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 직

6

 

무대밑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미라가 일어섰다.

《얘, 이분들이 벽화를 그릴분들이다. 네가 맡아서 이야기할게 있으면 해라.》

박춘식은 미라에게 그들을 소개하고 자기는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미라는 세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훑더니 요염하게 눈웃음을 치면서 《그럼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착수하셔야 됩니다.》 하고 그들을 데리고 돌아다니며 벽화를 그릴 장소를 일일이 지정해주었다.

미라가 요구하는것은 박춘식이보다는 훨씬 구체적인것이였다.

현관, 복도, 응접실, 홀, 침실 등 각 부분에 걸쳐 그림을 그리는데 전부 인물화와 동물화를 그려달라는것이였다.

풍경화는 이 별장자체가 아름다운 풍경속에 자리잡고있는만큼 그릴 필요가 없다는것이 미라의 리론이였다.

미라가 요구하는 인물화는 박춘식이가 말한 춘화도와 라체화와는 의견이 달랐다.

홀벽화는 성모마리야의 초상에서부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장면까지를 여러 장면에 나누어 그리고 침실에만은 라체화를 그리고 복도와 현관에는 청룡, 황룡과 백호를 그리라는것이였다.

지용세는 이 별장의 실권을 쥐고있는것이 미라라고 느껴지자 그의 의견을 듣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되였다.

찬수와 윤산은 거의 넋잃은 사람처럼 아무말없이 미라의 뒤를 따라 다니며 설명을 듣기만 했다.

이윽고 미라는 그들을 데리고 응접실로 돌아왔다.

《자, 이제는 실제로 그림을 그릴분들이 좀 이야기해보세요!》

미라는 미소를 띠우며 찬수와 윤산을 건너다보았다.

지용세는 찬수에게 이야기를 하라는듯이 눈을 주었고 윤산도 옆눈으로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이 순간 찬수는 미라에게 아무 의견도 말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미라는 찬수의 얼굴을 뚫어질듯이 바라보더니 요염하게도 깔깔 웃으며 《아니, 왜들 말이 없습니까? 벽화를 아직 그려보시지 못하신게로군요!》 하고 사람을 깔보는 태도로 말했다.

지용세가 벙긋이 웃으며 능란하고 재치있게 미라의 말을 받았다.

《두분의 말씀이 다 다르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옳을지 몰라 그럽니다.》

《걱정마시구 내 말을 들으세요. 이 별장은 우리 아버지가 지었지만 사용권은 내게 있으니까요. … 호호호…》

미라는 또 찬수와 윤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심각한 표정만 지으며 자기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는 찬수가 이상스럽게 생각되였다.

《아니, 그런데 이 두분은 어째서 아무 말이 없어요? 좀 의견을 말해보세요! 주인측에서는 그런 그림을 요구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그림이 있으면 그걸 그려두 좋구요. 그렇지 않아요?》

미라는 찬수를 또 뚫어지게 바라보며 의견을 묻는것이였다.

그러나 여전히 찬수는 미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침묵을 지키며 담배만 피웠다.

찬수는 그들부녀가 떠벌이는 수작이 해괴스럽고 꼴같지 않아 대응하기가 싫었던것이다.

별장에 무슨 마리야의 초상이니, 예수의 그림을 그려야 하며 또 저속한 춘화도와 라체화를 그려야만 하는가?

찬수는 무슨 모욕이나 당한것처럼 불쾌해졌다.

이들부녀가 이렇게까지 미국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미국식생활양식을 별장에다도 옮겨놓으려는 의도가 너무도 구역질이 났다.

찬수는 자기 기분대로 한다면 그저 금방 응접실에서 뛰쳐나와버리고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같이 간 지용세나 윤산이 얼마나 무안하고 당황해할가? 뿐만아니라 그것은 취직한지 불과 며칠밖에 안되는 미술장치사에 대한 모욕이며 업무방해며 지선생에 대한 배신행위로밖에 될수 없는 일이 아닌가?

찬수는 그런 생각을 하자 어느덧 용기가 사라져버리였다.

지선생의 소개로 이 미술장치사에 취직이 되였고 또 불원간 지용세로부터 하숙비를 선불받아 자하문밖으로부터 시내로 하숙을 옮기기로까지 되여있는 자기로서는 이 자리에서 자기 기분대로 휙 뛰쳐나갈 처지가 못되였던것이다.

찬수는 어쩔수없이 이 별장벽화를 그리는데 자기가 빠져서는 안될 형편에 처해있다는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과연 자기의 예술가적량심을 꺾고 다만 미술장치사의 립장을 세워주기 위하여 그들이 요구하는 그림 아닌 그림을 그려주어야 옳을가 다시한번 생각해보았다.

《뭘 그렇게 깊이들 생각합니까? 말 좀 하십시오!》

미라는 또 찬수의 얼굴을 훑으며 미소를 띠였다.

이윽고 찬수는 무게있는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별장벽화가 춘화도나 라체화나 종교선전화로 되여서는 안될줄 압니다. 이 별장건물은 지금만 있을것이 아니라 앞으로 수십년뒤 후대에 이르기까지 남아있을것이 아닙니까? 그렇기때문에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립장에서 벽화를 그리되 후대들에게서 욕을 먹지 않을 예술적향기가 짙은 그림을 그려야 할줄 압니다.》

찬수는 이렇게 말하며 미라의 얼굴을 비로소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 순간 미라는 얼굴빛이 갑자기 달라지더니 이윽고 《그럼, 결국 우리아버지가 요구하는 그림이나 내가 요구하는 그림은 그리지 못하겠단 말씀입니까?》 하고 꼬집어 묻는다.

지용세는 찬수의 대답이 혹시 위험하게 나올가봐 념려되여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결국 벽화를 더 예술적으로 가치높게 그리기 위해서 한 말씀입니다.》 하고 변명 비슷하게 말하면서 미라의 기분을 살피였다.

《어쨌든 미국손님들의 비위에 맞게 잘 그려주셔야 합니다.》

《네, 그건 념려마십시오.》

지용세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는 벽화주문을 못 맡을가봐 은근히 걱정되였으나 미라의 태도에 일변 안심이 되자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럼, 아주 오늘 계약하고 착수금을 좀 드릴가요?》

미라는 지용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느덧 또 찬수에게로 시선을 옮기였다.

어딘지 모르게 찬수의 얼굴엔 미라의 시선을 끄는 그 어떤 매력이 있는 모양이였다.

무겁게 다문 입, 빛나는 두눈, 알맞은 몸집과 체격에 곁에 앉은 윤산이보다는 훨씬 미술가다운 기풍이 넘치고있었기때문이다.

《자, 그럼 잠간만 앉아계세요.》

미라는 응접실을 나갔다가 조금후 다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명함이 한장 들려있었다.

《내 명함을 가지고 한국산업사에 가셔서 우선 먼저 이 정도만 받으세요.》

미라는 지용세에게 명함을 내주었다.

명함 뒤면에는 《현금 10만환을 오늘 미술장치사에 벽화착수금으로 지불하시오.》라고 씌여있고 미라의 수표가 또렷이 눈에 띄였다.

이때 윤산은 옆눈으로 명함을 힐끔 보았으나 찬수는 별로 볼 생각도 없이 담배만 피우고 앉아있었다.

《그런데 참, 두분은 누구누구십니까? 성함을 알아둡시다.》

미라는 찬수와 윤산을 바라보았다.

《네, 난 윤산이라 합니다.》

윤산이가 씽긋이 웃으며 먼저 말했다.

《남평입니다.》

찬수는 시치미를 뚝 따고 또렷이 말했다. 그 어조는 너무도 애교가 없고 무뚝뚝했다.

《아이유, 어쩌면 두분이 다 두자 성명입니까? 호호호… 남평, 윤산! 과연 예술가다운 성함들이군요.》

미라는 간드러지게 한바탕 웃으며 찬수와 윤산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찬수는 속으로 괴로운 웃음이 북받쳐올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윽고 찬수는 더 앉아있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지용세에게 눈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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