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 직

8

 

지용세는 자기 가방에서 만환짜리 돈뭉치 한다발을 꺼내여 찬수에게 주며 말했다.

《우선 이걸 용돈으로 쓰시오. 그리구 래일부터는 벽화에 착수합시다.》

찬수는 당장 용돈이 없어서 생활상 곤난하였으므로 그 돈을 받아야 할 처지였으나 얼른 손을 내밀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그 돈을 받는다면 오늘 주문맡아온 벽화를 그려주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되는것이라고 생각되였기때문이다.

《지선생!》

찬수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용세의 얼굴을 유심히 건너다보았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내게는 벽화대신 딴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 벽화에 대해선 웬 일인지 감흥이 나지 않습니다.》

《아니, 왜?》

지용세는 갑자기 놀란 빛을 띠며 찬수의 얼굴을 살피였다.

《지선생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대로 벽화를 그린다는것은 내 량심상 허락되지 않습니다. 아까 별장에서는 그 사람들에게 박절하게 말할 필요가 없어서 말하지 않았지만…》

찬수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지용세를 건너다보았다.

지용세는 잠간동안 묵묵히 앉아서 입맛만 쩝쩝 다시더니 《그럼 공연히 주문을 맡았군. 윤의 실력으로는 안될거구… 더구나 다른 사람들은 말할것두 없구… 어떻게 한다?》 하고 랑패한 표정을 보이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나두 홍선생의 화가적립장과 량심을 리해하지 않는것은 아니요. 나두 사실 그것이 좋아서 주문을 맡았겠소? 우리 동인들의 절박한 생활문제를 생각하고 주문을 맡은거요.》

지용세의 말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간곡하게 들렸다.

《홍선생! 기왕 우리 사와 관계를 맺은 이상 어떻게 합니까? 자존심을 당분간 버리셔야지… 화가의 자존심을 가지고서는 이런 직업에 종사하지 못합니다.》

지용세는 찬수에게 타이르듯 다시 말하였다.

《우리 어떻게 그 문제를 잘 연구해봅시다. 나는 홍선생이 성명을 감추고 우리 사에 당분간이라도 취직해있는것이 오히려 홍선생의 신변에 유리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윤산과 최강이가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찬수의 앞에 돈뭉치가 놓여있는것을 유심히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지용세는 그들 두사람이 자기 방에 들어온 리유를 모르지 않았다.

벽화 착수금을 받아가지고 온것을 그들이 빤히 알고 올라온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자, 오랜만에 큰일 하나가 생겼지만 이것을 잘 성공해야만 우리 사가 앞으로 난관을 뚫고나갈텐데… 문제는 주문주가 요구하는 라체화와 춘화도요. … 허허허…》

지용세는 서글프게 웃으며 윤산과 최강을 건너다보았다.

《그거 그릴 사람 없으면 내가 그리죠!》

최강이가 불쑥 나섰다.

지용세는 약간 난색을 보이며 《글쎄, 최형이 그리구싶은 생각은 좋으나 나중에 주문주에게서 그림값을 제대루 받아내느냐 못 받아내느냐를 생각해야지! 아무리 주문주가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른다구는 하지만 그래도 소위 안고수비라고 안목은 높은거요.》 하고 은근히 최강의 실력이 부족함을 암시하면서 그의 요구를 거절해버렸다.

사실상 최강은 지용세의 견해대로 실력이 약한 화공이였던것이다.

지용세는 잠간동안 지혜를 짜내다가 《허는수 없소. 라체화, 춘화도는 윤형이 맡으시오. 남선생은 청룡, 황룡인지 백혼지를 그리구, 최형은 지금 그리던 간판들을 다 그려놓고 조력하러 나가시오.》 하고 벽화작업을 대략 분공해주었다.

최강은 좀 무색한 얼굴이였으나 별로 무슨 의견을 말하지 않고 잠잠히 앉아있었다.

지용세는 가방에서 돈 두뭉치를 꺼내여 윤산과 최강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돈을 받아가지고 곧 물러나갔다.

찬수는 자기 태도를 선명히 하고 지용세앞에서 물러나와야 할 때가 되였다고 생각되였다.

지용세는 찬수의 표정을 저울질하며 인정이 풍기는듯 한 어조로 말했다.

《자, 홍선생! 돈을 넣어두시오. 홍선생의 기분을 나는 리해합니다. 아무리 상업미술이지만 감흥없는 그림을 그릴수야 없지요. 그러나 홍선생두 생활을 생각해야지! 우선 당장 굶을수야 없지, 그저 무난한 청룡, 황룡이나 그리시오.》

지용세는 돈뭉치를 집어 찬수에게 내밀었다.

《자, 어서 넣어두시오.》

찬수는 이 순간 지용세가 리해성있고 인간미가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였으나 그가 내미는 돈을 받고싶지는 않았다.

《돈은 나중에 주십시오. 입사한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선불금이 당치않습니다.》

찬수는 부드럽게 말했다.

《홍선생! 그건 너무 량심적인 말씀이요. 아마 홍선생은 이 돈이 꼭 벽화를 그리라고 선불해드리는것으로 아는지 모르겠는데 반드시 그런건 아니요. 아저씨께서 말씀도 있고 해서 선불을 해드릴려고 생각했던것이니까…》

지용세는 모자를 쓰고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돈뭉치를 찬수의 양복저고리 호주머니에 집어넣어주고는 바쁜듯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버리였다.

찬수는 자기 작업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웬 일인지 얼굴이 화끈해지며 마음이 거북해졌다.

지용세가 분담해준대로 청룡, 황룡을 그린다치더라도 결국 자기의 예술작품이 미국놈과 그 앞잡이놈들의 유흥과 향락을 위한 장소에 장식물로 그려진다는것이 몹시 서글프고 괴로웠기때문이다.

이윽고 그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그림을 손질해치워버리려고 붓에 채색을 찍어 화판우를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윤산이가 올라오더니 《남선생! 그만 손떼십쇼. 우리 같이 갈데가 있습니다.》 하고 찬수에게 말했다.

《어딥니까?》

《좌우간 내려가십시다.》

찬수는 옷을 갈아입고 윤산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최강과 2~3명의 어린 화공들이 옷을 갈아입고 대기하고 서있었다.

《자, 갑시다. 우리 오늘 저녁이나 같이합시다.》

윤산이가 일행을 이끌었다. 찬수는 윤산이가 오늘 돈을 받은김에 한턱 쓰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들은 바로 얼마 멀지 않은 상술집에 가서 술자리를 벌리였다.

그들은 한참만에 얼근히 취해 나왔다.

최강이가 찬수의 손목을 쥐고 자기가 한잔 내겠다고 떠벌이며 캬바레 《하와이》로 끌고 들어갔다.

윤산이도 따라들어왔고 어린 화공들은 모두다 헤여져버리고 없었다.

찬수는 최강에게 붙들린채 깊숙한 좌석으로 들어갔다.

레코드에서는 음탕한 쟈즈곡이 흘러나오고 정면 카운터밑에서는 술에 취한 사나이들이 녀급들을 끌어안고 쟈즈에 맞추어 춤을 추고있었다.

술냄새와 담배연기, 녀급들의 몸에서 풍기는 미국산 향수냄새는 찬수의 비위를 역하게 하였다.

한편 벽에는 벽 절반만 한 라체화가 걸려있었고 또 다른쪽 벽에는 그림인지 무엇인지 찬수도 알수 없는 해괴한 초현실파그림이 걸려있었다.

캬바레출입을 별로 해보지 못한 찬수는 마치 촌사람처럼 어리둥절하면서 그들과 함께 구석의 빈 탁자에 둘러앉았다.

이윽고 당번 녀급이 의자에 와앉는다.

《아니, 지척이 천리라구, 요즘은 왜들 그렇게 안 오십니까? 뭐 노여운 일들이 있어요?》

녀급은 세사람을 차례로 살피며 요염하게 웃었다.

《잔말말구 술 가져와!》

최강이가 호기를 뽐내며 말했다.

녀급이 술을 가지러 간 사이에 이 탁자 저 탁자에서 비번 녀급들이 하나둘씩 슬금슬금 모여들어 세사람사이에 끼여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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