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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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수는 먼저 지선생이 경영하고있는 건축설계사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지선생은 나오지 않고 난데없이 딴 사람이 거친 목소리로 《건축설계사는 이사갔소!》 하고 불친절하게 말했다.

《어디로 이사갔는지 모르십니까?》

《모르오!》

전화는 딱 그치고말았다.

찬수는 오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봤으나 그는 시골에 급한 출장을 가고 없었다.

찬수는 지선생이 어디로 옮겼는지 알수 없었으므로 찾아가 소식을 전할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한숙경의 집을 알아보기 위하여 마리야녀학교에 전화를 걸고싶지는 않았다.

자기의 목소리를 잘 아는 교원중 누군가 숙직을 서다가 전화를 받는다면 한숙경에게 재미적은 결과가 돌아가지나 않을가 불안스럽기때문이였다.

찬수는 어쩔수없이 현저동 언덕배기로 걸어올라가 사직동으로 내려섰다.

그는 오늘 출옥은 했으나 전차를 탈 돈도 없었고 또 돈이 있다치더라도 형무소에서 갓 나온 초라한 모습을 전차안의 사람들에게 보이기가 싫었다.

그는 어느덧 자하문고개를 넘어 자기 하숙이 있는 골짜기 비탈길로 들어섰다.

그는 이지러진 달빛에 비친 텁수룩한 자기의 그림자를 터벅터벅 밟으며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하숙앞에 이르렀다.

추리나무며 능금나무며 감나무들은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고 자기의 하숙방 들창은 쓸쓸하게도 바깥덧문까지 굳게 닫혀있었다.

그는 오늘 석방된것이 기쁘면서도 자기를 맞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혼자서 하숙으로 터벅거리며 쓸쓸하게 돌아온 자기의 현실이 너무도 울적하게만 생각되였다.

그는 어느 틈에 한달전 그날 자기의 하숙을 찾아와주던 영옥이의 환영이며 공판정에서 잠간 시선이 마주친 그의 눈물어린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가슴이 설레였다.

그러나 찬수는 소스라쳐 고개를 좌우로 쩔레쩔레 흔들어버리였다.

하숙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주인로파는 깜짝 놀라며 찬수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로파는 안방으로 찬수를 안내했고 또 그의 방에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

집안식구들은 찬수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여나오는 길이란것을 알자 수군덕거리며 어디로 무엇을 구하러 가는지 대문밖으로 들락날락했고 한참만에 밥상을 차려들고 들어와 찬수앞에 내놓았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흰밥 한그릇과 얼근하고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김치국이 한대접 놓여있었다.

찬수는 단숨에 밥을 다 먹고 국도 다 들이마시였다.

《그동안 혹시 나를 찾아온 사람은 없었어요?》

찬수는 로파가 가져다 주는 담배잎사귀를 뜯어 말아피우며 궁금한듯이 물었다.

《네, 아무도 안 왔어요. 선생님이 가신 뒤 이틀인가 지나서 그때 왔던 형사녀석들이 왔다가긴 했지만…》

로파의 말을 듣자 찬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자들이 또 무얼 가져갔습니까?》

《무언지 한보퉁이 싸가지고 갑디다. 그리구 이담에 선생님이 나오더래두 집에서 나가라고 하라구 하더군요!》

찬수는 갑자기 분격이 치솟아올라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자기 방으로 내려와봤다.

놈들은 자기가 아직 쓰지도 않은 새 속사첩들과 또 그때 압수해가고 남았던 서적들과 벽에 걸린 작은 풍경화들을 낱낱이 떼여갔던것이다.

《날강도놈들 같으니라구…》

찬수는 격분을 참지 못하여 잠간동안 이를 앙다물고 주먹을 불끈 쥐였다.

그는 자기 방 문을 홱 열어제껴놓고 책상우에 뽀얗게 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웃목 벽밑에 비스듬히 서있는 화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형사놈들이 자기를 체포하러 왔을 때 비옷에서 비방울을 흘려 못쓰게 만들어놓은 그림 《불굴의 투지》가 볼수록 아깝고 분통이 터져올라왔다.

그는 나머지 책들을 정리하면서 쓰지 않은 공책을 골라내여 감방안에서 부탁받은 사람들의 이름들과 용건을 대강 기록하기 시작했다.

찬수가 감방안 사람들에게서 받은 부탁가운데는 자기 손으로 그들의 소식과 용건을 자세히 알리는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할데도 있지만 직접 찾아가서 상대방을 만나 이야기를 전해야 할 곳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지금 자기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주소와 성명을 단단히 적어두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차동무의 부탁이였다.

찬수는 수첩에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광희문 밖 신부좌 우편 문화동 산등성이 55반 김만국, 의정부 사촌형-

찬수는 이렇게 써놓고나서 차동무에게 부탁받은것을 회상해보았다.

그는 문화동 산등성이 55반에 사는 김만국이란 사람을 찾아가서 그에게 의정부에 있는 자기 사촌형을 만나 그때 그 일을 다시 시작하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그때 그 일을 다시 시작하라!》는 그 말의 내용을 찬수는 잘 알수 없었으나 차동무의 부탁이 심상치 않은 부탁인것만 같았기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의 부탁보다도 이 부탁을 먼저 전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일일이 여러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대방의 주소와 성명을 다 써놓고 아래목에 침구를 깔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은 얼른 오지 않았다.

철창사이로 찬바람이 치밀어들어오는 딱딱한 마루방, 무거운 세멘트벽과 천장, 담요자락을 덮어주던 정돌이며 차동무의 다정스런 얼굴들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였다.

찬수는 어느 틈에 피곤을 느끼고 혼몽한 잠속에 빠져들었다.

얼마후 그는 소스라쳐 놀라며 눈을 떴다.

개짖는 소리가 요란히 들리였다. 찬수는 갑자기 긴장되였다.

누가 자기 하숙을 찾아오는것만 같았기때문이다.

찬수는 벌떡 일어나 들창 덧문을 열고 개짖는 골짜기를 내려다봤다.

이지러진 달빛이나 몹시 밝았다. 누구인가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이쪽을 향하여 올라오고있었다.

찬수는 자세히 살피였으나 나무가지그늘에 가리워 누구인지 잘 알수 없었다.

설마 금방 출옥한 자기를 어떤 놈이 또 잡으려고 오지는 않겠지싶어 그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이부자리를 걷어치웠다.

이윽고 밖에서 도란도란 이야기소리와 함께 발자국소리가 가까이 들리며 대문을 흔드는 소리가 났다.

찬수는 틀림없이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자 얼른 미닫이를 열고 뛰여나왔다.

《누구요?》

《날세! 어서 문을 열게!》

그는 틀림없는 지선생의 목소리였다.

《아니, 선생님!》

찬수는 대문을 열고 지선생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그래, 얼마나 고생했는가?》

지선생은 반갑고도 감격된 목소리로 찬수의 손목을 힘있게 잡아주었다.

이윽고 지선생의 뒤에서 청년 하나가 불쑥 나타나며 《홍선생님!》 하고 찬수의 앞으로 다가섰다.

찬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을 덥석 쥐며 《아니, 어떻게 이렇게 동행이 되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하고는 지선생과 함께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그는 바로 경찰서 류치장에서 피흘리는 자기의 머리를 매여주었고 지난번 공판정에서 자기에게 힘을 북돋아주던 송동무였다.

《그 망할자식들이 출옥시간을 늦게야 통지해줘서 이렇게 늦었네. 용서하게!》

지선생은 자기가 들고 온 보퉁이와 송동무가 가져온 보퉁이를 끄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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