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영락
제 2 장. 한산대격전
2
392년 7월 고구려-백제간의 전면전이 개시되였다.
진무가 이끄는 백제-가야, 이또가야의 5만대군이 북방계선의 석현성을 떠나 공격을 개시한것을 계기로 력사에 남을 사상최대의 대격전이 벌어지게 된것이였다.
그러나 단숨에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북상하려던 백제의 꿈은 대방계선에서 산산이 깨여져버렸다.
평양성에 행궁을 설치하고 남부전선의 싸움형편을 직접 지휘하고있던 고구려의 영락태왕이 곧 수만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대방계선까지 진출한 백제군을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린것이였다.
영락태왕은 수천명의 근위군을 거느리고 제가 직접 선두에 서서 백제군을 맹렬히 반격하였다.
백제군은 가야와 왜세력까지 끌어들여가지고 전쟁준비를 착실히 갖추었으나 영락태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맹공격에 완전히 풍지박산이 되였다. 전전선에 걸쳐 무질서한 패주가 시작되였다.
진무는 곧 전군의 붕괴를 막기 위해 1만명의 정예병을 직접 거느리고 고구려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막아 싸웠으나 강력한 고구려군의 공격에 크게 패하고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백제군은 석현성을 비롯한 북방의 10여개 성에서 저지선을 긋고 가까스로 고구려군의 진격을 막아내였다. 전쟁국면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여 버린것이다. 고구려군을 격멸하고 평양성까지 령토를 떼여내겠다던 백제의 호언장담이 한순간에 하늘로 날아나버렸다.
고구려군의 진격을 막지 못한다면 백제자체의 존재도 위태롭게 될것이였다. 고구려군은 전전선에 걸쳐 백제군이 숨도 돌릴새없이 불같은 공격을 들이대고있었다.
백제 좌장 진무는 전선의 여기저기를 잠시도 쉬지 않고 뛰여다니며 고구려군의 공격을 죽기내기로 막아 싸웠다.
백제의 아신왕은 곧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련이어 증원무력을 북방계선에 투입하였다.
백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석현성을 비롯한 북방계선의 10여개 성을 지켜내야만 하였다.
이 방어성들이 함락되면 북방의 관문을 열어주는 격이 될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강이북을 통채로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게 될것이였다.
한강이북을 잃으면 백제의 수도 한산성이 위험하였다.
말그대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던것이다.
백제군은 석현성 등지에 틀어박혀 맹렬한 공격을 들이대는 고구려군사들의 머리우에 화살과 돌을 내리퍼부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고구려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공격기세가 좀처럼 숙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싸우면 싸울수록 배가의 힘이 솟는것 같았다.
석현성에 진을 꾸리고 틀고앉은 진무는 싸움이 치렬해질수록 머리를 기웃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병력수에 있어서나 보유한 전투기재에 있어서 고구려군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백제련합군이 어째서 이렇듯 련전련패하는것일가.
진무는 이번 전쟁에서 승전하기 위해 근 수개월간의 세월과
가야와 왜군을 끌어들여 수륙군을 동시에 강화하였고 고구려군을 단숨에 격파하기 위해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온 겨우내 군사들을 조련시켰었다. 보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군사들로 대렬을 보충하기 위해 바다건너 제(산동반도)에 주둔하고있는 일부 병력까지 출전시키였었다.
그런데도 백제군은 첫 싸움에서 여지없이 패하였다.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등을 돌려 출발지점까지 쫓겨오지 않으면 안된 진무는 울화가 터져 미칠것만 같았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군사들의 사기는 차츰 떨어졌고 사상자만 늘어났다. 진무는 석현성에 무려 2만명이 넘는 대군을 둔쳐놓고 완강히 방어하고있으나 계속 이렇게 싸우다가는 패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현성이 함락되면 나중에는 관미성계선까지 밀려나지 않으면 안된다. 고구려군도 기본주타격을 석현성방향으로 돌리고 맹렬하게 공격을 들이대고있었다.
백제군은 반격할 엄두도 못 내고 성가퀴에만 들어박혀 응전하고있을 뿐이였다.
진무는 지금 루대우에 올라 싸움을 지휘하면서도 그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있었다.
그는 이미전에 3천명의 왜군을 전선에서 떼여내여 바다길로 고구려군의 배후를 기습하도록 하였던것이다.
만약 이 기습이 성공하여 고구려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혼란을 일으키게 하면 즉시 전전선에 걸쳐 반격을 개시할 결심이였다.
지금은 이 방법밖에 기울어진 전국을 바로잡을 그 어떤 계책도 없었다. 하지만 진무의 이 마지막기대마저 물거품처럼 하늘로 날아났다.
바다길로 은밀히 북상하던 왜의 수군이 그만 고구려수군함대와 조우하여 절반이 넘는 희생을 내고 쫓겨온것이였다.
가까스로 살아돌아온자들에게서 전후사연을 보고받은 진무는 얼굴을 흐리였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의 기색이 력연히 비꼈다.
진무는 루대에 올라 저 멀리 둔치고있는 고구려군진지를 바라보다가 부지중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이제 대항하는것은 그야말로 부질없는짓이였다. 고구려군은 력량을 보강해가지고 다음번 공격을 준비하고있었다. 충차와 루차를 비롯한 공성전에 쓸 병기를 주런이 늘여세우고 공격준비를 서두르는 모양이 한눈에 바라보였다.
석현성은 이미 여러 구간이 무너져내리고 군사들 또한 지치고 상해 사기를 잃고있었다. 이러한 군사로 계속 싸워봤댔자 얼마를 더 지탱해 내겠는가. 진무의 앞에는 지금 두갈래 길이 놓여있었다.
마지막까지 싸워 고구려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을 막아내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석현성을 일시 내주고 난공불락의 요새인 관미성계선으로 물러서는것이였다. 최후까지 싸워 고구려군의 진격을 막아낸다?!…
듣기 좋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분별을 잃은 광기에 불과한것이였다. 무엇으로 싸운단 말인가. 사기를 잃은 군사들의 수가 아무리 대군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오합지졸에 불과한것이였다.
설사 최후의 싸움을 치르어 석현성을 지켜낸다 해도 백제의 주력을 잃게 될수 있었다.
고구려보다 인구에서나 국력이 절반도 안되는 백제로서는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어봤댔자 결과는 뻔하였다.
가령 아군을 1만명이나 잃으면서 고구려군을 1만명정도 격멸한다고 하자. 이것은 명백히 우리의 패전이나 마찬가지다. 고구려에는 정규적인 상비군사가 20만이 넘는다. 거기에 비해보면 우리 백제는 10만도 못되는 상비군을 가지고있다. 땅은 설사 잃을지언정 병력의 손실을 더이상 당할수는 없다. …
관미성계선까지 물러서더라도 싸움에서 군사들을 잃고싶지 않아 진무는 이를 갈면서 속으로 결단을 내렸다.
수백리에 달하는 령토를 일시 떼여주고라도 전전선에 걸쳐 관미성계선으로 퇴각하리라 결심을 품었다.
그것만이 지금 처한 상황에서 내릴수 있는 마지막선택이였다.
진무는 루대우에서 치렬한 전장으로 화한 성아래를 굽어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참으로 모를 일이로군. 내 수년간 고구려군과 싸워보았으나 지금처럼 참담한 패배를 당한적이 없었다. 치양과 남평양에서 아군에게 대패하였던 고구려군이 이렇게까지 달라질수 있단 말인가. 저기 고구려군사들도 아군과 꼭같은 군사들이 아닌가.
고구려군사들이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저렇게 용맹할수 있으랴. …》
진무가 탄식하듯 중얼거리는데 곁에 서있던 연우가 창백한 얼굴을 들었다.
《
진무가 의아한 시선으로 연우를 노려보았다.
연우는 진무의 시선을 태연하게 받으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고구려군사들은 영락태왕을 모두 부루
진무는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으나 가까스로 자제하고 연우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래 넌 어찌 영락태왕에 대해 그리 잘 알고있느냐?》
《몇년전
그때 부루
《그럼 네 생각은 어떠하냐?》
진무는 화가 치민듯 소리를 질렀다.
연우는 침착하게 한마디 찍어 말하였다.
《시대는 두 영웅을 허용하지 않소이다.
백제군이 석현성방면에서 패해서 물러선 후 고구려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관미성까지 밀고나갔다. 전선은 관미성을 계선으로 고착되였다.
고구려의 영락태왕은 일단 여기에서 진격을 멈추기로 작정하였다.
그것은 관미성이 백제가 여러해에 걸쳐 방어시설을 보강한 《난공불락의 요새》였기때문이였다. 세면이 절벽으로 둘러막혔고 그 주위에는 바다물을 끌어들인 깊은 해자가 흐르고있어 수십만의 대군도 어렵지 않게 막아낼수 있는 견고한 방어성이였다.
성벽우에는 쉽게 기여오를수 없도록 록각과 가시울타리가 두겹, 세겹으로 둘러쳐있고 석포와 쇠뇌같은 병기들이 차고넘쳤다.
또한 성안의 군량이 수만명의 대군일지라도 1년은 족히 대줄수 있을만큼 충분하였다. 백제는 관미성을 잃으면 한산성이 위험하기때문에 여기를 쉽게 내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석현성을 비롯하여 10여개 성을 내주고 퇴각한 백제군은 관미성을 중심으로 력량을 재배치하고 완강한 방어진을 폈다.
영락태왕은 관미성에 대한 공격을 일단 뒤로 미루어두기로 하였다.
고구려군은 비록 여러차례 승전하여 기세가 왕성하다고는 하지만 몹시 지쳐있는 상태였다. 벌써 많은 병력을 손실당하였고 부상자도 수천명에 달했다. 그러나 영락태왕이 제일 근심하고있는것은 멀리 북방에서 진행되고있는 거란인들과의 전쟁이였다.
작년에 일부 병력으로 정벌군을 무어 떠나보냈으나 그것은 일시의 급함을 모면하기 위한것이요, 거란을 충분히 짓밟아버릴 력량으로는 되지 못하였던것이다.
고구려가 숙원하는것은 삼국의 통일성업이였다.
이것은 영락태왕의 의지였고 수백만 고구려백성들의 꿈이였다.
과연 삼국통일의 그 꿈이 언제야 이루어지겠는가?
동방의 대고구려가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았듯이 통일성업이라는 민족의 오랜 꿈도 쉽게 이루어질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 서북방의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민족을 지켜내고 부단히 력량을 강화한 고구려만이 삼국통일이라는 성업을 성취할수 있을것이였다. 사실상 이때까지 고구려가 삼국통일이라는 목적지향성이 없이 행동하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원래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삼국관계는 고구려를 종주국으로 하는 남쪽국가들의 병립관계였으며 중원대륙과의 교역을 통해 방대한 부를 축적한 고구려로부터 남쪽나라들이 문화와 문명을 전수받아 발전하는 관계였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6가야국은 고구려를 걸쳐 중원대륙과의 통상로를 열었으며 고구려의 후원으로 문명을 이룩하고 문화를 꽃피웠던것이다.
이러한 삼국관계에 큰 균렬이 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강한 힘을 마련한 백제가 고구려와 대등한 대국으로 자처하면서 동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것이였다.
백제에 못지 않은 야심을 가지고있는 신라의 정복전쟁으로 나라의 존재를 크게 위협당한 가야가 백제와 주종관계를 맺음으로써 삼국의 정세는 더욱 복잡해졌다.
백제와 가야가 서로 손을 맞잡고 신라를 압박하고 대대적인 북진을 시작하자 고구려는 앞뒤로 전쟁을 치르어야 했던것이다.
고구려는 적극적인 고토회복의 서진정책을 실시하여 이민족에게 빼앗긴 단군성왕시기의 옛땅모두를 다시 찾고 장성을 계선으로 중원과 지경을 가르려는 결심이였다. 서북방을 안정시킨 후 오랜 숙망인 통일성업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백제의 예상치 못했던 도전으로 이렇듯 커다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고구려가 아무리 강한 국력을 가진 대국일지라도 이러한 난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피동에만 머문다면 멸망할수도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고구려백성들은 새로 즉위한 영락태왕의 의지와 실질적인 행동에 공감하여 따라나서게 되였던것이다.
백제와의 첫 대격전을 승전으로 이끈 영락태왕을 바라보며 고구려의 래일을 내다보았다.
영락태왕은 새로 점령한 석현성 등 10여개 성에 무력을 배비하여 백제군의 있을수 있는 반격을 막아내도록 하고는 력량을 보강하기 위해 평양성방면으로 퇴군해갔다.
고구려군은 한번의 타격으로 백제군의 공격기도를 좌절시키고 그 기세로 밀고내려가 석현성을 비롯하여 10여개 성을 점령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더이상 전쟁을 확대할 력량이 마련되여있지 못했다.
여러달에 걸치는 싸움끝에 관미성 등지로 패주하여 쫓겨내려간 백제군은 력량을 수습하고 호시탐탐 반격할 기회만을 노리고있었다.
사실상 고구려로서는 새로 점령한 석현성 등 10여개 성을 지켜내는것도 아름찬 일이 아닐수 없었다. 전선이 수백리에 걸쳐 길어지고 매 성들마다 많은 무력을 배치하여 백제군이 반격해오면 막아내야 했던것이다.
하지만 영락태왕은 여기에서 멈출수 없었다. 백제가 숨을 돌리고 다시 일어서기 전에 무자비하게 두들겨부셔야 했다.
과연 영락태왕 담덕이 어떤 전략을 세울지 아직은 누구도 알수 없었다.
…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맹광은 천길나락의 환각속에서 모대기다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똑똑히 돌려왔다.
눈을 들어보니 밤하늘에서는 깜빡깜빡 졸고있는 새벽별들이 간간이 보이였고 교교한 달빛에 무르녹은듯싶은 젖빛안개가 대기를 싸고돌았다. 머리를 쳐들고 일어서려던 맹광은 신음소리를 길게 내였다.
무딘 칼로 베여내는듯 한 아픔이 온몸을 내리눌렀던것이다.
맹광은 여기가 어딘가 머리속으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포로로 붙잡혔는가 아니면 아군에게 구원되였는가?…
주위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맹광은 거란어와 한어에 매우 능했으나 자기 주위에 있는자들이 누구인지 짐작할수가 없었다.
고구려사람들이 아니라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이에 거란인들에게 포로로 붙잡혔구나. … 하지만 몸을 내려다보니 결박되여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두툼한 양털덧옷이 씌워져있었다.
맹광은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상반신을 쳐들었다.
그가 처음 본것은 그리 멀지 않은곳에 높이 세워놓은 기발과 달아나지 못하도록 매여놓고 풀을 뜯도록 놓아둔 수십마리의 락타와 말들이였다. 거의 백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피워놓은 모닥불곁에 둘러앉아있었다. 그들의 곁에는 커다란 짐궤짝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고 심지어 활과 화살, 창, 칼 등이 무져있었다.
맹광은 머리를 기웃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이런 황야에서 야영을 하는 저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의 차림새는 그야말로 형형색색이였다.
한인의 차림새를 갖춘자들이 보이는가 하면 거란족이나 해족들의 전통적인 옷차림새도 있었고 멀리 사막의 자그마한 종족의 옷을 입은자들도 있었다. 초원을 횡행하며 살륙과 략탈을 일삼는 도적의 무리라 하기엔 그들의 표정이 진지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비단길을 오가는 상단으로서는 그 규모에서나 무장을 갖춘 모양이 너무도 대조가 심했다.
모닥불곁에 둘러앉은자들이 일제히 맹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누군가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세운 맹광의 모습을 띄여본 모양이였다.
그들중에서 두명이 일어서서는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뭐라고 말을 붙여왔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자 손짓으로 열심히 시늉을 해보이는데 맹광은 그제야 자기에게 배가 고프지 않느냐고 묻는다는것을 깨달았다. 맹광이 머리를 젓자 그들은 슬금슬금 모닥불곁으로 물러가버렸다. 맹광은 실눈을 짓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도대체 저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가.
자기가 고구려장수라는것을 알면서도 해치지 않고 구완해준것을 보면 분명 적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없는것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안심할수는 없었다.
어쨌든 무슨 목적으로 다 죽어가는 인명을 구원하게 되였으며 또 어떤 영문에서 이 황량한 초원을 무리지어다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골똘한 상념에 사로잡힌 맹광은 누군가 곁으로 다가오는줄 미처 깨닫지 못하고있었다.
《이젠 좀 정신이 들었소?》
맹광은 고구려말로 누군가가 말을 붙여오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이가 쉰을 넘긴듯싶은 풍신좋은 중늙은이가 뒤짐을 지고서서 맹광을 내려다보고있었다.
몸에 사치한 비단옷을 걸친것으로 보아 아마 이 무리의 우두머리쯤 돼보이는 사나이였다.
어둠속이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이 무척 낯익어보였다. 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그가 누구라고 딱히 짚을수 없었다.
희미한 달빛에 코날이 고집스럽게 서고 턱이 앞쪽으로 약간 쳐들린 얼굴이 드러났다.
《이름은 어떻게 부르시오?》
그가 묻는 말에 맹광은 공손히 머리를 숙여보였다.
《맹광이라고 불러주소이다. 경각에 다달은 목숨을 구해주어 고맙소이다.》
상대는 무표정한 기색으로 또다시 입을 벌렸다.
《나도 한때는 고구려군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요. 물론 난 고구려인은 아니요. 하지만 고구려를 위해 검을 들었었지. …》
맹광은 상대의 말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혹시 전장에서 함께 싸웠던적이 있는 사람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치며 떠올랐다.
《언제까지 군직을 지내셨소이까?》
맹광의 성급한 물음에 상대는 비로소 입가에 랭소를 띄웠다.
《퍽 오래전이니 말해주어도 모를걸세. …》
《그러면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어찌하여 이런 인적없는 무인지경을 다니는것이오이까?》
상대는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서있다가 불시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난 군상이요.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 군대에 무기와 식량 등을 팔아주고있는 군상이요. 군상은 적아를 모르오. 전장을 찾아다니며 싸움을 치르는 량자에게 다같이 무기를 팔아주지. … 난 바로 이런 사람이네.》
맹광은 그제야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차릴수 있었다.
죽음이 배회하는 전쟁판을 누비며 무기와 군량을 비롯한 전쟁물자들을 팔아주는 군상이 바로 그들의 정체인것이다.
《성함은 어떻게 부르오이까?》
맹광은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내 이름은…》 상대는 말을 끊고 젊은 사람들도 감탄할 동작으로 몸을 홱 돌렸다. 무수한 말발굽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던것이다.
어둠속에서 기마군사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절대로 자기를 드러내서는 안되오. 앓는 사람처럼 꾸밀테니 눈을 감고있으면 될걸세.》
그는 재빠른 동작으로 양털덧옷을 맹광의 몸에 씌워주며 낮게 속삭였다. 맹광의 손에 검을 쥐여주고는 곧 돌아서서 기마수들을 맞받아나갔다. 맹광은 급히 검을 몸에 지니고 양털덧옷을 푹 뒤집어쓴 다음 불의에 나타난 기마수들을 눈여겨보았다.
모닥불곁에 앉았던 군상들이 저마다 무기를 갈라쥐고 벌떡벌떡 몸을 일으켜세웠다.
군상이란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다니기마련이라 그들은 늘 상단과 자기
아무리 불리한 정황에 부닥쳐도 필요에 따라 정규군과도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기마수들은 모두해서 백여명이나 되였는데 군장을 보니 거란족이 분명했다.
《웬 놈들이냐?》
거란군장의 호령에 군상의 우두머리사나이는 공손히 머리를 숙여보였다.
《저희들은 저 멀리 사막에서 오는 길이온데 비려부를 찾아가는 길이오이다.》
《비려부는 어째서 찾아가는것이냐?》
《추장인 막불우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지요. 우린 거란족에 무기를 대여주는 군상이오이다.》
거란인들은 저희들끼리 머리를 모으고 수군거리다가 의논이 되였는지 처음부터 말을 걸던자가 한발 나섰다.
《지금 우리 거란족은 고구려놈들과의 전쟁으로 큰 위기를 겪고있다.
혹 너희들이 렴탐질로 군상행색을 할지도 모르니 짐을 뒤져봐야겠다.》
군상의 우두머리는 화가 치밀어올랐는지 고분고분하지 못한 목청으로 웨쳤다.
《난 막불우한도 잘 알고있을뿐아니라 거란추장들중에 안면있는자들도 여렷이나 되오. 여직껏 이런 일이 없었는데 구태여 짐을 뒤져보겠다는 리유를 알고싶소.》
《고구려놈들과 교전중이라 하는 수가 없소. 우리 요구에 불응할 생각은 하지 않는것이 좋을것이요. 이 주변엔 모두 거란군이요.》
거란인의 퉁명스런 대꾸에 이어 갑자기 호탕한 웃음소리가 고즈넉한 정적을 깨뜨렸다.
군상의 우두머리사나이가 두손을 허리에 짚고서서 웃음을 터뜨렸던것이다.
《어리석기도 하군. … 그래 너희들 눈엔 내가 렴탐질이나 하는 세작으로 보이는가. 난 위문이란 사람이다. 아직까지 그 어데서도 감히 나를 괴롭힐 용기가 있는자를 보지 못했다. 재간이 있으면 어디 내앞에서 짐을 열어봐라.》
상대가 갑자기 표독한 살기를 드러내자 거란인들은 기세가 꽉 죽어 고분고분해졌다.
《위문이라면 우리도 이미 명성은 들었지요. 아, 그럼 진작 말씀할 노릇이지 어찌 우릴 놀리시는거요? 자, 우린 이만 실례하겠소이다. 행여 가는 길에 고구려놈들을 보게 되면 제때에 알려주시우.》
거란인들은 변명하는 말투로 지껄이고나서 말머리를 돌렸다.
거란인들이 어둠속으로 먹혀들어간 뒤에도 위문이라는 군상의 우두머리는 한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는 성난 목소리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놈들… 그만큼 전쟁물자를 대주었는데도 날 무시하려들다니…》
위문은 이렇게 차디찬 말마디들을 내뱉은 다음 맹광에게로 돌아섰다.
《아까 우리가 무슨 말을 나누다가 끝냈던가?…》
위문은 맹광의 뜻밖의 반응에 놀라 저도 모르게 뒤걸음쳤다.
맹광이 상대의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다가들었던것이다.
《한마디… 묻겠소이다. 고구려의… 유주자사 진을 아시는지요?》
위문은 화살에 맞은 맹수처럼 펄쩍 뛰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제 목을 그러쥐였다. 가슴이 답답한듯 비단옷의 앞섶을 제끼였다.
《진
맹광은 눈물이 앞을 가리워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이 과연 옛 유주의 범양내사 위문이 옳은가?
위문… 아버지의 부하?! 하도 어렸을 때 일이라 위문에 대해서는 생각나는것이 별로 없었다.
다만 이따금 여가시간에 찾아와 어린 자기를 말등에 태워가지고 다니던 그 인정많은 아저씨의 모습만이 기억의 희미한 밑바닥속에 고이 간직되여있을뿐이였다.
위문은 고구려사람이 아니라 한인이였다.
어린 나이에 연나라 군사에게 붙들려가 노예로 팔려다니다가 아버지의 손에 구원되여 그 부하가 되였다는 소릴 들은 기억이 났다.
싸움에서 용맹하고 무예실력이 남달라 아버지의 총애로 범양내사의 높은 관직까지 지니였던것이다.
유주에서 전사한줄로만 알았는데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 이렇듯 거란의 땅에서 군상이 되여 맹광이와 만나게 된것이였다.
맹광은 충혈된 눈을 들었다. 위문의 손을 뜨겁게 부여잡으며 격정을 터뜨렸다.
《그렇게도 알아보시지 못하오이까. 맹광이오이다.
위문은 머리를 한대 맞은것처럼 비칠거렸다. 숨결이 빨라지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맹광이란 말이지?! 그렇구나. 진자사의 아들 맹광이 틀림이 없구나.》
위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닌가싶어 맹광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군상이 되였소이까?》
격정의 파문이 지나간 후 맹광은 자기
위문은 죄스러운듯 고개를 떨구고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진자사가 전사한 후 살아남은 고구려사람은 불과 몇이 안되였다. 연군태수 자형도 전사하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밖의 숱한 동료들이 진나라 군대의 칼에 맞고 희생되였다. 그때 범양군에 있던 난 중상을 입은 몸으로 수치스럽게도 진군에 포로가 되였다.
사람의 성정이란 참으로 간사한것이니라… 몇번이나 자결할 결심을 하였지만 그러지 못했지. 구차스러운대로 살기를 도모하고 적의 노예가 되였다. 그후 탈출하여 이리저리 헤매이다가 결국은 먹고 살자고 군상이 되였다.》
《거란족은 대대로 고구려와 원쑤이온데 아무리 한인의 피줄을 이었다고 해도 한때는 고구려의 록을 받으신
위문은 공허한 눈길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자책과 후회 그리고 자기
팔소매로 이마에 돋는 땀방울을 꾹꾹 찍어내고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네 말이 옳다. 너의 부친을 비롯한 고구려사람들은 죽어서도 이겼지만 나는 비굴한 삶을 선택하여 끝내는 패배만을 당했다.
의리에 대한 배반, 자기 권리의 거부, 악에 대한 비렬한 순종… 이것이 나에게 차례진 패배인것이다.》
맹광은 심한 자책에 시달리고있는 위문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물론 저는 아저씨가 겪은 어려움을 잘 알고있소이다.
아저씨는 다만
그러나 아저씨는 이것을 거부한것으로 하여 아직까지 깃을 들이지 못하고 방황하고계시는것이 아니오이까?》
《그래… 네 말이 옳다. 난 이날 이때까지 조국이 없는 사람으로 자처해왔다. 너의 부친이 날 거두어주셨지만 굳이 고구려사람이 되지 못하고 다만 복종과 의리로써 고구려를 받들어왔지. … 하여 오랜 세월 방황하며 깃들일 곳을 찾지 못했구나.
그러나 이제는 똑똑히 알겠다. 나를 사람으로 내세워준 고구려가 진정한 내 나라라는것을 말이다. …》
맹광은 위문의 두손을 뜨겁게 맞잡았다.
《잘 생각하셨소이다. 한때의 곤난은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드오이다.
아저씨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셨다는것을 아시면 저의 아버님도 편히 눈을 감으실것이오이다.》
위문은 서글프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죄를 씻고 공을 세우게 되면 그때 돌아가겠다. 맹광이 네가 거란으로 진군할 때면 내 반드시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겠다.
비명에 전사하신 진
위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혀로 마른 입술을 추기고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곧 돌아가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족을 다시 들이치거라.
거란은 유목종족이라 자체로 강철무기를 만들줄 모른다.
이때까지는 내가 무기를 대주었지만 이젠 나도 내가 걸을 길을 똑똑히 깨달았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것이다.
이밖에도 거란과 계약한 무기와 군수기재가 많지만 하나도 대주지 않을 결심이다. 나는 남쪽으로 내려가겠다. 내가 지금까지 마련한 재부와 무기, 사람들을 모두 동원시키겠으니 너는 반드시 진자사의 꿈을 이루거라. 사람과 말, 락타들을 붙여주겠다. 여기 있는 무기와 군량을 모두 가지고 어서 부대로 돌아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