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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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옥이가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된지도 4~5일이 지난 어느날 아침이였다.

손종모는 허둥지둥 양복을 주어입고 모자를 쓰고 뜰로 내려섰다.

그는 그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마누라를 어쩔수없이 퇴원시켜 집에 눕혀놓고 의사에게 왕진을 청해 치료하면서 식모 하나를 림시로 고용하기는 했으나 영옥이가 집에 있을 때보다 모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들 영준이가 행방불명이 된것도 따지고보면 분하고 억울한노릇인데 딸자식 영옥이마저 쫓기여 집을 나가버렸으니 언제면 그 자식들을 마음놓고 받아들일것인가?

그 자식들이 지금 어디 가서 거처하며 어떻게 먹고나 있는지? 겨울이 닥친 이때 걱정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더구나 마누라는 이미 다리병신까지 되였으니 병이 나아 일어난들 쌍지팽이신세를 져야 할것이 아닌가?

손종모는 자기 집 꼴을 생각하니 실로 견딜수 없는 울화가 치받쳐올랐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공장이 륙군본부 지정공장으로 간판을 바꾸어달고 조업을 개시할수 있게 된것으로 스스로 만족과 위안을 얻으려 했다.

(마누라가 다리병신이 됐지만 돈만 있으면 감쪽같이 의족을 할수 있고 아들과 딸이 행방불명이 됐지만 돈만 있으면 무사히 만나게 될수도 있어.)

손종모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륙군본부의 안부성을 만나려고 집을 나서는 길이였다.

안부성이에게는 50만환, 그 직계부하인 과장에게는 40만환을 우선 제1차 《꾹돈》으로 주고 륙군본부 지정공장운영권을 얻게 된 손종모는 이날 제품물자를 인수하기 위하여 안부성을 다시 만나기로 한것이였다.

그동안 달포동안이나 문이 닫힌 공장은 한산하였으나 오늘은 로동자들이 제품물자를 인수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나와 공장안을 청소하고 재봉틀들을 다시 정비하고 기름을 치는 등 작업준비에 착수하고있었다.

손종모는 로동자들이 대기하고있는것이 한편 고맙기도 하고 처량해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이날 모여온 로동자들이 불과 10여명밖에 되지 못하는것을 보았을 때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기에게서 밀린 임금을 다 받지 못하고 그대로 실직자가 된 90여명의 로동자들은 그동안 어떻게 되였을가?

그들이 다 다른 직장에 취직하지는 못했을텐데 어째서 자기 공장이 다시 조업을 하게 된다는것을 각 부 책임자들에게 알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나와주지 않는것인가?

손종모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로동자들을 쭉 훑어봤다.

그들은 몹시 굶주린 기색들이였다. 손종모는 양복속에서 점심값을 꺼내여 로동자들에게 주고 공장을 나섰다.

그는 그길로 곧바로 륙군본부로 안부성을 찾아갔다.

물자인수에 대한 결재서류를 받아가지고 창고로 가서 물품을 인수할수 있게끔 미리 약속이 되여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손종모는 뜻밖에도 안부성과 면회를 못하고말았다.

자기가 들여보냈던 명함장을 응접실로 가지고 나오며 안부성의 부하 하나가 랭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 좀 바쁜 회의가 있어 면회할수 없습니다. 자세한것은 김치선씨를 찾아가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

손종모는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 오늘 꼭 만나기로 약속이 되였었습니다. 다시한번 좀 말씀해주십시오. 시간이 오래 걸릴 일도 아닙니다.》

《글쎄요. 그런데 그것이 아직 결재가 안된것 같습니다.》

《뭐요? 결재가 안돼요?》

손종모는 깜짝 놀라며 실망의 빛을 보이였다.

(이거 정녕 무슨 마가 붙었군!)

손종모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말았다.

이 순간 그는 전날 미군장교 스틸맨이 집에 와서 자기를 위협하던 말이 번개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당신 공장 못하게 할수 있습니다. 국방부 군수국에 전화해서 공장운영권 취소할수 있습니다.》

그 장교놈의 목소리가 다시금 자기의 귀를 째는듯 울리였다. 손종모는 몹시 분하고 억울하였다.

그는 어쩔수없이 안부성과의 면회를 단념하고 그길로 김치선을 만나려고 마리야녀학교로 달려갔다.

넓은 운동장에 들어선 손종모는 녀학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놀고있는것이 눈에 띄자 영옥의 생각이 불쑥 솟아오르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녀학생들은 손종모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며 저희들끼리 귀속말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손종모는 그것이 자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가 하는 생각에 열적어져 얼른 현관에 들어섰다.

교장실문을 두드리고 방안에 들어서자 김치선은 의외로 반가운 표정을 보이며 《아, 손선생! 내가 가뵈야 할걸. 오시게 해서 안됐소외다.》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긴 쏘파에 손종모를 앉히고 자기도 그곁에 앉으면서 《그래 조업준비는 다됐습니까?》 하고 눈웃음을 쳤다.

《조업준비요?》

손종모는 김치선이가 안부성이에게서 무슨 말을 아직 듣지 못했기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지 듣고도 시치미를 떼느라고 하는 수작인지 알수 없었으나 자기로서는 오늘 당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김치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벌렸다.

《조업준비는커녕 면회를 거절당했습니다.》

《네? 면회를 거절당하다니…》

김치선은 깜짝 놀라더니 이윽고 《허허, 이게 기어이 사달이 생겼쇠다. 내가 그렇게까지 스틸맨대좌에게 간청하고 애원을 했는데두…》 하고 이마살을 찡그리며 난색을 보이였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전화통을 들고 어디로인가 전화를 거는 모양이였으나 통화중이였던지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손선생! 이제는 별도리 없쇠다. 다된 일을 영옥이가 망쳐먹었으니… 에이 분해!》 하고 입맛을 다시며 실내를 오락가락하였다.

손종모는 담배를 피워물고 한숨을 길게 쉬며 연기를 내뿜었다.

《그래, 그뒤 영옥이소식은 못 들으셨습니까?》

김치선은 화제를 돌리였으나 손종모는 대답할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윽고 맥빠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결국 딸년 공부시키려다가 패가망신하게 됐쇠다.》

김치선은 손종모의 기분이 울분속에 잠긴것을 보고 먹은 간이 있어 《그러나 너무 락심마시오. 아무튼 어떻게 될게외다. 내 스틸맨대좌에게 다시한번 간청해보죠.》 하고 너무도 쉬운 말로 손종모를 위로하려들었다.

그러나 손종모는 그 말에 흥미가 없었고 또 미련도 없었다.

말하자면 한번 영옥이를 반미분자라고 규정한 그녀석이, 《유엔군사령부》의 직권을 가지고 안부성에게 공장운영권을 취소하라고 명령한 그녀석이 김치선의 말에 갑자기 마음이 돌아설리도 없고 또 김치선이가 제 말대로 그놈에게 간청할것 같지도 않았기때문이였다.

손종모는 모든것이 이제는 일장춘몽으로 돌아갔다고 생각되였다.

이제야말로 자기 생활은 문자그대로 파멸이며 몰락이 아닌가?

그는 부스스 일어나 모자를 집어쓰고 김치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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