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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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오전,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담배를 태우고 인삼차 한잔을 마시는 동안에 10분이 지나 정각 10시가 되자 박준국소장은 비서장 한재경상좌를 비롯한 참모성원들과 함께 회담장인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로 들어갔다. 흰색의 군사분계선표식띠가 흘러간 회담탁 저쪽에서도 문이 열리며 적측인원들이 줄레줄레 들어와 걸상을 덜컥거리며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런데 수석위원 박준국은 물론 우리측 참모성원모두는 일순 의아하지 않을수 없었다. 적측수석대표가 1차담판때부터 맞서온 스미스가 아니라 전혀 초면의 안경쟁이 미군소장이였던것이다. 영문자 《M》을 그리며 정수리로 벗어져올라간 흰 이마와 대모테안경알뒤에 깊숙이 숨어있는 연밤색눈, 큼직한 매부리코와 얄팍한 입술, 처진 볼살에 묻힌 덜 발달된 조개턱… 어딘가 의뭉해보이는 적측담판대표의 그러한 인상특징을 일별하고 자리에 앉은 박준국은 가방에서 발언원고와 자료들을 꺼내놓으며 정황이 달라진 조건에서 담판을 어떻게 진행할것인지를 타산해보았다.
적측에서 담판대표로 스미스대신 다른 인물을 내보낼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못한 그였다. 당황할것까지는 없다 해도 상대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있는 조건에서 자칫하면 피동에 빠지거나 덫에 걸리기 쉬웠다. 적측이 담판규정을 어기며 아무런 사전통지도 하지 않고 이렇듯 제창 맞선을 보이는것은 그런 효과를 노린것일수 있었다. 그러니 우선 그 점에서 허점을 보이지 말고 각성해야 할것이다. 다른 한가지 불편은 준비해가지고온 발언원고들이 의의를 상실한 점이였다. 그가 앞에 내놓은 발언원고들은 전번 15차담판때 적측대표 스미시가 내놓은 《인수증초안》의 부당성을 까밝히면서 우리가 주장하는 사죄와 담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고 그밖의 어떤 론의도 다 무익하다는데 대해 론증한것이였다. 아직은 이름도 모르는 이 생둥이에게 그것을 들이대야 소귀에 경읽기로 통하지 않을것임은 불보듯 명백하였다.
드디여 좌석이 정돈되고 격전전야의 정적같은 침묵이 회의장안을 감돌았다.
오늘담판은 순차상 우리측이 요구하여 진행되는만큼 박준국이 첫 발언을 하였다. 그는 적측대표를 똑바로 건너다보며 기본문제토의에 앞서 그가 스미스를 대신한 미국정부대표인가 하는것을 명백히 할것을 요구하였다. 상대방은 으시대듯 입귀에 얄궂은 미소를 띠우며 그렇다고, 자기로 말하면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의 석방문제를 토의할 전권을 가지고 미국정부를 대표하는 길버트 에이취. 우드워드라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담판을 계속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한 박준국은 이제는 이자를 길들여야겠다는 결심으로 토의문제와는 상관없이 지난 몇달간 미국측이 온갖 부당한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회담의 진전에 방해를 논 사실들에 대해 낱낱이 까밝히면서 그 책임을 추궁하였다.
아울러 담판 전과정에 시종일관 견지해온 공화국정부의 립장을 다시 한번 명백히 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의 선임자인 스미스씨가 인계했을수 있겠지만 혹시 망각하고 그냥 퇴임했을수도 있다고보아 상기시킵니다.
당신들이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인수하는 유일한 방도는 우리의 요구가 충분히 담긴 사죄문과 담보문건을 쓰는것입니다.
우리는 별다른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미국함선 〈푸에블로〉호가 우리 령해에 침입하여 정탐행위를 한데 대해 허심하게 사죄하고 다시는 어떤 미국함선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령해를 침범하지 않겠다는것을 담보하며 승무원들을 관대히 처분해주기를 바란다는것을 미합중국정부의 명의로 써내라는것이 우리의 요구입니다.》
이어 미국측대표 우드워드가 발언했다.
그는 여유작작하게 팔을 엇걸어 탁우에 놓으며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제법 우렁찼다. 선임자 스미스는 상대를 졸리게 만드는 애잔한 목소리였는데 이 작자는 자던 사람이 놀라 깨날만큼 목청이 웅글고 거셌다.
《나는 최근에 워싱톤에서 여기 판문점으로 왔습니다. 워싱톤을 떠나기 전에 나는 국무성과 국방성의 책임있는 관리들을 만나 당해 〈푸에블로〉호사건을 철저히 상론했습니다. 거기서 얻어진 나의 견해에 의하면 〈푸에블로〉호사건이 여러달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지금껏 스톱! 상태에 있는것은 당신측이 잘못을 우리 미국에만 있다고 고집하기때문입니다.
박수소리는 두손바닥이 마주쳐야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당신측은 이 물리적법칙을 부정하고 한손에 의해 박수가 일어났다고 우기는데 방금한 당신의 발언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 작자가 말을 아주 재미나게 하는군. 뭐 우리가 물리적법칙을 부정하고 한손으로 박수소리를 낸다?… 정말 소가 웃다 꾸레미를 터뜨릴 일이군.)
준국은 어이없는김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드워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에- 당신은 이미 진행한 15차례의 담판이 합의점에 이르지 못한것이 마치도 미합중국측이 부당한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회담에 방해를 놀았기때문인것처럼 묘사했는데 그건 지나친 독선입니다. 이미 진행한 회담들에서 나의 선임자가 견지한 립장은 어느것이나 다 미합중국대통령과 정부의 숙고된 정책에서 나온것입니다. 국회의 지지도 물론 있었고… 따라서 이번사건과 관련하여 우리측이 어떤 반칙이나 실수가 있었다면 그건 〈푸에블로〉호자체의 책임이지 미합중국정부가 책임지고 사죄할 일은 아니라는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북조선지도부가 이 점을…》
준국은 손바닥으로 책상모서리를 탁! 치며 우드워드의 발언을 중지시켰다. 그러지 않아도 이자에게 처음부터 신발을 잘 신겨야 할 필요를 느끼고있던 참인데 마침 절로 기회가 마련되였던것이다. 그는 갑자기 웬일인가싶어 눈이 덩둘해진 우드워드를 쏘아보며 엄하게 휘몰아쳤다.
《우리측은 지난 회담들에서 당신측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조선〉이라고 부르는데 대하여 이미 경고한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오늘 또 그런 무례한 발언을 되풀이하고있다. 이것은 당신들이 이 담판을 아주 불성실하게 대하고있으며 문제토의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있지 않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다시한번 명백히 알려주겠으니 똑똑히 들어두라. 오늘 이 세상엔 〈북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으며 이 회의장에 그 어떤 〈북조선〉대표도 참가하지 않았다. 만약 당신들이 이 담판에서 〈푸에블로〉호 승무원문제를 해결할 의향이 진실로 있다면 그런 무례한 발언을 하지 말것을 다시한번 경고한다!》
박준국은 우드워드가 주권국가로서의 공화국의 권위를 훼손시킨 이상 경어를 쓰지 않고 재판관이 피고에게 범죄를 인정시키듯 하대하였다.
《…》
예상 못한 급습으로 강타를 먹은 우드워드는 서방인들이 당황하고 할말이 없을 때면 항용 그러듯이 량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억울해하는것 같은 인상이기도 하였다.
저쪽이 그러거나말거나 박준국은 일단 거머쥐였던 상대의 멱을 놓지 않고 숨통을 바싹 조였다.
그는 참모성원들에게 《푸에블로》호 선원들의 자백서를 있는대로 찾아달라고 하고는 다시 발언을 시작하였다.
《우드워드씨, 내가 보건대 당신은 〈푸에블로〉호사건의 내막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소. 당신은 방금 말하기를 미국측에 어떤 〈반칙이나 실수〉같은것이 있었다면 그건 정부의 잘못이 아니라 〈푸에블로〉호자체가 책임질 일이라고 했는데 그거야말로 닭을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놓는것과 같은 강변이요. 다시말하여 당신은 지금 온 세상이 다 알고있는 사건의 진실을 모르고있소. 〈푸에블로〉호가 우리 나라 령해에 침입한것은 그 어떤 부주의나 우발적인것이 아니라 미국정부의 대조선정책이 빚어낸 결과요.》
박준국은 참모성원들이 골라준 선원들의 자백서를 받아쥐며 말을 계속하였다.
《이건 당신네 사람인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의 연구장교 스테븐 아르 해리스대위의 자백서인데 들어보시오. 〈나는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을 집행하였을따름이지만 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동해에 와서 한 일은 아주 더러운 죄악이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할수록 그 엄중성을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나를 이와 같은 범죄의 길로 밀어넣은것은 죤슨행정부와 나의 상관들입니다. 나는 그들을 증오합니다.〉
이것은 해리스대위 혼자만의 말이 아니요. 〈푸에블로〉호 선원들이 쓴 공동사죄문에는 이런 내용도 있소. 〈우리 군대(미국)의 목적은 우리 정부가 결정한 정책을 수행하는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범죄를 빚어낸 책임은 미국정부당국자들과 군부수뇌자들에게 있습니다.〉
우드워드씨, 당신은 당신네 장병들이 말한 이 엄연한 진실을 부인할 작정이요?》
우드워드는 땀이 나는지 손수건을 꺼내 이마와 목덜미를 누르며 지체하다가 뒤쪽 보좌관들한테서 종이장이 넘어와서야 읽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엔 나의 선임자 스미스장령은 앞서 진행한 15차담판에서 선원인수와 관련한 〈인수증초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측이 오늘 회담을 제의한것은 그 〈인수증초안〉을 토의하자는것이 목적인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사또보다 아전의 눈이 더 밝다는 말이 옳았다. 사실 우드워드의 말은 옳기도 했는데 보좌관들한테서 넘어온 쪽지의 덕분이였다.
15차담판때 미국측이 내놓고 우리가 연구해보고 오늘 담판에서 대답을 주기로 한 《인수증초안》이란 이런것이였다.
인 수 증
(초 안)
나는 82명의 미국해군함선 《푸에블로》호 승무원들과 수병(웨인디 하제스)의 시체를 인수함을 이에 인정하는바이다.
나는 당해 선박이 정보수집행동에 종사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12해리이내로 침범하였다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의 자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 수석대표에 의하여 제공된 이와 같은 효력을 가지는 기타 문건들을 읽었으며 이에 류의하였음.
나는 미국정부가 이들 문건들에 기초해서 이와 같은 행동들에 대한 유감의 뜻을 표명하며 미국선박이 앞으로는 북조선으로부터 12해리이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할것을 담보해야 한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 수석대표의 요청에 류의하였음.
우의 내용에 립각하여 나는
(A) 당해 《푸에블로》호가 조선인민군에 의하여 나포되였을 당시에 정보수집의 임무를 띠고있었다는것을 인정하는바이며
(B) 미합중국 해군함선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12해리이상밖에 머무르라는 명령을 계속 받을것을 보증하며
(C)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12해리이내로 당해 선박이 접근하는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르는 미국해군함선 《푸에블로》호에 대한 여하한 명령위반에 대해서도 유감의 뜻을 표하는바이다.
이것은 하기 인원에 의하여 서명될것이다.
미군 해군소장 제이. 브이. 스미스
미국측이 내놓은 이 난해한 《인수증초안》을 따져보면 적들이 《푸에블로》호가 우리 나라 령해를 침범하고 정탐행위를 한데 대해 사죄를 똑똑히 하지 않으려는 종전의 기본립장에서는 물러서지 않았지만 형식상 좀더 후퇴하고 태도상에서도 일정하게 수그러들었다는것으로 판단할수 있었다. 《푸에블로》호가 정보수집활동에 종사했으며 승무원들의 자백서와 우리측이 제공한 문건들에 류의했다고 한 사실들은 미국측이 우리의 립장을 어느 정도 고려하면서 저들의 체면을 유지할수 있는 어떤 해결방도를 모색하고있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였다.
담판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볼수 있는 이 15차담판정형과 차후작전안을 보고받으신
《…물론 미국은 력사상 다른 나라에 사죄문을 낸 일이 없기때문에 사죄문을 내라면 나자빠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것이 없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우리 손에 있는만큼 그들로서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죄문을 써내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제는 미국측에 사죄문과 담보서를 써내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던 단계로부터 우리가 주동적으로 사죄와 담보문건내용을 성문화하여 제기하고 그것을 미국측에 접수시키기 위한 투쟁단계, 다시말하여 공격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지금 박준국이 주패장처럼 앞에 놓고 마음 든든해 앉아있는, 이제 때를 보아 넘겨줄 적측의 사죄문건은
《그럼 당신측이 제기한 〈인수증초안〉에 대한 답변을 주겠는데 그전에 한가지 명백히 하고 넘어갈것이 있소. 우리 조선말사전에는 〈사죄〉라는 말의 뜻을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 상대편에게 용서를 비는것이라고 씌여있으며 〈담보〉는 어떤 목적이나 지향의 실현을 어김없이 보장한다는 뜻으로 규정하고있소. 당신네 미국언어사전에도 그런 말이 있소? 있다면 그 의미를 어떻게 풀이하오?》
박준국이 이런 언어유희를 해보는것은 이 생둥이 우드워드에게 우리가 요구하는 《사죄》와 《담보》가 어떤것이라는것을 개념으로라도 똑똑히 심어주자는 의도에서였다. 우드워드는 이쪽의 취지가 잘 리해되지 않는지 보좌관들의 도움을 받아가지고야 대답하였다.
《우리 영어에도 그런 단어는 있고 그 의미도 별로 다르지 않은것으로 리해합니다.》
《오- 그렇소? 그렇다면 희망을 가져봅시다. 우린 합의점을 찾을수 있겠소.》 미소도 보태서 그렇게 상대방에게 아량을 보인 박준국은 또 어째선지 갑자기 위에 둔한 아픔이 오는것을 느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의 선임자 스미스소장은 우리에게 〈인수증초안〉을 제출하면서 그것이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석방하는데서 합의할수 있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초를 제공할것이라고 언명했소.
그러나 우리는 〈인수증초안〉을 연구하는 과정에 유감스럽게도 스미스소장이 언명한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초〉를 끝내 찾아내지 못했소. 우리가 찾아낸것은 당신들측이 나포될 당시 〈푸에블로〉호가 정보수집임무를 띠고있었다는것을 인정하고 12해리이내로 접근하는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르는데 대해 유감을 표시한것과 그 무슨 〈류의〉를 많이 한것이 전부요.
당신측은 아직도 문제의 본질을 리해하지 못한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인정〉하고 〈류의〉해서는 우리를 납득시키지 못하며 선원인수도 불가능하오.》
《…》
《알아야 할것은 우리는 사죄와 그리고 재발이 다시 없으리라는 담보를 요구하오. 그런데 당신들은 사죄나 담보라는 말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무슨 〈류의〉나 〈유감〉에 대해서만 많이 말하고있거던.
보아하니 당신측은 늘 남한테서 사죄를 받기만 한 모양으로
박준국은 앞에 놓았던 조선어와 영문으로 된 사죄문을 쥐고 일어나 엉거주춤 마지못해 일어서는 우드워드에게 넘겨주었다.
시작부터 그냥 《방어전》만 하느라고 지쳤는지 우드워드는 앉자마자 피발이 선 눈으로 이쪽을 한번 흘끔 건너다보더니 읽어내려갔다. 한번만이 아니라 적어도 3번정도는 읽는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주의깊이… 그리고는 오늘회담은 이것으로 끝내자, 당신측이 제기한 본문건을 상부당국에 제출하겠다고 하면서 제 먼저 일어섰는데 도망치듯 바삐 문을 열고 나가는걸 보니 엉뎅이가 거멓게 젖어있었다. 짐작에 오줌을 싼것 같았다.
하여 이날부터 우드워드한테는 《오줌싸개대표》라는 별명이 붙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