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의 고향

5

 

찬수는 홍인제의 집에서 하루밤을 자고 그 이튿날 다시 병원으로 나와 아주 입원환자처럼 숙직실에 누워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홍인제는 찬수가 서울로 올라간 뒤 근 1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따금 보내오는 안부편지를 통하여 서울에서 무사히 화공생활을 하고있다는 정도의 소식을 알고있었으나 마리야녀학교에 취직한것이라거나 또 연회사건이후 형무소에까지 가서 감방생활을 하고 나온 소식은 전혀 알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다가 지난번 지선생이 고향에 내려왔을 때 비로소 그 이야기를 대강 듣게 되였던것이였다.

그러므로 홍인제는 이번에 찬수가 중상을 당한 전말을 알수 없었고 다만 이번의 부상이 화공생활을 하다가 높은데서 잘못 떨어졌기때문이라는 말을 부자연스럽게 듣지도 않았다.

그는 찬수가 출옥은 했지만 집행유예란것을 알고있었다. 그것을 좀 껄쩍지근하게 생각하는것 같은 인상이 찬수의 예민한 신경을 자극하였던것이다.

찬수는 소박한 생각에서 믿고 내려온 5촌이지만 별장벽화사건으로 미군장교놈에게 중상을 당한 전말까지 이야기해서 자기의 정체를 밝히기는 싫었다.

그것은 홍인제가 5촌이라고는 하지만 자기가 고향에 내려온데 대하여 앞으로 혹시 어떤 루라도 생길가봐 일종의 공포감을 가지고 불안스러워하지나 않을가 하는 과민한 걱정에서였다.

사실상 홍인제는 찬수가 헙수룩한 모습에 중상까지 당하여 고향에 내려온것이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으나 자기가 병원을 경영하고있는 이상 그를 치료해주는것이 친척된 도리라고 생각하고있었던것이다.

찬수는 하루이틀 날이 갈수록 더욱 성의껏 자기 상처를 치료해주는 젊은 의사와 어느덧 친밀해졌고 그의 호의에 가슴속깊이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저녁때 진찰실이 고요해지자 젊은 의사는 숙직실문을 열고 약품과 붕대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찬수의 상처에 새 심을 박고 새 붕대를 감아주었다.

《이제는 좀 어떠세요? 통증이…》

《네, 좀 덜합니다.》

《이젠 앞으로 얼마 안 가서 심을 뺄수 있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너무 선생께 페가 많습니다.》

찬수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앉으며 젊은 의사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원, 천만에…》

젊은 의사는 위생복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여 찬수에게 권하고는 자기도 한대 붙여물었다. 그들은 잠간동안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 무엇인가 말을 할듯 했지만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찬수는 이 젊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기 시작한지가 벌써 일주일이 가까와오건만 아직도 정식으로 통성명을 못한 사실을 두고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젊은 의사에게도 한가롭게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벌려놓을만 한 시간이 없었던것이였다.

그래서 오늘 찬수는 젊은 의사와 마주앉아 담배를 피울 시간이 생긴것이 그와 정식으로 통성명을 할수 있는 좋은 기회나 아닌가 생각되였다.

기실 숙직실이 젊은 의사의 침실을 겸하고있었으나 찬수가 독점한 뒤로 그는 별로 이 방에서 자지 않았고 찬수를 치료하러 들어올 때나 약장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들어오군 했을뿐이였다. 그러니 그 이외에는 시간을 내여 들어와 앉아서 찬수와 한가롭게 이야기할 그런 기회는 별로 없었던것이였다.

찬수는 자기때문에 침실을 빼앗긴 젊은 의사에게 미안하였으므로 《나때문에 여기서 주무시지도 못하고 얼마나 불편하십니까?》 하고 비로소 미안한 표정을 보이였다.

《원,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내 걱정은 마십시오.》

젊은 의사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어느덧 다시 《그런데 이거 정말 여태껏 인사를 못 드려 실례가 많습니다.》 하고 빙그레 웃었다.

찬수는 자기가 하려고 한 말을 젊은 의사가 먼저 하게 한것이 약간 미안스러웠으나 실상은 통성명을 하지 않더라도 그의 이름이 리준호라는것을 자기 5촌에게 들어서 알고있었던것이였다.

결국 젊은 의사가 자기의 이름과 래력을 똑똑히 알고싶어서 묻는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글쎄올시다. 나 역시 실례를 했습니다. 나는 홍평이라 합니다.》 하고 소개를 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찬수는 자기 본명을 당분간 어디에서나 쓰지 않기로 작정하고 자기 5촌에게도 만난 첫날에 이름을 《평》으로 갈았다고 말해두었던것이다.

때문에 이 젊은 의사가 자기의 본명을 알리는 없다고 생각되였다.

만일 영준이가 지난번 지선생이 와서 홍인제에게 찬수의 이야기를 하는것을 곁에서 귀담아들을 기회가 있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홍인제의 조카가 바로 홍찬수란것과 또 그가 마리야녀학교에서 미술교원노릇을 하였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있었더라면 그는 벌써 찬수가 변성명을 했더라도 미리 알아채고 자기의 정체를 가만히 알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암시라도 주었을지도 모른다.

찬수 역시 리준호가 손영준의 변성명인줄 안다면 자기의 정체를 숨겨둘 필요는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찬수는 지선생에게서 들은바도 있어 어딘지 그를 유심히 살펴보며 그의 정체를 알고싶었으나 좀처럼 어떤 단서를 잡아낼수가 없었다. 도리여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자신이 그에게 수상하게 보일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덧 영준이에게 정체가 드러날 단서를 드러내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찬수가 이름은 감출수 있었지만 직업만은 속일수 없었기때문이였다.

찬수가 짊어지고 온 등산용배낭속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화구와 미술서적들과 속사첩들이란것을 영준은 쉽사리 알수 있었고 또 찬수 역시 그것을 크게 자랑하려고 한것이 아닐지라도 붓과 속사첩을 꺼내놓고 때때로 일어나 앉아서 또는 누워서 그림을 그리다가 그의 눈에 뜨인 일이 더러 있었던것이였다.

찬수는 이 숙직실에 입원한이래 여러장을 속사했었다.

젊은 의사가 오후에 왕진을 나가고 병원안이 조용해진 때면 그의 눈앞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떠올랐고 그것이 또한 그자신의 화상과 창작의욕을 자극해주었던것이였다.

속사첩에는 이미 자하문밖에서 속사해둔 영옥이, 선희, 인자들이며 형무소생활과정에 취재한 차동무, 정돌이며 공판정에 나선 자기의 모습과 방청온 학생들과 학부형들의 모습들이 인상적으로 그려져있었다.

어떤 장에는 김만국의 얼굴과 문화동에서 살고있는 그를 찾아갔을 때에 본 빈민굴의 참상을 속사해둔것도 있었다.

이 마을에 온 이후 그가 이미 형체조차 없어진 장군바위와 500년 묵은 팽나무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놓은 페지도 있었다.

또한 허물어져가는 농민들의 오막살이며 헐벗은 마을사람들이며 진찰실에 모여드는 환자들의 음울한 모습들도 여러장 속사되여있었다.

젊은 의사는 찬수가 그동안 속사하는것을 례사로이 보지는 않았으나 그 모델이 어떤것들인지 또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자세히 몰랐기때문에 일종의 호기심도 났다.

그는 오늘 찬수와 비로소 처음으로 마주앉아 통성명을 하고 담배를 같이 피울 시간을 얻은것이 다행한 기회라고 생각되였던지 빙그레 웃으며 《그런데 참 홍선생, 내 얼굴 하나 스케치해주시겠습니까?》 하고 불쑥 요청했다.

찬수도 빙긋이 웃으며 《뭐, 그릴줄을 알아야죠. 그저 붓장난입니다.》 하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젊은 의사에게 자기의 직업이 화가라는것이 알려진 이상 그의 요청을 거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였다.

그는 어느덧 담요밑에서 속사첩과 연필을 꺼내여들었다.

그는 얼른 새 장을 번지고나서 묵묵히 앉아 심각한 얼굴로 변한 젊은 의사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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