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야녀학교

8

 

찬수는 울분에 넘치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휘청휘청 운동장을 걸어나왔다.

륙상선수들이 쉬고있다가 찬수에게 인사를 했으나 고개를 수그린채 학생들앞을 지나치며 그는 그저 형식적으로 답례를 했다.

음악실에서는 합창련습을 하는지 맑은 노래소리가 울려나왔다.

순진하고 명랑한 처녀들의 아름다운 노래소리! 그것은 이미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딴세상에서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교문을 나서서 높은 돌담밑 모래밭길을 걸어가는 그의 발길에는 락엽이 한잎두잎 짓밟히여 부서졌다.

찬수는 그 락엽이 마치 오늘의 자기를 상징한것 같았다. 그는 흡사 긴 악몽에서 깨여난 사람처럼 머리가 뗑하고 어지러웠다.

그는 새삼스럽게 이 학교에 취직했던것이 후회되였다.

자기가 미술가를 지망하던 어린 소년시절의 순진했던 리상이 오늘날 와서 이렇게까지 자기의 마음에 치명상을 입힐줄은 꿈에도 몰랐던것이다.

학비가 없어서 중학에 입학이 되고도 중도퇴학을 하고말았으면 그대로 운명에 맡기여 로동을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할 일이지 무슨 주제넘게 미술가가 되여보겠다고 열여섯살에 간도 크게 부모를 속이고 일본 도꾜로 건너갔던가!

8. 15해방직전까지도 갖은 고생을 해서라도 미술가가 되여 돌아오겠다고 결심하고 3년동안이나 신문배달을 해가며 고학으로써 어떤 화가의 개인미술연구소에서 야간교수를 받아온 자기, 다행하게도 처녀작이 전람회에 입선이 됨으로써 일약 신진화가로 등장할수 있었던 자기!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와서 마리야녀학교의 교장이하 간부교원들로부터 인격적모욕을 당하고 멸시를 받으며 억울하게 면직처분을 당하기 위하여 쌓아온 노력이였던가?

차라리 이 학교에 교원으로 취직을 하지 않고 거리에서 뼁끼묻은 로동복을 입고 간판쟁이로동이라도 했더라면 이런 아니꼬운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것만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자기를 이 학교에 소개해준 소학교시기의 은사이며 지금은 서울에 올라와 건축설계사로 있는 지선생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또 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지선생이 써준 소개장과 자기 리력서를 가지고 교장 김치선을 찾아오던 날 그는 아주 친절한 태도로 찬수를 대해주었던것이다.

《에- 내가 지성근선생을 믿는만큼 홍선생을 믿겠소. 부디 지성근선생에게 루가 끼치지 않도록 해주시오.》

김치선은 그때 이렇게 점잖게 말했고 찬수에게 몇가지 부탁을 했던것이였다.

《홍선생두 알겠지만 우리 학교는 그리스도교학교요. 원래 교직원채용은 신자가운데서 하는것이 원칙이요. 그러니 홍선생두 이 기회에 신자가 되시오. 그리고 매주마다 례배당에 나오시오.》

《네.》

찬수는 취직할 욕심에서 그저 선뜻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후 그는 처음 몇주는 부지런히 례배당에 나갔지만 차차 한번두번 빠지게 되고말았다.

례배당에 나오는 교원들이란 간부교원 7~8명 이외에는 별로 없었고 학생들도 기숙사에 들어있는 학생이외 통학생들은 잘 참가하지 않았다.

교장 김치선은 례배당에 잘 안 나오는 학생들과 교원들의 명단을 작성해놓고 직원회의가 있을 때에는 의례 《약국에 감초》격으로 그 문제를 한몫 넣어 교직원들의 《신앙의 자유》에 대하여 억압하고 강요했던것이다.

그러나 물리, 화학이나 수학이나 박물학과 같은 과학계통의 학과를 담당한 교원들이나 급이 낮은 말석교원들속에는 그렇게 충실하게 교장의 지시에 복종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찬수는 결국 교장의 지시에 충실하지는 못했다.

김치선은 이런 교원들을 《요시찰명단》에 기입하고 은근히 거동을 살피기 시작했던것이다.

찬수는 원래 종교에 대해서 별로 호감을 갖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로골적으로 반대해나설 사상적리론이 확립된것도 아니였다.

다만 그가 학교 교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거짓신자노릇을 하기에는 그의 예술가적량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찬수는 교장이나 또는 어떤 간부교원으로부터 자기가 례배당에 잘 안 나가는데 대하여 별로 개인적인 추궁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찬수가 취직이래 례배당에는 불충실하게 나오지만 미술교원으로서는 한결같이 학생들을 열성껏 지도했고 따라서 학생들에게 두터운 신임과 지지를 받아온다는 사실을 교장 김치선이나 간부교원들은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따라서 구태여 단 한사람만이 그런것도 아닌 신앙문제를 들고 찬수만을 개별적으로 공격할수도 없었다.

교육에 열성이 있고 게다가 온건하고 말썽이 없는 선생이라고 좋게 평가를 내리면서도 교장 김치선이나 교무주임 윤성오는 찬수에게 은근히 불만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찬수가 고분고분하게 자기들의 손아귀에 휘여들지 않았고 또 자기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기를 별로 즐겨하지 않는데 대하여 괘씸하게 생각한것이였다.

찬수는 결국 그들에게 교만하게 보이였고 또 미술가랍시고 건방지게 군다고까지 비평을 받게 되였던것이고 더 나아가 사상문제까지 은근히 의심받게 되였던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이런 종류의 녀학교 교원으로서 가져야 할 량면적인 성격을 갖지 못했고 특히 교장이나 교무주임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아첨할줄 모르는, 너무나 소박하고 고지식하고 단순한 예술가의 자존심과 감정만을 가진 사람이였다.

찬수는 이렇게 자기를 회상해볼 때 오늘 면직처분을 당한것이 결코 우연한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그러나 그는 오늘 면직은 당했어도 독수리에게 채여가던 어린 병아리를 구해낸것처럼 영옥이를 야수와 같은 미군장교놈의 손에서 구원해낼수 있었던 자기의 의분과 행동이 대견스럽게 느끼여졌다.

(흥, 미군장교를 모욕했다고? 영옥이에게 불순한 생각을 가졌기때문이라고? 더러운 자식들!)

찬수는 아래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흥분된 발길로 어느덧 전차정류장까지 나왔다.

효자동에서 전차를 내린 그는 자하문고개를 향하여 걸어올라갔다.

자하문밖에 그의 하숙이 있었던것이다.

마리야녀학교에 취직하면서부터 그는 통근거리가 좀 멀었지만 조용한 환경속에 넓은 화실을 가지기 위하여 일부러 자하문밖으로 하숙을 정한것이였다.

경북중학교뒤 북악산허리를 감도는 구부러진 신작로를 힘없이 터덜거리며 자하문고개마루에 다달았을 때 정오를 알리는 고동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였다.

찬수는 허물어진 성터를 바른편에 끼고 한참동안 골짝길을 걸어올라갔다.

아직도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밭 사이길로 그는 천천히 발길을 옮기였다. 여기저기 탐스럽고 먹음직스런 감이 떨어져있건만 찬수에게는 그것을 주을 용기도 나지 않았고 또 가을전경이 별로 아름다와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감나무숲속에 파묻힌 외딴 초가집 아래채로 다가가 방문을 열고 가방을 방안에 던지였다.

두칸 통방인 그의 방은 바로 화실까지 겸하고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넓고 큰 교자상 같은 창작용책상이 놓여있고 그우에는 채색그릇과 속사첩, 붓이며 그리다 놓아둔 작은 화판과 서적들이 널려져있었다.

웃목에는 여러개의 크고작은 그림천과 그림틀이 벽에 기대여 세워져있었다.

그는 양복을 벗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전신을 아무렇게나 내던지다싶이 아래목에 픽 쓰러져 누워버리였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여 피워물고 연기를 깊이 빨아 푸우- 하고 천장을 향하여 길게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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