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문고개

3

 

골짜기에 비치는 해볕은 바람 한점 없이 따뜻하였다.

단풍이 들어 떨어진 감나무잎을 바시락바시락 밟으며 세면대야에 빨래감들을 담아든 영옥은 물소리가 들리는 골짜기로 내려갔다.

유리알처럼 맑은 물이 졸졸 흘러 푸른빛을 띠고 제법 큰 웅뎅이를 이룬데도 있었다. 하얀 바둑돌이며 굵은 차돌이 흐르는 물밑에 깨끗하게 깔려있었다.

울긋불긋 곱게 물든 단풍나무가지가 웅뎅이에 고인 맑고 푸른 물우에 멋들어지게 축 처진 그림자를 또렷이 비치고있었다.

그것은 흡사 한폭의 그림이였다.

영옥은 빨래돌이 놓인 곳으로 가까이 갔다.

그는 깊은 웅뎅이의 물에 자기의 상반신이 거울처럼 비치자 잠간동안 자기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둥그스름한 아래턱, 불그스레한 두뺨, 밝게 빛나는 두눈, 꼭 다문 조그만 입… 모든것들이 자기 아닌 딴 처녀의 얼굴을 보는것처럼 황홀하게 예뻐도 보이였고 또 대견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얼굴에서 어느 틈에 소녀의 티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랐으며 또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하고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갑자기 단풍잎 하나가 고요한 수면에 떨어졌다. 가벼운 파문이 일었으나 《거울》은 그만 깨여지고말았다.

그는 맑은 물에 빨래를 담가놓고 빨기 시작하였다.

그는 오늘 웬 일인지 홍선생의 빨래를 해주고 가야만 할것 같은 충동을 느껴 홍선생이 굳이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벽에 걸린 헌옷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밖으로 휙 나와버린것이였다.

영옥은 오늘 홍선생에 대하여 왜 이런 친절한 감정이 일어난것인지 자기자신도 얼른 알수 없었다.

홍선생이 다만 자기의 미술공부를 지도한 선생으로서 존경하는것으로 그쳐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날 밤 만일 홍선생이 아니였다면 자기는 야수와 같은 미군장교놈에게 끌려가 어떤 모욕을 당했을것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영옥은 몸서리가 쳐지군 했다.

물론 오늘 홍선생을 찾아온 목적이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빨래를 해주려고 온것은 아니였다.

그는 자기때문에 면직처분을 당한 홍선생을 위로하기 위하여 온것이였으나 막상 와서보니 홍선생의 하숙생활은 너무도 곤난해보이고 또 쓸쓸해보였던것이다.

주인집로파가 얼마나 솜씨가 있고 깨끗한지는 몰라도 그는 세면대야를 찾다가 부엌을 들여다보고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멍이 들고 때국이 낀 밥사발, 이가 빠진 대접, 별로 닦은적이 없어보이는 누런 숟가락들, 물때가 앉아 시커먼 바가지들, 덮지도 않고 열어놔둔 먹다남은 반찬그릇들, 그우에 달라붙은 파리떼들…

영옥은 홍선생이 왜 이런 집에 하숙을 정했는지 실로 의문스러웠다.

물론 복잡하고 좁은 시내보다 조용하고 넓은 화실을 가질수 있으나 이런 불결하고 쓸쓸한 곳에 하숙을 정했다는것은 그만큼 무탈하고 소박하고 까다롭지 않은탓인가?

만일 자기 집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 홍선생을 자주 모셔다가 식사를 대접하고싶고 또 빨래도 계속 해드리고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어났다.

영옥은 왜 이런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되는지 자기도 잘 알수가 없었다.

영옥은 빨래를 다해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마당에 널었다.

《저런… 하이칼라아가씨가 빨래두 아주 얌전히 했군.》

주인로파는 감을 따가지고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빨래해드리기에 수고하시죠. 할머니?》

《수고랄게 있소. 선생님이 어떻게 얌전한지 양말이나 속옷 같은건 꼭 자기 손으로 빨지 날 안 준다오. 그런데 아가씨는 선생님허구 어찌되오?》

로파는 영옥의 귀에 대고 은근히 묻는다.

《우리 선생님이예요!》

《음, 그래? 난 혹시 선생님허구 약혼이라두 한 아가씬줄 알았지.》

영옥은 수다스러운 로파가 약간 얄밉기도 했으나 그 말이 그렇게 불쾌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 선생님 진지해드리기에 얼마나 힘이 드세요.》

《힘들게야 뭐 있나. 선생님이 까다롭지 않고 한집안식구처럼 지내니깐 그저 된장 한가지만 놓아드려두 내색을 안하시고 잘 잡숫는다우. 원, 산골짜기 외딴집이 돼서 때마다 반찬을 사다 대접할수도 없고… 정말 선생님께 미안할 때가 많다오.》

주인로파의 미안해하는 말투로 보아 홍선생이 이 집에서 식생활까지도 곤난하다는것이 넉넉히 짐작되였다.

《우리 선생님은 보통 선생님과 다른분이예요. 그림을 늘 그리시는데 여간 정신이 쏠리지 않거든요. 그러니깐 좀 잘 대접해주세요. 반찬은 미리 한꺼번에 사다놓구서…》

《글쎄, 그래야 할텐데 선생님에게서 돈을 받으면 그저 가난한 살림이라 당장 다 써버리게 되고만다우.》

영옥은 로파와 이야기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찬수는 책상우에서 속사첩을 정리하고있었다.

《결국 영옥이가 오늘 내 빨래를 해주려고 온것으로 되고말았구만. 허기야 빨래두 할줄 알아야 하니깐…》

《아이참, 선생님두. 집에서 빨래를 안하는줄 아세요?》

영옥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방긋이 웃었다.

《참, 영옥이. 오빠소식은 없어?》

찬수는 궁금한 표정으로 영옥을 바라보았다.

《소식이 있을게 뭐예요. 어머니는 늘 걱정하시던 끝에 지금은 아주 병환이 나셨어요.》

영옥의 얼굴은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글쎄, 그야 걱정되시겠지. 그러나 영옥의 오빠만 그런게 아니니깐…》

《그렇지만 식구라군 오빠까지 해서 단 네식구였었는데 이제는 부모님하구 저하구 셋밖에 안되니깐 집안이 여간 쓸쓸한게 아니예요.》

찬수는 영옥이 오빠를 본 일은 없었으나 그가 금년봄 의과대학에서 강제징병을 반대하고 동맹휴학을 일으킨 주동인물의 한사람이라는것만은 잘 알고있었다.

《오빠가 지금 어디 가있는지 생각할수록 불안해요. 앞으로 겨울은 닥쳐오는데…》

《그래, 아버지의 사업은 잘되여나가?》

《이젠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어요.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공장문을 안 닫으려고 애쓰시지만 잘될것 같잖아요.》

《…》

찬수는 잠간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영옥이네 공장만 그런게 아니니깐…》

《그런줄은 알지만 우리 집은 결국 공장때문에 망하게 됐어요. 생각하면 우울하기만 해요. 오빠는 행방불명이 되고 어머니는 병환이 나고 아버지는 공장이 망해들어가니깐 화만 내시고…》

《그런 환경속에서도 영옥이는 난관을 극복하고 나가야지!》

찬수는 어느 틈에 영옥을 위로하는 립장에 서게 되였다.

영옥은 자기 집 이야기를 벌려놓아 공연히 찬수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한것 같아 얼른 화제를 돌리였다.

《그런데 선생님!》

《음?》

《선생님은 왜 이렇게 하숙생활만 하세요? 고향에서 사모님을 모셔오지 않고…》

영옥의 질문을 받은 찬수는 갑자기 당황하였다.

아직 미혼인 자기에게 이런 맹랑한 질문을 하는 영옥이에게 무어라고 대답을 해주어야 좋을지 몰라 그는 그저 웃어버리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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