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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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에서 왕십리로 뚫린 거리는 넓기는 하지만 그것이 큰 상업도로는 아니였다.

따라서 이 부근은 큰 간판을 붙인 상점이 별로 없었고 또 있다치더라도 구태여 미술장식까지 할만 한 경기좋은 상점들은 보이지 않았다.

비록 뒤골목이였지만 그래도 서울의 도심지대로서 형형색색의 잡동사니들이 많이 모여드는 종로 네거리 종각뒤에 사무실을 내왔을 때는 주문주도 적지 않았고 교통이 좋고 전화까지 있어서 편리하게 영업을 하던 현대미술장치사였다.

그러나 박춘식의 별장벽화를 맡아서 그리다가 스틸맨의 만행사건이 벌어진 이후 애매하게도 미움을 받아 영업허가를 취소당하게 되고 경찰과 미군이 들랑거리는 바람에 점포주인이 영업도구까지 들어내며 퇴거령을 내리였기때문에 어쩔수없이 도심지대와 떨어진 변두리로 옮겨오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던것이다.

지용세가 경찰에 구금당했다가 석방이 되여나왔을 때 최강이를 비롯한 어린 화공 몇몇은 모두 겁을 집어먹고 어디로엔지 흩어져가고 오직 남아있는 사람이란 용세보다 먼저 석방된 윤산이와 또 어린 화공 한명밖에 없었다.

지용세는 그들과 다시 론의하고 영업도구를 신당리로 옮기기는 했으나 영업허가를 취소당한 이상 간판을 걸수는 없었다.

영업허가를 다시 신청하자면 등록비와 사교비와 《꾹돈》 등 무려 수십만환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것을 알고있기때문에 그는 숫제 허가신청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나머지 재료인 뼁끼와 채색이 없어질 때까지 궁여지책으로 이 근방과 또는 가까운 지방으로 다니면서 뜨내기로 이동영업을 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용세는 자기의 영업처지가 갑자기 이렇게 몰락하게 된 원인을 모르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박춘식의 별장벽화를 무조건적으로 주문받았기때문에 생긴것으로서 홍찬수에게 예술적감흥이 없는 벽화작업을 강요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되였다.

중상을 입은 찬수가 병원에서 치료를 더 받지도 못하고 강제퇴원을 당했다는것을 안 지용세는 그가 하숙에서도 짐을 맡긴채 어디로 사라진것을 발견했을 때 놀랐었다. 정녕코 그가 고향마을에 내려간것만 같아 은숙이에게 편지를 했으나 아직 아무런 소식이 오지 않아 찬수의 행방을 명확히 알수 없어 초조했다.

혹시 찬수가 하숙에서 나와 어디로 가려다가 도중에서 체포라도 당하지나 않았나 생각되자 그는 새삼스럽게 불안스럽고 그 허물이 자기에게 있는것만 같아 괴롭기 그지없었다.

혹시 찬수가 퇴원이후 체포를 피하여 하숙을 다른데로 옮겼다면 새 주소를 알려줌직한 일이지만 이제는 이곳으로 영업장소까지 옮겨왔으니 설사 그가 자기 소식을 전하고싶더라도 전할 길이 막연하지 않는가?

지용세는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 이렇게 늘 찬수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마음이 가볍지 못했다.

어느날 저녁때 지용세는 어린 화공과 단 둘이서 남아있는 뼁끼재료와 채색감들을 다시 정리하고있었다.

점포라야 세평방쯤 되는 좁은 곳이였고 거기 조그마한 방이 하나 붙어있었다.

조그마한 방은 어린 화공의 침실 겸 숙직실로서 낮에는 사무실로도 썼다.

책상도 다 들여놓지 못하여 점포벽에 붙여 그대로 쌓아놓았고 방에는 지용세의 책상과 의자 두어개만 들여놓은 상태였다.

찌그덕거리기만 하고 잘 열려지지 않는 점포의 유리창문을 겨우 열면서 어떤 낯선 젊은 녀성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확실히 20살이 넘어보였으나 학생인지 또는 직업녀성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가정주부인지 얼른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검정외투를 입고있었는데 외투밑으로는 수수한 람빛치마가 보이였고 흰고무신을 신고있었다.

눈이며 코날이며 아래턱이며 살결이며 모두가 예쁘고 귀여워보이고 또 령리해보이는 얼굴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가벼운 고민과 애상에 잠긴듯 한 표정으로 보아 그는 학생은 아닌것 같았다.

그는 어느덧 자기의 외투를 벗어 팔에 걸고 지용세를 마주 바라보면서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저- 말씀 좀 묻겠어요. 종로에 있던 미술장치사가 이리루 옮겨오셨어요?》 하고 가만히 물었다.

《네, 왜 그러십니까?》

지용세는 젊은 녀성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혹시 윤산이나 최강이가 어디서 외상을 지고 미술장치사로 떠넘겼기때문에 그것을 채근하려고 온 녀성이나 아닌지? 그러나 이 녀성은 옷차림새나 언어, 행동, 태도로 보아 고상한 품위와 교양을 갖춘듯싶었고 결코 그런 류의 외상값을 받으러 온 녀성은 아닐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이 녀성은 대체 웬 사람이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온것인가?

지용세는 은근히 의심스러운 생각과 함께 호기심이 나서 젊은 녀성의 동정을 유심히 살피였다.

《저- 선생님이 지용세선생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네. 다름아니라 잠간 조용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뵈러 왔는데요. …》

《내게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좌우간 이리 들어오십시오.》

지용세는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나 의자 하나를 자기 책상곁으로 옮겨놓고 그에게 앉기를 권했다.

젊은 녀성은 두어번 사양하다가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다름아니라 이 장치사에 남평선생님이 계세요?》

《네, 계셨습니다.》

《지금 어디 계신지 좀 가르쳐주실수 없을가요?》

《글쎄요. … 그건 사실은 나두 잘 모릅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남평선생님을 잘 아십니까?》

《네, 저의 선생님이세요.》

《네, 그렇습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이 집 찾기가 매우 힘드셨을텐데…》

《사실은 이리로 옮겨오시기 전엔 종로 종각뒤 그 사무실로 여러번 찾아갔었어요. 그러나 늘 문이 잠겨서 헛걸음만 했어요. 그 선생님이 입원하셨단 말씀을 듣고 찾아갔으나 벌써 퇴원하신 뒤였어요.》

그는 어느덧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럼 그동안 남평선생을 만나뵈려구 매우 고생하셨습니다그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아시구 오셨습니까?》

《사실은 꽤 힘들었어요. 종각뒤에 있는 손수레군들을 붙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봤어요. 다 모른다고 해서 단념했었는데 어떤 령감님이 자기가 짐을 실어날랐다구 하면서 자세히 알려주었어요.》

그는 방그레 웃으며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거, 매우 영특하신 방법으로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잘 찾아오셨는데 정말 남평선생을 만날 길은 막연한데요.》

지용세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사실상 찬수의 행방에 대하여 아직까지는 막연하기때문이였다.

《혹시 고향에 내려가시지나 않으셨을가요?》

《글쎄요. 다소 그런것 같기두 합니다만…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중상을 당한 다리를 가지고 내려간다는것도 힘든 일이고…》

《혹시 고향이 어디신지 선생님께서 아시면 가르쳐주실수 없을가요?》

지용세는 이 순간 정신을 번쩍 차렸다.

고향마을을 가르쳐줄수는 있으나 누가 세상일을 알수 있을것인가?

정말로 찬수가 내려갔는지 똑똑히 알지도 못하는 형편에 그의 고향주소를 정체모르는 녀성에게 알려줄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글쎄요. 그건 나두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꼭 그 선생님을 만나셔야 할 일이 있으면 여기에다 주소와 이름을 적어놓고 가시든지 하십쇼. 만일 앞으로 그 선생님의 소식을 알게 될 때 통지해드릴테니…》

지용세는 이렇게 하는편이 가장 무난한 방법 같았다.

그러나 젊은 녀성은 자기 주소와 이름을 적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잠간동안 머뭇머뭇하다가 《그럼 제가 다시 또 와뵙겠어요. … 너무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지용세는 구태여 주소와 이름을 적어둘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되여 《그럼, 또 이 다음에 한번 와보십쇼.》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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