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비밀

1

 

앙상하게 뼈만 남아가는 뽀뿌라나무, 때때로 회리바람이 불어 넓은 운동장에 티끌과 락엽을 휘몰아올리는 흙먼지기둥, 한때는 오색화초가 만발하여 교정을 아름답게 꾸며주었건만 지금은 그 형체조차 찾아볼수 없는 쓸쓸한 화단들, 된서리가 내릴것만 같은 우중충한 구름이 해빛을 겹겹으로 가린 음침하고도 쌀쌀한 날씨, 마리야녀학교의 첫겨울 풍경은 몹시 스산하고 우울하였다.

학생들은 오늘도 점심휴식시간에 본관 교실벽밑 아늑한 구석을 찾아 여기저기 모여서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졸업반교실 유리창밑에는 5~6명의 녀학생들이 심각한 표정들을 하고 서로 얼굴들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얘, 저놈의 구름이 자꾸만 해를 가리누나.》

몸집이 뚱뚱한 녀학생이 구름을 쳐다보며 쓸쓸한 얼굴표정을 했다.

《마치 저 해빛이 그 누구의 운명과도 같구나 얘.》

호리호리하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처녀가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얘, 말을 하려면 똑똑히 하려무나. 그 누구가 대체 누구란 말이냐?》

수다스러워보이는 녀학생 하나가 참견하고 나섰다.

《생각해보렴. 그 누구인가…》

신경질적으로 생긴 처녀가 새초롬해지며 쏘아던졌다.

《정말이지 홍선생님은 가엾어. 마치 저 구름속에 가린 해같이 됐으니… 글쎄 무슨 죄로 형무소까지 넘어가니? 정말 억울하지 않아?》

5~6명중에서 눈이 별처럼 반짝거리고 예뻐보이는 학생 하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걱정할것 없어. 구름이 만날 해를 가릴줄 아니? <월출산이 높더니만 미운것이 안개로다/ 천왕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와다 두어라/ 해퍼진 후면 안개 아니 거두랴>…》

좀 멋들어져보이는 녀학생 하나가 목청을 뽑아 능글맞게 옛 시조 한구절을 읊었다.

《얘, 공연히 그런 시조 읊지 말아. 정학처분 당한다. …》

《정학이 뭐 그리 겁나니? 시시한 놈의 학교 이젠 정말 명색졸업까지 몇달 안 남았으니까 다니지 더 다닐 생각 개똥두 없다 얘!》

시조를 읊던 처녀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러나저러나 조선희나 백인자는 왜 여태껏 석방이 안되니?》

《구류 29일씩 먹었대.》

《그럼 쉬 나오겠구나!》

《쉬 나오면 뭘 해, 고문이 심해서 병신들이 다됐대.》

《조선희와 백인자두 가엾어! 일을 제대루 성공두 못하고…》

《글쎄말이야, 공연히 아이들만 많이 정학당하게 하고…》

《얘, 너 그런 소리 말아. 남의 이야기하듯 하구있구나. 걔네들이 나온 뒤엔 우린 정말 할 말 없어! 일이 잘 안된건 걔네들이 잘못했기때문인줄 아니? 우리가 모두 겁쟁이가 돼서 일이 잘 안됐지 뭐야!》

한 처녀가 핀잔조로 은근히 꼬집었다.

《그런데 얘들아, 영옥이는 구류당하고 나오더니만 왜 그리 딴 사람이 돼버렸을가? 말두 잘 안하구 우리들허구 잘 어울리지두 않구…》

《글쎄말이야, 그게 자격지심에서 그렇지 뭐야. 바루 말이지 제손으로 진정서를 썼고 또 교장실에까지 가지구 들어간 영옥이 죄가 더 크면 컸지 하급생들을 학교 못 나오게 골목에서 막은 선희나 인자 죄가 뭣이 그리 크니?》

얼굴이 검붉은 처녀가 입을 열었다.

《영옥이는 꾹돈을 멕였는지두 몰라. 그래서 쉽게 나왔지만 선희나 인자는 꾹돈을 쓸수 있어? 학교 수업료내기도 쩔쩔매는 판인데…》

그들은 서로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해를 가린 구름이 가셔지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때마침 한대의 고급승용차가 교문을 들어와 본관앞에 정거하더니 미군장교 한명이 선뜻 내리였다.

《얘, 저 흉물이 그때 그녀석이지?》

《글쎄, 뭣하러 우리 학교에 또 나타나누?》

《저녀석이 우리 학교만 오는게 아니라더라. 리화녀대엔 아주 가서 산대…》

녀학생들은 증오스러운 표정으로 그놈을 쏘아보았다.

그놈은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다가 녀학생들이 모여선쪽으로 한손을 높이 들어 좌우로 흔들면서 《헤-이-》, 《하버하버》 하는 소리를 뒤섞어가며 제딴에는 인사를 표시하는 모양이였다.

그러나 녀학생들은 누구 하나 그놈의 수작에 응대해나서지 않았다.

장교놈은 좀 열적은 표정으로 그러나 징그러운 웃음을 띠우며 본관 현관으로 들어섰다.

마침 복도에서 현관으로 나오던 두세명의 녀학생들과 마주친 그놈은 두팔을 쩍 벌리며 녀학생들의 앞을 가로막아서서 뭐라고 알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군복외투주머니에서 은지로 싼 쵸콜레트를 대여섯개 꺼내여 녀학생들앞에 내밀었다.

그러나 녀학생들은 그것을 받을 생각은 않고 좌우로 재빨리 피해 도망쳐버리였다.

《망할녀석! 우릴 거지루 취급해!》

《거지루 취급하는건 약과다 얘. 툭하면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고 총으로 쏘아죽이니 걱정이지…》

녀학생들은 현관을 나가면서 수군거리였다.

장교놈은 녀학생들이 자기가 주는 쵸콜레트도 받지 않고 랭정하게 피해가며 욕설을 퍼붓는것과 같은 인상을 받았을 때 기분이 몹시 불쾌하였다.

그놈은 곧바로 김치선의 방을 두드리고 들어섰다.

김치선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놈앞으로 다가가며 《오, 스틸맨대좌님! 어서 오십시오!》 하고 악수를 청하였다.

《오오, 미스터 김! 안녕하십니까?》

그놈은 김치선이가 권하는 안락의자에 덥석 앉으며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래, 대좌님께서 일전에 오셨단 말씀은 웰톤선생께 들었습니다.》

김치선은 웃으며 장교놈의 눈치를 살피였다.

이윽고 김치선은 자기 책상다리에 장치된 종을 세번 연거퍼 눌렀다.

가사교원 최보배가 있는 실습실로 통하는 신호였다.

최보배는 교장실에서 신호가 세번 울리여오면 의례 그것은 특별귀빈으로 알고 다과를 준비해서 예쁜 학생들을 골라 들려가지고 교장실로 가져오게 되여있었다.

장교놈은 의자에 앉아 아무말없이 려송연을 꺼내여 붙여문다.

《그런데 대좌님, 그렇게 급한 려행을 하셔서 매우 고단하시겠습니다.》

김치선은 그놈의 비위를 맞추며 알랑거렸으나 웬 일인지 그놈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놈은 정색을 하고 입을 벌렸다.

《미스터 김, 학교교육 정신채리시오! 학생들 점점 사상이 좋지 못해갑니다. 한국국민들 우리 미국사람 믿는 마음 점점 적어져갑니다. 학생들 나보고 모두 피해 도망갑니다. 재미없습니다. 정신채리시오.》

장교놈은 먼저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김치선은 당황했으나 어느덧 교활하게 깔깔 웃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스틸맨대좌님, 그것은 대좌님의 오해이십니다. 한국녀학생들은 원래 반가운 손님을 만나면 그렇게 피해 도망가는것이 례의로 되였습니다. 하하하…》

《오오-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좋습니다.》

장교놈은 어느덧 얼굴이 명랑해지며 다시 말을 이었다.

《미스터 김, 그때 그 녀학생 손영옥 공부 잘합니까?》

《네-》

《나 바루 그날 파티에서 돌아가자 사령관의 명령으로 그 이튿날 아침일찍 비행기로 본국에 갔습니다. 나는 그 학생 지금까지 잊지 않고있습니다. 그 학생에게 줄 선물 우리 숙사에 두고 왔습니다. …》

《네, 네, 알겠습니다. 손영옥이를 불러드리지요!》

김치선은 소사 박로인이 있는 서무실로 신호하기 위하여 종을 눌렀다.

복도 저편에서 찌르릉 하고 종이 울리는 소리가 은은히 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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