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장을 하고

4

 

빈민부락에도 해가 저물었다. 거센 바람이 산등성을 스칠 때마다 궤짝집 지붕우에 덮인 가마니자락이 휘날리고 굴뚝들이 흔들리였다.

여기저기서 고무쪽 타는 냄새, 종이타는 냄새, 헝겊쪽 타는 냄새가 비위를 상할만큼 코를 찔렀다.

영옥은 앞치마를 입고 물을 길어나르고 두부와 콩나물을 사다가 반찬을 장만했다.

비록 빈민부락으로 전락은 했지만 얼마동안 살아갈 밑천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지 장작단도 두어짐은 될만큼 사다놓았으며 구공탄도 두어궤짝이나 들여왔다.

영옥은 저녁을 다해놓고 아버지 오기만 기다리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늦게 들어오세요?》

《모든 일이 걱정이 돼서 그러시지 않니… 집안살림은 망했지만 너희들 일 또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잠신들 집에 계실수 있니?》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말하고나서 다시 영옥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너는 학교에 다시 못 갈게다. 그 미군장교놈때문에… 그렇다구 어디 취직두 할수 없구…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그까짓 학교는 단념한지 오래요. 그런데 지금 학교에서 또 동맹휴학이 벌어졌어요.》

《응, 그래? 그건 어찌 알았니? 너는 아예 참견말아!》

어머니는 걱정스런 표정을 보이며 미리 주의를 주었다.

《정말이지 어머니, 이제 난 학교아이들에게 볼낯이 없게 되고말았어요.》

《그런 소리 말구 이젠 집에 가만히 있거라.》

모녀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대문이 삐거덕 열리며 기침소리가 들리였다.

《얘, 아버지 오시나부다.》

《아버지!》

영옥은 부리나케 방문을 열고 뛰여나가며 불렀다.

《응? 누구냐?》

손종모는 고주가 되여 비틀거리면서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저예요!》

영옥은 술에 취해 자기를 몰라보는것만 같은 아버지가 너무도 야속스럽게 생각되였다.

《응? 누구?》

아버지는 더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영옥이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들어와 정신없이 쓰러져버렸다.

그리고는 어느 틈에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울화가 치받쳤으면 저렇게 취하도록 약주를 잡수셨겠니…》

영옥이 어머니는 혼자말로 한탄섞어 중얼거렸다.

이윽고 영옥은 어머니곁에 누워 잠을 이루려 했으나 오늘따라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새록새록 맑아왔다.

오빠가 행방불명이 된 환경속에서 갑자기 몰락의 구렁창으로 떨어져버린 자기 집안의 앞일을 생각해볼 때, 가엾게도 병신이 되고만 어머니를 생각해볼 때, 화김에 약주에 취해 들어오는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볼 때 피신처에서 무사히 집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오히려 걱정은 더 컸고 어떤 무거운 짐이나 진것만 같았다.

과연 자기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장차 미술가로 성공해보겠다는 희망도 포부도 이제는 다 수포로 돌아가버리지 않았는가?

영옥은 이런 생각에 가슴을 설레이며 이리 뒤적, 저리 뒤적 몸을 안정하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서 잠을 자거라.》

어머니 역시 딸의 일을 걱정하여 잠을 못 이루었다.

이튿날 이른아침, 술이 깬 손종모는 비로소 영옥이가 들어온것을 알고 놀랐다.

영옥은 마당에 나와 아침을 지었다.

손종모는 영옥이가 지은 아침을 먹고나서 그를 불러앉히고 주의를 주었다.

《너 이제는 꼭 집안에만 있거라.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지를 말고…》

손종모는 다시 외출양복을 입고 바쁜듯이 밖으로 나가버리였다.

영옥은 아버지의 주의가 있었으나 자기의 량심상 그대로 집에만 박혀있을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홍선생의 소식이 궁금하였으므로 오늘 자하문밖으로 나가보고만싶었다.

그는 허둥지둥 부엌설겆이를 마치고나서 나들이옷을 갈아입었다.

《아니 얘, 너 어디 갈려구 그러니?》

《어머니! 암만해두 그대루 집에만 박혀있을수 없어요. 내 잠간만 아버지 오시기 전에 다녀올께요.》

《아니, 어딘데?》

《홍선생이 암만해두 출옥했을것만 같아요.》

영옥은 여전히 궁금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그야 너때문에 감방생활을 하고 나온 선생이니 가서 인사를 드리고 와야 도리에 마땅하지. 그러나 얘, 아버지가 아실라! 얼른 다녀오너라.》

어머니는 불안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영옥은 치마저고리우에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외투속주머니에서 자기의 시민증을 다시한번 만져보고는 을지로6가로 나와 전차를 타고 남대문에서 내린 다음 효자동으로 가는 전차를 바꾸어탔다.

효자동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영옥은 바쁜걸음으로 자하문고개를 향해 올라갔다.

가을에 홍선생을 찾아올 때와는 딴판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이 살풍경마냥 눈에 띄였다.

눈발이 희뜩희뜩 휘날리는 음산한 날씨였다.

영옥은 고개를 넘어 다급히 홍선생의 하숙이 있는 산골짜기길을 걸어들어갔다.

지금쯤은 홍선생이 하숙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쇠약한 몸을 쉬고있을것만 같았다.

홍선생이 자기를 보면 얼마나 반가와할것이며 또 그동안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또 얼마나 놀랄것인가?

홍선생의 하숙집 대문에 들어선 영옥은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그의 방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이 순간 영옥은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홍선생의 방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방안에는 책상도 그림틀도 책들도 보이지 않았다.

영옥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눈앞이 캄캄해지는것만 같았다.

주인할머니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로파를 불렀다.

《아이유, 그때 왔던 아가씨로구먼! 그런데 선생님이 어저께 우리 집에서 아주 나가셨는데 어떡해!》

영옥은 로파의 말을 듣고나자 더 맥이 홱 풀리고말았다.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세요?》

《글쎄말이유. 어디루 가시느냐고 물었더니 시골로 내려갈것 같다구 그러시던데…》

《시골로요?》

영옥은 눈앞이 더욱 캄캄해지고말았다.

《선생님 짐은 다 가져가셨어요?》

《짐군이 와서 다 져내갑디다그려.》

《짐군이 이 마을사람들은 아니예요?》

《아니야, 시내에서 데려온 짐군들이던데…》

《…》

영옥은 더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신통한 말이 나올것 같지 않았으나 또다시 무슨 말이라도 나올가 하여 다시 로파에게 물었다.

《혹시 선생님이 다시 댁에 오신다고 하시지는 않았어요?》

《글쎄, 그런 말은 하시지 않았지만 세상일이란 누가 아우? 또 오실지…》

《만일 선생님이 오시거든 제가 뵈러 왔다 갔다구 말씀 좀 해주세요.》

《아, 그건 념려마우. 어제 저녁때만 같아두 만나봤을텐데… 정말 안타깝게 됐구려.》

로파는 영옥이가 침울한 얼굴에 랑패스러운 표정을 띠우자 보기가 딱해서 자기도 언짢은 기색을 보이였다.

영옥은 잠간동안 침착하게 생각하다가 다시 《참, 선생님의 기류(거주)는 댁에 붙였었던가요? 퇴거두 어제 떼여가셨나요?》 하고 물었다.

《아니야, 우리 집에 원래 기류를 붙이지 않았다우.》

영옥은 로파의 말을 듣고나자 홍선생이 간 곳을 찾아낼 길이 실로 막연하였다.

그는 어쩔수없이 로파와 작별을 하고 맥이 풀린 발길로 고개를 넘었다.

영옥은 이제 홍선생을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지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했다.

혹시 홍선생이 자기를 만나려고 종로4가를 찾아갔거나 또 앞으로 갈는지도 모르나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행방을 밝히지 않은 자기네 집주소를 어떻게 알아서 찾아올것인가?

로파가 전하는 말대로 홍선생이 만일 시골로 내려갔다면 그것은 대체 어느곳일가? 그의 고향마을인가? 그러나 홍선생의 고향이 다도해가 보이는 바다가 농어촌이란것은 알지만 어느 도, 어느 군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영옥이였다.

그는 나온김에 조선희와 백인자를 만나보고싶었으므로 그들을 찾아갔으나 그들은 하나도 집에 없었다.

벌써 여러날째 그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게 되자 영옥은 선뜻 마리야녀학교에서 벌어진 동맹휴학과 또 무슨 관련이라도 있기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였다.

영옥은 이 순간 얼굴이 화끈해지며 그들을 배반한것만 같아 몹시 괴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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