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길

5

 

영옥은 웬 일인지 오늘 금방 홍선생을 만나게나 된것처럼 마음이 기쁘고 가슴이 설레였다.

그가 추운것도 잊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와 앉아서 술자리를 벌리고 무슨 이야기인지 하다가는 왁자하니 떠들며 껄껄 웃고있었다.

《아이유, 어머니! 오늘은 웬 손님들이예요?》

영옥은 부엌으로 들어서면서 양푼에 약주를 데워 주전자에 따르고있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오늘 웬 일인지 아주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그전처럼 료리집은 못 가실망정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자기가 한잔을 내니 기분이 좋지 않으시겠니…》

어머니는 술주전자를 들고 방문앞으로 갔다.

사실 손종모는 이 빈민부락으로 옮겨온 이후부터 술을 흡족하게 마셔본적이 없었다.

그래도 공장을 운영할 때는 고리대금을 빌리기 위해서 또 외상을 받기 위해서 또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서 원료물자를 좀 싸게 사들이기 위해서 이놈저놈 교제해야 하는 바람에 거의 매일 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였다.

그러나 몰락을 당한 이후에는 선술집이나 대포집에서 화술이나 더러 마셨지 버젓한 료리집은 고사하고 상술집출입조차 하지 못했다.

손종모는 원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몰락한 지금에 와서도 술만은 끊을수 없었다.

술을 끊는것이 손종모에게는 생활상 큰 도움이 될줄 잘 알면서도 울분이 치솟아 견딜수 없어서 두루마기를 들추어입고 밖으로 휙 나가 술친구를 찾아다니는것이였다.

술친구도 자기처럼 몰락을 당하고 빈민부락으로 이사해온 사람이 아니면 감정이 통하지가 않아 교제가 드물어졌다.

그는 자기가 옮겨온 이 부락에서 네댓명의 술친구를 발견하였다.

그와 비슷하게 피복계통의 공장을 경영하다가 고리대금업자에게 경매차압처분을 당하여 시외로 떨어져나온 친구들가운데는 그전엔 안면만 있던 사이였지만 처지가 같아지면서부터 술친구가 된 사람도 있었다.

명월관, 천향원, 국일관 같은 자고로 유명한 일류료리집에는 자주 출입을 못했지만 그래도 을종료리집에서 기생을 데리고 놀던 환상은 때때로 그의 기억을 새롭게 했다.

공장경영의 파탄과 몰락은 곧 그의 생활의 파탄과 몰락을 가져왔고 그것이 곧 술자리의 몰락까지에 이르게 된것이였다.

료리집에서 상술집이나 내외주점으로, 거기서 다시 떨어져 대포집으로… 이렇게 점점 하강일로를 걸어온 그는 이제는 어쩔수없이 자기 집이나 친구집에서 술을 받아다 마시는 편이 창피하지도 않거니와 경제적이고 실속이 있다고 생각되였던것이다.

이런 심경은 손종모에게만 있는것은 아니였다.

오늘 밤 모여온 술친구들은 다 그러한 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였다.

손종모는 그동안 이 친구, 저 친구들에게 끌려 그들의 집에 가서 술빚을 졌기때문에 오늘 밤은 자기가 그들을 데리고 와 술빚을 갚기로 작정했던것이였다.

그들은 벌써 술에 만취되여있었다.

영옥은 외투를 벗어 부엌기둥에 걸고 저고리소매를 걷었다.

《넌 그럼 이 찌개를 좀더 데워라. 조금 있으면 또 찾으실라. 난 술을 좀더 사와야겠다.》

어머니는 술병을 들고 쩔뚝거리며 부엌에서 나가려 했다.

《어두운데 어머니가 어떻게 가신다구 그러세요. 내가 갔다오겠어요.》

영옥은 어머니에게서 병을 받으려 하였으나 어머니는 태연스럽게 《아니다, 네가 술집에 술 사러 가서야 되니…》 하고 쩔뚝거리며 지팽이를 찾아쥐고 밖으로 나갔다.

영옥은 남비에 끓여놓은 동태찌개를 다시 아궁이에 데우면서 방안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아니 글쎄, 이제는 우리가 바랄것은 한길밖에 더 있소? 이제 우리가 다시 공장을 하겠소? 그렇잖으면 무슨 미국놈 상사에 들어가서 서사노릇을 하겠소? 얼른 미국놈이 물러가고 평화통일이 돼야만 우리가 다시 산단 말야!》

《원, 조선사람 운명이란 기구하기 짝이 없지. 아, 글쎄 왜놈이 물러갔으면 독립이 돼야지 옳지, 이게 글쎄 12년동안이나 미국놈은 왜 안나가고 지랄이란 말이야. 그저 생각할수록 울분이 치솟는다니깐…》

《원, 그리게 말이야. 아니 조그마한 땅이 남북으로 갈라져 이게 원… 정전후 4~5년이 지나도록 이 녀석들은 해놓은게 뭐냐 말야! 대체… 평양에서는 4층, 5층 집들이 굉장하게 일어서고 새로 아파트거리가 다 생겼다구 허지 않아? 파괴되였던 흥남비료공장, 성진제강소, 황해제철소를 비롯해서 8천여개의 공장, 기업소가 복구되였다는데 이런 망할 자식들은 있던 공장두 모두다 문을 닫게 만드니 그래 이런 놈의 세상이 어디 있느냐 말야.》

《말해 뭘 하겠나. 우선 한가지만 보면 알지. 6. 28 새벽에 부산으로 뺑소니치면서 끊어놓고 간 한강철교를 아직두 제대루 수리를 하지 않고있는 녀석들허구 무슨 놈의 상대가 돼. 그동안 란장판속에서 공장을 경영해먹으려던 우리네가 어리석었지.》

《세상에 이런 일이 대체 어디 있느냐 말야.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단 말야. 한 나라, 한 민족이 두동강이 나가지고 서로 가두오두 못하는건 둘째쳐놓고 편지래왕조차 못하지 않느냐 말이야.》

손님들은 제각기 한마디씩 주고받았으나 손종모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덧 손종모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좌우간 멀지는 않았어. … 썩을대로 썩어문드러진 놈의 리승만정부가 그대로 지속되지는 못해! 미국놈들이 결국 물러가지 않고 견디여낼 재주야 없겠지! 남북조선 온 삼천리에서 규탄, 배격받는 녀석들이 버티면 얼마나 버티겠나…》

영옥은 아버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어머니! 아버지가 웬 일이세요? 저런 말씀을 다하시니…》

영옥은 술을 사가지고 들어와 양푼에 따르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게 다 우연한 일이겠니. 요새는 아버지가 점점 생각이 달라지신단다. 네 오래비를 그렇게 욕을 하시던 량반이 이제는 잠잠하시지 않니. 아까 낮에 만국이가 왔었는데 너의 아버지가 글쎄 만국이허구 한참동안이나 세상이야기를 하시더구나. 만국이가 이제 보니깐 례사로 볼 사람이 아니더라. 아무것도 모르는체 하면서두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횅하게 잘 알더구나.》

모녀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있을 동안에 손종모는 문을 열고 빈 주전자를 내보냈다.

그들은 얼마후에 일어나 나오기 시작했다.

몰락은 되였으나 그들은 오늘 웬 일인지 명랑한 얼굴로 롱담을 주고 받으면서 손종모를 이끌고 골목으로 사라지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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