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의 고향

8

 

어느날 오후였다. 젊은 의사는 여전히 이날도 왕진가방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고 홍인제는 아침에 읍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고요해진 병원안에는 찬수만 혼자 남아 숙직실에 누워있었다.

찬수는 그동안 밤이면 마을로 드나들었을뿐아니라 또 2~3일전에는 이 마을에서 약 20리나 멀리 떨어져있는 정돌이의 고향마을을 찾아가서 가족을 만나 그의 소식을 전하고 그곳에서 붙잡는 바람에 하루를 쉬고 오늘에야 돌아오는 길이였다.

사실 상처의 통증이 아직도 멎지 않았건만 형무소에서 같이 고생하던 정돌이를 생각하면 그대로 누워있을수 없어서 그의 마을을 찾아갔던것이였다. 그렇게 왕복 40여리 길을 쌍지팽이로 쩔뚝거리며 걷고나니 다시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하였고 신열이 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정돌이의 가족들이며 그와 함께 불복상고하고나선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형무소에 갇혀있는 수감자들이 아예 딴 사람들이 되여 씩씩하게 잘 싸우고있다는 소식을 전했고 또 그가 가지고 간 속사첩에서 정돌이의 얼굴모습을 보면서 모두 기뻐하며 찬수를 반가이 대해주던것을 생각하면 상처가 아픈것도 어느덧 잊혀지는것이였다.

그는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속사첩을 번지며 정돌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홍선생, 정말 고맙당깨. 다리가 아픈데두 어떻게 갔다왔능게라우?》

텁석부리 정돌이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는것만 같았다.

《아니요, 도루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가 출옥한 뒤 여태까지 아무것도 차입 못해드렸으니…》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지금쯤은 그들이 추위에 무척 고생할것을 걱정했다.

그는 다시 새 장을 번지고 머리에 떠오르는 화상을 속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정돌이와 차동무가 추위를 이기려고 랭수마찰을 하고있는 감방안의 풍경을 그리려는것이였다.

그가 그림을 채 끝내지 못했을무렵이였다.

갑자기 밖에서 바쁜 발자국소리가 들려오더니 숙직실문을 열고 어떤 농민 한사람이 헐레벌떡거리며 들어섰다.

그리고는 《리선생님 안 계신게라우?》 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왕진가신것 같습니다.》

《아, 이거 큰일났네. 들어오시거든 산밑 마을로 곧 좀 오시라구 말씀 좀 전해주시겠능게라우?》

농민은 찬수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였다.

《네, 산밑 마을로요? 무슨 급한 환자가 생겼습니까?》

《아니라우, 그저 그렇게만 전하면 좋아라우.》

젊은 농민은 다시 무슨 말을 할듯말듯 하더니 이윽고 용기를 내여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신지 모르지만 리선생님허구 친하신게라우?》

젊은 농민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은근히 물었다.

《네, 왜 그러십니까?》

찬수는 갑자기 긴장되였다.

《… 다른게 아니라우, 리선생님이 만일 산밑 마을에 못 오실 형편이면 이 병원에 계시지 말고 어디로 얼른 피해가시라구 말씀해주시라우.》

《네? 어디루 피해가시라구요?》

찬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그저 그렇게만 꼭 전해주시면 되라우.》

젊은 농민은 더 자세한 말을 하지 않고 바쁜듯이 휙 나가버리였다.

찬수는 그대로 숙직실에 있을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 병원문밖을 나섰다.

암만해도 젊은 의사 리준호의 신변이 위험한것만 같아 찬수는 실로 불안스럽고 걱정이 되였다.

날씨는 금방 비나 눈이 쏟아질것처럼 음산하고 침울하였다.

리선생이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초조한 마음이 찬수로 하여금 건너다보이는 마을의 골목길을 유심히 보게 하였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사람들이 심상치 않은 걸음걸이로 바삐 오가고있었다.

비설겆이를 하는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혹시 리선생이 가까운 이 마을에라도 왕진을 오지나 않았을가싶은 마음에서 그는 마을골목을 향하여 걸어갔다.

얼른 그를 찾아서 급한 소식을 전해주고싶었기때문이였다.

이집저집 마당에 벼낟가리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짚북데기속에서 벼이삭을 골라내는 로파들이며 아낙네들의 모습이 눈에 띄였다.

《아니, 여보소들! 그깐 놈의 북데기 만날 또 털고털고 하면 뭐가 또 나오겠능게라우. 집어치구 어서 주먹밥들이나 마련하시라우.》

어떤 중년농민 하나가 울타리너머로 고함을 치고는 바삐 사라져버리였다.

《어디 주먹밥 헐 쌀이 있간디?》

《보리개떡이라두 찌랑깨.》

로파와 젊은 아낙네가 주고받는 말이였다.

《에이 귀찮은 놈의 세상! 이놈의 세상이 언제나 망해?》

로파는 한숨을 후우- 하고 내쉬며 북데기를 툴툴 털고 일어나 나락모가지가 한줌쯤 담긴 바가지를 들고 절구통곁으로 옮겨갔다.

추수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량식은 다 빼앗기고 북데기를 털어 끼니를 이으려는 서글프고 괴로운 로파의 얼굴표정에는 미제와 리승만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찬수는 골목길에서 상설이를 만났다.

그는 바삐 어디로 가고있었다.

《여보게 상설이, 우리 병원 리선생 이 마을에 왕진오지 않았는가?》

《글쎄, 온것 같지 않아. 어제 저녁때 왔다갔는데 뭐. 왜 그러는가?》

상설은 이상한 표정을 하며 묻는다.

《응, 좀 만날 일이 있어서…》

찬수의 얼굴에는 초조한 표정이 넘치고있었다.

《그런데 홍군, 소식 들었나?》

상설은 가만히 찬수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무슨?》

찬수는 긴장되여 다시 상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지금 소동이 일어났다네. 군으로 농민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어간 모양이야. 량식 빼앗기고 그저 가만히 앉아 죽을수야 있는가? 악이 차면 못하는 일이 없느니… 우리 마을두 가만히 있을수는 없어.》

상설은 흥분되여 말했다. 그리고는 《자넨 너무 나돌지 말게. 푹 좀 누워서 치료를 받아야지. 어디 그렇게 자꾸 다니면 상처가 낫겠나?》 하고 걱정스럽게 찬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부디 일 잘하게. 나두 도와줍세.》

《음, 그래! 오늘 밤에 다시 만나세.》

상설은 바쁜듯이 저쪽으로 사라져갔다.

찌프렸던 하늘에서는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찬수는 어쩔수없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비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때때로 천둥소리도 났다.

아무도 없는 병원 숙직실에서 찬수는 리선생이 빨리 오기만 기다리고있었다.

이윽고 얼마후에 젊은 의사가 돌아왔다. 그는 비에 후줄근하게 젖은 위생복을 벗고 숙직실로 들어왔다.

찬수는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산밑 마을 젊은 농민 하나 만나시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여기 언제 왔다갔습니까?》

그는 태연스럽게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도, 불안스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

찬수는 이 젊은 의사가 아직 소식을 모르는것이 아닌가싶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선생, 어디로 얼른 떠나십시오. 그 농민이 와서 말을 전하고 갔습니다.》

《뭐, 상관없습니다. 념려마십시오.》

그는 여전히 태연하였다.

이때 밖에서 급한 발자국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윽고 중년농민 하나가 숙직실문을 열더니 눈짓을 하고 리선생을 불러내갔다.

찬수는 더욱 긴장되였다.

진찰실에서 주고받는 그들의 이야기가 찬수의 귀에 어렴풋이 들려왔다.

《선생님, 어서 피신하시라우. 오늘안으로 어디루든지 멀리 떠나시라우. 반드시 그놈들이 선생을 잡으러 올게라우.》

농민의 초조한 목소리였다.

《뭐, 너무들 념려마세요.》

젊은 의사는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아니라우, 어서 가시지라우. 마을사람들이 모두 선생님을 피신시켜야 한다구 그러는데라우.》

농민의 말소리는 더욱 간곡히 들렸다.

《자, 그럼 먼저 가세요. 내 곧 갈테니.》

젊은 의사는 농민을 먼저 돌려보내고 숙직실로 들어왔다.

그는 별로 허둥대는 기색도 없이 자기 책상우와 서랍속을 대강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찰가방을 열고 벽에 걸린 자기 수건과 샤쯔며 또 약장속에서 몇가지 약품들을 꺼내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깜박 잊었다는듯이 자기 양복바지 주머니속에서 조그마한 병을 꺼냈다. 그것은 틀림없는 술이였다. 술에 젖은 종이병마개에서 알콜냄새가 풍기였다.

그는 책상속에서 유리고뿌 두개를 꺼내여 술을 따랐다.

《자, 홍선생. 오늘 우리 한잔 합시다.》

그는 찬수에게 술을 권하고 자기도 들었다.

찬수는 심각한 표정을 하며 술잔을 들었다.

《홍선생, 미안합니다. 드디여 홍선생과 헤여져야 할 때가 왔나봅니다. 선생의 상처를 완전히 치료해드리지 못하고 떠나게 되니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완쾌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약과 붕대를 따로 드릴테니 홍선생이 직접 치료하십시오. 자, 어서 마십시다.》

그는 심각한 어조로 말을 하며 술을 먼저 마시였다. 찬수도 같이 마시였다.

찬수의 얼굴에는 갑자기 침통한 빛이 어리여있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오히려 내가 미안합니다. 너무 리선생께 페를 끼쳐서…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게 되니 서운한 마음을 걷잡을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비장한 표정으로 찬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홍선생, 이 방에 계시지 마시고 오늘 곧 원장어른댁으로라도 우선 옮겨가십시오. 지금 여러 마을에서 절량농민들의 시위대렬이 군으로 몰려가고있는 판입니다. 경찰놈들이 나를 주목하고 이곳으로 습격올 위험성이 있습니다.》

잠간 말을 끊고 자기 손목시계를 힐끔 들여다보던 그는 《홍선생도 이 마을에 너무 오래 계시지 마십시오. 웬만하면 하루라도 속히 떠나시는게 좋을줄 압니다. 나는 홍선생의 최근의 경력을 대강 짐작하고있습니다. 고향마을에 내려오셔서 농민들과의 접촉을 가지신것은 좋은 일입니다. 나는 농민들이 선생으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다는것도 대강 짐작하고있습니다. 농민들은 선생의 그림을 좋아하고 선생을 지지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우선 상처를 고치는데 주력해야 합니다.…》라고 당부했다.

찬수는 가슴이 섬뜩해지고 긴장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구 홍선생께 또 한가지 말씀드립니다. 서울에 가시거든 좋은 그림 많이 그리시구 또 선생의 스케치에 모델이 된 그 녀학생을 잘 지도해주십시오. …》

찬수는 이 순간 깜짝 놀라며 머리끝이 찌르르해졌다.

이 젊은 의사가 과연 자기가 짐작했던대로 영준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소리를 할수 있을가싶었기때문이였다.

찬수는 자기의 예감이 들어맞은 쾌감보다도 그와 이 순간에 작별하게 된 현실적환경이 몹시 안타깝고 슬펐다.

《아니, 그럼… 선생은 대체 누구십니까? 손영준씨가 아니십니까?》

찬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담하게 물었다.

젊은 의사는 잠간동안 대답이 없더니 빙긋이 웃음을 띠우며 나지막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앞으로 자연히 아시게 되겠지요. 자, 그럼 우리들의 최대념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힘껏 싸웁시다!》

젊은 의사는 손을 내밀며 찬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굳세게 잡은 손과 손!

이 순간 찬수는 젊은 의사의 뜨거운 피가 자기의 혈관에 흘러드는듯 한 감촉을 느끼였다.

젊은 의사는 찬수의 상처에 바를 약과 붕대와 가제 등을 내놓고나서 입에 마스크를 끼고 모자를 쓰고 병원을 나섰다.

비는 줄줄 내리고 점점 어두워져가는 밤길, 밭두렁과 논두렁사이로 빨리 걸어가는 그의 뒤모습을 찬수는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찬수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에야 돌아서서 쩔뚝거리며 숙직실로 들어왔다. 그는 자기 몸이 비에 후줄근하게 젖었다는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찬수는 어둠속으로 비를 맞으며 바삐 사라지지 않으면 안되는 젊은 의사의 일이 새삼스럽게 걱정이 되고 또 한편 참을수 없는 흥분이 치솟아올랐다.

마을의 절량농민들의 시위사건과 아울러 허둥지둥 행장을 챙겨 바삐 어디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젊은 의사…

반드시 여기에는 어떤 끊을수 없는 련관이 숨어있을것이라고 생각되자 찬수는 그동안의 젊은 의사의 생활이 토막토막 자기 눈앞에 그림처럼 떠올랐다.

그는 날마다 오후에는 먼 마을로 왕진을 간다고 나갔고 또 왕진을 갈 때면 의례 서랍속에 따로 넣어두었던 신문들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갔고… 또 이따금 진찰실에는 환자 아닌 농민들이 들랑거렸고… 그럴 때마다 젊은 의사가 그 사람들과 진찰실에서 장시간 무슨 이야기인지 수군수군 주고받던 사실들… 이러한 사실들이 오늘 와서 생각해보면 결코 우연한것이 아니였다고 느껴졌다.

뿐만아니라 찬수는 젊은 의사가 바로 손영준이라는것과 그가 이미 자기의 정체도 알고있었다는것, 자기가 고향에 내려와 농민들과 접촉한 내용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그를 통하여 알게 된 자기가 너무나 둔감한것만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찬수는 새삼스럽게 울적하고 가슴이 설레여졌다.

그와 작별하며 나눈 술 한잔에 찬수는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고 흥분된 감정은 더욱 치솟아올라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아까 마을의 골목에서 목격한 일들이 궁금하고 걱정스러웠던것이다.

마을사람들에게 주먹밥을 얼른 꾸리라고 웨치던 농민의 목소리, 바삐 오고가던 농민들의 발걸음, 더구나 상설이의 말을 미루어 죽촌리의 농민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는 숙직실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쌍지팽이를 짚었다.

마을로 들어가보고싶은 충동이 북받쳐올랐던것이다.

그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쩔뚝거리며 마을의 골목을 향하여 어둠속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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