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영락

제 2 장. 한산대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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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2년인 392년 10월 고구려군은 드디여 관미성에 대한 불의의 공격을 진행했다.

고구려군의 움직임과 무력의 배치, 공격전술에 대해 일일이 세밀하게 관찰하고있던 백제군은 영락태왕이 거란원정에서 크게 승전하고 돌아오는 북방군의 현무당을 비밀리에 료동방면에서 배에 태워 남하하여 관미성의 바로 코앞에서 상륙시켜가지고 불의의 공격을 들이댈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이것은 백제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타격이였다.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백제가 자랑하던 관미성의 든든한 성벽이 뚫리기 시작한것이였다.

관미성을 내놓으면 한수이북의 넓은 땅으로 고구려군이 거침없이 들어올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도성인 한산성이 함락될것이였다.

백제는 관미성이 전략상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아는것만큼 군지휘부를 여기에 두고 전전선의 지휘를 진행하고있었다.

관미성은 바다물을 끌어들인 해자와 아아한 절벽으로 둘러막혀있으므로 수십만 대군의 공격도 어렵지 않게 막아낼수 있는 천험의 요새였다. 식량도 수만명의 군대가 해를 넘길 정도로 충분하였고 군사들의 사기도 비교적 높은편이였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이번 공격은 백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있던 타격이였다.

비록 고구려군의 머리수는 관미성안의 백제군의 절반밖에 안되였으나 백제 좌장 진무는 이미 소문으로 현무당이 거란원정에서 큰 승전을 거둔 최정예부대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매 군사가 기마술에 능란하고 궁술이 귀신같아 거란을 공포에 떨게 한 부대라고 하였던것이다.

이러한 고구려군이 공격을 진행하자 벌써 성안에는 공포가 떠돌기 시작했다. 어디에서도 병력을 끌어올데는 없었다.

석현성 등지에 틀고앉은 고구려군 주력을 막기 위해 북쪽계선에 저지선을 긋고있는 부대를 빼내여 관미성을 공격해오는 현무당의 배후를 견제만 한다면 승전할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전선에 빈 공백이 생기게 될것이였다. 좌장 진무에게는 연우가 이끄는 1만명의 가야-왜군이 예비군으로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의 수군이 바다로 대규모의 공격을 가해오면 바다길을 막아야 할 마지막밑천이였던것이다.

진무는 머리를 싸쥐고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연우의 가야-왜군을 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심을 내렸다.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할것이였다.

또한 고구려군이 재차 수군에 의한 공격을 진행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때문에 이런 결심을 내리게 된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때 고구려 수군이 백제 수군에 비해 렬세했기때문이였다.

백제는 저들의 수군함대를 내놓고도 가야-왜군의 수군함대를 예비로 가지고있었다.

여기에 비해 고구려의 수군함대는 보유한 전함이나 군사를 수송할 상륙함과 수송선이 백제의 수군함대보다 적었던것이다.

더우기 료동방면에서 이미 5천의 현무당을 배길로 실어날라 관미성앞에 상륙시켰으니 어디서 전함과 수송선을 또 끌어오겠는가.

륙군은 고구려군이 강력한 철갑기병을 많이 가지고있어 강할지 모르겠으나 수군은 고구려군보다 함선수에서 우세하다고 자부하고있는 백제였다. 진무는 성루에 서서 해자에 부교를 놓고 그곳을 통해 성에서 쏟아지는 시석을 무릅쓰고 과감히 돌진해오는 고구려 북방군 현무당의 군사들을 굽어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마하니 영락태왕 담덕이 저기 5천밖에 안되는 군사로 난공불락의 요새인 관미성을 공격할것인가 생각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된 고구려군이 가련하게만 여기여졌다.

전령들이 련이어 달려와 싸움형편을 수시로 보고했다.

《재중장군과 고이만지장군이 이끄는 아군이 석현성에서 나와서 관미성으로 남하하려는 고구려군을 반격하여 물리치고 차지한 계선을 지켜냈다고 하오이다.》

《목협성을 떠난 고구려군도 우태장군이 이끄는 아군의 매복에 걸려 고전을 치르고있소이다.》

진무는 눈을 부릅뜨며 두손을 맞비볐다.

《담덕, 이제는 네 차례다. 너의 그 무모한 젊은 혈기가 어떤 피값을 치르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줄테다.》

진무는 이어 명령을 기다리는 부하들에게로 돌아섰다.

《여봐라, 어서 봉화를 지펴 연우의 군사들이 고구려놈들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하라. 내가 직접 성문을 열고 짓쳐나가 한놈도 남김없이 전멸시키겠다.》

부하들이 황급히 령을 받고 물러간 후 진무는 두손으로 성들을 짚고 서서 무모하게 공격해오는 고구려군을 굽어보았다.

진무의 눈에서는 만족한 웃음이 떠돌았다. 흔히 덫을 향해 다가드는 맹수를 바라보는 로련한 사냥군의 눈빛이 그런 법이다. …

연우는 수전에 매우 익숙한 가야-왜군 1만명을 태운 수군함대를 거느리고 관미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닻을 내리고있었다.

저기 관미성에서는 한창 무서운 대격전이 벌어지고있을것이였다.

관미성에서 봉화만 오르면 연우는 수군을 거느리고 상륙하여 공격에만 전력하고있는 고구려북방군의 뒤를 덮치고 동시에 진무가 성문을 열고나와 앞뒤로 포위섬멸할것이였다.

5천명의 고구려북방군이 전멸되면 영락태왕 담덕의 기세도 한풀 꺾일것이고 그 기세를 타서 총공격에 진입한다면 빼앗겼던 령토를 되찾을수 있을것이였다.

연우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기스스로가 환멸스러워 얼굴색이 무거워졌다. 백제를 위해 몸바쳐 싸운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야땅에 연우, 자기의 왕조를 세운다는 명목하에 수많은 가야사람들을 죽음의 전쟁판으로 내모는것이 혐오스러웠다.

장사에서는 우정이 있을수 없으며 우정에는 흥정이 있을수 없다고 했다. 수천수만의 가야인의 목숨을 가지고 권력을 사고파는 흥정을 해야만 하는 자신이 몹시 가련하게만 느껴졌다.

가야의 운명을 통채로 전쟁에 내맡기는것이 과연 옳은 처사이겠는가. 동족의 피를 팔아 뜻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기 모습이 가련하게만 느껴졌다.

연우는 누군가가 다가와 어깨우에 덧옷을 씌워주는것을 느끼고 괴로운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치희였다. 그의 맑은 눈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돌아서버렸다.

마치 나쁜 장난을 하다가 들킨 소년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연우는 이러한 자기자신에게 스스로 화를 내며 갈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았다.

《나는 지금 너와 같은 고구려사람들을 죽이러 가고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래도 날 따를수 있겠느냐?》

치희는 아무 말도 없이 재빛물결이 출렁이는 바다에만 시선을 주고있었다. 연우는 치희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얼핏 훔쳐보고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를 하였다. 어쩐지 치희가 가엾게만 생각되였다.

이번 싸움에 데리고나오지 말았어야 했었다는 자책감이 밀물처럼 가슴을 쳤다. 이 불행한 처녀에게 무엇이라고 위로의 말을 할것인가.

《조금만 더 기다려라. 그러면 꿈은 현실로 된다. 가야땅에 내 왕조를 세우면 다시는 너에게 이런 괴로움을 안겨주지 않겠다.》

연우는 치희의 어깨우에 손을 올려놓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순간 연우는 치희의 검은 눈에서 작열하는 불꽃을 보았다.

무엇인가 가슴을 무섭게 찌르는 환각까지 느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오이까. 정녕 10년전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갈수 없단 말이오이까.》

치희의 말은 낮고 부드러웠으나 연우는 그 말속에서 자기를 준렬히 꾸짖는 질책을 느꼈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으나 아직도 눈앞에 치희의 검은 눈동자가 얼른거렸다. 입새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한참만에야 자기를 다잡고 눈을 떠보니 치희는 이미 가버린 뒤였다. 연우는 검을 뽑아들고 제 얼굴을 비쳐보았다.

깨끗하게 산다는것이 어떤것일가?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는 생의 마지막황혼기에 가서야 총화받는다 하지 않았는가?!

연우는 가슴이 천근추에 눌리운듯 답답해옴을 느꼈다.

장군, 관미성에 봉화가 올랐나이다. 진무장군이 우릴 부르고있소이다.》

연우는 부하의 웨침을 듣고 눈을 떴다. 저 멀리 관미성 봉화대에서 한줄기 검은 연기가 길게 피여오르고있었다. 무의식중에 투구를 깊숙이 눌러썼다. 거친 바람에 돛폭이 크게 부풀며 함선들을 관미성으로 날라갔다. 부하들이 흥분된 얼굴로 다가섰다. 김지수와 외삼촌 시마를 비롯한 왜군장수들도 보였고 새로 수하에 들어온 6가야 장수들의 낯선 모습들도 보였다.

얼굴에 남아있는 고통의 표정을 가까스로 물리쳐버리며 고개를 든 연우는 검을 뽑아 관미성을 가리키며 소리를 높여 웨쳤다.

《전군은 나를 따라 고구려군을 공격할것이다.》

장수들이 저마다 군령을 받고 제자리로 돌아갈 때 연우는 시마를 한옆으로 데려갔다. 의아해서 올려다보는 시마에게 이런 말로 당부했다.

《외삼촌, 조카의 부탁이라 생각하시고 한가지만 절 도와주시오이다.》

《무엇이든 다 듣겠으니 어서 말만 떼거라.》

연우는 시마의 두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속삭이는듯 한 목소리로 낮게 말하였다.

《치희를 어디 먼곳으로 데려가주소이다. 부탁이오이다. 고구려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주시오이다.》

 

맹광은 가야-왜군이 배길로 불의에 배후를 기습해왔다는 전령의 보고를 받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타격이였다.

력량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성을 정면으로 공격한것은 좌우익을 막아줄 군사가 곧 당도한다고 믿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증원군은 오지 않고 가야-왜군이 배후를 기습해온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것이였다. 맹광은 이를 악물며 검을 틀어잡았다.

싸워야 한다. 다른 길이란 있을수 없다.

갑자기 관미성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백제군이 성문을 열고 짓쳐나왔다. 고구려군은 삽시에 대포위속에 들었다.

맹광의 눈에서는 불길이 쏟아져나왔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싸워 대고구려군의 본때를 보여주리라!

맹광은 영락태왕이 직접 지휘하는 한 관미성대격전이 반드시 이기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때가 되면 영락태왕이 반드시 구원해줄것이다.

맹광은 대장기를 높이 들고 온 전장이 울리게 찌렁찌렁한 소리로 웨쳤다.

《군사들! 두려워말라. 태왕페하께서 꼭 구원해줄것이다. 최후의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승전을 믿는자는 반드시 이긴다.》

고구려군은 대장기주위에 시급히 밀집하여 사방으로 향한 원형진을 짓고 적의 공격을 막아 싸우기 시작했다. …

관미성앞에서 적아가 마구 뒤엉켜 죽기내기로 싸우느라 여념이 없는데 갑자기 바다쪽에서 뽀얀 안개를 헤치고 이루 헤아릴수없이 많은 배들이 불쑥 자태를 드러내보였다.

돛폭에 바람을 가득 안은 덩지 큰 배들이 화살같이 빠른 속도로 기슭으로 가까이 접근했다.

관미성의 성루에 올라 전신을 드러내고 싸움을 지휘하던 백제 좌장 진무는 얼결에 바다쪽을 바라보다가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저건 무슨 배들이냐?》

진무의 성급한 물음에 좌우에 있는 부하들중 그 누구도 대답할수 없었다.

《글쎄올시다. 생긴것으로 봐서는 조운선같은데 도무지 어느 나라 배인지 알수 없소이다.》

조운선이라니?!… 조운선이 어찌 전쟁판에 나타날수 있겠는가.

진무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치렬한 전장을 다시 굽어보았다.

연우가 이끄는 가야-왜군은 모두 상륙하여 고구려군을 포위공격하고있었다.

가야-왜군도 아니라면 아신왕이 보낸 지원군인가?…

설마하니 고구려의 수군은 아닐테지?!…

웬일인지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싸늘해져서 정신없이 기슭으로 들어오는 배들을 굽어보기만 하였다.

드디여 포구에 다달은 배들이 살같이 들어오던 속도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룡골이 모래불에 푹 박히게 기슭으로 올라섰다.

맨 선두에서 기슭에 올라선 배머리우에 갑자기 누런 기치가 불쑥 솟았다. 고구려태왕의 기치인 일월기였다.

함성이 일어났다.

조운선이라고만 여겼던 배에서 고구려군이 함성을 지르며 앞을 다투어 뛰여내렸다.

《속았구나!》

그제서야 눈앞에서 벌어진 사태를 깨달은 진무는 주먹으로 돌을 치며 부르짖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배에서 뛰여내린 고구려군은 재빨리 대오를 짓고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백제, 가야-왜련합군을 무섭게 공격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고구려군의 공격에 가야-왜군은 물론 정예라 일컫던 백제군마저 공포에 질려 허둥거렸다.

《큰…큰일났소이다. 고구려의 태… 태왕군이오이다.》

백제 좌장 진무는 부하들의 비명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혼란된 전장을 굽어보았다.

붉은 전포우에 은백색의 철갑을 입은 복장으로 보아 태왕군이라 불리우는 고구려왕당군이 틀림없었다.

선두배에 누런색의 일월기가 높이 솟아 해풍에 나붓기는것이 담덕이 직접 이끌고온 고구려의 근위군인 왕당의 군사들이였다.

백제 좌장 진무는 이번에도 영락태왕의 계책에 속았던것이다.

담덕은 우정 북방군 현무당을 배길로 날라 상륙시켜 관미성을 공격하게 하여 바다를 막고있는 가야-왜군을 유인하고서 이렇듯 텅 빈 바다로 조운선을 타고 공격해왔던것이다.

진무가 아무리 가슴을 치며 후회해도 형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

드디여 기슭에 모두 상륙한 고구려의 왕당군은 일월기를 선두로 관미성을 향해 총진격을 개시했다.

그것은 마치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번지는듯싶은 장쾌한 광경이였다.

영락태왕 담덕은 호위군사들과 장군들이 그토록 간절히 만류하였지만 기어코 선두에 서서 나아갔다.

시위장수인 왕당군의 일월수호당주 미추는 태왕에게 위험하니 뒤로 물러서달라고 간청하다못해 아예 말고삐에 매달렸다.

《태왕페하, 신들이 죽기로 싸우겠으니 제발 물러서주시오이다. 신이 직접 선봉에 서겠나이다.》

담덕은 서늘한 시선으로 전장을 바라보며 미추의 청을 단호히 밀어던졌다.

《짐이 선두에 서지 않으면 누가 저기 사지판으로 즐겨 가겠는가.

짐이 뒤에서 군사들에게 죽음을 두려워말고 싸우라고 소리칠수는 없다. 짐이 여기서 물러서면 군사들이 상하게 될것이고 그러면 짐의 육체를 잃는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짐은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영락태왕은 두팔을 벌리고 필사적으로 막아나선 미추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걱정말아라. 짐은 반드시 관미성을 타고앉을것이다. 오늘의 싸움은 각자가 어떻게 싸우는가에 달려있다.》

영락태왕은 치렬한 전장을 향해 대오의 맨 앞에서 말을 달렸다.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태왕을 선두로 한 고구려왕당군이 폭풍이 휘몰아치는듯 한 기세로 백제군을 덮쳤다.

고구려왕당군의 공격은 그야말로 노도와도 같았다.

《영락태왕이 왔다! 고구려의 부루장군이 신병을 끌고 쳐들어왔다!》

이러한 공포의 비명소리가 도처에서 터져오르고 백제, 가야-왜의 군진은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져버렸다.

성루에 높이 서서 전장을 바라보고있던 진무는 사태가 순식간에 역전되고 백제, 가야-왜군이 고구려왕당군의 공격에 갈팡질팡하며 쫓기는 모습에 기절초풍하였다.

더우기 왕당군의 선두에서 날리는 고구려태왕의 기치는 싸움에서 두려움을 모른다는 백전로장 진무의 가슴을 싸늘히 식게 하였다.

진무는 저도 모르게 두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영락태왕이 바다로 직접 공격해올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것이다.

왕당군의 공격으로 포위에서 벗어난 고구려북방군도 기세가 바짝 올라 함성을 지르며 죽기내기로 달려들었다.

성밖을 나갔던 백제군과 가야-왜군이 고구려군의 무서운 공격에 쫓겨 성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성우에 있는 백제군사들이 패주병들의 퇴로를 열기 위해 비발치듯 화살을 날렸다. 진무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길게 내였다.

고구려근위군인 왕당의 군사들이 하나같이 방패로 머리를 가리우고 전진하는데 그들의 선두에서는 해와 달을 부각한 고구려태왕의 황색기가 장엄하게 나붓기고있었다.

근위군의 공격에는 여유작작하면서도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진무는 눈꼬리를 파들파들 떨었다. 그는 아직까지 이러한 정예의 군사들과 싸워본적이 없었던것이다.

고구려에서 흔히 왕당이라고 일컫는 근위군은 고구려군 무력중에도 최정예의 무력이며 매 군사는 실전으로 무예를 다진 로련한 무사들이였다. 전고가 하늘땅을 뒤집을듯 맹렬하게 울리는 속에 수천명의 고구려왕당군이 마치 열병식에 나서듯이 공격해오고있었다.

관미성에서 쏟아지는 화살이 영락태왕의 주위에 비발치듯 떨어졌다.

《페하를 몸으로 지켜야 한다. 우리는 고구려무사들이다!》

시위장수 미추가 전장의 온갖 소음을 짓누르며 벽력과도 같은 소리로 웨쳤다. 와 함성이 일어나며 근위병들은 방패로 아니, 온몸으로 영락태왕을 에워싸고서 관미성을 향해 무섭게 짓쳐들어갔다.

왕당의 군사들은 절대로 렬을 흐트리지 않았다.

화살이 비발치듯 하는 속을 뚫고 전진하는데 따라 사상자가 계속 생겨났으나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재빨리 그 공백을 메꾸면서 맹공격을 들이대고있었다.

성벽이 부서지고 성문이 깨여져나갔다.

가파로운 성벽을 기여오른 고구려북방군 군사들이 성루에 고구려북방군의 기치를 꽂았다. 성문을 돌파한 왕당군과 백제군과의 치렬한 싸움은 차츰 성안으로 번져지고있었다.

진무는 검을 내리웠다. 그는 졌던것이다. 아니, 백제가 패하였다! 진무는 상처입은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하늘을 향해 두팔을 쳐들었다.

《아, 하늘이여! 정녕 백제를 멸망시키려오이까? 우리 백제가 고구려의 손에 넘어지는것을 이대로 보고만 계신단 말이오이까? 아-》

고구려군이 성안으로 진입했다.

곳곳에서 백제군사들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방어자들은 어떻게 하나 고구려군의 진격을 막아보려고 자리를 옮겨가며 저항했으나 이미 기울어진 사태였다.

진무는 미친 사람처럼 관미성안을 향방없이 헤매였다. 비틀거리면서도 무작정 앞으로만 걸어갔다. 군사들의 시체가 그의 발길을 걸음마다 붙잡았다.

진무는 괴로왔다. 괴로운 나머지 미쳐죽을것만 같았다.

하늘이 백제를 멸망시키려고 하고있었다.

그는 사람이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했으나 걸음걸음 패배만을 당했다. 고구려군을 이기기 위해 가야-왜군까지 끌어들였으며 비렬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수천수만의 군사들이 피를 흘리는것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백제의 백성들에게 전쟁만을 강요했었다.

과연 이것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짓이란 말인가?

고구려를 짓밟고 천하의 패권을 쥐려는 꿈이 어리석은 망상이란 말인가?!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좋은것도 나쁜 목적에 쓰이게 되면 나쁜것이 된다는 말이였다.

백제를 부흥시키려는 꿈이 야심을 낳았고 그것이 자기의 범위를 주제넘게 넘어섬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산것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수없는것이였다.

불을 바라고 부나비가 뛰여든것은 불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고구려에 전쟁을 강요했다가 이런 처참한 살륙을 불러온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진무는 계속 정처없이 앞으로만 걸었다. 몇 안되는 호위군사들이 그의 주위를 싸고돌며 죽기내기로 보호하고있었다.

온몸에 피를 들쓴 연우가 어디선가 달려왔다.

그의 뒤로는 백여명의 아라인들이 우르르 따라섰다.

연우는 다짜고짜 진무의 팔소매를 잡아끌며 큰소리로 웨쳐댔다.

《여기서 무얼하시오이까? 내가 길을 열겠으니 여길 벗어나야 하오이다.》

진무는 연우의 손을 뿌리쳤다.

《놔라, 내 죽을 곳은 여기다. 난 성과 운명을 같이하겠다.》

연우는 더이상 지체할수 없었다.

고구려군에 의해 앞뒤가 차단되면 빠져나갈 가능성이 없게 되는것이다.

연우는 좌우에 대고 눈짓했다. 몸집이 우람한 두명의 힘장사들이 달려들어 진무의 몸을 달랑 들어올렸다.

발광하는 진무를 쳐들고 남쪽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진무를 혼자 둬두고 빠져나갈수 없기에 연우가 직접 군사들을 데리고왔던것이다.

수백명의 고구려군사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앞을 막아나섰다.

연우는 내닫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검을 비껴든채 고구려군사들의 무리속에 뛰여들었다.

그들은 치렬한 백병전끝에 간신히 사지판을 벗어나 성을 뛰쳐나올수 있었다.

고구려군에 점령된 관미성을 뒤에 둔채 남쪽을 향해 달렸다.

백제 좌장 진무와 그의 수하들이 남쪽성문으로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은 맹광은 길게 생각할새없이 추격병을 이끌고 성을 뛰쳐나왔다.

창황중이라 그의 뒤를 따르는 기병의 수는 불과 20여명뿐이였다.

진무를 놓쳐서는 안되였다. 진무만 사로잡으면 백제군의 항복을 받아낼수 있기때문이였다. 맹광은 말을 죽기내기로 때려몰며 진무가 도망쳤다는 남쪽길을 향해 풍우같이 달렸다.

성을 50리가량 벗어나자 멀리서 백제군의 기치가 은은히 엿보였다.

맹광은 진무를 사로잡으려는 생각에만 정신이 빠져있어 앞뒤정황을 헤아려보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그곳은 백제의 패잔병들이 열어놓고 기다리는 함정이였다. 맹광은 산뒤에서 전고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어세웠다. 한무리의 기마군사들이 뽀얀 먼지를 일구며 맞받아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화살이 날아왔다. 아마 고개우에 궁수들이 매복하고있는 모양이였다.

《흩어져라!》

맹광의 호령소리에 고구려군사들이 다급하게 흩어졌다.

숲속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한무리의 적군사들이 창검을 추켜들고 뛰쳐나왔다. 진무를 사로잡으려는 생각에만 몰두하다나니 이렇듯 복병이 기다리고있을줄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것이였다.

맹광은 큰 실책을 범했던것이다. 뒤로 물러설 길은 없었다.

맹광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맞받아 달려오는 적기마병들의 무리속에 과감하게 뛰여들었다.

맨 처음 맞다드는 적장의 목을 치고 뒤따라 들어오는자의 가슴을 일직선으로 찔렀다. 세번째로 달려드는자가 창을 들어 내지르는것을 왼손으로 덥석 잡아 힘껏 나꾸어챘다.

창을 놓친자는 그 힘에 못 이겨 땅에 나딩굴었고 맹광은 빼앗은 창으로 네번째로 접어드는 적수를 겨누고 힘껏 던졌다.

맹광은 줄지어 달려드는 백제군사들을 사정없이 베여 쓰러뜨리며 앞으로 말을 달렸다. 뒤에서는 20여명의 고구려기마군사들이 숲속에 매복하였던 백제군사들과 치렬하게 맞붙어 싸우고있었다.

고구려군사들은 창황중에 당한 불의의 기습이라 차츰 밀리는 형세였다. 더우기 백제군은 고구려군에 비해 10배나 넘는 인원이였다.

맹광은 타고있는 말이 화살에 맞고 쓰러지는통에 땅에 내려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재빨리 땅에서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았다.

백제기마군사들은 서뿔리 덤벼들지 않고 맹광의 주위를 빙빙 에돌며 기회를 노렸다. 맹광은 두발을 땅에 든든히 붙인 자세에서 검을 수평이 되게 쳐들고는 백제군사들이 먼저 공격해오길 기다렸다.

백제군사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 맹광은 그들이 천천히 뒤걸음쳐 물러서는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백제군사들속에서 한 장수가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맹광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얼굴이 남쪽사람답게 둥그스럼하고 눈이 부리부리한 젊은 장수였다.

다부진 몸을 은빛의 철갑으로 단단히 감싸고 발에는 흔히 기병들이 신고다니는 쇠못달린 놋신발을 신고있었다.

당시의 기마군사들은 후세에 박차라고 일컫는 쇠붙이를 발뒤꿈치에 단것이 아니라 주로 놋으로 주물한 신발을 신고다녔다. 이것은 땅에서 걷기에는 불편했지만 등자를 밟고 말을 타고 다니기엔 아주 편리했다.

놋신발의 바닥에는 예리한 쇠못이 무수히 박혀있어 등자가 쉽게 미끄러져 벗겨지지 않았고 또 필요에 따라 말배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말이 아픔을 느끼기때문에 빨리 달리는것이였다. 더우기 이 놋신발은 일종의 무기로도 리용되고있었다. 백병전때 놋신을 신은 기마수에게 채우거나 밟히우기만 해도 상대는 거의 죽기 직전에까지 이르기가 보통이였다.

기마군사들이 신고다니는 놋신의 연원은 일찌기 철갑기마군사를 많이 배출한 고구려에서 발상된것으로서 이시기(4세기)에 와서는 백제, 신라를 비롯한 남쪽국가들에도 널리 전파되였었다.

놋신이라 하지만 그 무게가 매우 가볍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가죽신발에 못지 않게 편리했다.

맹광은 상대가 검을 머리우에 쳐들고 오른쪽으로 도는데 따라 자기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상대가 든 검은 맹광이의 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다.

맹광은 고구려기마군사들이 주로 가지고다니는 긴 검을 즐겨썼는데 당시에는 환도라고 불리우는 장검이였다.

그 길이가 3척이 넘고 자루끝에 고리모양의 장식이 붙어있어 환도라고 불리웠다.

거기에 비해 백제장수는 한팔길이의 보다 짧은 검을 쓰고있었다.

원래 맹광이 쓰는 고구려재래의 환도는 보병들보다 기병들이 쓰는것으로서 단 한번의 타격으로 상대를 반드시 쳐죽이는 법수를 쓰게 되여있었다. 말그대로 공격형의 검법을 갖추어야 했던것이다.

장검은 말에서 내려 땅에서 쓸 때에도 자연히 쌍수도로 쓰게 되여있었다. 장검은 공격에는 유리하지만 한번 타격에서 실패하면 다음자세를 취하기까지의 동작이 느리고 검의 방향을 마음대로 바꿀수 없는 약점을 가지고있었다. 한마디로 공격에는 유리하고 방어에는 불리했다.

장검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검은 자세에 변화가 많고 검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수 있는 반면에 장검의 정면공격을 막아낼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맹광은 장검을 두손으로 잡고 오른쪽으로 곧추 세워들고 상대가 빈틈을 보이기를 잔뜩 노리고있었다.

백제장수는 검을 불쑥 내밀어 그 끝으로 맹광의 머리를 견주었다.

쉽사리 빈틈을 보일 상대가 아니였다.

적아가 모두 싸움을 멈추고 둘의 대결을 지켜보고있었다.

맹광은 백제장수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문득 그의 모습이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에 미쳤다. 분명 그는 어디선가 맹광이 상대하였던 인물이였다. 생사를 건 전장에서 무사는 자기가 든 검에 정신력을 집중하지 못하면 패하기마련이다.

맹광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생각은 계속 상대하고있는 적수의 얼굴을 기억에서 더듬어내고있었다.

잔뜩 노리고 섰던 두사람중에서 백제장수가 서너걸음 크게 뛰며 육박해들어왔다.

맹광의 장검이 원을 그리며 휘익 날았다. 아츠러운 소리가 울리며 검이 마주쳤다.

백제장수는 반대켠으로 휘둘러 떨어지는 맹광의 검을 피해 그의 등뒤로 빠져나갔다.

맹광은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이번에는 곧바로 우에서 아래로 힘껏 내리쳤다.

백제장수는 몸을 틀어 검을 흘려보내는것과 동시에 맹광의 가슴팍을 향해 내찔렀다.

맹광은 검을 들어 상대의 검을 튕겨냈고 둘은 검을 십자로 맞댄채 돌아갔다. 두사람이 식은땀으로 화락히 젖은 상태였다.

벌써 다섯합이 지났지만 승부는 결단나지 않았다.

둘의 무술실력이 엇비슷하여 승패를 결정하기가 어려웠던것이다.

두사람이 다시 떨어질적에 맹광이 수평이 되게 장검을 휘둘렀는데 상대는 다급하게 검을 바꾸어쥐며 옆구리로 들어오는 칼날을 간신히 막아내였다.

맹광은 공격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상대에게 기회를 주면 그만큼 공격할 회수가 적어지고 나중에는 반공격을 당할수 있는것이였다.

본래 맹광이 배운 검술은 몸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진퇴하게 되여있어 원안에 들어온 상대는 장검술의 공격에 피동으로 몰리우다가 결국은 패하도록 되여있었다.

반면에 검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무술검은 대체로 중원의 검법이 전해져 발전하였는바 장검술과 맞부딪치는 경우 그 원의 공격력을 피해 바깥으로 작은 원을 그리게 되여있었다.

맹광이 공격을 멈추고 상대방의 전술에 말려들면 패하고말것이였다.

이것을 잘 알고있는 맹광은 상대방이 검의 방향과 자세를 바로잡기 전에 단칼에 베려고 압박해들어갔다.

백제장수는 맹광의 장검을 피해 껑충 뛰기도 하고 또 허리를 꺾으면서 뒤로 물러서기도 하였다.

역시 장검의 날카로운 공격예봉을 피하기는 어려운 법이였다.

일직선으로 들어오는 검끝을 피해 허리를 뒤로 꺾은 백제장수는 물러나오려다가 그만 발을 걸채여 뒤로 넘어졌다.

맹광의 장검이 머리우로 솟았다. 순간 맹광은 검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밑에서 맹광을 무섭게 노려보는 그 눈, 그렇지! 이제야 생각이 났다.

차디찬 료서의 밤… 자기를 아라사람이라고 소개하던 사나이, 인상적인 검은 눈을 가진 처녀무사…

광야를 뒤덮은 시체더미속에서 경각에 달한 맹광을 살려준 장사군차림새의 아라사람이였다.

불시에 온몸에 맥이 스르륵 물러앉는듯싶은감을 느꼈다.

검을 든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상대는 재빨리 몸을 굴려 사이를 만들고 벌떡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맹광은 슬그머니 검을 내리웠다.

《그대는 연우가 아닌가?》

부지불식간에 맹광의 입에서 튀여나온 이 말에 깜짝 놀랐는지 백제장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랭정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넌 누구냐?》

《4년전 료서의 전장에서 그대가 구원해준 고구려무사를 지금 알아보겠나?》

연우는 놀라서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차마 믿을수 없는듯 맹광의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기만 하였다.

불현듯 그의 귀가에 이또의 바다가기슭에서 흐느끼며 속삭이던 치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듯 했다.

《두려웠나이다. 어디선가 오라버님이 꼭 살아 저를 찾고만 있을거라고 생각한 확신이 깨여질가 두려웠나이다. 만약 그 무사가 그렇게 꿈결에도 찾던 오라버님이 아니라면… 저의 마음은 지금보다 더 괴로울것이오이다. …》

연우는 음울한 신음소리를 내며 좌우에 대고 손짓하였다.

창검을 잔뜩 겨누고 주위에 둘러섰던 그의 부하들이 백보가량 물러섰다.

맹광의 눈짓에 따라 10여명가량 남은 고구려기마군사들도 활 한바탕 거리로 물러섰다.

연우는 검을 거두고나서 맹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천만뜻밖일세. 자네가 이렇듯 내 적수로 맞다들릴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군. …》

《그건 나도 마찬가질세. 그때 자넨 헤여지면서 이렇게 말했지, 벗으로가 아니라 원쑤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구. …》

연우는 쓰거운듯 웃었다.

《그때 처녀무사는 어디에 있나?》

《치희 말인가. …》

《그래, 자네와 동행했던 그 처녀무사 말일세.》

연우는 한동안 대답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서있다가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고구려사람이 어인 일로 그 처녀무사에게 관심을 가지는가?》

맹광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물론 이것은 이루어질수… 없는 꿈이지만 어쩐지 그 치희라는 무사가 꼭… 남같지 않아서 그러네. …》

연우는 맹광을 향해 몸을 홱 돌렸다. 불꽃이 튀는 눈으로 맹광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맹광은 연우의 이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젠 16년이 지났구만. … 난 16년전에 헤여진 누이동생을 찾고있네. 그때는 다섯살의 어린 계집애였는데 지금 살아있으면… 처녀가… 다… 되였겠지. …》

《손잡이에 물고기를 새겨넣은 자그마한 나무칼을 가지고있는 계집애겠지?》

맹광은 숨이 막혀 하마트면 주저앉을번 하였다.

갑자기 하늘땅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환각을 느꼈다.

귀에서는 벌떼가 날개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군, 고구려군이 오고있소이다.》

이때 연우의 부하가 말을 끌고 달려와 소리쳤다. 연우는 부하가 끌어다준 말에 뛰여올랐다.

맹광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두팔을 벌리고 서서 연우의 앞을 막았다.

《어디 있나? 어서 말해주게. 그 처녀는 내 동생 상이일세.》

《자네 누이동생은 이 세상에 없네.》

연우는 잠간 맹광을 내려다보다가 매정하게 말하고는 박차를 질러 질주하기 시작했다.

맹광은 무의식적으로 몇걸음 따라가다가 멎어섰다.

상이가 죽다니?!…믿을수가 없었다.

그러나 연우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상이가 이 세상에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상이가 죽다니… 무엇때문에 죽었단 말인가?

이 세상에 남은 단 한점의 혈육인 누이동생 상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식은 맹광에게 무딘 칼로 가슴을 통채로 도려내는듯 한 참을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맹광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말발굽소리가 대지를 진동하더니 근위군인 왕당의 일월수호당주 미추가 300명가량의 기마군사들과 함께 달려왔다.

미추는 행길우에 장승처럼 굳어져 하염없이 남쪽하늘만 바라보고있는 맹광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한참동안 맹광의 뒤모습만 바라보고 서있다가 우선우선한 목소리로 불렀다.

장군, 이젠 그만 돌아가는것이 어떻소? 페하께서 그대를 부르고계시오.》

맹광은 슬픔을 털어버리려는듯 고개를 젓고나서 부하들이 끌어다준 말에 올랐다.

길지 않은 맹광의 생애에서 여러번 슬픔과 고통이 그를 괴롭혔었다.

허나 맹광은 오늘처럼 괴로왔던적이 없었다.

관미성은 승리자들의 손에 들어왔다.

관미성을 고구려군에게 빼앗긴 백제는 전전선에 걸쳐 무질서하게 패주하였다.

석현성을 내놓고 관미성계선으로 물러설 때만 해도 백제군은 그것이 패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관미성계선까지 물러서서 력량을 보강하고 전력을 수습한 다음 다시 반격에로 넘어가려는 전략적타산과 힘이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관미성에서 처참한 패전을 당하고 패주하는 백제군은 어제날의 강군이 아니였으며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그 어떤 힘도 고구려군의 위력에 넋을 잃은 백제군을 다시 이전과 같은 용맹한 군대로 되돌려세울수 없었다.

백제군의 패주에 이어 진무가 그렇게도 고심어린 노력끝에 간신히 전선에 내세웠던 가야-왜군도 앞을 다투어 전선에서 물러섰다.

백제는 이로써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나라의 관문을 통채로 열어준것이였다. 관미성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군은 거침없이 남하할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였다.

물론 아직도 백제의 도성인 한산성으로 가자면 크고작은 수십개의 방어성을 격파하여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방어성들은 관미성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못했던것이다.

한수이북의 땅이 관미성대격전을 계기로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고구려를 압도하는 대국이 되려던 백제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관미성격전이 끝난 후 성안에서는 전승을 축하하여 큰 연회가 벌어졌다. 전승의 희열로 온 성안이 부글부글 끓고있는데다가 영락태왕이 직접 전승연에 참가한것으로 하여 고구려장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연회가 고조되자 무술시합을 비롯한 다채로운 종목이 올랐고 각 지방에서 들어온 군사들이 자기 고장의 전통적인 무술동작이나 풍속춤을 펼쳐놓아 분위기를 한껏 돋구었다.

영락태왕 역시 수하장수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마음껏 즐기였다.

연회가 고조에 이르자 판은 더욱 흥성이였다.

영락태왕이 직접 연회에 참가한것으로 하여 더욱 사기가 오른 장수들과 군사들은 저저마다 팔을 걷고나서서 평소에 익힌 무술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중 볼만 한것은 맹광의 북방군 현무당군사들의 기마술과 활쏘기였다.

비호같이 달리는 말등에서 각이한 자세로 활을 쏘아 어김없이 목표를 맞히는 그들의 재주는 오직 무예습득을 꾸준히 한 결과였다.

드디여 영락태왕이 부하장수들의 간청으로 강궁을 들고나섰다.

무게가 무려 120근에 달하는 강궁은 웬만한 힘장사라도 들기조차 힘든 활이였다. 수만명의 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락태왕은 강궁을 힘껏 당기였다. 3백보 되는 거리에 적에게서 로획한 투구를 나무가지우에 걸어놓았는데 영락태왕은 강궁으로 이것을 겨누었던것이다.

영락태왕이 깍지낀 손을 놓자 윙 소리를 내며 무거운 쇠화살이 대기를 찢으며 날았다.

화살은 어김없이 목표를 명중했다.

순간 수만명의 군사들이 환호하였다. 군사들은 창검을 추켜들며 일제히 《부루장군!》, 《부루장군!》 라고 함성을 질렀다.

연회가 끝나고 군사들의 공에 따라 상을 주는 일이 진행되였다.

이번 관미성대격전때 선봉에 선 북방군 현무당군사들이 많은 상을 받았다.

시상식마감에 이르러 영락태왕은 북방군 현무당주 맹광에게 근위군인 왕당의 중리도독의 벼슬을 주었다.

시상식에 참가하였던 장군들과 조정대신들은 모두 놀라 서로 돌아보았다. 원래 예로부터 고구려근위군인 왕당의 중리도독은 왕족이 아니면 5부귀족중에 가장 문벌이 큰 귀족출신의 자제만이 맡을수 있는 벼슬이였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아직 출신도 밝혀지지 않은 맹광이 왕당의 중리도독으로 승진되였다는것은 일찌기 있어보지 못한 일이였던것이다.

이때까지 잠자코 눈치만 보던 고추대가 고부진이 영락태왕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페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맹광이 비록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왕당의 중리도독을 시키는것은 너무 과한줄 아오이다. 더우기 그가 군영을 탈출한자라는것을 잊지 말아주옵소서. …》

영락태왕은 단호하게 말하였다.

《짐은 맹광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였는지 알고싶지 않다고 이미 조정백관들앞에서 말하였소. 짐에게는 오직 오늘의 맹광만이 있소. 보시오, 여기가 어디인가. 백제가 절대로 함락될수 없다고 장담하던 관미성이요. 맹광이 목숨을 내놓고 싸우지 않았으면 오늘의 승전이 있겠는가. 짐은 결심했소. 누구나 고구려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힘껏 싸운다면 짐은 그 무엇도 아끼지 않을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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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ger - - coder - 201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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