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정열

3

 

영옥은 자기가 분담한 재학생 두명을 찾아보고 학교내 정세와 학생들의 동향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안 들어왔으나 어머니는 웬 일인지 얼굴에 기쁨을 띠우고 영옥이가 들어오자마자 《얘, 어서 외투를 벗고 아래목에 앉아라. 기쁜 소식이 왔다.》 하고 말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무슨 소식인데요?》

《뉘 오래비 소식을 알게 됐다. 어서 앉아라.》

《네? 정말이예요? 어디 있어요? 편지예요?》

영옥은 깜짝 놀라 외투를 벗다말고 그대로 서있었다.

《얘, 편지가 한장두 아니구 석장이나 왔단다.》

《어디 있어요? 어서 좀 주세요.》

영옥은 외투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어머니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어머니는 아래목에 깔린 담요밑에서 편지봉투를 꺼내여 영옥이에게 주었다.

편지는 우편으로 온 편지가 아니였다.

《아니, 이 편지는 누가 가지구 왔어요?》

《조금전에 만국이가 의정부에 갔다가 온다구 하며 가지구 왔더라.》

《아니, 그럼 오빠가 지금 의정부에 있단 말이예요?》

《아니란다. 만국이가 자기 사촌헌테 갔더니 이 편지를 우리한테 전해달라구 주더란다.》

영옥은 얼른 편지를 집어들었다. 묵직한 편지였다. 벌써 어머니가 뜯어 읽은 뒤였다. 영옥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속의 종이를 꺼냈다. 영옥의 가슴은 이 순간 파도처럼 출렁거리였고 떨리였다.

봉투안에는 편지종이 두장과 꼭 봉한채 뜯지 않은 봉투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 봉투에는 《영옥이 보아라》라고 씌여있었다.

영옥은 어머니가 자기앞으로 온것이라고 해서 그대로 둔것이 몹시 고마왔다.

두장의 편지중 한장은 《아버님 전상서》라고 씌여있고 또 한장은 《어머님 전상서》라고 씌여있었다.

영옥은 먼저 자기앞으로 온 편지를 읽고싶었으나 먼저 눈에 띄인 아버지앞으로 온 편지를 들었다.

《얘, 아버지가 그 편지를 보시면 무척 반가와하실게다. 뉘 오래비가 원래 편지두 잘 쓰느니라.》

어머니가 오빠를 칭찬했으나 영옥은 편지내용에 정신이 쏠려 그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영옥은 편지를 읽어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 아버님! 이 불효자식은 행방불명이 되고 딸은 학교도 못 다니게 되고 공장은 아버님 맘대로 운영이 안되고… 이것이 다 누구때문입니까? 만일 지금 공장문을 닫으셨고 집안생활이 곤난해지고 몰락이 되였다면 이것이 다 누구때문입니까? 이 자식이 아버님과 어머님을 뵈려 집에 못 들어가고 또 소식조차도 이제야 겨우… 그것도 우편으로 못 보내드리고 다른 곳을 통해 인편으로 보내드리게 된것이 누구때문입니까?

아버님! 아버님은 그동안 절실히 느끼셨고 깨달으셨을줄 압니다. 아버님! 지금 우리 땅에서 미국놈만 물러나가면 우리는 그날로 바로 평화통일이 될수 있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수 있습니다.

이 자식이 지난날 아버님의 꾸중을 사던 일도 실상은 평화통일을 위한 생각에서 한짓이였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평화통일을 위한 일에 몸을 바칠 각오이오니 너무 념려마시고 이 자식의 장래에 대하여 기뻐해주시기 바랍니다. …》

영옥은 편지구절을 대강 읽고나서 자기에게 온 편지봉투를 부리나케 뜯었다.

그는 급한 마음에 편지를 뽑아서 펼치기가 바쁘게 서두부터 읽어내려가지 않고 먼저 중간중간 뛰여넘기며 내용을 훑었다.

《… 그동안에 네 소식은 신문을 통하여 알고있었다. … 이번 전라도 어느 농촌에서 우연히 홍찬수씨를 만나 그를 치료해주었다. …》

영옥은 깜짝 놀랐다. 가슴은 어느덧 금방 터질듯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다음 장으로 시선을 옮기였다.

《… 홍찬수씨는 믿을만 한 사람이다. 그는 너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고있는것 같다. 앞으로 너는 꼭 그의 지도를 받아야 할것이고 또 너의 장래문제도…》

이런 구절에 이르자 영옥의 얼굴은 갑자기 화끈해오르며 가슴은 더욱 두근거려졌다.

《… 그리고 너의 학교가 아직도 그 일에서 큰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있는것만큼 너희들은 힘을 합쳐 승리를 얻도록 노력하여라. 오빠두 뒤에서 협조해줄테다. …》

영옥이가 채 읽기도 전에 어머니는 갑갑했던지 《얘, 왜 너 혼자 속으로만 읽니? 좀 크게 읽어봐라.》 하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오빠가 글쎄 홍선생을 치료했대요.》

《뭐? 어디 좀 보자. … 그게 웬 소리냐? 내가 좀 속시원하게 읽어봐야겠다.》

어머니는 편지를 다 읽고나더니 빙긋이 웃으며 영옥이에게 편지를 돌려주었다.

《그러기에 네 오래비가 내게 한 편지에 그런 말을 썼구나.》

영옥은 그 소리가 무엇을 말하는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되였으나 궁금하여 어머니앞으로 온 편지를 읽으려 하였다.

《안된다. 내 편지는 읽지 말아.》

어머니는 웃으며 편지를 잡아챘다.

《아이유, 어머니두… 그럼 왜 어머니는 내 편지를 읽으셨어요?》

영옥이도 방그레 웃으며 어느 틈에 화닥닥 어머니손에서 편지를 잡아챘다.

그는 어머니에게 다시 빼앗길가봐 편지내용가운데서 자기와 관련된 구절만을 찾아 읽어내려갔다.

《… 영옥이의 결혼문제에 대하여서는 아직 급작스럽게 서둘지 마시고 어디까지나 영옥이의 의사를 존중하여야 하며 영옥이자신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어야 할것입니다. 영옥이는 이젠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또 보통 평범한 아이가 아닙니다. 영옥이의 소질을 살려 반드시 앞으로 훌륭한 미술가로 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영옥이를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홍선생의 지도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

영옥은 이런 구절을 발견하자 다시 얼굴이 화끈해올랐다.

오빠가 이렇게까지 자기의 결혼문제, 장래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깊을줄은 몰랐기때문이였다.

《그래, 읽고나니 속시원하니? 아버지가 오시거든 네 편지와 내 편지는 보여드리지 말자. 아버지의 눈치를 떠보기 전엔 이런 편지를 내놓으면 안되겠다. 아버지는 지금 네 신랑감을 하나 구해달라구 누구에게 부탁하신 모양이더라.》

어머니는 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유, 어머니두! 그런 때는 왜 아버님 하시는 일에 반대 안하시구 가만히 계세요?》

영옥은 펄펄 뛰며 나섰다.

《반대를 안해두 안될 일이니깐 가만있지 뭐냐. 지금 집안형편이 네 결혼문제를 끄집어낼 때냐?》

《그러니깐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셔야 해요. 있다 아버지가 오시면 어머니께 온 편지두, 내게 온 편지두 다 보여드리세요.》

《아따 고년, 오래비 편지를 받더니만 갑자기 기가 나서 야단이구나.》

어머니는 가볍게 영옥에게 핀잔을 주었으나 실상은 자기도 생기가 솟는것만 같고 기쁨을 감출수 없을것 같았다.

얼마후 대문이 열리며 손종모가 들어왔다.

그는 아들의 편지를 받자 긴장속에서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마누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식은 된 놈이요. 그동안 내가 너무 그놈을 욕질하고 죽일놈 살릴놈 해가며 가루꿰진다구 야단친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우둔하고 어리석었기때문이요.》

손종모는 잠간동안 말을 끊고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듯 하더니 이윽고 무게있는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우리 식구뿐아니라 전체 민중이 살길은 그 자식 말대루 미국놈이 물러가고 평화통일이 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소.》

《그러기에 소금먹은 놈이 물 먹는다구 그애가 그래두 중학교때부터 사상이 옳바루 선 아이요. 그애가 나모르게 책인들 좀 많이 읽었소. 다 이제 큰일을 할 자식이요.》

어머니가 자랑삼아 말했다.

《… 원, 그놈이 그래두 속이 애비보다 낫군. 내게 그렇게 천대를 받은 놈이 애비라구 편지를 하니 말야! 허허허… 그저 어디 있든 제몸이나 안전하게 있으면서 제 말대루 평화통일을 위해서 일을 한다면야 집에 안 들어오기로서니 상관있나…》

《그렇지만 그 자식이 객지로 떠돌아다니니 얼마나 고생이 많겠소.》

《소년고생은 사서 하랬다오. 그게 다 이 다음에 자랑삼아 옛말하게 될게 아니요. 허허…》

손종모는 만족스럽게 껄껄 웃었다.

영옥은 아버지가 편지를 읽고 태도가 달라진것을 보자 가슴이 뻐근해오도록 기뻤다.

아버지가 이제는 확실히 오빠의 일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것이 몹시 놀랍고 충격적이였기때문이였다.

《그래, 오늘두 이웃녀자들 집에 왔다갔니? 바깥소문이 아주 좋더구나.》

아버지는 영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은 공일이라 쉰다우. 그런데 상점일은 어찌됐수? 잘 팔립디까?》

어머니가 화제를 돌리며 령감을 바라보았다.

《글쎄, 천신만고해서 점포를 벌렸는데 그 망할놈들이 그 근방에 또 철거령을 내리고 함부로 도끼, 쇠몽둥이, 쇠갈구리들을 가지고 와서 점포들을 막 파괴하는구려. 그러니 여태까지 몇사람이 모여 해논 일이 허사가 되고말았지 뭐요.》

손종모의 얼굴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영준이의 편지로 말미암아 기쁨과 반가움에 넘치던 분위기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영옥이도 어머니도 얼굴에 걱정과 불안이 피여올랐다.

손종모는 그동안 자기와 처지가 같이 된 사람들끼리 생계를 위하여 의논한 끝에 중앙시장 어느 한 귀퉁이에 조그만 점포를 빌려 《농산품상점》을 경영하기로 하고 농촌지대에서 농민들이 수공품으로 만들어오는 비자루, 돗자리, 삼태기, 방망이, 새끼, 방석, 바구니, 버들상자, 싸리발, 이남박, 드레박줄, 빨래줄 등을 위탁판매도 하고 도매, 소매도 하기로 하였던것이다.

《흥, 안되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여진다고 개업한지 불과 사흘만에 이 지경이 되였으니 어떻게 한담.》

《아니, 그놈들이 이 추운 겨울에 철거령을 내리면 다 얼어죽으란 말인가?》

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놈들이 무슨 절기를 가린답디까? 구실은 무허가건물, 불량건물이라구 철거령을 내렸지만 실상은 그 근방을 말짱 철거시키고 또 미군의 군용건물이 들어앉을 모양이야.》

손종모는 서글프게 한숨을 내쉬였다.

《아버지, 서울시내 큰 건물은 다 몰수해서 군용건물로 쓰는 판에 뭐가 부족해서 또 시장점포까지 철거령을 내려요?》

영옥이도 울분을 터뜨렸다.

《점포만 철거령을 내리면 약과지. 개천가 궤짝집들도 수백호가 이번에 철거를 당했다. 이 추운 겨울에 당장 철거를 당한 주민들이 한지에서 밤을 새워가며 얼어죽고 굶어죽게 됐으니 이런 일이 어디 또 있겠니? …》

아버지는 한탄조로 말하며 한숨을 내쉬였다.

얼마후 영옥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흥분된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는 오빠 영준이의 소식을 알게 되였고 오빠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것이 한없이 기뻤고… 또 홍선생과 오빠가 시골에서 만난 사실을 알게 된것이 더욱 기뻤으나 지금 홍선생이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어 몹시 안타까왔다. 뿐만아니라 마리야녀학교 연회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살한 오영애와 안혜란의 죽음이며 앞으로 며칠후면 열릴 성탄절 밤의 그 저주스러운 연회… 철거령을 받아 페업하게 된 아버지의 일, 철거를 당하여 갈데올데 없이 한지에서 추운 이 겨울밤 하늘을 이불삼아 지새울 굶주리고 헐벗은 주민들의 참상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신음소리와 아우성소리가 귀에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영옥은 이처럼 흥분되고 고조된 감정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룰수 없었던것이였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0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