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8
전대지휘부 정문아치우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관현악의 힘찬 선률이 흘러나오고있다. 노래 《수령이시여 명령만 내리시라》이다. 미제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사건이 발생한 이래 조성된 긴장한 정세의 요구에 맞추어 하루에도 몇번씩 방송되면서 병사들의 심장을 높뛰게 하는 격동적인 음악이다.
결전에 부르는 당의 목소리
우리들의 젊은 피 끓게 하누나
병사들은 힘차게 보고하노니
우리는 일당백 준비되였다
하나의 강토와 민족을 둘로 가른 놈
오늘 또다시 우리 땅에 불질하련다
수령이시여 우리들에게 명령만 내리시라
단숨에 달려가 원쑤 미제 이 땅에서 소탕하리라
점심시간이다. 식사후 세목장에 가려고 방송에 맞추어 휘파람을 불며 빨래감이 담긴 소랭이를 들고 침실을 나서던 박인철은 함장이 마주들어오는 바람에 눈이 덩둘해졌다. 놀랄수밖에 없는것은 자기와 수뢰장이 동거하는 이 《총각군관침실》에 함장이 오는 일이 극히 드물기때문이였다. 게다가 전투근무를 위해 함이 래일 새벽 출항해야 하기때문에 그 준비로 어지간히 바쁜 함장이였다.
《그 처년 도대체 어떡헐 작정이라오?》
소랭이의 빨래감에 눈길을 박으며 던지는 함장의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였다. 인철은 함장이 말하는 《그 처녀》가 누군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우정 모르쇠를 하며 《웬 처녀가 뭘 어떡한다는겁니까?》 하고 천연스레 되물었다.
《의대 다닌다는 애인처녀 말이요, 이젠 졸업할 때레 되지 않았소?》
인철은 그제야 깨도가 된듯이 《예-에, 그 말입니까?》하며 선웃음을 지었다. 《졸업은 한것 같은데… 아마 지금 배치를 기다리는가 봅니다.》
《배치는 웬놈의 배치, 졸업했으면 곧장 시집와서 조타(가마뚜껑)나 맡아갖구 아이낳구 남편시발하면 되는거지. 대학을 열두개 나와두 녀자의 초소는 부엌이고 기저귀빨래지 다른게 아니요.》
함장은 박인철이 서른살이 다되도록 독신으로 지내는것을 잘못 선택한 애인탓으로 보며 본인 당자보다 더 안타까와하는 사람이다. 까닭에 기회가 있을세라 왜 하필이면 평양처녀와 눈이 맞아가지고 그러는가, 듣자니 평양녀자들은 지방으로 나오는걸 영 끔찍해한다는데 이제라도 관계를 끊고 여기 처녀를 얻으라, 전대통신중대장이 제대될 때가 됐는데 어떤가? 녀자가 그만하면 인물도 있고 품성도 원만하니 한번 맞서보자 하며 꼬드기기를 잘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기회였다.
《이제 보니 함장동무의 녀성관이 잘못 서두 이만저만 잘못 서지 않았구만요. 녀자의 초소가 왜 부엌이고 기저귀빨래밖에 안되겠습니까? 함장동무도 잘 알겠지만 큐리부인은 두 딸을 키우면서도 남편과 같이 과학사업을 했고 라디움을 발견해서 인류과학발전의 새시대를 열어놓았습니다. 녀자라면 큐리부인의 이런 모범을 따르든가 하다못해 그 비슷한 꿈이라도 지녀야 현대녀성이라고 할수 있지요. 부엌과 기저귀빨래라니… 딴데 가선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우에서 알았다간 당장 불러올려다 비판서를 씌우든가 인민군군관으로서의 자격을 문제삼아 제대시키자고 하겠습니다.》
롱담이기는 해도 성미가 좀 거칠어서 수틀리면 아무데서나 모난 소리를 퉁퉁 내뱉는 함장임을 잘 알기에 인철은 롱담속에 완곡된 비판도 담았다. 이쪽이 그러거나말거나 함장은 코방귀를 불더니 해군복바지주머니에서 애용하는 고불통과 쌈지를 꺼내 담배를 담으며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이보 정치부함장, 그 고리타분한 연설말고 내 말을 명심해듣소. 물론 녀자들속에 큐리부인 같은 천재들도 더러 있는건 사실이요. 그렇다고 우리 아낙네들더러 그걸 모범으로 따르라는 사상은 좋지 않소. 해군군관의 처는 그야말로 착실히 가정에만 만족해야지 헤딴데 눈을 팔다간 집을 한창 명태철의 선창처럼 만들어놓기 쉽소. 아무튼 난 정치부함장의 일사가 큰 걱정이요. 여기 연포땅에도 환한 처녀들이 드디고 쌨는데 하필이면 왜 평양처녀와 눈이 맞았는가 말이요. 평양처녀들은 지방에 시집와서도 속은 노상 평양 가서 산다는데.…》
정 안타까운지 함장은 곰방대를 문 입귀로 담배연기와 한숨을 같이 흘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젓더니 볼일을 다 보았다는듯 문을 밀고나가는것이였다.
인철은 따라나가다말고 그제야 생각나서 물었다.
《한데 함장동문 웬일로 왔댔습니까? 남의 애인 시비하러 온건 아닐텐데 말입니다.》
함장이 우뚝 굳어지며 돌아서더니 제편에서 되묻는다.
《내레 여태 그걸 말 안했소? 전대정치부에서 찾는다는…》
《지금 들으니 초문입니다.》
《내 이렇다니… 오후 첫시간에 와서 정치부장동질 만나라더구만.》
함장과 헤여져 세목장으로 내려간 인철은 목욕용쪽걸상을 깔고앉아 내복에 비누칠을 하다말고 부지중 허허 웃었다. 여기 연포땅에도 좋은 처녀들이 《드디고 쌨》는데 하필이면 왜 평양처녀와 눈이 맞았느냐고, 평양처녀들은 지방에 시집와서도 마음은 노상 평양에 가서 산다던 함장의 말이 생각났던것이다. 무슨 그럴만한 체험이 있어서 하는 말 같지는 않고 얻어들은 소리가 그렇게 나빴던 모양 함장의 평양처녀들에 대한 평가는 언제보나 좋지 않았다. 인철은 함장이 노상 《평양처녀》라고 지칭하며 불만해하는 애인 한성희가 여기서 이런 론의를 하고있는줄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지를 상상해본다. 우선 떠오르는것이 그 인상적인 오목샘을 볼에 파며 정차게 웃는 모습이다. 웃으며 《함장동지가 아주 재미있는분이군요.》할것이다. 혹은 꼬리가 긴 그윽한 눈에 꾸며낸 질투를 담고 《그곳 연포땅에 그렇게 멋진 처녀들이 〈드디고 쌨〉으면 〈평양처년 뒤로 돌앗, 제갈데로 갓!〉 하고 거기서 다시 골라보는것 안예요?》 할수도 있다. 또 다르게는 《그 함장동지 우리 관계를 너무 범속하게 보시는군요. 우리의 사랑이야 어디 눈맞춤의 결과인가요? 마음의 융합이지.》라고 하며 부끄러움에 스스로 얼굴을 붉힐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단순히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보았다. 각자가 서로에게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필요한 존재인가를!…)
벌써 세해전 일로 되였다.
당시 중위로서 상급정치부에서 주는 임무수행차로 함흥시에 갔던 박인철은 여러날 묵으며 그날 오전까지 일을 끝내자 오후에는 부대로 돌아오려고 역으로 나갔다.
평양-라진행급행렬차는 오후 4시에 정시로 함흥역에 들어섰다.
짐이라야 문건 몇건과 세면도구가 들어있는 멜가방이 전부고 붐비는데 끼우기도 싫어 나중손님으로 승강대에 올라 차칸으로 들어가던 인철은 무엇인가 발끝에 채우는것이 있어 내려다보았다. 책이였다. 복잡통에 어느 손님이 떨군것 같은데 집어올려서 보니 책이라기보다 표지에 비단천을 씌운 페지수가 꽤 나갈 길죽하고 두툼한 수첩이였다. 이런 종류의 수첩은 외국어단어장이기 쉽다는 생각에 몇장 번져보았는데 페지마다 깨알같은 먹글씨로 써넣은것은 외국어단어가 아니라 민간료법이라 할지 아니면 의학상식이라 할지 좌우간 그러루한 내용들이였다. 미루어 판단되는것은 수첩의 주인이 의사 혹은 의학공부를 하는 사람이며 수첩으로 말하면 큰 품을 들여 만들고 내용도 금싸래기 모으듯 한,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귀중한 물건이 틀림없다는것이였다.
인철은 차칸중간쯤에 채 못 미쳐 앉을자리를 정하자 선채로 수첩을 높이 들고 큰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손님들은 모두 호기심어린 눈길로 쳐다보기만 할뿐 제것이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거듭 말해보았지만 역시 나서는 사람이 없어 결국은 찾기를 그만두었다. 함흥역에서 내린 사람이 떨군 모양으로 더는 주인을 찾을 길이 없다는것이 명백해졌던것이다.
그 수첩덕분으로 인철은 장시간에 걸친 기차려행을 별로 지루감을 느끼지 않고 아주 쉽게 했다. 사전처럼 내용을 자모순으로 체계성있게 배렬한 수첩안에는 별의별 의학상식과 민간치료방법이 다 수록되여있었다. 기억력을 높이고 호흡기질병과 허리아픔에 좋은 각종 체조료법, 물을 건강에 유익하게 마시는 방법과 종이를 말아 코구멍안을 간지럽혀 딸국질을 멈추는 묘리, 40살이후에 금해야 할 5가지 원칙과 잠잘 때 지켜야 할 10가지 사항, 《목덜미는 온몸의 지령탑》이라는 제목아래 기술한 목덜미료법, 《변비는 미모와 성기능의 원쑤》라는 프랑스속담, 여름철 식중독에 걸렸을 때 생가지를 먹으면 설사가 인차 멎는다는 신통한 치료법… 그야말로 사람의 건강과 생활에 절실히 필요한 상식과 민간료법 《소사전》으로서 소설 못지 않게 흥미도 있었다.
그는 부대에 돌아가서도 짬만 있으면 그 민간료법 《소사전》을 꺼내 읽었다. 읽기만 한것이 아니라 내용을 해병들에게 보급하고 누가 어떻게 아프다고 하면 필요한 료법을 찾아가지고 치료도 해주었다. 그러느라니 인철이 자신이 상당한 민간료법을 알게 된것은 더 말할것이 없고 그것이 소문으로 퍼져서 전대군의소 군의와 간호원들이 욕심을 내는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부대에 취재를 내려왔던 인민군신문사의 한 기자는 그가 풍부한 민간료법을 습득하고있는것을 정치일군으로서 군인들과의 사업을 더 잘하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로 보면서 그런 취지의 기사를 써서 신문에 내겠다고 달라붙어 겨우 설복한 일도 있었다.
기차칸에서 우연히 주은 의학상식수첩의 활용범위가 그렇게 점점 넓어질수록 인철은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은 지금 얼마나 안타까와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그새 그는 수첩의 주인이 어떤 사람이겠는가를 여러모로 추측해보았다. 그 결과에 의하면 수첩의 임자는 녀자로서 의학대학 재학생이였다. 표지에 씌운 연분홍색의 비단천이나 깨알같은 글씨체의 단정함이나 정히 다룬 느낌, 수첩장들에서 풍기는 연한 향기 그리고 앞표지아래에 먹으로 써넣은 《희》자와 그앞에 그려져있는 《오각별》이 그것을 반증하여주었다. 그러한 판단으로부터 인철은 좀더 파고들어 수첩을 주은데가 함흥역이므로 그 임자는 함흥의학대학 학생이기 쉬우며 성은 몰라도 이름은 오각별과 련결시켜 《별희》일수 있다고 보았다. 별희, 얼마나 특색이 있으면서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이름인가!
솔직히 말하면 어방짐작으로 지어낸 그 이름에도 끌린바가 없지 않아서 인철은 홍어 한마리를 잡으려고 바다에 투망을 던져보는 심정으로 함흥의학대학 교무부학장앞으로 편지를 써보냈다. 여사모사한 일로 《별희》라는 학생을 찾자고 하니 가능한껏 도와주기 바란다고… 회답은 보름이 넘어서야 왔는데 실망스러운 소식이 씌여있었다. 재학생들속에 별희라는 이름을 가진 녀학생이 없다는것이였다. 그 회답편지를 받고서야 인철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으며 수첩임자의 이름이 별희가 아니라 별을 의미하는 흔한 이름인 《성희》일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다시 편지를 보냈는데 이번에는 실망과 함께 희망을 주는 소식도 있었다. 실망스러운것은 대학에 성희라는 이름을 가진 재학생이 자그만치 다섯명이지만 그들모두에게는 의학상식수첩이 있어본적이 없거나 잃어버리지 않았다는것이고 희망을 주는것은 기초의학부 3학년에 한성희라는 녀학생이 있었는데 년전에 부모들을 따라 평양으로 이사해갔으므로 평양의학대학에 알아보라는것이였다.
(한성희! 수첩의 임자가 틀림없다. 별 하나에 희자를 더하면 분명 한성희라는 답이 나온다. 묘한 산수인걸!…)
하여 인철은 곧장 평양의학대학 기초의학부 4학년 한성희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한성희가 부모를 따라 평양으로 전학했으면 틀림없이 의학대학의 전공학부에 편입했을것이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어찌된셈인지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가깝도록 회답이 오지 않았다. 혹시 편지가 어디서 분실되여 본인에게 가닿지 못했을수 있다고 보아 재차 써보냈는데 다시 한달이 넘도록 역시 답장이 없기에 또 한번 써보았지만 역시 무소식이였다. 회답이 없고보면 보낸 편지라도 되돌아와야겠는데 돌아올줄도 몰랐다. 그야말로 난바다에 투망을 던진 격이라 달리 무슨 방도도 떠오르는것이 없고 편지를 다시 쓸 흥심도 나지 않아서 결국은 찾기를 단념하고말았다. 첫 편지를 써보낸 때로부터 넉달이 되고 함흥역두에서 수첩을 주은 때부터 계산하면 반년이 더 되는 때였다.
평양의학대학 기초의학부 학생 한성희로부터 회답편지가 온것이 바로 그무렵이였다.
박인철군관동지에게.
안녕하십니까?
동지가 보내주신 석장의 정성어린 편지를 함께 받아보고 군무에 지장을 준것 같은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회답이 늦어진 사유부터 말씀드린다면 그새 저는 실습차로 평북도인민병원에 가있다가 꼭 넉달만에 오늘 대학으로 돌아왔는데 꿈나라에서 온 사신인듯 동지의 편지가 기다리고있질 않겠습니까.
군관동지,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한성희의 편지는 좀 더 길었으면싶게 짧았다. 짧았지만 자기가 잃어버리고 지금 인철이한테 있는 그 수첩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것인가 하는 설명에, 그걸 잃고 안타깝고 분한 나머지 어린애처럼 엉엉 울며 한달나마 밥맛까지 잃었다는 고백에, 하면서도 찾을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천만다행으로 군관동지같이 고결하고 성실한분의 손에 들어가 다시 찾게 된것이 정말 꿈같이 생각된다는 토로에, 이 신세갚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은 생각나지 않아서 연구쩨마로 삼으련다는 소리에 그리고 수첩을 자기에게 보내느라고 수고하지 말아달라는것, 소포로 부치느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기에 자기쪽에서 인편을 구해보겠으니 그때까지 건사만 잘하고있어달라는 등 할소리를 다 하고 마감을 이렇게 맺았다.
…저는 본래 좀 경망하고 수다스러운 녀자인데다 수첩을 찾게 되여 몹시 기쁜김에 안면도 없는 군관동지에게 부끄러운줄 모르고 이 소리, 저 소리 마구 썼습니다. 리해를 바랄뿐이예요.
끝으로 한가지 부탁하고싶은건 저의 이 편지를 받으시거든 부담스러운대로 회답을 보내달라는것입니다. 그래야 저도 련계가 이루어진걸 확인하고 안심될것 같습니다. 주소는 기초의학부 5학년으로 해주세요. 저는 요새 한학년 진급했답니다.
그럼 군관동지, 부디 몸건강하여 군무에서 큰 성과가 있기를 축원하면서 이만 펜을 놓습니다. 안녕히…
인철은 한성희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여(부탁이 없더라도 응당 썼을것이지만) 회답을 보냈다. 수첩임자를 찾고보니 동무쪽보다 오히려 자기가 더 기쁘다고, 인편이 올 때까지 수첩을 보물처럼 잘 지키고있겠으니 안심하고 건강하여 학업에 열중하기만 바란다고… 그 편지에 대한 회답이 한성희쪽에서 다시 왔고 이쪽은 이쪽대로 또 할소리가 있어 답장을 보내는 식으로 편지가 몇차례 오가던중 인철이쪽에서 인편이 생겼다. 해군대학을 졸업한 고향이 평양인 기관장이 함에 새로 배치되여왔는데 그가 휴가를 가게 되여 그편에 수첩을 보낼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여 수첩을 보내면서 인철은 속이 여간 허전하지 않았다. 비록 이름 석자밖에 모르는 의대생처녀지만 1년가까이 수첩을 가지고있으면서 그리고 그동안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 이제껏 모르던 대방의 인간적향기와 이성간의 친밀감을 깊이 느꼈다고 할지, 수첩이 임자를 찾아감으로 해서 그 향기와 뉴대를 더는 맛볼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이 텅 비는것 같았다. 차라리 한성희가 보낸 인편이 올 때까지 수첩을 그냥 가지고있을걸 내편에서 서둘러 보내지 않았는가 하는 후회까지 들면서 우울해지는 기분을 쉽사리 털어버릴수가 없었다.
그런데 인연이란 한번 이어지면 쉽사리 끊기지 않는 법인지 뜻밖의 《기적》이 일어났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기관장이 한성희의 편지와 함께 사진 한장을 내놓는것이였다.
《이건 웬 사진이요?》
사진속의 눈매 시원하고 단아한 녀자의 모색을 일별하며 인철은 물었다.
《왜, 몰라보겠습니까? 그게 바로 정치부함장동지가 보낸 수첩임자 한성흽니다. 편지만 달랑 갖고와야 정치부함장동지레 섭섭해할것 같아 한장 달랬지요.》
《그-래? 좋구만. 헌데 쉽게 줍데?》
만일 쉽게 주었다면 경박한 처녀임이 분명하여 흥미도 없어질것 같았다.
《쉽게가 뭡니까? 편지를 받아놓고도 두번이나 더 찾아가서야 마지못해 내놓으며 〈어쩌나, 영 밉상인데.…〉하더니 정 환영하기 곤난한 인상이면 퇴송해도 좋다고 합디다.》
아무렴 그랬을테지. 인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진속의 한성희를 뜯어보았다. 어질어보이면서도 정기가 흐르는 크고 서느러운 눈, 도두룩 한 이마와 선이 곧은 코, 상큼한 목을 차랑차랑 덮으며 량쪽 귀방울밑에서 날개마냥 살짝 까부라져들린 중발머리… 미인까지는 아니라도 지성과 신선미가 느껴지는 매혹적인 얼굴이였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한페지를 채운 내용이 수첩을 보내준데 대한 고마움과 신세갚음을 못하는 미안함으로 일관되여있었다. 반가운 소리는 마감에 있었다. 자기에게는 남동생은 둘이나 있지만 손우 오빠가 없기에 이제부터 박인철군관동지를 오빠처럼 여기겠으니 편지련계를 계속 가지자는것 그리고 인철이쪽에서 평양에 오는 기회가 있으면 꼭 대학에 찾아와달라는것이였다.
인철은 기뻤다. 사진속의 아름다운 대학생처녀 한성희가 자기를 오빠로 삼겠으므로 편지련계를 끊지 말자는것이나 평양에 오는 기회에 꼭 찾아와달라는것이나 다 기쁨을 자아내며 피를 끓여주는 소리였다.
그리하여 자주는 아니라도 편지가 오가는 가운데 인철은 지난해 봄 해군사령부에서 조직한 정치일군강습차로 평양에 간 기회에 한성희를 만날수 있었다. 그때 인철은 이미 군사칭호가 상위였고 한성희는 대학 6학년에서 졸업론문을 준비하는 방년의 처녀였다.
한성희는 몹시 반가와하였다. 야속한것은 상봉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많지 못한것이였다. 인철이 두시간후면 부대로 돌아가는 북행렬차를 타야 했기에 그들은 같이 평양역으로 나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야기가 잘 흐르지 않아서 주고받는 말보다 발부리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걷는 시간이 차차 길어졌다. 그간 해를 넘기며 편지를 통해 교감을 많이 한탓이랄지, 아니면 너무 갑작스런 상봉이여서 감정상의 혼란이 온 까닭이라고 할지, 마음속에 할 말은 가득한데 정작 입밖에 내자면 어색하고 아무 의의없는 군소리처럼 여겨져 오히려 침묵이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시간이였다.
평양역에 도착해서도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역두에는 함께 북행렬차를 타야 할 100여명 정치일군들이 먼저 와 대기하고있어서 그들의 눈길까지 받자니 이야기를 나누기가 더 따분하였다. 인철은 초조한 나머지 등골에서 진땀이 솟는 느낌이였다. 이렇게 마음의 말도 변변히 나누지 못한채 《우뢰처럼 만났다가 번개처럼》 헤여진다면 앞으로의 관계상발전도 기대하기 어려우리라는것이 예감처럼 떠오르는 불안이였다. 그러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이 따분한 분위기를 역전시킬수 있을것인가. 한성희쪽에서라도 바지런히 화제를 꺼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 역시 땀이 나는지 네모나게 접은 연분홍색손수건으로 입언저리며 이마만 자꾸 누를뿐 주동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지 못하고 묻는 말에나 간간이 대답하는 정도였다. 편지에서는 그토록 쾌활하던 처녀가 갑자기 새침데기로 변한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렬차시간이 되여 그들은 같이 홈으로 나갔다.
인철의 마음속에서 초조감에 쫓기운 무모한 용기와 함께 어떤 결심이 군함의 마스트처럼 우뚝 일떠선것이 이때였다.
오를 사람들이 기차에 다 오르고 이제 막 출발하려는듯 기관차가 두번째 기적을 울릴 때가 되여서야 인철은 해병다운 용감성을 발휘하여 처녀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기가 햇솜같은 연연한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단숨과 함께 불같은 물음을 쏟아놓았다.
《성희, 대답해주오. 난 꼭 대답을 듣고 가야겠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기, 기다려도 의견이 없겠소?》
한성희는 일순 몸을 흠칫 떨며 얼굴색이 해쓱해졌을뿐 손을 맡긴채 굳어져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처녀의 못하는 대답을 붕- 부웅- 기적이 대신해주었다.
이어 기관차쪽으로부터 차량의 련결고리를 당기는 덜커덩소리가 가까와오더니 드디여 객차가 놀란듯 자리를 떴다.
《어서 올라요, 어서…》 한성희가 재촉하였다.
인철은 처녀의 손을 놓고 뒤걸음으로 승강대계단을 밟았지만 더 오르지는 않고 기대어린 불타는 눈길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성희는 마주보기를 피하며 종시 바라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기차가 속도를 내며 저만치 사이가 멀어졌을쯤에야 처녀는 비로소 어떤 결심이 선듯 반달음을 놓아 따라오며 소리쳤다.
《기다리세요!-》
그러나 인철은 차바람때문에 처녀의 말을 정확히 들어낼수 없었다.
그는 손바닥을 귀바퀴에 오그려붙이며 마주 소리쳤다.
《뭐요?-》
《기다려… 기다리란 말예요.》
그제야 인철은 알아들었다. 아!-
《알겠소- 고맙소!-》
정녕 인철은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온 세상을 가진단들 이보다는 더 기쁘지 못할것이다. 감정이 시키는대로면 당장 뛰여내려 사랑스런 처녀를 힘껏 포옹해주고싶었지만 군인의 몸이라는 자각에 단속되여 점점 작아지는 처녀의 모습만 바라보고 또 보았다.…
×
함장이 일러준대로 인철은 오후 첫시간에 전대정치부로 갔다.
그가 정치부장실에 들어섰을 때 정치부장은 책상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있었는데 《와서 앉소.》 하더니 쓰던 글을 마저 쓰고야 만년필을 놓으며 얼굴을 드는것이였다.
《평양갈 준비를 해야겠소. 머리서껀 멋있게 깎구 군모, 군복, 혁띠, 군화… 백프로 새걸루 무장하오. 오늘 저녁 라진에서 나오는 렬차를 타야 하오.》
정치부장의 말에 인철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회의가 있습니까?》
정치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회의가 아니요. 동무도 들었겠지만 이번에 평양에서 2월8일경축행사를 크게 하오. 총정치국에선 그 경축행사에 참가할 해군대표를 〈푸에블로〉호나포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중에서 선출할것을 요구한다오. 그래 우리는 동무를 보내기로 했소.》
인철은 자신이 일찌기 체험해보지 못한 커다란 영광의 문어구에 서있음을 의식하였다. 기뻤다. 아니, 행복하였다. 《푸에블로》호나포전투가
있은지 열흘가량 된다. 그 열흘동안 그들 나포전투참가자들은 거의 매일과 같이 기자들을 만나야 했고 함대사령부와 해군사령부는 물론 민족보위성과
총정치국에서 내려온 많은 고위간부들의 찬사와 축하, 격려를 받으며 그야말로 둥둥 떠받들려 살다싶이 했다. 그것만도 인철은 한생에 다시 없을 분에
넘치는 영예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화국의 군건설사에 또 한번의 사변적의의를 가지는 2월8일경축행사에 그것도 해군대표의 자격으로
참가하는것은 앞서의 그것에 비할바가 아니게 큰 영광이였다. 모름지기 그 경축행사에는 경모하여마지않는
하지만 인철은 달리 생각해본다. 인민군군인치고 어느 누구에겐들 최고사령관동지를 뵙고싶은 소망이 없겠는가. 그렇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다 있다. 그리고 《푸에블로》호나포전투에 참가한 전투원들로 말하면 나 혼자가 아니다. 한길이, 중옥이, 현주… 아니다. 계산을 그렇게 하면 안된다. 함장도 포함하여 우리 구잠함 해병전원이 다 그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니 그들도 다 해군을 대표하여 20돐경축행사에 참가할 자격을 갖추고있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나는 정치일군이 아닌가. 당정치일군 특히 군대의 정치일군은 돌격전의 앞장에는 꼭 서야 하지만 영예를 누리는데서는 반드시 뒤줄에 서야 한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러 인철은 소신을 표명했다.
《정치부장동지, 저를 2월8일경축행사대표로 추천해주는건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저는 못 가겠습니다.》
정치부장은 대뜸 눈이 휘둥그래졌다.
《못 가다니? 왜 못 간다는거요?》
인철은 한바탕 설전을 벌려야 정치부장을 납득시킬수 있으리라 예견하면서 생각한바를 내놓았다.
《정치부장동지도 잘 아시지만 〈푸에블로〉호를 나포하는 전투에는 우리 구잠함해병 전원이 참가했습니다. 말하자면 함장동지를 비롯하여 감시병과 기관수에 이르기까지 다 공훈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사지휘관이라면 몰라도 정치일군이 그 공훈을 혼자 독차지한다면 제 꼴이 뭐가 됩니까? 전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만일 제가 경축행사에 갔다오면 우리 해병들이 더는 나를 신뢰하지 않을겁니다.》
정치부장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보 동무, 생각을 과연 별나게 하는구만. 동무처럼 문제를 볼래기 하면 나는 더 말할것도 없고 우리 전대의 전체 해병들이 다 〈푸에블로〉호나포전투에 참가하여 공훈을 세운것으로 되는데 그럼 그들을 다 경축대표로 뽑아야 하겠소?
것두 그렇거니와 동무는 정치일군을 무슨 〈도사〉나 〈신선〉처럼 생각하는것 같구만. 물론 정치일군은 전사들의 리해와 믿음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겨야 하오. 그러나 전사들의 정치일군에 대한 신뢰는 어떤 랭정한 론리나 양보심같은데서 생겨나는것이 아니요. 그건 따뜻한 감정에 바탕을 둔 아주 숭고한것이요.
내 말이 리해되오? 만일 동무가 영예를 독차지한것으로 신뢰를 잃을가봐 경축행사에 가지 못하겠다고 하는걸 동무네 함장이나 전사들이 알면 뭐라고 할것 같소. 그들은 오히려 정치부함장이야말로 자기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며 모욕감마저 느낄거요, 모욕감을… 알겠소? 그러니 군소리말고 가오. 우에서 요구하는걸 봐도 그렇고 동무가 적임자요.》
인철은 정치부장을 리치나 론리로 이기기는 힘들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고 경축행사에 가지 않으려는 결심은 철회하고싶지 않았다. 한즉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래, 욕을 먹더라도 강행돌파를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다.
《부장동지, 총정치국의 의도가 〈푸에블로〉호나포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중에서 경축대표를 선출하는거라면 말입니다, 군인교양측면에서 봐도 그렇고 차라리 군관보다 전사들중에서 선출하는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어느모로 보나 무던하게 생긴 정치부장의 너부죽한 얼굴에 노여움같은것이 어렸다.
《그러니 끝내 못 가겠다는거요?》
《…》
인철은 정수리에 떨어질 바위라도 기다리는 심정으로 눈을 지써 내리깔고 앉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치부장은 어이없어 말이 나가지 않는지 한동안 묵묵해있다말고 어째선지 한걸음 물러섰다.
《그럼 동무생각엔 누굴 보내면 좋을것 같소?》
《저는 김현주동무를 보냈으면 합니다.》
《왜 꼭 김현주요?》
《그 동무는 함 사로청위원장으로서 결사조에 자원했습니다. 전투시에는 적함에 선참 뛰여올라 함장실을 점거하고 선원놈들을 제압체포하는데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치부장은 입을 꾹 다물고 앉아 한동안이 지나도록 반응이 없었다. 그 침묵이 모처럼 마련된 정황을 되돌려세울것 같아 인철은 조바심치며 제편에서 리유를 보충했다.
《제가 그 동무를 경축행사대표로 보내자고 하는건 다른 리유도 있습니다. 〈푸에블로〉호사건이 있기 얼마전에 그 동무는 집에 표창휴가를 갔다왔습니다. 그런데 휴가를 갔다와서부터 우울해 지내면서 무슨 고민을 하는것 같았습니다. 담화를 해보니 아버지문제로 고민하고있었습니다. 그는 이제껏 철도일군이던 아버지가 전쟁시기 수송전투를 지휘하던중 희생된줄로 알았답니다. 그런데 휴가를 가서 정확히 안데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전쟁초기 철도정치공작대로 해방지역에 갔다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행방불명되였더랍니다.
그래 저는 말해주었습니다. 전쟁시기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전쟁인데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그리고 중요한것은 당에서 그런 사람들을 별다르게 보지 않는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이전처럼 밝은 얼굴로 군무에 충실하라, 동무야 함 사로청위원장이 아닌가.… 그후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전 같지는 못합니다.
저는 그가 이번에 경축대표로 갔다오면 얼굴의 그늘이 다 걷힐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그런 자세를 취했는지 정치부장은 엇걸어 책상모서리에 놓은 팔우에 가슴을 실은채 이윽토록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전화기를 끌어당겨놓고 교환수더러 상급정치부 《5번》을 찾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5번》이 나오자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구잠함 35호의 정치부함장 박인철상위가 2월8일경축행사대표로 가지 못하겠다고하면서 상등병 김현주를 대표로 보내자고 제기하는 사실에 대해 보고하였다. 보고끝에 정치부장은 박인철이 경축행사대표를 사양하는 리유와 《푸에블로》호를 나포하는 전투에서 김현주가 발휘한 위훈에 대해 다시 자세히 설명했는데 아마 《5번》이 결심을 정확히 내리기 위해 물어본것 같았다. 이어 정치부장은 《예, 예, 그렇습니다.》하는 소리만 여러번 되풀이하더니 문득 《전대적으로 제일먼저 붉은기중대칭호를 쟁취한 함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하고는 송수화기를 놓았다.
《〈5번〉동지가 뭐라십니까?》
인철은 정치부장이 아무 소리없이 빼람을 당겨 담배갑부터 꺼내는걸 보고 기다려내지 못하고 입빠르게 물었다. 정치부장은 이쪽의 급한 마음은 알바가 아니라는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몇모금 빤 다음 재털이에 재까지 털고야 입을 열었다.
《김현주를 보내자오.》
《그럼 됐구만요.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소리가 어이없게 들리는지 정치부장은 《원, 사람두…》 하고는 다른 말을 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