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의 고향

3

 

젊은 의사는 찬수를 숙직실에 눕혀두고 위생복을 입은채 마스크를 코에 걸고 가방을 들고 병원을 나섰다.

그는 날마다 오전중 병원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의 진찰과 치료가 끝나면 마을로 왕진을 나가는것이 하나의 일과로 되여있었다.

의원에 입원실이 없는것도 한가지 리유이지만 중한 질병때문에 도저히 자기 발로 찾아와 치료를 받을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원장 홍인제와 젊은 의사가 차례로 순회하며 치료해주지 않을수 없었다.

만일 왕진을 자발적으로 나가지 않을 경우에는 의례 환자가 있는 집에서 허둥대며 왕진을 청하러 오군 했다.

지상건물이건 토굴이건 농가호수 100여호가 넘는 이 죽촌리에는 날마다 급한 환자가 생기지 않는 날이 없었고 보통 환자는 평균 대개 한집에 한사람은 의례 발생하고있었다.

어떤 집은 식구전부가 병석에 누워있는 집도 있었다.

이렇게 환자가 많아 병원의 경기는 여전히 좋으나 왕진비를 받지 못하고 또 약값이 외상으로 많이 나가고 또 읍내 병원처럼 옥도정기 한방울을 발라주고도 몇백환씩 받을수 없었기때문에 경제적수지가 잘 맞지는 않았다.

《장군바위》와 주막거리에서 철거를 당하고 이주해온 사람들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이 마을에 토착해서 오랜 기간 살아온 농민들도 1년동안 농사를 지었다고는 하나 벌써 절량농가가 태반이 넘었다.

그들은 추수를 해서 타작을 하기가 바쁘게 농지상환곡이니, 토지소득세니 무어니무어니 하여 요리조리 현물로 다 빼앗기고 실상 겨울을 날 량식조차 한토리도 남기지 못했던것이다.

《농지개혁》이후 8년이나 지난 오늘(1957년) 이 마을은 생활이 향상되기는커녕 해마다 더 심한 빈궁과 기아와 질병속에서 헤매게 되였다.

우선 이 마을의 농민들은 《분배》를 받은 농지에 대하여 갚아야 할상환곡을 제때에 다 바치지 못했기때문에 아직도 자기의 소유로 이전수속을 하지 못한 농민이 100호중 96호나 되였으며 그 농토의 경작권을 도로 빼앗기고있는 형편이였다.

빈궁과 질병은 뗄래야 뗄수 없는것인지 마을사람들은 노상 질병속에서 헤여나지 못했고 이럴 때마다 인제의원의 신세를 지지 않을수 없었다.

인제의원 원장 홍인제는 60살이 가까운 늙은 의사다. 그는 주막거리에서 개업을 할 때에 비하여 환자는 많으나 수입이 적어졌기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겨앉아볼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다른 곳이라야 마찬가지였고 마을사람들의 애원과 간청으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던것이였다.

더구나 6~7개월전에 이 젊은 의사를 맞이하게 된 뒤로는 마을사람들은 인제의원을 읍내 병원보다 훨씬 높이 평가하게 되였다.

사실 이 젊은 의사가 어떻게 되여서 인제의원 같은 촌병원에 왔는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마을에 하나도 없었다.

그를 의례 면허를 가진 의사로 알았고 또 신분이 확실한 사람으로 알았던것이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그는 면허도 없었고 또 신분이 확실하다고 할수도 없었다.

인제의원에 약제사로 있던 청년이 징병령장이 나오자 기피해서 행방불명이 된 뒤에 인제의원은 홍인제 혼자 손에 몹시 곤난을 당하고있었다.

그는 생각던 끝에 자기의 옛날 의전동창생이고 해방후엔 한때 의과대학 교수로 있던 친구에게 신원이 확실하고 적당한 약제사나 조수감이 있거든 한사람 구해 내려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결국 얼마 있지 않아 이 젊은 청년이 그 친구의 소개장을 가지고 홍인제를 찾아왔던것이였다.

그가 면허를 가지고있지는 않았으나 약제사의 자격만이 아니라 의사의 자격도 훌륭히 가지고있다는것을 발견한 홍인제는 외출할 때는 병원일을 거의다 맡기다싶이 하고 자기는 외교에 주력하였던것이였다.

홍인제는 이 청년의 이름이 소개장에 쓰인대로 리준호인줄만 알고있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리준호가 아니라 바로 손영옥의 오빠 손영준이였다.

영준은 자기가 다니던 의과대학에서 강제징병반대투쟁에 련관되여 체포령이 내리자 이리저리 피신하여 돌아다니다가 자기가 대학에서 배운 일이 있고 또 자기들의 투쟁을 은근히 지지해주는 어떤 선생의 소개를 받아 인제의원에 피신겸 취직을 하게 된것이였다.

그러나 영준은 만일을 념려하여 자기의 이름을 감추고 변성명하였고 자기가 가진 모든 증명서류도 리준호라는 명의로 만들었던것이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실제나이 27살의 청년이면서도 얼핏 보아 30살이 넘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코밑수염을 까맣게 길렀고 대모테색안경을 낄 때가 많았다. 그리고 눈병이 나지 않았을 때도 일부러 안대를 한쪽눈에 걸기도 했고 가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마스크를 끼군 하였다.

이것은 영준이가 자기의 용모를 변장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였다.

그것은 이 근방이 서울과 멀리 떨어져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안심할만 한 어수룩한 곳은 결코 아니였기때문이였다.

영준이가 처음 이 병원에 나타나 약제사노릇을 하게 되였을 때 경찰지서의 순경따위가 그의 신분조사를 한다고 들랑거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홍인제는 그들에게 술을 사먹여 돌려보냈다.

홍인제는 경찰지서나 면소따위는 어느 정도 손아귀에 넣을만큼 사교적인 수완도 가지고있었다.

그는 영준이가 체포령을 받고 변성명을 해가지고 피신해온 인물이라는것을 전혀 알수 없었으나 어디엔지 영특하고 침착하며 지식수준이 높은 청년이라는것을 느꼈을 때 다소 이상스런 생각과 불안스런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그러나 홍인제는 영준이가 병원일을 착실히 보아줄뿐만아니라 멀리 떨어진 농촌에까지도 자기를 대신하여 왕진을 다니고 또 그에 대한 일반환자들의 반영이 좋을뿐아니라 자기 병원의 인기와 위신이 점차 올라가고있다는 사실이 은근히 기뻤으므로 영준이에 대하여 신뢰감이 생기게 되였던것이다.

영준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으나 홍인제에게 자기 래력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신변에 대한 경각성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영준은 마을을 한바퀴 휙 돌아 해질무렵에야 병원에 들어왔다.

그는 아까 숙직실에 눕혀놓고 간 이름모를 청년의 일이 불쑥 생각났다.

그는 진찰실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열고 숙직실로 들어갔다.

《통증이 좀 어떠십니까?》

《네, 좀 나은것 같습니다.》

찬수는 아래목에 누웠다가 부시시 일어났다.

영준은 이 청년이 원장 홍인제의 친척이라고는 하나 주소와 이름을 말하지 않는것이라거나 이 마을이 고향마을이라고는 하나 별로 이 지방 사투리를 쓰지 않고 서울말을 쓰는것이라거나 또 그 모습이 파리하고 또 입은 양복주제가 다소 초라해보이나 그의 태도와 표정에서 어딘지 모르게 고상한 지식인청년다운 기개가 엿보이는것이라거나 그가 짊어지고 온 등산용배낭속에 정녕코 무슨 서적이 들어있을것인가 하는 등 아직 통성명을 하지 못한 이 미지의 청년에 대하여 적지 않은 호기심과 궁금한 생각이 솟아오르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찬수는 부시시 일어나 등산용배낭을 메고 쩔뚝거리며 숙직실문을 열고 진찰실로 나왔다.

그는 비록 초라한 모습으로 부상을 당한채 고향에 찾아왔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5촌의 집을 찾아가야만 도리에 마땅하다고 느꼈던것이다.

《아니, 어디를 가시려구 나오십니까?》

《네, 원장어른댁에 좀 가봐야겠습니다.》

《그럼 가서 인사나 하시구 다시 오십시오. 그 댁에도 가족이 많아서 안정하고 치료를 받을 방은 없습니다. 입원실은 따로 없지만 여기서 숙식하면서 치료하시는게 어떻습니까?》

영준이가 간곡히 권하자 찬수는 너무도 고마와 감격되였다.

《네, 감사합니다.》

찬수는 쌍지팽이를 짚고 영준이곁으로 다가가 그와 악수를 한 다음 진찰실을 나왔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0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