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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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때라 아이들이 학습반에 간 뒤 세칸이나 되는 방을 부지런히 쓸고 닦고 한 신복은 이마에 내밴 땀발을 손등으로 훔치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다된 8시였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된줄 몰랐던 신복은 서둘러 출근차비를 하였다. 크림을 찍어바르고 눈섭이나 돋구는 정도의 가벼운 화장에 외출복을 갈아입고… 그러다가 문득 오늘이 일요일이여서 남편이 집에 들어올수 있다는데 생각이 미쳐 옷장에서 남편의 내복을 꺼내 침대머리에 개여놓았다. 민주조선사 부주필인 남편은 미제무장간첩선사건이 터진 날부터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있었다.
신복은 내복우에 편지를 써놓는걸 잊지 않았다.
《미국놈들과 싸우시느라 수고 많겠어요. 내복을 갈아입고 벗은건 뭉그려 침대밑에 넣어두세요. 선아가 감기를 만나 코물을 흘리며 학습반에 갔어요. 당신도 주의하세요. 8시 10분에 이마쟁이.》
《이마쟁이》란 그들부부끼리 통하는 신복의 별명이다. 신복의 이마가 약간 넓으면서 툭 튀여나왔다고 신혼시절 남편이 가끔 익은 참외나 수박을 고르듯 손가락등으로 두드려보며 《이마쟁이, 이마쟁이》 하고 놀려준것이 그대로 별명이 되고만것이다.
이제는 나갈 때가 되여 아래방에 내려와 몸거울앞에서 외투를 입는데 부엌에서 설겆이를 끝낸 어머니(신복은 친어머니를 모시고있다.)가 방에 들어서다말고 눈이 커졌다.
《아니, 오늘도 나가냐? 일요일인데…》
《나가야 해요. 접때 제가 말하지 않았어요. 수령님의 교시로 온 나라 아이들에게 겨울옷과 털모자, 솜신을 해주어야 한다고… 올해에 우리 피복부문은 죽으나사나 그 과업을 관철해야 해요.》
《그건 그렇다 해두 니야 무슨 간부길 하냐, 책임자이길 하냐? 끈 떨어진 망석중이나 다름없이 된 신세에.…》
신복은 평양시지방산업총국 부총국장으로 사업하다가 간해 늦봄에 해임된 이래 지금껏 다른 직무에 임명되지 못하고있다. 이즈막에 어머니는 그것을 매우 불만스레 여기는것이였다. 그것은 신복이도 다를바없는 심정이지만 어머니앞에서 표현할수는 없었다.
《어머니, 어디 가 제발 그런 소릴랑 말아요. 간부사업이 뭐 달을 세가며 하는거예요? 필요에 따라 빨리 할수도 있구 늦게 할수도 있구… 아무튼 그건 우에서 하는 일이기때문에 이러구저러구하면 안돼요. 그리구 난 맡은 직무가 없다고 집에 앉아 놀고있을수 없는 사람이예요. 나야 당원이라도 전쟁전 47년도에 입당한 당원이구 수령님의 남다른 믿음과 사랑을 받으며 간부로 일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머닌 어쩜 그런 말을 해요. 난 오늘 살고 래일 죽더라도 수령님의 그 사랑과 믿음을 절대로 저버릴수 없어요. 아니, 그에 보답 못하고선 난 죽을수도 없는 몸이예요. 어머닌 이걸 알아야 해요.》
말을 하느라니 신복은 저도 모르게 격해오르며 눈굽이 젖어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어머니도 감심한 기색이였다.
《내가 그걸 모를가봐 그런 소릴 하냐? 난 네가 해임이 된지 반년이 넘두룩 온전한 자리에 임명 못되구 그 림시책임자라는걸루 장 있는게 속상해서 그런다. 아무턴 내가 잘못했다. 내 다신 그런 소릴랑 안할테니 아무쪼록 수령님뜻대로 일을 잘하거라.》
집에서 그런 일을 겪고 서문거리로 넘어와 대동교에 들어서도록 울적한 기분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귀가에 매달려 여전히 떠나지 않는것은 자기더러 끈 떨어진 망석중이나 다름없다고 하던 어머니의 말이였다. 성정이 워낙 온화하여 지금껏 불편한 속을 《언제면 임명해준다니?》 혹은 《요새 무슨 소리가 없더냐?》 하는 말로 표현하는것이 고작이던 어머니다. 그러던 어머니가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했으면 그런 말까지 하랴 하는 생각에 신복은 고추가루물이라도 마신듯 속이 쓰려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하지만 딸의 일로 어머니가 아무리 속상하다 해도 신복이 당자만이야 하랴.
신복은 정확히 지난해 5월 14일에 해임되였다. 해임리유는 기구개편으로 둘이던 부총국장자리가 하나로 축소된데 있었다. 국가공무원의 생활에 조동이 없을수 없어 신복은 자신의 해임을 별치 않게 여겼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우고 다년간 경공업부문에서 일한 경험과 능력을 고려한 새 직무에 인차 임명될것이라고 생각했을뿐이였다.
그런데 한달이 가깝도록 아무 소식도 없었다. 직무가 없어 집에서 소일한다는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신복은 난생처음 체험해보았다.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성당비서를 찾아가 《왜 여태 배치를 안해줍니까? 아무 일이라도 좋으니 일감을 주십시오. 정 일자리가 없으면 방직공장에 가서 직포공이라도 하겠습니다.》라고 제기했다. 성당비서는 웃으면서 직포공으로 배치해주면 천을 짤수 있는가고 물었다. 신복은 있다고, 해방전 녀고생시절 징용에 걸려 중국의 남만방직공장에 가서 일한 경력이 있어 천을 짜는 미립은 터있다고 하였다.
그제야 성당비서는 생각난듯 《참, 동무한테 그런 경력이 있지.》 하더니 심정은 리해된다, 하지만 부총국장사업을 하던 사람을 직포공으로 보내는건 간부사업원칙에 맞지 않는다, 아직 맞춤한 자리가 나지 않아서 그러는것 같으니 좀 더 기다리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래도 신복은 물러서지 않고 그냥 방직공장에 가서 일하겠으니 방직공장 지배인이나 당위원회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졸랐다. 그에 감심되였는지 성당비서는 신중한 기색으로 한동안 생각을 하다말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최근 평양시내에 있는 크고작은 피복공장을 다 합쳐서 피복종합공장으로 만들라는 내각의 지시가 떨어졌는데 림시로 그 조직사업을 해보지 않겠는가고 하는것이였다. 신복은 그렇게 하겠다고 선뜻 대답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당시 그에게는 관직이 문제가 아니였으니 그럴만큼 무슨 일이든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지경이였다.
정작 맡고보니 일이 생각보다 헐치 않았다. 동대원, 선교, 중구, 창광, 하당, 형제산… 평양시내 각 구역에 널려있는 17개의 피복공장에 피복연구소까지 한데 합쳐놓고 시범적으로 독립채산제를 실시해야 하였다. 사무실도 온전히 없어 선교편직공장행정청사 아래층 두칸을 빌려 썼다. 자동차는 고사하고 전화기도 없는 형편이라 재단용연필 한자루, 재봉바늘 한쌈지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자재를 공급해주느라고 온종일 시내를 주름잡으며 이 공장에서 저 공장으로 바삐 뛰여다녔다. 그래도 손이 미치지 못하고 놓치는 일이 많아 현장에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지만 힘든줄 모르고 뛰고 또 뛰였다. 애쓴 덕분에 차츰 종합공장이 자기 체모를 갖추어갔다. 관리운영체계와 자재공급질서도 기본상 섰고 공장지도부 편제인원이 4명으로부터 8명으로 늘었는가 하면 사무실에 전화기도 놓였다. 단 안타까운것은 림시책임자라는 국가공직이 아닌 림시직명을 가지고 일하자니 지시나 포치가 잘 내리먹지 않고 《김신복이 지배인이 되려고 〈과잉열성〉을 부린다》느니, 《임명이 안되는걸 봐서 필경 무슨 문제가 있는 녀자》라느니 등등 귀에 담기 힘든 뒤소리를 드문히 듣지 않으면 안되는것이였다. 그렇게 작년을 보내고 이해도 1월이 다 갔건만 여태 아무 소식이 없으니 정말이지 애가 나는 일이였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이즈막에는 혹시 간부사업을 보는 사람들이 나 김신복의 존재를 아예 잊어버린거나 아닐가 하는 무서운 생각조차 가끔 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선교편직공장에 도착하여 사무실에 들어서던 신복은 뒤에서 누가 찾는 소리에 문고리를 쥔채 고개를 돌렸다. 상급인 성 피복관리국장 최도식이였다.
《성당에 가보오. 비서동지가 찾습데.…》
모난데가 없이 둥글둥글하게 생겼지만 눈매만은 꽤 사무러운 최도식의 말이였다.
신복은 성당비서가 왜 찾는것 같더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고 알겠다면서 문고리를 당겼다. 우선 떠오르는것이 이제야 정식 배치해주려는 가부다 하는 생각이였다. 달리 생각할수 없는것은 림시로 책임지고 조직사업을 해보라고 권고한 지난해이래 성당비서가 그를 따로 찾은것이 오늘 처음이기때문이였다.
저절로 마음이 조급해져 관리일군들이 다 출근하기를 기다려 여느때없이 사업조직을 간단히 한 그는 서둘러 편직공장정문을 나와 부지런히 방직공장쪽으로 내려갔다. 방직 및 제지공업성은 거기 평양방직공장건너편 영제동에 있었다.
얼마나 안타깝게 기다린 오늘인가! 신복은 커다란 기대와 흥분을 안고 성당비서의 방에 들어섰다. 방안에는 성당비서말고도 낯선 손님이 한명 앉아있었다. 성당비서가 일어나 인사를 시키며 소개하는걸 보니 간부사업을 하는 일군이였다.
그런데 그들 두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신복은 금시 마음속이 불안해졌다. 낯선 일군의 인상도 침침하게 어둡거니와 성당비서의 얼굴에는 깊은 시름이 구름장처럼 덮여있었다. 그런 어두운 표정을 풀지 않은채 앞상우에 놓았던 가방을 세우며 일어선 낯선 일군은 호크를 풀고 가방안에서 길쭉한 봉투를 꺼내더니 신복이앞에 내밀었다. 신복은 어안이 벙벙하여 받으며 《이건 무엇입니까?》 하고 얼결에 물었다.
《파견장이요. 평북도에 가서 배치받으면 되겠소.》
일이 끝난 모양 가방의 호크를 채우며 하는 낯선 일군의 대답이였다.
한순간 신복은 심장이 얼어붙는것 같은 느낌을 체험하였다. 평북도에 가서 배치받으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가?!… 신복은 가까스로 자제력을 견지하면서 물었다.
《저를 평북도에 가서 배치받으라는 리유… 어째섭니까?》
《그건 동무의… 아니, 당의 조치로 알아두시오.》
신복은 온몸의 기력이 싹 빠지면서 금시 주저앉을것 같았지만 강잉히 몸을 다잡으며 성당비서의 방을 나왔다.
거리에 나섰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떨리여 제대로 걸을수 없었다. 그의 락심천만한 기색과 이상한 걸음새를 보고 지나가는 길손들이 눈이 둥그래졌지만 신복은 거기에 신경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침저녁 늘 다니던 출퇴근길이건만 오늘따라 왜 이리도 멀어보이는지 신복은 더 걷지 못하고 대동교를 건느기 전에 동뚝에 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귀전에서 그 일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왔다.
《파견장이요. 평북도에 가서 배치받으면 되겠소.》
지방으로 가는 세번째 파견장이였다.
신복이 첫번째로 파견장을 받은것은 1959년 12월이였다. 당시는 지방경제를 빨리 발전시킬데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교시에 따라 중앙기관일군들을 지방에 많이 파견하는 조치가 취해졌으므로 신복이도 그중의 한사람으로 함경북도 지방산업관리국장으로 임명받고 내려가게 되였다. 그때 당중앙위원회의 한 일군이 그를 불러 이번에 당이 취한 조치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주고나서 동무는 대학을 나온 후 중앙기관에서만 사업하다보니 경제관리경험이 없는것이 약점이라고 하면서 지방에 가서 경제관리경험을 잘 배우라고 일러주었다. 신복은 알겠다고, 당의 신임에 어긋나지 않게 일을 잘하겠다고 시원하게 대답하고 신심과 희망에 넘쳐 청진으로 내려갔다.
당시 함경북도에는 250여개의 지방산업공장이 있었다. 신복은 우선 실태를 료해하기 위해 지방산업공장들을 다 돌아볼 결심으로 먼저 청진시내에 있는 40여개의 공장들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런 다음 출장길에 올랐다. 경성, 어랑, 화대를 거쳐 최북단 선봉까지 그리고 무산, 연사 등 내륙지방까지 부지런히 다니며 료해하였다. 모든 군들에서 당의 의도에 맞게 자기 지방의 특산물로 지방공장들을 비교적 잘 운영하고있었다.
도내 지방산업공장들을 다 돌아보고나니 자신심이 생기고 앞이 환히 보였다. 특히 기쁜것은 도안에 인민생활을 훨씬 높일수 있는 무진장한 잠재력이 있음을 확인한것이였다.
이런 좋은 조건에서 일을 잘하지 못하면 일군이 아니라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신복은 팔을 걷고 일을 전개해나갔다. 힘은 들어도 눈에 띄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힘이 솟고 일할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한창 열이 나서 일하고있던 이듬해 4월 그는 당중앙위원회의 소환으로 다시 평양에 올라오게 되였다. 함북도에서 일을 시작한지 반년도 못되는 때라 신복은 영문을 알수 없었다.
당중앙위원회에서는 그를 경공업위원회 지방지도국 부국장으로 임명해주었다. 그런데 그를 임명한 당중앙위원회 일군의 말이 정녕 뜻밖이였다. 신복이 평양에 소환되여 경공업부문의 책임적인 직무에 배치된것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시에 의해 취해진 조치였다.
《아니, 수령님께서 저를요?!》
신복은 가슴치는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날저녁 온 가족이 환희에 잠겨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보살펴주시니 나는 정녕 얼마나 행복한 일군인가! 온 세상을 향해 이 영광, 이 긍지, 이 행복을 크게 소리쳐 알리고싶었다.
신복은 이튿날로 사업에 착수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였지만 함경북도에 가서 쌓은 경험에 기초하여 평양시와 각 도의 지방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 지방지도국사업이 활기를 띠고 눈에
알리게 진척되고있던 그해 가을
너무도 분에 넘친 신임을 거듭 받아안은 신복은 몸이 열쪼각이 나도 그 신임과 사랑에 보답할 비상한 각오를 안고 일에 몸을 던졌다. 어느새 달이 가고 해가 가는지 정말 모르게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1962년 가을, 경공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일한지 2년이 되나마나한 때 그는 또다시 함경북도지방산업총국 부총국장으로 내려가게 되였다. 두번째 파견장이였다.
무엇때문인가? 어째서 나를 또 함북도에 내려보내는것인가? 신복은 랭정하게 자기 사업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보아도 다시 함경북도로, 그것도 직무보다 떨어져내려가야 할 까닭을 찾을수 없었다.
첫번째 파견장을 받고갈 때와 달리 신복은 괴롭고 무거운 마음으로 평양을 떠났다. 그러나 일단 직무가 있고 일이 있는 이상 사업에 몰두하는것이 그의 타고난 성미였다.
그새 함북도에는 100여개의 공장이 더 늘어나 350여개나 되였고 생산규모도 훨씬 커졌다. 인민생활을 하루빨리 높이시려는 어버이수령님의 원대한 구상을 받들어 신복은 죽을둥살둥 모르고 뛰여다녔다. 그렇게 꼭 2년을 일한 1964년 가을에 또다시 소환장이 내려왔다. 평양에 도착하는 즉시로 당중앙위원회에 찾아가니 해당 부서의 일군이 반갑게 맞아주며 이런 가슴뜨거운 사연을 들려주었다.
며칠전 어느 경제일군협의회를 지도하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 요즘 왜 김신복이가 보이지 않는가고 물으시였다.
정준택부수상으로부터 함북도에 내려간지 몇해 된다는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몹시 노하시여 그 동무는 내가 옆에 두고 일을 배워주며 키우는 일군인데 왜 자꾸 먼데로 보내는가, 당장 평양에 데려다가 새 직무를 맡겨주라고 교시하시였다는것이였다.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신복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그것은 참고참아도 참을수 없는 격동과 감사의 눈물이였다. 아, 세상에 이처럼 세심하고 다함없는 은정을 지니신 자애로운분이 또 어디에 있을것인가!!
신복은 평양시지방산업총국 부총국장으로 임명받고 사업하였다. 그러다가 기구개편을 계기로 해임하여 반년이상 미배치로 두더니 이번에 세번째로 지방배치장을 주는것이다. 그것도 직무조차 없이 말이다. 신복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검은 손길이 자신을 노리고있는것 같은 예감이 들며 몸서리가 쳐졌다.
그는 떠나기 전에 해당 부문을 찾아가서 자신이 직무조차 없이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는 리유 즉 사업상결함인가, 작풍상결함인가, 능력부족인가 아니면 경력상문제인가 하는것을 알아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의 지방행이 당의 조치로 결정된 이상 흥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원으로서의 자각이 동의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렇다. 이런 때일수록 인격을 잃지 말아야 한다. 로동당원에게는 당의 조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접수와 실행만이 있다. 당이 요구하면 평북도가 아니라 물과 불속에라도 서슴없이 가는것이 당원의 자세다. 입당할 때 나는 성스러운 당기앞에서 그것을 결의했고 그 결의를 지키는것이야말로 당원된 존엄이라고 확신해왔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 결의를 따를것이다!)
결심은 그렇듯 굳었지만 배치지도 없는 세번째 파견장을 받은 지금 신복은 자신의 앞길에 무엇이 기다리고있을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