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여진 꿈

6

 

박춘식은 자기의 심복인줄로만 알았던 경찰서장마저 실상은 도난사건을 기회삼아 엉뚱하게 제 리속을 차리는 멀쩡한 도적놈이란것을 깨닫게 되였을 때 한없이 분했다.

그는 압수한 물품으로 밑천을 건지려 했으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 되고말았다.

이미 자기가 망하게 된 틈을 타서 교묘하게 제 리속을 차리는 심복을 어찌 믿고있겠는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경찰서를 다녀오는 길로 바로 차를 몰아 《한국산업사》 지배인을 만나러 갔다.

전 같으면 전화로 부를것이지만 오늘은 자기가 직접 장부를 검열하고 현금을 대조해보려 함이였다.

그러나 지배인은 사에 없었다.

《벌써 퇴근했소?》

박춘식은 사무실로 들어가 경리과장을 불렀다.

《오늘 지배인어른 출근 안했습니다.》

《출근을 안하다니?》

《어제 오후에 사장어른 뵈려구 별장에 나가시지 않았어요?》

《오지 않았어.》

《그래요? 어제 현금을 가지구 사장댁에 간다구 갔는데요.》

《뭐, 뭐? 현금을? 그래 얼마나?》

《어제 은행에서 2천만환 찾아온것 다 가지고…》

《뭐?》

박춘식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 정말 모르세요?》

《…》

박춘식은 전신에 진땀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머리속이 핑 돌았다.

그는 어느 틈에 이를 앙다물고 눈을 지그시 감으며 땅이 꺼지는듯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두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입을 열었다.

《어서 경찰에 고발하오. 회사 돈을 횡령해가지고 도주한 모양이요.》

《네? 정말 그랬을가요?》

《틀림없소. 어서 고발하오. 세상에 믿을 놈이 없군. 허허허.》

박춘식은 장부검열과 현금대조를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아 그대로 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대한공익사》로 달려갔다.

벌써 문이 잠기고 아무도 없었다.

그는 《대한공익사》도 믿을수 없어서 이리저리 지배인을 찾아다니였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말았다.

웰톤에게 주금을 송두리채 먹힌것도 분한노릇인데 《한국산업사》의 거액의 자금까지 횡령당했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노릇인가?

그는 도저히 맑은 정신으로는 울화가 치받쳐 견딜수 없었다. 그는 독한 술에 취한 다음 밤이 늦어서야 자기 집으로 향하였다.

서울의 도심지대인 수송동에서도 아담하고 화려한 그의 주택에는 현재 그가 데리고 사는 기생첩이 있었건만 오늘따라 그 녀자도 달갑게 생각되지 않았다.

사흘만에 집에 돌아오는 그였으나 반가이 맞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자기가 망하게 된 눈치들을 챈것인지 행랑지기도 또 하녀도 고분고분하게 인사를 하는것 같지 않았다.

그가 마당에 들어섰을 때 집안은 웬 일인지 그전과는 다르게 휑하니 찬바람이 도는것만 같았고 또 어떤 불길한 일이라도 있는것만 같았다.

전 같으면 대문밖에서 자동차소리가 나면 의례 기생첩이 나와 자기를 맞아주었건만 오늘은 자기가 비틀거리며 마당에까지 들어가도 아무 소리가 없는것으로 보아 정녕 이 계집도 자기를 업신여기는 수작임이 틀림없다.

《얘, 아씨 안 계시냐?》

박춘식은 자기를 부축해주는 하녀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안 계셔요.》

《뭐? 어디 갔니?》

《어제 어디 잠간 다녀오신다구 나가셨는데요.》

《어제? 그래, 혼자 나갔니? 누가 와서 같이 나갔니?》

《어제 산업사 지배인어른이 와서 같이 나갔어요.》

《뭣이 어째?》

박춘식은 부르르 치가 떨리였다.

그는 성큼 방안으로 다가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방 웃목에 놓인 장농과 거울달린 양복장이 거의 못쓰게 파괴되여있었고 방바닥에는 거울쪼각이 흩어져있었다.

《아니, 대체 이게 어찌된 셈판이냐?》

박춘식은 기가 막혀 주춤하고 서서 하녀를 불렀다.

《어제 아침 계동댁아씨가 와서 그렇게 부셨답니다.》

《뭣이 어째? 그럼 왜 치워내지두 않았단 말이냐?》

《아씨가 나가시면서 방 치우지 말고 그대루 두라구 말씀하셨어요.》

하녀는 방으로 들어가 깨여진 유리쪽을 쓸어모으는 등 허둥대기 시작했다.

박춘식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계동댁아씨란것은 그가 기생첩을 얻기 전인 작년까지 같이 살던 학생첩을 말하는것이다.

《망할년들 같으니… 계집년들이 늘 방정을 떨어대니 집안일이 될게 뭐야.》

그는 한탄조로 말하면서 전화가 있는 건너방으로 들어가 안락의자에 덥석 앉더니 우이동별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얘, 미라냐? 너 거기 차있니? 없어? 차 내보낼테니 어서 좀 들어오너라. 뭐? 어째? 그만둬라. 망할년 같으니…》

박춘식은 전화를 탁 끊어버리고는 의자에 앉은채 고개를 수그리고 무엇인가 한참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 승용차를 탔다.

박춘식은 곧바로 차를 우이동별장으로 내몰았다.

《너는 도대체 어찌된 아이기에 집안일에 그렇게 무관심하니? 산업사 지배인녀석이 돈 2천만환을 횡령해가지구 수송동계집을 데리구 도주한것두 모르니?》

《뭐라구요? 잘됐군요. 망하는김에 아주 철저히 망하는군요.》

미라는 서글프게 웃었다.

박춘식은 쏘파에 비스듬히 기대인채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얘, 너 왜 남의 말하듯 하니? 결국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그따위 소리를 하니? 응? 이게 다 네가 잘못 생각한탓이야.》 하고 퉁명스럽게 질책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태도가 달라지며 《얘, 미라야! 내 말 좀 듣거라. 이제는 믿을 사람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어디 또 있니? 네가 나를 살려다오. 네가 웰톤씨를 한번만 더 만나거라. 웰톤씨는 너를 역시 사랑하고있더구나.》 하고 거의 비명을 올리듯 애원하였다.

《그건 다시 만나 뭘 해요. 아버지의 주권은 그자들의 수중에 벌써 넘어갔어요.》

미라는 아버지가 어리석다는듯이 코웃음을 치며 입을 비죽거렸다.

《아니야, 아직 그렇지 않아. 네가 가기만 하면 일이 잘 풀릴것이다. 웰톤씨가 무슨 내 돈이 욕심나서 그러는게 아니야. 결국 너때문이야. 네가 지금이라도 가서 웰톤씨의 마음을 풀어만 놓으면 내 주권이 넘어갔다치더래도 다시 찾는 방법이 또 있다. 그렇게만 되면 그까짓 산업사가 망해두 좋고 수송동계집이 도망을 갔거나말았거나 그까짓것 아까울것 없단 말이야. 제발 너 이 애비를 살려라. 이번 주권만 다시 찾는 날이면 산업사나 공익사를 아주 네 명의로 떼여주마.》

박춘식은 술에 취하였으나 정신은 말뚱말뚱한 모양인지 여전히 미라에게 간절히 애원하였다.

미라는 이 순간 아버지가 이렇게 딸의 앞에서까지 비굴할수가 있을가 하고 생각되자 몹시 서글펐다.

아버지는 자기가 웰톤을 찾아가 아양을 떨고 웃음을 팔면 단번에 주권을 다시 찾을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미국인의 성질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느껴졌다.

《아버지, 쓸데없는 공상마시구 어서 약주가 깰 때까지 주무세요. 이제는 벌써 때가 늦었어요. 모두가 사라진 무지개예요.》

미라는 이렇게 명백히 말해버리고나서 침대우에 침구를 깔아놓고 자기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박춘식은 각각으로 취해오르는 술기운에 못이겨 침대우에 옮겨갈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쏘파에 쓰러져버렸다.

그러나 얼마 안되여 그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몸을 비틀거리며 마치 미친 사람모양으로 중얼거렸다.

《… 웰톤선생, 웰톤선생, 나를 구해주시오. 너무도 억울하외다. 나는 한미무역사에 내 재산을 거의다 바쳤쇠다. 웰톤선생! 미라를 사랑해주시오. … 이번 선거에 재선이 되게만 해주시오. 나는 미국을 위해서 지금까지 충실히 복무했고 또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겠쇠다. 웰톤선생, 나를 구해주시오. 나를 구해주오…》

그는 마치 자기앞에 웰톤이 앉아있는것처럼 애원을 하다가 그러나 그 웰톤이 자기를 비웃으며 창문밖으로 피해나가는것 같았던지 《아, 웰톤선생, 웰톤선생!》 하고 유리창있는 벽쪽을 향하여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인차 유리창에 이마를 탁 부딪쳤다.

이 순간 유리창이 깨여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박춘식은 몸의 중심을 잃고 날카로운 유리쪼각이 흩어진 마루바닥에 정신없이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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