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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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부락 문화동에서 왕십리쪽으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마치 무슨 창고 비슷하게 생긴 기다란 함석지붕건물 한채가 두드러져보이였다.

이 건물주위에도 궤짝집들과 함께 다 찌그러져 들어간 빈민들의 가옥이 꽉 들어차있었다.

이 건물정면에는 문화제면공장이란 간판이 붙어있었고 제법 넓어보이는 마당에는 넝마, 누더기, 헌솜뭉테기가 거름더미처럼 지저분하게 쌓여있었다.

공장건물안에서는 10여대가 넘는 솜틀기계가 요란한 소음과 함께 혼탁하고 불결한 솜먼지를 날리고있었다.

누더기뭉치와 넝마들을 새끼로 동여매여 목판에 짊어지고 들어오는 사람들, 손수레에 싣고 들어오는 사람들, 헌솜보퉁이를 이고 들어오는 녀자들… 마당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매상부앞에서 수매할 차례를 기다리고있었다.

책상이 다섯개 놓여있는 사무실안에는 한명의 녀사무원을 앉혀놓고는 모두 현장에 동원되였다.

넓지는 못하지만 텅 비여있는 사무실구석의 제일 끝 책상에 혼자앉아서 이따금 고개를 들어 유리창밖으로 마당을 내다보군 하면서 로동자들의 출근카드를 정리하고있는 녀사무원이 있었다.

그는 바로 이 공장에 취직해 들어온지 며칠 안되는 영옥이였다.

상업부기를 알지 못하는 영옥이지만 전직자가 하던 사무를 인계받아 원료매상전표를 장부에 기록하기도 했고 또 그날 로동자들의 출결근상태와 작업내용을 기록한 전표들을 정리하여 통계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것이 영옥이가 맡은 사무내용이였다.

이 공장으로 넝마와 누더기와 헌솜들을 팔러 오는 사람들속에는 대개 신당리, 왕십리 등의 빈민부락들과 또 광나루 뚝섬, 청량리방면 등농촌지대를 돌아다니는 엿장수, 물감장수, 양재물장수, 바늘장수, 비누장수들을 비롯한 넝마주이 남녀행상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영옥이가 사는 문화동 빈민부락의 녀자들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영옥이네 동아피복공장에 다니던 녀자들도 몇사람이 공장에서 일하고있었다.

그중에는 김만국이와 함께 밀린 임금을 받으러 왔던 녀자도 눈에 띄였다.

원료로 수매한 누더기며 넝마며 헌솜뭉치는 일단 로동자들의 손에 의하여 면직, 견직, 모직 등의 종류별로 선별되고 또 흑색, 백색, 홍색 등 색갈별로도 나뉘여졌다.

선별된 넝마들은 세탁부의 로동자들이 손수레에 담아싣고 왕십리 개천바닥으로 세탁을 하러 나갔다.

서울시내의 하수도오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왕십리 개천바닥으로 흘러내리였고 그 개천주변은 원래 일제시대에 서울시내 오물쓰레기와 똥거름을 실어내다버려 이루어진 땅아닌 땅이지만 지금은 그 거름더미우에 수만호의 소시민주택들과 빈민주택이며 방공호까지 그대로 들어앉아있었다.

개천바닥으로는 언제나 거무데데한 탁류가 흘러내리고있었고 썩은 냄새가 사람들의 이마살을 찡그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 불결하고 불쾌한 개천이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뿐만아니라 백오십만을 헤아리는 서울시민들에게 지금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처럼 되고말았다.

우선 수도시설이 지극히 좋지 않아 물구경하기가 어려운 시민들은 빨래를 이 개천에 와서 했고 남새도 여기에서 례사로이 씻어 먹었다.

더운 여름에는 아이들이 더러운줄도 모르고 이 개천바닥에 뛰여들어 썩어빠진 시궁창물에 목욕들을 했다.

뚝섬과 왕십리 남새장수들은 의례히 개천에서 남새를 씻어가지고 들어가야만 물귀한 시민들에게 팔릴줄 아는듯이 제철이면 장사짐이 개천바닥에 꼬리를 물고 오락가락했다.

기생충, 피부병, 눈병, 파상풍, 리질, 배앓이, 학질 등 허다한 전염병의 온상지인 이 오물개천에 대하여 당국은 아직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시해오고있는것이였다.

제면공장 세탁부 녀성로동자들은 더러운 개천인줄 알지만 어쩔수없이 여기 개천으로 넝마와 누더기와 헌솜들을 빨러 나왔다.

누더기와 넝마 등을 세탁하는것은 제면의 질을 높이기 위한것도 있지만 제면당시 작업장내에 날리는 불결한 먼지를 적게 하기 위한데도 목적이 있었다.

세탁이라고는 하지만 비누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흙먼지와 때국을 뽑는 정도면 그만이였다.

빈민부락의 녀자들은 이 제면공장의 작업이 불결한 일인줄 알면서도 그런 일자리나마 구하지 못해 애를 썼다.

세탁을 해서 말렸다고는 하나 때국과 먼지가 완전히 없어지지 못한 넝마에서는 여전히 불결한 먼지가 일면서 작업장내를 날았고 또 그것이 사무실에까지 날아들어왔다.

영옥은 때때로 자기 책상에 날아와앉는 솜먼지를 입으로 불기도 했고 물걸레로 닦기도 했다.

그는 어쩔수없이 취직은 했으나 자기가 맡은 사무가 자기 취미에 전혀 맞지도 않았고 따라서 손에 붙지도 않았다.

몇푼 안되는 월급을 타서 망해가는 집안에 다만 얼마라도 도움이 될가 하여 취직을 하긴 했으나 이런 불결한 유해직장에서 사무원노릇을 하는것보다는 차라리 집에서 김만국이처럼 봉투나 성냥갑을 붙이는 편이 낫지나 않을가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생각에 잠긴 영옥은 매일 명랑치 못한 표정으로 출근하였고 또 퇴근하여서도 침울한 표정으로 깊은 사색과 고민에 잠겼다.

제면공장에 나가서나 또는 집에 돌아와서나 그의 머리에 선뜻 떠오르는것은 마리야녀학교의 맹휴사건에 관련되여 구금되여있는 한선생과 오변호사며 기타 재학생들에 대한 걱정이였다. 또 홍선생과 자기 오빠의 행방을 알 길이 막연하여 안타깝기도 했다.

그는 어느날 퇴근을 하는 길로 지용세를 한번 더 만나서 소식을 알아볼가 하여 며칠전에 갔던 미술장치사 점포를 찾아갔다.

다행히 자물쇠는 채워있지 않았으나 지용세는 없고 어떤 젊은 녀성이 방에 앉아서 무슨 자수도본 같은것을 그리고있었다.

그는 바로 지은숙이였건만 영옥은 알리 없었다.

지용세는 은숙의 취직을 위하여 련일 맹렬한 활동을 하였으나 거의다 실패하고말았다.

은숙은 집에 처박혀 우두커니 있을수는 없었기때문에 우선 용세의 사무실에 나와 자기가 할수 있는껏 그의 사업을 협조하고 사무실도 지키면서 어디든 취직이 되기만 고대하고있는중이였다.

《저- 지선생님 어디 가셨어요?》

영옥은 은숙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였다.

《네, 어디서 오셨어요?》

《이 근방에서 왔어요. 그런데 곧 들어오실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왜 그러세요?》

은숙은 처녀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보였으므로 긴장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영옥은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막연히 기다릴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처음보는 젊은 녀성에게 자세한것을 물어볼수도 없고 하여 그대로 나와버리고싶었으나 혹시 알수 없어서 《저- 그런데 이 사에 남평선생이라고 계셨지요?》 하고 은근히 물었다.

은숙은 그것이 찬수의 변성명인줄은 몰랐다.

《남평씨요? 글쎄요, 나는 이 사 일을 잘 몰라요.》

은숙은 친절한 어조로 말했으나 영옥이에게는 그 말이 진정으로 들리지 않았다.

《왜? 저 별장에서 다리를 중상당하신 화가선생님 말씀이예요.》

《네? 그분이 남평씬가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은숙은 더욱 수상하게 생각되였다.

《그 선생님을 꼭 만나뵈여야 하겠기에…》

《그래요?》

은숙은 잠간동안 상대방의 모습을 다시한번 살피였다.

찬수의 소식을 알지 못해 안타까와하고 그를 만나지 못해 애타하는 태도를 봐서는 알려주고도싶었으나 그러나 다른 한편 주저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녀성이 어떤 녀성인지 그 정체를 알지 못하고 어찌 함부로 고향마을을 대주랴싶었던것이다.

더구나 고향마을에서 비오는 날 밤 헤여졌을뿐 지금까지 거의 십여일이 되도록 그 마을에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떠나오는 도중인지 혹시 도중에 무슨 사고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알수 없었으므로 은숙도 사실상 찬수의 소식이 궁금하였던것이다.

《글쎄요, 그 선생님이 아직 서울에 안 오셨나봐요.》

은숙은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영옥은 무슨 단서나 잡은듯이 바싹 다가들며 《아니 그럼, 그 선생님이 그동안 어디 가계셨는지 아세요?》 하고 파고들었다.

《어느 시골에 가계셨나봐요. 쉬 올라오신다나봐요. 꼭 만나실 필요가 계시거던 주소와 이름을 적어놓고 가세요.》

은숙은 상대방의 태도를 살피며 종이와 연필을 내주었다.

그러나 영옥은 얼른 쓸 생각은 하지 않고 망설이기만 하다가 《그럼 그저 말씀으로 전해주세요. 선생님 제자가 여러번 왔다갔다구만 해주세요. 그렇게만 말씀하면 아실거예요.》 하고 은숙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순간 은숙은 그 부탁이 도리여 걱정스럽게 생각되였다.

《글쎄요, 그렇지만 그렇게만 말씀하신다면 그 선생님 역시 얼른 아시기가 힘들잖을가요?》

영옥은 비록 처음 대하는 녀성이였으나 퍽 소박한 태도로 남의 일을 걱정해주는 이 녀성이 무척 고맙고 믿음직스럽게 생각되였으므로 선선히 《그럼 써드리겠어요!》 하고 대답하고 종이쪽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문화동 문화제면공장 사무실내 영옥.》

영옥은 종이쪽지를 주며 다시 부탁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이 종이쪽지를 사무실에 두시지는 마세요. 이 사무실이 종로에 있을 때처럼 또 어떤 일이 생길지 알수 없으니까요. 기억하시면 찢어버리셔도 좋아요.》

《네, 알겠어요. 그런건 념려마세요. 내 그 선생님 소식 아는대로 곧 이 주소로 련락해드리겠어요. 안심하세요.》

은숙은 상냥스럽게 웃으며 종이쪽지를 접어 자기 양복저고리 속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아이유, 그럼 너무나 페를 끼쳐 어떡해요.》

영옥은 그가 몹시 고마왔다. 그는 만족한 웃음을 띠우며 은숙이와 인사를 하고 헤여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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