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의 고향

9

 

비바람은 여전히 사납게 휘몰아쳤다. 때때로 눈발이 섞여 진눈까비로 변하기도 했다.

인제의원이 있는 죽촌리에서 10리쯤 떨어진 신작로건너 남산리 박서방네 사랑방에는 침침한 석유등잔불을 가운데 놓고 마을사람들이 빽빽하게 둘러앉아있었다.

겨울이건만 솜옷을 입지 못하고 다 해진 홑껍데기를 입은 농민이 반수가 넘었고 나머지는 누덕누덕 기운 겹옷을 입은 사람들이였다.

이 마을 사람들도 송림리나 죽촌리사람들처럼 영양실조에 걸려 해쓱하게 마르지 않았으면 얼굴이 시누렇게 부황이 났다.

벌써 모여앉은지 제법 오랬는지 이발빠진 재털이에는 신문지쪽으로 말아피운 담배꽁초가 거의 절반나마 쌓여있었고 담배연기는 방안에 자욱하였다.

《에… 이번에는 내가 한마디 하지라오. 아, 글쎄 우리 마을 80호중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벌써 몇사람인게라우. 농사지어 추수한지 두어달두 못되여 벌써 량식이 떨어져 굶어죽는다니 참말루 기가 막힐 일이 아닌게라우. 오첨지, 백서방, 용이 할머니, 만순이네… 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능게라우. 우서방은 빚에 쫄리다 못해 목매달아죽고… 이러다가는 우리 마을사람 성하게 겨울 날 사람 있겠능게라우? 게다가 왼통 온 마을이 병투성이구… 이런 놈의 세상에서 어디 살아갈 재미가 있능게라우.》

30살가량 되여보이는 한 농민이 이렇게 말하고 잠간 숨을 돌리자 《흥… 이 사람아, 그것뿐인가? 남순이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첫국밥을 끓일것이 없어 사흘이나 굶은것을 이제야 겨우 동네에서 쌀 두되를 긁어모아주었당깨.》 하고 다른 농민이 거들었다.

《아니, 그것두 그거지만 어디 애들 학교 보내겠능게라우. 오늘두 글쎄 여러 끼니 굶고 핵꼰지 뭔지 가더니만 애들이 모두 울며불며 쫓겨오지 않던게라우. 월사금 못 냈다구 공부 안 시키고 쫓아내니 헐수없이 쫓겨올밖에… 그까짓 놈의 핵교 우리헌테 아무 소용두 없당깨.》

《젠장맞을것, 여보게들, 이놈의 세상이 갈수록 험산이라구… 왜놈때보다 한술 더 뜬다니깨. 오늘 그 빌어먹을 놈의것 그대루 내버려둘걸 공연히 출생신곤지 뭔지 하려고 면소에 갔다가 젊은 면서기놈에게 뺨을 다 맞았당깨. 시간이 늦었다구 안 받을라구 하기에 15리나 되는데서 왔는데 좀 받아달라고 사정했더니만 그만 화를 발끈 내더니 래일 오라면 래일 오지 무슨 잔말이냐구 하면서 그 자식이 뺨을 갈기더랑깨. 아, 글쎄 왜놈때두 그런 압제와 천대를 받은것이 분했는데 그렇게 일평생을 살아나간다면 차라리 우서방처럼 일찌감치 목매달아 죽는게 낫당깨.》

수염이 시꺼멓게 난 중년농민 하나가 울분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뭐, 그런 이야기 하려면 한이 있능게라우. 우리 하루바삐 그런 압제와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배불리 먹고 잘살수 있는 세상 맨들기 위해서 싸우는수밖에 없지라우.》

빼빼 마른 중년농민 하나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때 밖에서 기침소리가 나며 허리가 구부러진 70살도 넘어보이는 로인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기침을 몹시 하면서 아래목쪽으로 내려앉았다. 로인은 방안을 한번 휙 둘러보더니 《자네들, 오늘 송림리, 용바위마을사람들이 읍내로 밀려들어갔단 말 들었는가?》 하고 말문을 열었다.

《아, 듣기뿐이겠능게라우. 여태까지 우리두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하고난 길이라우.》

한 농민이 대표로 말했다.

《암! 어떻게 해야지, 우리 마을이라구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나?》

로인은 이렇게 모인 농민들을 격려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이렇게 모여앉아있으니까 옛날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나네. 가만있자, 자네들가운데서는 그때 일을 알만 한 사람은 영식이허구 석근이가 있구는 다들 코흘리는 어린애들이였지. … 그때 이야기를 할테니 좀 들어보게. 그때 우리 남산리마을은 100호가 훨씬 넘었는데 모두다 왜놈 동척회사 소작인노릇을 하지 않았던가! 아, 이놈들이 글쎄 해마다 추수마당에 와서 있는대로 박박 긁어가더란 말일세. 지금이 그때나 꼭 마찬가지야. 아니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지! 그때 말일세… 우리들 젊은 농민들이 분통이 터져 어디 살겠던가! 아, 그래서 기왕 굶어죽기는 매일반이니 한번 싸워나보구 죽자구 나서지 않았던가. 그때 동척회사앞으로 몰려간게 우리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였어. 그래 그 이듬해는 소작료를 훨씬 적게 물었다네. 힘이란게 모이면 무서운거야!》

로인은 겨우 말을 마치고나서 기침을 깇었다.

《제기럴것, 그저 화나는대루 하면 당장…》

한 농민이 불쑥 나섰다.

《우리두 이렇게 앉아서 공론만 하고있을게 아니랑깨. 송림리, 용바위사람들처럼 용감하게 밀려들어가야 헌당깨.》

이때였다. 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나더니 비에 젖은 젊은 의사가 들어왔다.

《아, 리선생 오시는게라우. 오늘은 비가 와서 안 오실줄 알았지라우.》

《어서 이리 아래목으로 내려와 앉으라우!》

농민들은 비를 맞고 온 젊은 의사를 반가이 맞이해주었다.

《좋습니다. 아, 그런데 할아버지가 다 나오셨습니까? 기침이 좀 어떠세요?》

젊은 의사는 로인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글쎄, 그놈의 기침이 좀처럼 낫지 않는구려.》

로인은 연방 기침을 깇었다.

젊은 의사는 가방을 열고 약봉지 하나를 꺼내여 로인에게 주었다.

《이 약을 더 잡수세요. 바람을 쏘이지 마셔야겠는데요.》

《원, 올 때마다 이렇게 약을 갖다주니 고맙기는 하오마는 렴치가 없소. 그저 늙으면 일쯕 죽어야지.》

《원,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오래 사셔서 좋은 세상을 보셔야죠.》

젊은 의사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글쎄말이요. 그런 희망이라두 가지니깨 살지.》

로인도 환하게 웃었다.

젊은 의사는 방안에 모인 사람들을 쭉 한번 둘러보면서 《마을의 환자들은 그뒤 어떻습니까?》 하고 궁금한듯이 물었다.

《리선생 덕분으로 더 앓지는 않지라우.》

한 농민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젊은 의사는 가방에서 다시 몇가지 약봉지와 약병들을 꺼내여놓았다. 약봉지우에는 이름이 씌여있었다.

《이 약은 요전 그 산모에게 주십시오. 또 이 약은 배앓이하는 할머니거구 또 이것은 귀앓는 어린아이거구…》

농민들은 젊은 의사가 나누어준 봉지약과 물약들을 받아들었다.

젊은 의사는 다시한번 방안을 휙 돌아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께 잠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당분간 이 마을에 왕진을 못 올것 같습니다. 환자가 생기시거든 제가 오기를 기다릴것이 아니라 지체마시구 바루 데리구들 가셔서 원장어른께 보이십시오!》

《아니, 그럼 선생님은 병원을 그만두고 어디 가시는게라우?》

《큰일났네. 병자는 날마다 생기는데 선생님이 어디루 가신다니…》

《출장을 가시는게라우?》

《네.》

젊은 의사는 이렇게 대답할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게라우?》

《한 열흘 되겠능게라우?》

《어쨌든 일쯕 돌아오시라우.》

농민들은 서로 서운한 표정들을 지으며 젊은 의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되도록 일찍 돌아오겠습니다.》

젊은 의사는 태연스럽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몹시 쓰리고 아팠다.

그는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하며 방안에 모인 농민들을 쭉 다시한번 바라보면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구 한가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싶은것은 혹시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송림리와 용바위에서 농민들이 오늘 군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든간에 여러분들도 군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죽촌리에서는 주먹밥을 만들어가지고 오늘 밤 마을사람들이 군에 들어간다 합니다. 송림리나 용바위마을사람들은 자기들이 뜻한대로 빼앗겼던 량곡을 돌려받지 않고서는 물러나 돌아오지 않을것입니다. …》

젊은 의사의 말소리는 어느덧 고조되였다. 그는 어디 또 가야 할데가 있다는듯이 선뜻 손목시계를 굽어봤다. 벌써 열시가 넘었다.

《자, 그럼 전 가봐야겠습니다. 그리구 오늘 일어난 사건이 끝날 때까지는 이렇게 이 사랑방에 너무 많이들 모이지는 마십쇼. 여기저기 나누어 모이십시오!》

젊은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농민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 그건 념려마시라우.》

농민 하나가 대표로 말했다. 그들은 젊은 의사가 자기들과 작별을 하고 비를 맞으며 어두운 밤길을 걸어나가는 뒤모양을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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