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문고개

4

 

《선생님, 왜 웃기만 하시고 말씀을 안하세요?》

영옥은 자기도 그 돌발적인 질문이 어색했고 또 우스웠던지 고개를 숙이고 웃고있었다.

찬수는 영옥이의 그런 질문이 사실을 몰라서 알려고 묻는다기보다는 이미 이러저러한 각도에서 잘 알고있으면서도 한번 시치미를 떼고 자기를 떠보자는 맹랑한 물음인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였다.

말하자면 결혼기에 있는 녀학생들이 이렇게 젊은 미혼인 자기와 같은 남선생을 한번 툭 건드려보는것이 다감한 처녀들의 심리로 보아 흔히 있을수 있는 일이라고는 해석되지만 오늘 영옥이가 돌발적으로 이런 질문을 꺼낼줄은 전혀 몰랐던것이였다.

《선생님, 고향이야기라도 좀 해주세요. 네?》

《그래, 내 고향이야기가 그렇게 듣고싶어?》

《네.》

영옥은 어른에게 동화를 들으려고 달라붙는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게도 눈을 반짝거리며 찬수의 입을 바라보았다.

찬수는 잠간동안 침착한 표정을 짓고있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내 고향은 먼 남쪽 다도해가 보이는 아담한 농어촌, 앞으로는 푸른 바다 사나운 물결, 뒤로는 넓은 벌판 황금물결… 나는 어린시절을 거의 이 고장에서 살았어.》

갑자기 소년시절로 돌아간듯 찬수의 눈앞에는 과거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가도가도 끝없는 바다였지. 산더미같은 물결을 헤치며 조그만 쪽배를 타고 바다로 아버지를 따라 고기잡으러 다니기도 했고 황금물결 이는 무연한 벌판에서 송아지를 몰아 풀을 뜯기도 했지…》

《아이유, 재미있어요. 어서 계속하세요. 꼭 선생님이 시인이 되신것만 같군요.》

영옥은 흥미를 느끼며 바싹 다가들었지만 찬수는 웬 일인지 그 반대로 이야기를 더 해주기가 싫어졌으므로 입을 다물어버리고 담배를 꺼내피웠다.

찬수에게 있어서 소년시절을 회상한다는것은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니였다. 그것은 마치 쓰라린 상처를 건드리는것과 같이 괴로운 일이였다.

《어서 말씀하세요.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셨는데 왜 이런 산골짜기를 골라 오셨어요?》

영옥이는 또 암팡진 질문을 했다.

《나는 바다에서 살았지만 늘 바다를 원망했어. 우리 집은 농사두 짓구 고기두 잡았어. 물론 우리 집만 그런것은 아니였어. 말하자면 우리 마을은 반농반어부락들이였지. 그러나 늘 생활들은 곤난했어. 일제와 지주에게 빼앗겼고 어장주와 어업회사의 선주들에게 빼앗겼으니깐…》

《그럼, 지금 부모님은 살아계셔요?》

영옥은 또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8. 15해방을 맞아 내가 도꾜에서 돌아오니까 아버지는 바다에서,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어. 내 형들은 징용으로 끌려간채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찬수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영옥의 얼굴빛은 흐린 날처럼 어두워졌다.

《말하자면 고향이라기보다는 타향같았지. 그래서 난 서울로 올라와 취직을 하려고 헤매였으나 누구 하나 나를 취직시켜주는 사람은 없었어. 도꾜에서는 그래도 내 그림이 입선이 되여 이름이 좀 났지만 고향에 돌아오니까 누가 날 알아주어야지. 난 얼른 우리 조선의 남북이 통일되여 독립이 되기만 기다렸지. 취직난은 심하고 생활문제는 절박했기때문에 나는 별별 일을 다했지. 소학교 교원, 간판쟁이, 수예사, 자수도안쟁이, 영화관 간판그리기… 그러다가 마리야녀학교에 취직되였던거야. 이젠 알았지?》

《정말 선생님이 그렇게 고생하신줄은 몰랐어요. 그럼 지금 고향에는 아무도 안 계셔요?》

《음. 일가집이 하나 있어. 5촌아저씨야. 그러나 알수 없어. 여러해동안 가보지 않았으니까…》

찬수의 이야기를 듣던 영옥은 잠간동안 명상에 잠기다가 갑자기 용기를 내여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생님, 정작 제가 알고싶은것은 쑥 빠졌어요. 왜 그건 말씀 안해주세요. 네?》

영옥은 갑자기 명랑해지며 깔깔 웃었다.

《뭘?》

《사모님 말씀이예요. 지금 어디 계셔요?》

찬수는 또 곤난한 질문에 부딪쳤다.

《글쎄, 그게 꼭 알고싶은가? 가르쳐주지. 고향에 있어. 어린아이가 주렁주렁 매달렸지. 자, 이젠 시원해? …》

찬수는 어느덧 쾌활하게 웃었다. 영옥이도 한바탕 따라웃었다.

그러나 웃음이 그친 뒤에는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침묵이 계속되였다.

이윽고 침묵을 깬것은 영옥이였다.

《이제는 선생님이 고생을 더 마셔야 해요. 그리구 큰 작품을 창작하셔야 해요!》

영옥의 어조는 어른처럼 대견하게 들렸다.

《글쎄, 그러나 난 이제부터가 정작 고난의 길에 들어선것 같애.》

찬수는 어느덧 우울한 표정에 잠기여버렸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러저러한 곤경보다도 앞으로 닥쳐올 곤경이 더 클것만 같아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에 사로잡히고말았다.

《… 걱정마세요. 선생님 복직문제는 우리가 끝까지 싸워서 꼭 승리하고야말터예요.》

찬수는 영옥이의 이런 심정이 아름다왔고 고맙게 생각되긴 했으나 그것은 역시 세상을 아직 모르는 너무나 순진한 처녀로서의 기분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난 면직당한 사실이 분할따름이지 다시 복직을 바라지는 않아!》

찬수는 자기 심경을 솔직히 말했다.

《선생님, 그건 안돼요. 면직당할 리유가 뭐예요. 선생님은 다시 복직하셔야 돼요!》

영옥은 찬수를 이렇게 격려하였다.

그러나 영옥이를 비롯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한다고 해서 자기가 쉽사리 복직될수는 없는 일이며 설사 된다치더라도 그러한 부패한 교육기관에 또다시 들어가 교원노릇을 한다는것은 량심상 도저히 허락할수 없는 일이였다.

《하여간 나 하나의 복직문제때문에 학생들이 희생되여서는 안돼.》

찬수는 이렇게 말은 했으나 영옥의 투지를 꺾고싶지는 않았다.

얼마가 지났다. 책상우의 사발시계가 한시를 가리키는것을 본 영옥은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는 마당에 널은 찬수의 와이샤쯔를 만져보았다.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그는 와이샤쯔를 걷어 개여들고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는 책상밑으로 깊숙이 손을 넣어 무슨 보자기 하나를 꺼내였다.

그것은 영옥이가 가지고 온 보자기였다. 그는 얼른 보자기를 끄르더니 그속에서 화려하게 장식한 자개박이찬합을 꺼내여 책상우에 가만히 놓는다.

《선생님, 이거 우리 어머니가 선생님께 드리는거예요. 선생님 구미에 맞으실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주셨어요. 제가 가거든 열어보세요.》

《아니, 그건 웬걸… 난 영옥이 어머님을 한번두 뵈러 가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정말 신용없으세요. 늘 오신다오신다 하시면서 어디 한번이나 오셨어요?》

《글쎄, 미안하게 됐어. 그러나 한번 꼭 가뵙지!》

《그럼 래일모레 꼭 오세요. 어머니는 늘 선생님 말씀을 하세요. 네가 앞으로 미술가가 되려면 그 선생님을 잘 받들어야 된다고 하시면서…》

영옥은 풀어진 보자기에 걷어온 와이샤쯔를 챙겨넣어 매듭을 맺는다.

《아니, 그건 왜 가져가? 그만둬.》

《풀해서 다려드릴테예요.》

《아니 그만둬, 이 집 할머니가 다해주는데 뭘 그래.》

《그렇지만 로인이 하시는게 오죽해요. 늘 선생님 와이샤쯔는 잘못 다렸던걸요. 목깃이 겹쳐지지 않으면 삐뚤어졌거나 살이 펴지지 않았거나…》

《난 그런거 별로 관심없으니깐… 그저 깨끗하면 그만이지 뭐…》

영옥이는 보자기를 들고 일어섰다.

《전 그럼 가겠어요. 맹휴문제때문에 2시에 동무들과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음. 그럼, 기왕 할바엔 침착하게 철저하게 해서 이겨야 돼, 응?》

《네. 념려마세요.》

찬수는 영옥을 격려하면서 그를 바래우려고 자하문고개까지 나왔다.

영옥이가 구부러진 산모퉁이길로 사라질 때까지 찬수는 자하문고개에 서서 손을 높이 들고 흔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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