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있는 산골

7

 

그놈은 다시 령감에게 뭐라고 떠벌이더니 어느덧 가버렸는지 조용해졌다.

영옥은 그제야 숨을 돌리고 부엌뒤 모퉁이에서 돌아나왔다.

벌써 산골짜기에는 쓸쓸한 회색빛어둠이 닥치였고 거치른 밤바람이 나무가지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파는 웬 일인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아, 이거 무슨 사달이 난게야. 이렇게 안 올리가 없는데… 내 나가보고 오지…》

령감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니예요, 할아버지는 고단하실텐데 집에 계셔요. 내가 나가보겠어요.》

영옥이가 말하자 령감은 굳이 말리며 어슬렁어슬렁 사립문밖을 걸어나갔다.

순옥이는 방안에서 자꾸 울기만 하였다.

영옥은 밀기울이 섞인 밥덩이를 조금 그릇에 담아 순옥이에게 먼저 주었다.

순옥이는 울음을 그치고 단숨에 입에 퍼넣었다. 그러나 량이 차지 않아 숟가락을 입에 문채 시틋하게 그대로 앉아있었다.

《더 먹고싶으냐? 있다 할머니 오거든 같이 먹자. 응?》

영옥은 순옥을 달래였으나 애는 대답을 하지 않고 울상을 짓고 앉아서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영옥은 자기 몫으로 퍼둔 밥그릇에서 몇숟갈 덜어 순옥이에게 또 가져다 주었다.

순옥은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단숨에 아귀차게 다 먹어버리고는 그제야 겨우 숟가락을 놓았다.

영옥은 밖으로 나와 사립문밖을 또 내다보았다.

둥글대로 다 둥근 밝은 달이 동쪽하늘우에 솟아올랐다.

영옥은 무심코 달을 바라보자 왜서인지 마음이 산란해지고 가슴이 설레여졌다.

어머니가 수술하던 그날 밤 병원에서 보던 초생달이 그동안 저렇게 둥글어진것을 보면 스틸맨대좌놈에게 쫓기여 집을 나온지가 그럭저럭 열흘이 넘은것을 알수 있었다.

열흘동안 이 산골짜기 외딴집에서 피신생활을 해온것을 돌이켜볼 때 그는 너무도 자기가 값이 없고 천해져버린 사람과 같이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이 집에서 무사하게 피신을 해왔지만 앞으로 과연 안심하고 이 집에 숨어있을것인가? 자기 집에 심부름을 간 이 집 로파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것으로 보아 정녕 발각된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아니라 지금쯤은 이미 홍선생의 판결언도도 끝나 출옥이든 복역이든 결정되였을것이건만 소식을 듣지 못하고 숨어있기만 하는것도 실로 답답하고 갑갑해 견딜수가 없었다.

설사 출옥이 된다치더라도 어느날 되며 그 날자를 안다치더라도 시민증을 갖지 못한 자기로서 형무소문앞까지 나가 기다릴수도 없는노릇이 아닌가?

어쨌든 얼른 로파나 돌아왔으면싶어 그는 어느덧 사립문밖 외가닥 길아래로 걸어내려갔다.

별장에서는 피아노소리가 둥당둥당 울려왔고 쏘프라노(녀성고음)도 은은히 흘러나왔다.

그러나 영옥에게는 그 소리가 아무런 흥미도 자아내지 못했다.

이미 그것은 자기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딴 세계에서 들리는 소리와 같았다.

영옥은 일찌기 음악가가 되고싶지는 않았으나 마리야녀학교에서 음악시간에 피아노를 쳐보기도 했고 또 합창대에 끼워 교내 음악회 같은때 단우에 올라보기도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오늘날 자기의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없는것들이였다고 느껴졌다.

뿐만아니라 지금 들리는 노래소리가 낮에 별장아래 골짜기에서 듣던 그 망측스러운 광경을 연출하던 녀주인공의 노래소리가 틀림없다고 생각되자 어느덧 불쾌한 감정이 솟구쳐올랐다.

영옥은 새로 생긴 별장이 서울시내 어떤 부자의 별장이란 말은 이 집 로파에게 듣고 또 그 부자의 딸인지 무엇인지가 이 별장에 가끔 나와서 노래공부를 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것이 바로 자기 집을 차압하고 경매에 붙인 장본인 박춘식의 별장이라는것을 알리 없었고 또 그 요염한 녀성이 박춘식의 딸이란것도 알수 없었다.

영옥은 어느 틈에 산모퉁이 넓은 길앞까지 나왔다.

이제는 더 내려가서는 안되는 지점이였다.

영옥은 우두커니 서서 아래만 내려다봤다.

(웬 일인가? 암만해도 집에서 무슨 일이 생긴게야. …)

영옥은 추운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서있기만 했다.

한참만에 령감과 로파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올라오고있었다.

영옥은 그제야 긴장되였던 마음이 확 풀리며 반가운 마음에 앞으로 뛰여내려갔다. 그러나 로파는 웬 일인지 맥이 전혀 없어보이고 얼굴에는 심란한 빛이 가득차있었다.

《그래 별일없어요? 집에?》

영옥이는 우선 이렇게 바삐 물었다.

《가만있수. 집에 가 이야기할게.》

로파는 이이상 더 말을 해주지 않고 숨만 헐떡거리였다.

영옥은 로파의 손에 조그만 쌀자루 하나밖에 들려있지 않는것으로 보아 자기 외투를 가져오지 못한것을 깨달을수 있었고 분명 무슨 사고가 난것 같아 불안스러워지지 않을수 없었다.

《할머니, 집에 무슨 일이 생겼어요?》

영옥은 성급한 마음에 다시 물었다.

《내 편지 줄게 집에 가 읽어보우.》

로파는 자기 치마밑에서 4각으로 접은 편지를 꺼내여 영옥이에게 주었다.

영옥은 급한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았으나 달빛이 나무그늘에 가리워 편지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바쁜걸음으로 얼른 집에 돌아와서 침침한 등잔불아래 편지를 펼쳤다.

아버지가 연필로 쓴 편지였다.

영옥은 갑자기 두눈이 흐릿해지며 글자가 아롱거려 편지를 제대로 읽을수 없었다.

《영옥아, 너는 지금 얼마나 고생이 많겠니. 너의 어머니 다리가 성했으면 너의 어머니나 내가 당장 너를 찾아가겠지만 너의 어머니를 혼자 놔두고 집을 비울수가 없구나. 우리 집은 이젠 다 망했다. 너까지 집을 나가 여러날이 넘도록 들어오지 못하게 됐으니 부모의 마음은 자나깨나 편할 때가 없다.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고 너의 남매를 집에서 내쫓은 놈들이 누구냐? 정말 그놈들은 미국놈들이구나. 미군장교 스틸맨이란 놈은 너를 잡으려고 또 왔다갔고 형사녀석들도 심심하면 와서 네 소식을 대라고 을러댄다. 너는 얼마동안 그곳에 있거라. 네가 먹을 쌀을 조금 보낸다. 쌀이 떨어지거든 또 이 로인을 보내여다오. 네 시민증과 시계는 네 외투가 들어있는 옷장에 차압딱지가 붙어서 지금 당장 꺼낼 재주가 없구나. 수일후에 이 로인을 한번 더 보내라. 손이 떨려 이만 쓴다.》

영옥은 편지를 다 읽고나자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그는 앞길을 어떻게 개척해나가야 좋을지 아직 세상경험이 적은 자기의 두뇌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이 집에 숨어있을수도 없는 자기가 아닌가?

이러한 긴박한 문제들을 당장 누구를 붙들고 의논을 하며 해결할것인가?

만일 자기곁에 오빠가 있다면, 홍선생이 있다면 그들은 충분히 자기 문제를 해결해줄수 있지 않을가?

과연 오빠는 지금 어디에 피신하고있으며 자기가 이렇게까지 안타까와하는것을 알고나 있을가?

영옥은 이런 생각에 한없이 괴롭고 가슴만 답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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