병탄하고는 곧 그 기세를 타서 동, 서 두 방면에서 일제히 고구려를 공격하려는것이였다.
한마디로 가야-왜무력을 신라땅에 들이밀어 전쟁의 불집을 일으켜놓고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자는것이였다.
고구려와의 오랜 전쟁으로 참패의 쓴맛을 볼대로 본 백제로서는 이것이 마지막선택이였다.
벌써 한해전부터 은밀히 백제로 건너와 백제군의 무장을 갖추고 백제의 전법을 익힌 왜군은 어제날의 야만인의 무리가 아니였다.
더우기 구노국 왜군을 주축으로 하는 이또가야국의 무력은 다년간 해전을 치르어본 경험이 풍부하여 불의의 기습공격과 바다우에서의 싸움에 아주 능했다.
여기에 고령가야를 비롯한 6가야의 수천명지원군이 뒤를 받쳐주게 전략이 세워져있어 신라군에 비해 렬세한 무력이 아니였다.
물론 가야-왜련합군이 신라를 병합하기 위한 전쟁을 치를 기본력량은 아니였다. 근 3만명에 달하는 백제군이 전면전에 진입할 모든 준비를 끝낸지 오래였다.
그런데 가장 우려되는것이 신라의 청병요청으로 고구려가 개입하는것이였다. 이렇게 되면 전쟁상황은 또다시 급변하게 될것이였다.
하여 백제는 어떻게 하나 고구려가 후연과 대립하여 료서방면에서 쉽사리 발을 뽑지 못하도록 하고서 그 기회에 신라를 병합할 치밀한 전략을 세워놓고있었던것이다.
이것이 아신왕이 한산의 치욕이후 근 3년동안 깊이 타산한 전략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