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국강상의 전설

 제 1 장. 아침노을은 붉다

 

…9년 기해년에 백잔(백제)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더불어 화의를 맺고 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내려오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여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그 나라 지경에 가득차서 성들을 무너뜨리고있는데 노객(신라왕)은 태왕의 신민으로서 왕에게 와서 지시를 주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광개토태왕릉비문중에서)

 

1

 

396년 대격전이 끝나 고구려를 종주국으로 하는 삼국관계가 다시 이루어졌다.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 영락태왕앞에 무릎을 끓고앉아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고 다짐한 후 백제는 왕의 동생과 고위급대신 10명을 볼모로 고구려에 보냈으며 남녀노비 1 000명, 가는 베 1 000필을 바치고 58개 성, 700개 촌지역을 떼여주었다.

겨레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고구려의 오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고있었다.

고구려는 일단 남부전선에서 전투행동을 종결한 다음 북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남방진출에 주력하고있을 때 식신(숙신)을 비롯한 북방의 여러 종족들이 고구려의 기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지위를 꿈꾸는 기운이 나타났기때문이였다. 식신은 이미 서천왕 11년인 280년에 고구려땅을 침범하였던 북방의 유목종족이였다. 그때 서천왕의 동생 달가장군이 정예무력을 이끌고 불의에 식신의 거점인 단로성을 기습공격하여 그 성을 함락시키고 예닐곱개 부락을 부용(속령)으로 전환시킨적이 있었다. 식신은 옛 북부여의 수도 동북지방에 자리잡고있었는데 고구려가 남방진출과 적극적인 서진으로 한때의 어려움을 겪게 되자 어리석게도 반란을 꾀하였던것이다.

고구려의 영락태왕은 이것을 그냥 내버려둘수가 없었다.

영락태왕은 남쪽의 백제가 복종을 맹세하자 곧 적극적인 북방진출에 나섰다. 영락태왕은 이 기회에 반란을 꾀하는 식신을 짓뭉개고 고구려와 이웃하고있는 북방 여러 민족들에게 고구려의 위용을 과시하기로 하였다. 그 기초에는 앞으로 후연을 멸망시키고 옛 조선의 모든 령토를 수복할 큰뜻이 담겨져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진행할 후연과의 전쟁에 앞길을 막는 모든 장애물을 없애버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북방을 완정시켜야 삼국통일의 대업도 이룰수가 있었다.

영락태왕의 가슴속에서는 옛 조선의 모든 령토를 되찾고 여러개로 갈라진 겨레를 하나로 통일할 웅대한 포부가 이글거리는 용암으로 굽이치고있었다. 그러나 영락태왕의 이 웅대한 꿈을 이루는데 커다란 암초가 또다시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그것은 북방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식신도 아니요, 호시탐탐 고구려의 지경을 엿보고있는 후연도 아니였다.

고구려의 위력에 굴복하고 복종을 맹세하였던 백제였다.

사실 영락태왕은 백제의 아신왕이 무릎을 끓었을 때 그 기회에 백제지역을 힘으로 완전히 눌러놓을수도 있었다. 허나 그것은 동족간의 류혈싸움만을 초래하는것으로 하여 아신의 외교적인 굴복을 너그럽게 받아주었던것이다.

영락태왕이 북방진출전략을 세우고 그 실현에 들어가자 백제 아신왕은 굴욕의 수치를 씻고 령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야망이 되살아나 맹활약을 하기 시작하였다.

고령가야를 중심으로 세력지반이 변한 6가야련합체를 회유와 설복을 하다못해 나중에는 위협까지 해가면서 다시 손아래에 끌어들였다.

바다건너 왜땅에는 태자 전지를 보내여 그를 내세워 왜인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집결하려고 획책하였다. 비밀리에 중원으로 백제의 사신들이 자주 래왕하였으며 중원국가들과의 결탁이 이루어졌다.

백제전국에서 군역, 부역으로 청장년들을 닥치는대로 끌어냈으며 전쟁준비에 미친듯이 박차를 가했다.

영락태왕이 북방으로 진출한것을 백제는 더없이 좋은 기회로 여겼다.

백제는 근 1년만에 전쟁의 피해를 가셔내고 다시 일어섰다.

397년 가을 한수이남에서 대규모의 열병식을 벌려 군력을 시위한 다음 백제는 공공연히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벌렸으며 이 군사훈련에 가야의 장수들과 대가들도 초청하기까지 하였다.

말그대로 백제의 위력을 보여주어 가야를 비롯한 손아래동맹국들을 다시 끌어들이려는 속심이였던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서뿔리 군사행동을 전개하기를 아직 삼가하고있었다.

그것은 백제가 몇해동안 고구려군의 위력에 된맛을 톡톡히 보았으므로 될수록이면 무모한 싸움은 피하고 좋은 기회를 노리고있다가 최후의 일격을 가할 타산에서였다. 새로 모집한 신병들로 당장에 고구려군에 대항한다는것은 맨발로 바위차기였다.

백제는 전쟁준비의 일환으로 군사훈련을 집중적으로 벌렸고 군사들뿐아니라 백성들도 일상적으로 활쏘기와 무예를 습득하도록 강요하였다.

나라의 모든 체계를 전시체계로 바꾸고 임의의 시각에 한수를 넘어 고구려를 침공할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어놓았다.

398년에 들어서면서 백제는 고구려를 치기 위한 전초기지를 꾸리기 위해 한수북쪽에 쌍현성을 쌓았으며 이곳에 강병을 둔쳐놓았다.

바로 이러한 때 고구려에 잠입하였던 세작들이 북방으로 진출한 고구려군의 동태를 련이어 보고해왔다. 식신을 정벌하려 북상한 고구려 원정군이 승전하여 군사를 되돌렸다는 소식이였다.

고구려가 북방으로 진출한 기회를 노려 군사를 일으키려던 백제의 꿈이 또다시 산산이 부서져버리게 되였다.

고구려군이 식신을 공격하여 두개 성을 짓밟아뭉개고 수백명의 포로를 붙잡자 식신은 혼비백산하여 스스로 항복해왔던것이다.

식신이 이렇듯 제풀에 주저앉게 된 원인은 그들이 이미전부터 영락태왕의 명성과 고구려의 강대성을 풍문으로 또는 직접 제 눈으로 보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영락태왕이 북방에 수만대군을 둔쳐놓고 약간의 군사로 위력을 보이자 식신은 고구려군에 대항해보았댔자 멸족될수 있다는것을 절감하고 고구려에 복종을 맹세하고 어김없이 조공을 바칠것을 맹약하였다. 식신을 확고하게 복종시킴으로써 옛 부여의 동북쪽 송화강류역의 광대한 지역에 널려사는 식신족들이 고구려에 속령으로 편입되였고 고구려의 북방령역은 더 크게 확장되고 완정을 이룩하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성과는 백제를 극도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백제는 고구려가 식신과의 전쟁으로 혼란을 겪으리라 타산하였는데 일은 예상과는 정반대로 뒤집혔다.

백제 아신왕이하 조정대신들은 이를 갈며 통분해하였으나 그 무슨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가 난관에 직면하기를 기다리다가는 오히려 자기들의 수족만 점점 묶이운다고 생각하고는 대군을 발동하여 한수를 건너 한산북쪽의 목책으로 진출하였다.

영락태왕은 동족인 고구려의 너그러운 아량에 대한 백제의 오만방자한 배신행위에 대노하였다.

즉시 강력한 철기군을 직접 거느리고 백제군의 목책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백제의 배신에 하늘도 노했는지 한밤중에 뢰성벽력이 울리고 큰 별찌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백제군영의 한복판에 떨어지는 괴변이 일어났다. 백제는 아신왕이하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급히 군사행동을 그만두고 군사를 한수이남으로 철수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제조정내부에서는 고구려와 정면대결을 피하자는 목소리들이 강하게 울려나왔다.

아신왕의 정책이 파탄을 면치 못했던것이다.

새로 등장한 소장파의 대소관료들은 무모하게 고구려와 전면전을 추구할것이 아니라 먼저 신라부터 병탄하여 힘을 키운 후 북상하는것이 현명한 방책이라고 주장해나섰다.

백제의 정책은 점차 그들의 주장에로 기울어지게 되였다.

아신왕을 중심으로 한 구귀족세력들은 소장파 대소관료들의 주장에 눌리우기 시작했다.

392년이후로 수년간의 전쟁은 백제왕권과 그와 결탁한 여덟성씨의 구귀족세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하여 396년 전쟁이후로 백제조정내부는 세력균형이 바뀌여 새로 일어난 소장파의 대두를 가져왔던것이다.

소장파는 대체로 고구려와의 대격전에서 직접 일선에서 싸운 무장들을 중심으로 백제전국의 신진귀족들과의 결탁과정에 이루어진 세력이였다. 그들은 구귀족세력이 약해지는 기회를 노려 백제전국에서 근왕병으로 올라온 대소무장들을 규합하여 자기 세력을 구축하였던것이다.

하여 아신왕을 끼고돌던 진씨를 비롯한 오랜 문벌귀족들의 힘이 차츰 쇠약해진 반면에 새로 조정내부의 소장파 문무관료들이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이들은 무모하게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릴것이 아니라 머리를 숙이고 지위를 보존하는 한편 신라를 병탄하여 백제의 힘을 키운 후 서서히 북쪽으로 전쟁을 확대하는것이 현명한 방도라고 주장해나섰다. 이들의 주장이 전혀 무근거한것은 아니였다.

아무리 국력이 전쟁전 수준으로 일어섰다고는 하나 백제의 힘으로는 결코 고구려에 대항할수 없었던것이다.

비록 전쟁에 충당할 인원을 가야-왜군으로 보충한다고 해도 감히 대고구려에 정면으로 도전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만일 지금상태에서 싸움을 건다고 하면 신라가 대세의 추이에 재빠르게 동조하여 고구려의 노객(노복)이 된것으로 하여 전면전은 고구려-신라를 한 축으로 백제-가야-왜를 다른 축으로 격렬하게 벌어질것이지만 고구려의 위력에 비할바가 못되였다.

그러니 먼저 고구려에 가붙은 신라를 떼여내고 병탄한 다음 그 힘까지 최대한 가능한껏 동원시킨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이 아니라는것이 소장파의 주장이였다.

백제의 소장파세력은 표면상으로는 고구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직접 나서지 않고 가야-왜군을 선봉에 내세우리라 생각하고있었다.

물론 신라가 만만한 상대가 아닌것만큼 그 나라를 병탄하자면 가야-왜군의 무력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백제의 수만대군이 전면전에 나서야 가능한 일이였던것이다.

백제 아신왕은 마침내 소장파 대소관료들의 주장을 승낙하고 신라를 먼저 병탄하자는쪽으로 기울어졌다.

손아래 동맹국인 가야련합체는 신라와 대대로 적수이므로 그 동의를 받아내는것은 어렵지 않을것이였다.

가야만 응해나선다면 바다건너 왜세력을 얼마든지 끌어들일수 있었고 가야-왜군을 먼저 선봉에 내세워 신라를 공격할것이였다.

백제는 한수이남에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군사를 집결시킬것처럼 허장성세하는 한편 대군을 신라변경가까이로 은밀히 움직이였다.

가야-왜군이 남쪽에서 신라의 지경을 침범한다면 즉시 대군으로 전면전의 불을 지를 작정이였던것이다.

 

한산의 치욕(396년 전쟁이후 가야-왜군의 군사들은 백제의 항복을 이렇게 불렀다.)때에 김지수는 한팔을 잃었다.

고구려군에 포위된 한산성에서 연우와 헤여져 빠져나오다가 그만에야 고구려기마군사의 칼에 팔이 잘리웠던것이다.

말에서 떨어져 고구려군사에게 붙잡힐번 한것을 부하들이 간신히 구해내였다. 가까스로 포위환을 벗어나 남쪽으로 줄행랑을 놓아 가야땅에 도착했을 때에야 일행은 그곳에서 백제 아신왕이 무릎을 끓고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고구려의 수만대군이 한산북쪽에 주둔하고있으니 서뿔리 돌아갈수도 없고 하여 사람을 보내여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였으나 전쟁이 갓 끝나고 국가체계가 혼란된 백제땅에서 그 무엇도 제대로 알아볼수 없었다.

김지수는 무엇보다도 연우의 생사가 걱정되였다. 그것은 시마나 치희도 마찬가지였다. 치희가 혼자서라도 연우를 찾아가겠다고 하는것을 김지수와 시마가 간신히 눌러앉히였다. 아무리 무예실력이 출중하다고해도 연약한 녀인의 몸을 전란의 여파로 어수선한 백제땅으로 보낼수는 없는것이였다.

더우기 연우가 한산성으로 들어가면서 치희를 거듭 부탁한 이상 무사의 의리로써도 그 약속을 지켜야만 했던것이다.

눈물과 비분에 떠는 치희를 반백의 두 사나이가 이러저러한 소리로 달래가지고 한걸음한걸음 남쪽땅으로 나아갔다.

김지수는 연우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다시 왜땅으로 찾아올것이라 믿고있었다. 그는 한팔을 잃은 고통보다도 수십여년간 가슴에 품었던 의지가 한순간에 깨여져나간것이 더 아프고 쓰렸다.

연우라는 한 인간을 내세워 흩어지고 방황하는 가야를 크게 집결하여 대국으로 일떠세우려는 야망이 물거품이 되고말았던것이다.

지금형편에서는 왜땅으로 물러나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책이 없었다. 연우라도 곁에 있었으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할수 없었고 하려는 의지마저 꺾이였던것이다.

이러한 패잔병일행에 기이하게도 우연히 한산성에서 탈출한 백제태자 전지일행이 끼여들게 되였다.

불행이랄가 아니면 다행이겠는지 김지수는 백제태자 전지까지 끼여든 일행을 모두 이끌고 일단 바다를 건너 왜땅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김지수는 백제 못지 않게 혼란으로 뒤범벅이 된 가야땅을 뒤에 두고 배를 타고 왜땅으로 떠났다.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는 수천의 왜군이 기세좋게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진출하였으나 고구려군에 얻어맞고 패배를 당한 지금에는 불과 수백명의 인원뿐이였고 더우기 김지수자신은 한팔을 잃은 병신의 몸이 되였다.

쫓겨나다싶이 가야땅을 떠나 배에 몸을 실은 김지수는 가슴을 무딘 칼로 도려내는듯 한 괴로움에 시달렸다.

차마 대낮에 이또가야국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한밤중에 정박장에 배를 대고 도적고양이처럼 은밀히 뭍에 내려섰다.

김지수는 관사에도 들리지 못하고 곧장 집으로 기여들어가 안방에 들어박혔다.

하지만 이 왜땅 렬도안에서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있는지 김지수는 전혀 알수 없었다.

북규슈소국련합체에서 종주국의 지위를 차지하고있던 이또가야국이 자기의 병력을 모체로 여러 소국의 군사 수천명을 백제에 파병하였다가 처참한 패배를 당하자 왜땅에서는 불길한 움직임이 일어나고있었다. 이또가야국을 맹주로 하던 북규슈소국련합체가 해체되고 가야계통의 이주민들의 힘이 현저하게 약화된 대신에 원주민계통소국들이 새로 힘을 뻗치기 시작한것이였다.

그중에서 순수 원주민들로 주민구성을 이루고있는 구노국이 음흉한 야심을 가지고 일어섰다.

구노국왕 사사히꼬는 이또가야국이 약화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차츰 북규슈소국련합체를 하나하나 수중에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은 김지수가 한창 수하군사들과 함께 대륙에서 악전고투하고있을 때 은밀하게 벌어졌던것이다.

사사히꼬는 단순하고 미개한 야만인들과는 별개의 인물이라고 할수있었다. 그의 아비는 한때 해적으로 유명하여 중국 강남의 상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자였다.

큰 해적무리의 두목이 나중에는 왜원주민소국을 세우고 왕이 되였다.

해상에서의 략탈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중원의 무기를 강탈하여 무력을 갖추었는지라 날이 갈수록 그 세력이 강해졌다.

옛적부터 원주민들은 농경이란 말도 모르고 지내왔으므로 주로 사냥이나 채집을 생존방식으로 근근히 살아왔다.

그러한 생존방식이 세월이 흐르면서 배를 타고 상단들을 습격하는 해적짓으로 생존수단을 바꾸었던것이다.

그들은 구노국의 주변소국들 거의모두가 백제-가야계통의 이주민들이 세운 소국들이라 서뿔리 백제, 가야의 연해지방을 략탈할수는 없어 주로 중원남부지방까지 나아가 상선들을 덮치군 했다.

당시 왜인들의 배무이기술이란 매우 락후하여 큰것이라야 고작 서른명정도 타는 작은 배들이여서 자칫하면 풍랑을 만나 몰살되기 십상이였다. 해적질이 매번 성공한다는 담보도 없었다.

거치른 풍랑을 만나 표류할수도 있었고 또 고구려나 백제국의 순시선을 만나 붙잡힐수도 있었는데 왜구라는것이 밝혀지면 그 즉시 처형되군 하였다.

왜인들은 이러한 가혹한 생활조건으로 하여 차츰 야수의 무리같이 사납고 교활해졌다.

사사히꼬는 이러한 돌개무리속에서 태여나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부터 애비를 따라 해적선에 올라 멀리로 황해(조선서해)는 물론 고구려 남부지방에까지 해적질을 나갔던자였다.

당시 구노국의 백성이란 바꾸어말하면 거의 모든 성원들이 사납고 악착한 해적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주변나라들의 눈을 피해 고기배인척 위장하고 바다에 나가지만 상선이나 다른 어선들을 만나면 즉시 야수의 이발을 드러내고 덤벼들었으며 신라는 물론 고구려 연해지방에까지 기여들어 략탈을 하군 했다.

사사히꼬는 조상들의 이러한 기질을 남김없이 물려받은자였다.

그가 자기의 손으로 직접 가라앉힌 배들만 해도 아마 수백척은 헤아릴것이며 그로 하여 수천명의 죄없는 사람들이 수장되였다.

구노국 왜구들은 일단 략탈한 상선이나 어선에 한해서는 절대로 놓아 보낸적이 없었다. 살아돌아간자에 의해 신원이 밝혀지면 구노국은 응징을 받아 멸망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이렇듯 해적질을 거듭하고있는 사이에 사사히꼬는 신라인들에게 잡혀죽은 제 아비를 릉가하는 야수로 자랐다.

사사히꼬는 죽은 아비의 뒤를 이어 구노국의 왕이 되자 무슨 속심에서인지 훌쩍 중원땅으로 떠나갔다.

그때는 렬도의 왜소국들이 《문명의 개화기》를 만나 겨끔내기로 대륙과 교류를 원하고있을 때라 머나먼 중원에까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고있었다.

물론 왜국들은 종주국이라 할수 있는 고구려, 백제-가야, 신라 등의 지원과 승인하에서만 이러한 교류를 진행하고있었다.

사사히꼬도 이러한 추이를 타서 중원에까지 발을 붙여볼수 있었던것이다. 아마 렬도의 원주민으로서 고구려, 백제-가야, 신라 등 대륙의 세 나라와 멀리 중원에까지 다녀온자는 사사히꼬가 처음일것이였다.

편답과정에 사사히꼬가 느낀것은 천하는 얼마나 넓은가 하는것이였다. 자기가 나서자라난 세계와 너무도 판이한 거창한 세계를 눈여겨보는 사사히꼬의 눈에서는 야심이 황황히 불타올랐다.

사사히꼬는 편답과정에 나름대로 보고 느끼고 많은것을 배웠다.

특히 저 멀리 바다건너 중원에서 치렬하게 벌어지는 피의 싸움은 사사히꼬에게 권력에 대한 묘한 야심을 심어주었다.

사사히꼬는 구노국으로 돌아오자 가슴속에 대륙에까지 진출해볼 야망을 키워왔다. 때는 사사히꼬를 찾아왔다.

이또가야국이 패전하고 힘이 현저하게 약해진것은 사사히꼬에게 있어서 절호의 기회라고 할수 있었던것이다. 이것은 사사히꼬라는 보잘것 없는 왜인을 일약 력사라는 활무대우에 피묻은 발을 올려놓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되였다.

김지수는 집안구석에만 들어박혀 울분으로 세월을 보내고있었다. 그 옛날 흉중에 묻어두었던 꿈은 이미 넋과 함께 황천으로 가버린지 오래되였다.

김지수는 매일 미친듯이 화술에만 매달려있었다. 그는 혹시 그 누가 자신을 모함할지 모른다는 피해의식에 빠져 그가 누구이든 한마디라도 거슬리는 소리를 하게 되면 당장에 목을 쳐죽이였다. 이또가야국내에서도 같은 계렬의 금관가야인들만 믿고 아라계통의 사람들은 멀리하였으며 누구의 말도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김지수의 이러한 태도는 이또가야소국을 분렬에로 몰아갔다.

김지수에게 몸을 붙이고있던 백제태자 전지는 이대로 관망만 하다가는 이또가야국이 멸망할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가장 좋은 방도로는 백제혈통을 내세워 북규슈지방의 왜소국들을 집결시켰으면 좋겠으나 여기는 백제계통의 이주민들의 힘이 현저하게 약했기때문에 그것은 욕망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쨌든 왜소국들의 분렬의 위기를 막고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왜땅을 백제의 세력권안에 두어야 했다. 이러한 때에 구노국왕 사사히꼬가 은밀히 백제태자 전지를 찾아왔다. 백제에 복종하겠으니 구노국을 내세워달라는것이였다.

전지는 사사히꼬의 청을 선뜻 수락할수 없었다.

이주민혈통도 아닌 야만인과 결탁한다는것이 어쩐지 께름직하였던것이다. 그것은 또 대국 백제의 태자로서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기도 했다.

교활한 사사히꼬는 검질기게 달라붙었다.

그가 꺼내든 패쪽은 백제의 파병요구에 적극 응하겠다는것이였다.

사사히꼬뿐아니라 이또가야국의 일부 세력내에서도 이젠 백제의 속국 비슷한 지위에까지 굴러떨어진 가야보다 백제를 직접 등에 업고 왜땅에서 세력권을 펴겠다는 야심을 가진자들이 많았다. 이왕지사 대륙의 종주국을 섬길바치고는 가야보다 백제가 더 큰 대국이였기때문이였다.

백제태자 전지도 사사히꼬를 무턱대고 배제할수 없었다. 지금 왜땅에서 세력균형이 바뀐 판국에서 인구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야만인들을 손아귀에 넣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것이다.

야만인 왜소국들은 또 저들나름대로 허울만 남은 가야의 기반에서 벗어나 백제를 등에 업고 힘을 키우려고 획책하고있었다.

마침내 백제태자 전지는 결심을 내리였다. 앞으로 왜의 무력을 본토의 전장으로 밀어넣으려면 지금당장 사사히꼬를 끌어당길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렇다고 전지가 왜땅을 야만인들에게 맡기려고 작정한것은 결코 아니였다. 시급히 왜땅의 혼란을 바로잡고 백제를 돕기 위해서는 사사히꼬와 같은 왜인들이 필요했기때문이였다.

이주민출신들과 야만인들과의 세력균형을 맞추다가 기회를 보아 백제계통의 소국들을 내세워 왜땅을 백제가 모두 장악하려는것이 전지의 결심이였다.

동맹국인 가야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왜땅을 통제하며 왜의 무력을 끌어들이려는것이 바로 한산성을 떠나 멀리 렬도에 발을 붙인 백제태자 전지가 무르익힌 구상이였다.

바로 이러한 때 왜왕 사사히꼬는 곧 행동하기로 결심하였다.…

 

김지수는 요즘 며칠째 악몽속에 시달리고있었다.

눈만 감으면 고구려군사들이 창검으로 자기를 내리치는 환각에 빠져들군 하였다. 아무리 술을 퍼마셔도 악몽은 잊혀지지 않고 항상 주위를 배회하였다.

백제전역에 무주고혼이 되여 널려있는 부하들의 시체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있었다.

모든것이 김지수 자기의탓이라고밖에 할수 없었다.

한순간 어리석게도 길을 잘못든탓에 수많은 피를 흘리고 이렇듯 패전지장의 고배를 신물이 나게 맛보아야 했던것이다.

내가 왜 고구려와의 싸움은 맨발로 바위돌 차는 격이라는것을 잘 알면서도 굳이 그 길에 나섰던가.

금관가야의 왕통으로 태여났지만 일찌기 버림을 받아 죽음의 고비를 넘어야 했던 원한이 결국은 김지수를 그 길에 떠밀어세웠던것이다.

그러나 그 결말은 어떠하였던가.

백제에 붙어 힘을 키우려고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차례진것은 수천수만의 죽음뿐이였다.

백제도 가야도 신라도 어리석은 꿈에서 깨여나야만 했다.

김지수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어느새 손이 술주전자를 향해 저절로 가닿았다. 잠시라도 술을 입에 대지 못하면 괴로운 시달림에서 벗어날것 같지 못했다.

갑자기 김지수는 술주전자를 내팽개치고 불에 덴것처럼 자리를 차고일어났다. 분명 밖에서 나는 함성을 들었던것이다.

술기운에 흐릿하던 눈동자가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김지수는 무장답게 장검을 잡아쥐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화살이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날아와 지붕의 기와를 깨였다.

불화살이 섞여있는지 뒤울안에 쌓아놓은 건초더미에 불이 붙어 화광이 충천하였다. 밖에서는 싸움이 붙어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 비명소리가 악마구리끓듯 요란하였다.

두명의 심부름군이 미친놈처럼 허둥거리며 달려왔다.

《대인어른, 피하소이다. 구노국의 사사히꼬가 반란을 일으켰소이다.》

김지수는 아연하여 입을 벌렸다. 부닥친 현실을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그토록 경멸하여마지않던 원주민 왜인들에게 이런 모욕을 당할것을 누가 꿈에서나마 생각이라도 해보았겠는가.

김지수는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술독에나 빠져있은 자신을 경멸하며 장검을 뽑아들었다.

고령의 몸으로 한팔까지 잃은 뒤였으나 죽으면 죽었지 사사히꼬와 같은 야만인들에게까지 뒤를 보이고싶지 않았던것이다.

《두려워말고 싸워라. 곧 증원군이 당도할것이다.》

김지수는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호위무사들에게 웨쳤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사사히꼬의 동생 헤구리가 이끄는 구노국군사들에 의해 모든 길목이 차단되여 그 어디에서도 구원병이 오지 못한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김지수와 그의 호위무사들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싸운다고 해도 불과 10여명의 인원으로 수십배의 기습병을 감당할수 없었다.

사사히꼬를 선두로 하는 수백명의 구노국군사들이 대문을 부시고 쏟아져 들어왔다. 김지수는 사사히꼬의 칼을 맞고 쓰러지면서도 증원군이 오기를 고대하였으나 그것이 헛된 기대인줄을 끝내 깨닫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도 한때는 비운을 겪으면서도 가야국을 크게 부흥시키려고 노력한 사나이로서는 너무도 비참한 종말을 고했다고 해야 할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구노국이 이또가야국을 대신하여 북규슈소국련합체의 맹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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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ger - - coder - 201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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