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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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극장에서 오전 8시부터 시작된 조선인민군 붉은기중대군인열성자대회는 오후에도 계속되였다.
오후 5시경, 토론은 이미 끝나고 지금 연탁에서는 단발머리 녀성군인이 또랑또랑 여문 목소리로
박인철은 온 정신을 모아 맹세문의 구절구절들을 그리고 한생의 절정과도 같이 느껴지는 이 뜻깊은 대회의 마감장면들을 뇌리에 깊이 새기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찌된셈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이 분산되면서 눈길이 저도 모르게
(…인철이, 이러면 안된다. 이게 어떤 장소인데 너는 과연 무엄한줄 모른단 말이냐? 이제는 맹세문랑독도 끝나가고있다. 그러니 인내성을 발휘해야 한다. 더구나 너야 오늘
오전회의 첫 휴식시간에 있은 일이였다.
《호명된 동무들은 빨리, 빨리 나를 따라오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속에 인철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정치국일군을 따라 방으로 갔다. 그 옆방에서 다시한번 명단과 본인을 대조하여본 총정치국일군은 명단의 순서대로 한명한명 불러세우더니 순서를 바꾸면 안된다는것을 강조한 뒤 뜻밖의 놀라운 말을 했다.
그들모두가 이제
그 순간부터 너무 긴장되여 정신이 혼미해졌다고 할지, 이후의 일들과 관련하여 인철은 지금도 꿈속에서 겪은듯 선명한 기억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있다면 오직 하나 그의 차례가 되여 어느 일군인지
《푸에볼로》호 나포전투를 지휘한 동해함대 구잠함 35호의 정치부함장임을 말씀드리자
오전회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여 숙소에 가서 인철은 대회에 함께 온 김현주에게
갑자기 우렁찬 박수소리가 장내를 진감하였다. 맹세문랑독이 끝난것이였다.
대회의 마감순서로 조선인민군 륙, 해, 공군대표들이 전체 인민군군인들의 충정스런 신념과 의지를 새긴 붉은 표지의 맹세문원본을
인철은 자기가 격동의 눈물속에 어떻게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르는지 몰랐다. 모르고있다가 오전회의 휴식시간에 자기들을
2층의 중앙홀에 모인 인원은 모두 11명이였다. 대부분이
총정치국일군과 함께 이마가 정수리까지 벗어져올라간 사복차림의 일군이 나타나 명단을 짚으며 매 11명 군인의 부대명과 이름, 생년월일을 재삼 대조확인하더니 아래층의 어느 방으로 데리고갔다. 크지는 않으나 깨끗이 꾸려진 그 방에서는 총정치국장 오진우대장과 함께 륙, 해, 공군의 장령 몇명이 벽밑의 쏘파에 앉아 담소하다가 그들을 맞아주었다.
대장의 자리앞에 있는 넓고 번쩍거리는 탁우에는 훈장갑으로 짐작되는 밤색의 곽들이 주런이 놓여있었다. 그 곽들을 보고서야 인철은 대회에 올라올 때 전대정치부장이 이번 대회기간에 수훈식이 있을수 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사복차림의 일군이 지시하는대로 11명이 앞상에서 몇걸음 떨어진 앞에 횡대로 서자 민족보위성 책임일군이 일어나
인철은 가슴속에서 갑자기 묵직한 쇠망치같은것이 심장을 쾅쾅 때려 울려주는듯싶은 느낌을 체험하였다. 이 무슨 소린가. 영웅칭호를 수여하다니, 그럼 내가 영웅이 된단 말인가? 그것도 공화국영웅이!…
오전에
이윽고 수훈식이 끝나 그들 11명의 영웅들은 가슴에 영웅메달을 그냥 패용한채로 대기시켰던 뻐스에 올라 숙소에 도착하였다. 숙소에서는 먼저 도착한 대회참가자들과 려관직원들의 열렬한 축하가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총정치국에서 미리 조직한것 같았다.
박인철에게 있어서 일찌기 상상해보지 못한 영광을 체험한 《꿈》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갔다.
저녁식사시간을 앞두고 벌써 부대로 돌아가는 문제가 론의되였다. 정세가 의연 긴장한만큼 대회참가자들이 평양에서 지체하지 말고 속히 부대에 돌아가 군무에 진입할데 대한 민족보위성의 지시가 있었던것이다. 하여 지시집행을 위한 각 군종책임자들의 모임이 있고 거기서 방향별 렬차시간과 행동방향이 주어졌다. 저녁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숙소를 떠나 역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방향도 있었다. 동해안쪽으로 가는 대표들은 래일 아침 9시 10분에 평양역에서 출발하는 라진행렬차를 타라는 지시가 내렸다.
인철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애인 한성희를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할가봐 내심 걱정이였는데 옹근 하루밤을 얻은것이였다. 한성희를 정작 만나면 계획이 어떻게 변경될지 몰라 그의 현재로서의 결심은 밤새워 함께 대동강유보도를 거닐며 그간 가슴속에서만 키워온 사랑의 감정을 맘껏 터쳐보리라는것이였다.
저녁식사후에 즉시 행동할 생각으로 인철은 김현주에게 미리 이야기까지 해두었다. 누구를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외출을 하겠다고, 좀 늦어지기는 하겠지만 잠은 꼭 숙소에 돌아와 자겠다고. …
그러나 저녁식사후에 인철은 예상치 못한 정황과 맞다들었다. 귀대를 앞둔 수하의 대회대표들을 만나보기 위해 해군사령부 정치부장 오동삼장령이 숙소에 왔던것이다. 동서해 각급 해군부대들에서 온 대표들의 침실을 돌아보며 건강을 묻고 부대에 돌아가면 대회참가자답게 붉은기중대운동의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하라고 고무도 하면서 지체하던 장령은 돌아가기 전에는 박인철을 부르더니 따로 할 말이 있으므로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것이였다.
《앉소.》 숙소의 마당끝에 있는 돌의자에 앉으며 하는 오동삼장령의 엄한것 같으면서도 인정이 느껴지는 말이였다. 《동무는 내가 성희의 큰아버지라는걸 알고있겠지?》
《예.》
장령옆에 얼마간 사이를 띄워앉으며 인철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한성희의 부모들과도 아직 안면을 익히지 못했는데 큰아버지부터 만나보는것이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생각되는바가 없지 않았다. 게다가 직계상관이기도 한 애인처녀의 큰아버지였다.
《만나보았나?》
이번 대회에 올라와서 한성희와 접촉이 있었는가 하는 소리였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왜?》
《기회가…》
《하기는 대회전에 견학과 참관을 계속했다니까 기회가 없었겠지.》 한즉 오늘 저녁에라두 꼭 만나보고 가라는것이였다.
《그럴가 합니다.》
(암, 그래야지.)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장령은 상봉인지 작별인지 모를 일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있는 숙소마당안을 한바퀴 둘러보더니 이윽고 독백을 하듯 감정을 담아 말했다.
《내 장담하는데 성흰 좋은 처녀야. 곱질 않나 공부가 없나, 성격이 나쁘고 교양이 부족하나… 정말 백점짜리 색시감이지. 내가 큰아버지긴 해도 걸맞는 아들이 있었더라면 동무한테 절대 양보하지 않았을거야. 동무가 설사 영웅이라고 해도 말이지. 알겠나? 그렇게 탐이 나는 처녀지.》
인철은 귀뿌리가 달아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사랑하는 처녀의 우점을 속속들이 알고 칭찬해주는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하더라도 어쩐지 쑥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교양은 해야 돼.》 다소 심장한 의미를 띠는 장령의 말이였다. 《동무가 성희의 어떤 점을 보고 일생의 반려로 삼았는진 다 모르겠지만 내 보기엔 처녀가 공부는 많이 했어도 아직 사랑의 참뜻은 잘 모르고있어. 조선인민군 군관을 사랑한다는 의미에 대해선 더구나 모르는것 같구.…
내가 이렇게 말하면 동무도 대략 짐작은 가겠지만 그래, 성희는 지금 수도생활과 떨어지기 싫어 동무를 평양가까이에 끌어올릴 작정을 하고있소. 어머니가 울고불며 한숨만 쉰다느니, 할아버지가 뭐 어쩐다느니 하고 무슨 구실이 많지만 기본은 성희의 행복관에 문제가 있소. 천리마시대에 맞지 않는 뒤떨어진 행복관을 가지고있거던. …》
《!…》
《내가 그런 생각을 해선 안된다고 단단히 타이르긴 했지만 내 말 한번으로 그 락후한 생각이 쉽사리 머리속에서 빠져나갈수 있을가?》
《…》
《물론 나는 동무가 성희의 소환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있소. 그러나 동의하지 않았다는것만으로 동무의 할바가 끝나는것은 아니요. 사나이는 한 처녀를 일생의 동반자로 선택했으면 그의 모든것을 책임져야 하오. 더구나 군관은… 말하자면 처녀를 뜻과 운명을 똑같이하는 또 하나의 자기로, 진짜 혁명동지로 만들어야 한단 말이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남녀간의 사랑이란 두사람이 한사람으로 되는 아름다운 결합과정이며 그 총화라고 생각하오.
그런데 언제부터 사랑했는진 모르겠는데 동무넨 아직도 하나가 못되구 그냥 둘이거던, 게다가 한쪽은 향수냄새밖에 안나는 온실의 꽃이구. 인민군군관의 안해는 적어도 절반 군인은 돼야 해, 옹근 군인이면 더 좋지만.… 내 말이 리해되오?》
《예.》
인철은 대답이 혀끝에서 겨우 떨어지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것을 감출수 없었다. 아울러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 오동삼장령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한성희가 소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자기의 회답편지를 받고도 그것을 무시하고 제 주장대로 일을 추진시켜본것이 분명하였다. 그랬다가 큰아버지의 꾸중을 들었고… 그 불똥이 결국 자기에게까지 튀여와 지금 애인을 교양 못한 책임도 합쳐 이런 사랑과 결혼에 대한 《훈시》를 듣고있는것이였다.
인철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불쾌한것은 한성희가 자기를 무시한것이였다.
개념으로서의 무시를 상대의 존재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업신여기는 의미로 본다면 인철은 한성희에게서 모욕을 당해도 이만저만 당하지
않은셈으로 되였다. 그러나 인철은 한성희의 소행을 자기를 업신여기거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출발한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처녀
《그럼 이젠 성희한테 가보라구, 날 만났단 말은 말고. …》
손을 꽉 잡아주면서 부대에 내려가면 영웅답게 일을 더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장령이 돌아가자 인철은 돌의자에 되돌아와 앉았다. 앉아서
팔굽밑에 무릎을 고인채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헝클어진 마음을 정돈해보았다. 정돈이 잘되지 않았다. 여전히 체물처럼 속에 웅크리고 내려가지
않는것은 한성희한테 무시당한 불쾌감이였다. 이런 감정으로 한성희를 만날수는 없었다. 만난대야 정다운 말보다 화부터 낼것 같았다. 아니, 화나 낼 정도면 가서 만나볼수도 있었다. 그보다 더 나쁜것은
한성희가 자존심을 세우며 반박이라도 해오면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인철은 숙소마당을 나와 지나가는 학생아이에게 체신소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체신소는 길건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저녁때여선지 전화를 리용하는 손님이 한명 있을뿐 조용한 가운데 현금입고준비를 하는 직원에게서 인철은 봉함엽서를 한장 샀다. 사가지고 구석에 놓여있는 전보문을 쓰는 책상앞에 가 만년필을 뽑으며 생각을 가다듬자 쓰기 시작했다.
…성희, 그간 안녕하오?
나는 건강하여 맡은바 임무수행에서 할바를 다하고있소.
신문이나 방송을 들었으면 알리라고 보지만 오늘(27일) 평양대극장에서는
성희, 나는 방금전에 동무의 큰아버지되는분을 만나보았소. 만났을뿐더러 동무가 나를 위해 어떤 《장한》일을 했는가 하는 이야기도 들었소. 동무는 참, 동무는 전번의 내 편지를 어떻게 리해했소? 소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절대로 그렇게 할수 없다고 내가 얼마나 명백히 말했소. 나는 그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말을 한마디도 더 보탤수 없으리만큼 립장을 똑똑히 밝혔소. 그런데 그런 어처구니없는 걸음을 하다니… 정말 한심하오. 한심하고 한심하고 또 한심하오!
나같은 해군상위쯤 우습게 보는것은 좋소. 그러나 그 우습게 보이는 해군상위가 지켜선 조국초소를 우습게 보며 소환을 운운하는데 대해선
용납할수 없소. 그런 의미에서 오늘 재삼 말하는데 제발 다시는 그런 생각을랑 하지 마오. 전번에 회답편지에도 썼듯이 내가 지키고있는 바다로 말하면 당과 조국이 해군군관인 나를 신임하여 맡겨준, 준엄한 시각이 오면 생명을 바쳐서라도 기어이 지켜내야 하는 나의 귀중한 혁명초소요. 나는 이 복무초소를 신성하게 여기며 높은 긍지를 가지고 사랑하오. 나는 동무가 무엇보다도 이 점을 리해하고
만일 그것이 어렵다면 우리 두사람중 어느 한쪽은 분명 불행한 선택을 했음에 틀림없소. 따라서 우리는 이제라도
그럼 회답을 기다리겠소. 안녕히…
모란봉구역 체신소에서.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