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의 고향

10

 

죽촌리마을사람들은 주먹밥을 꾸려 싸들고 비를 막기 위하여 가마니짝들을 머리에 쓰고 읍으로 통한 고개길로 올라갔다.

찬수는 그 사람들 틈에 끼여 자기도 따라가보고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어났으나 상처가 다시 쑤시기 시작하였을뿐아니라 쌍지팽이를 짚고 쩔뚝거리는 걸음으로서는 도저히 그들을 따라 20여리나 되는 길을 갈것 같지 못했다.

그는 멍하니 서서 비를 맞으며 고개를 넘어가는 마을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아쉬운 감정을 걷잡지 못한채 하는수없이 병원으로 돌아와버렸다.

그는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자기가 다리병신이 된것이 억울하고 분하기 짝이 없었다.

숙직실로 들어온 그는 격동된 마음을 가라앉힐수 없어 속사첩을 꺼내 금방 목격하고 온 마을사람들의 형상을 속사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비줄기소리는 더욱 스산하게 들리였고 때때로 요란스런 뢰성까지 울려퍼졌다.

찬수의 귀에는 그 뢰성이 격분에 차오른 농민들의 함성과도 같이 들려왔다.

- 빼앗아간 쌀을 내라!

- 일자리를 내라!

- 이대루는 살수 없다!

- 미군은 물러가라!

찬수의 귀에는 또다시 농민들의 아우성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소스라쳐 놀라며 속사첩을 덮어놓고 벌떡 일어나 다시 숙직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쌍지팽이를 짚고 진찰실을 나가 문을 활짝 열어제끼였다.

비소리는 더 요란하고 찬바람이 홱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결심한듯 두주먹을 힘껏 틀어쥐고 상처의 아픔조차 잊어버린채 자기의 귀에 들려오는 아우성소리를 찾아 달려가고싶었다.

그는 선뜻 마당으로 내려섰다.

이때 찬수의 앞에서 누구인가 병원을 향하여 우산을 들고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너 어디 가니? 비를 맞구… 어서 병원에 좀 들어가자. 급히 할 말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홍인제였다.

《지금 읍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음.》

찬수는 홍인제를 따라 다시 병원으로 들어오고말았다.

홍인제는 랑패한 표정으로 찬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리군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니?》

《아니, 리군을 혹 만나셨습니까?》

《음, 지금 오다가 봤다. 난 처음 그 사람을 쓸 때에 어느 정도 짐작은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저것 가리다가는 똑똑한 사람을 구할수 없어서 모르는체 하고 채용했더니만 결국은…》

홍인제는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계속 말했다.

《그저 온전하게 병원일이나 볼 일이지, 이건 밤마다 왕진갑네 하고 이 마을, 저 마을 샅샅이 다니면서 농민들을 모아놓고 부채질을 했단 말야! 허허허…》

홍인제는 두덜거리며 서글프게 웃었다.

찬수는 잠간동안 잠잠히 있다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 그건 그렇게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농민들이 혹시 세상형편 같은것을 물었겠죠. 그 질문에 대해서 량심을 가진 사람이면 어찌 거짓말이야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농민들을 선동해서 사건이 일어나게 만들어놓았으니 말이지. 이 조그마한 병원 하나두 이제는 못해먹게 됐다. 도청으로, 군청으로 왔다갔다허면서 이놈저놈 교제해가지고 겨우 약품 구해다가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해오는 이 판에… 이제 봐라 리군때문에 당장 병원이 습격받지 않나.》

《아저씨, 어찌 그렇게만 생각하세요. 지금 농민들 처지로 봐서 누가 선동해야만 일어나게 됐나요? 자연히 저절로 일어나게 되잖았어요.》

《아니다. 모르는 소리말아! 리군이 여간내기가 아니였더구나.》

홍인제는 이렇게 말을 하고나서 다시 《오늘 군에 갔다가 오는 길에 면에 들렸더니 마침 경찰서 형사 두 녀석이 나를 만나려고 나온다구 하더라. 그놈들이 리군을 체포하려고 나오던 길이였더구나. 그래 어찌 그놈들을 그대로 내버려둘수 있더냐. 두놈을 다 술집에 데리구 가 곤드레만드레가 되도록 처먹여서 저네 집으로 돌려보내고 오긴 했지만 암만해두 그 녀석들이 아니면 딴 녀석이라두 래일에는 들이닥칠게다. …》 하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찬수는 5촌의 말이 사실 같기도 했으므로 자기 역시 불안스럽고 걱정스러웠다.

《너두 이 숙직실에 이대루 있어서는 안된다. 그저 치료나 받구 가만히 누웠으면 몰라두 밤마다 마을로 들랑거리며 이러니저러니 농민들과 맞장구친 사실을 그놈들이 혹시 안다면 널 가만 놔두겠니? 래일 식전 일찍 집으로 옮겨라. 그래서 며칠 더 치료를 해가지고 어서 이 마을을 떠나거라. 만일 이곳에서 형사놈들에게 무슨 꼬투리라도 잡히면 집행유예가 취소된다는걸 알아야 헌다. 그래 네 행장가운데는 뭐 께끄름한거나 없냐?》

홍인제는 불안스럽게 찬수를 바라보았다.

《너무 념려마십시오. 그리구 리군때문에도 그렇게 겁내시지 마세요.》

찬수는 먼저 이렇게 안심시키고난 뒤에 잠간 쉬였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아저씨는 그동안 리군때문에 이 병원의 위신이 올라갔다는것을 아셔야 해요. 리군은 아저씨에게 둘도 없는 방조자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이 부근 농어촌의 인민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인물인줄 압니다. 리군의 신변에 혹시 위험이 닥치거든 아저씨는 적극적으로 보호해주십시오.》

찬수의 어조는 침착했다.

홍인제는 찬수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있었다.

《리군이 나쁜 사람이라구는 생각지 않는다. 이런 조그마한 농촌진료기관에서는 너무나 지나친 인재다. 의학적실력으로 보나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는것으로 보나 또 물욕이 없는것으로 보나 내가 놓치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내 병원경영만을 위해서는 필요치 않은 점도 있었다. 솔직히 네게 말하지만 나는 무슨 자선사업을 위해서 이 병원을 연것은 아니다. 리군이 온 뒤로는 이 사람이 너무도 병원경리에는 무관심하고 무료진료, 외상진료가 대단히 많았다. 그러므로 사실은 내게 경제적타격이 없지도 않다. 그 야간왕진만 자발적으로 다니지 않았어두 타격이 적었을것이구 또 지금 와서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게다.》

홍인제는 젊은 의사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다.

《아저씨! 너무 코앞의 리익만 생각하시지 마세요. 아저씨는 자선사업을 하려고 한것이 아니라 하시지만 <의술은 인술이다.>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선사업두 하셔야 합니다. 무료진료, 외상진료가 태반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원이 경영을 못해나가도록 분수없는짓은 안했을겝니다.》

《그건 네 말이 옳다. 경영난에 빠지도록 하지는 않았지만…》

《아저씨, 리군이 앞으로 병원에 다시 못 오게 되는 경우 딴 사람을 두시더라도 지금까지 해오던 야간자진왕진을 계속하셔야 합니다. 아저씨의 이 사업은 농민들을 위한 사업이 되여야 합니다. …》

찬수는 홍인제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찬수의 그 말에는 찬성할수 없다는듯이 아무런 대꾸도 없더니 벌떡 일어나 약장속과 진찰실안을 두루두루 살펴보고나서 《자! 어서 자거라. 불을 끄고…》 하고는 다시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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