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여진 꿈

5

 

박춘식은 이틀동안 별장에 그대로 누웠다가 사흘만에야 겨우 일어났다.

독한 술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마셨던 후과로 술병이 났던탓도 있었지만 이번 일을 생각하면 너무도 억울하게 바가지를 쓰고 나자빠지게 된 자기가 한편 어리석기도 했고 또 분하기도 했으며 또 차라리 일찍 사표를 내지 못한것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려 일어나긴 했으나 앞으로 자기 일을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고 또 기가 막히였다.

미라가 웰톤을 만나 애걸을 했다 하나 그것도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는 자기의 주권이 속절없이 모두다 웰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말게 된것을 생각했을 때 지난날의 모든 부귀와 영화가 한낱 꿈같기도 하고 사라진 무지개같기도 했다.

지난날에는 일제에게 충실히 복무함으로써 리권을 얻어 치부하였고 그뒤를 이어 미제가 남조선을 강점한 후에는 미제에게 아부굴종함으로써 《국회》의원이 되였고 또한 실권은 웰톤이 쥐였지만 누구나 부러워하고 탐을 내는 《한미무역사》 사장자리까지 차지했던 버젓한 자기였건만 이제는 《국회》의원도, 사장자리도 자기와는 인연이 멀어져가는것이나 아닌가 생각되였다.

나머지 재산이라고는 이제 자기 주택과 별장과 소규모로 정리해버린 《한국산업》, 《대한공익》 이외에 약간의 동산이 있을뿐 무엇이 더 있단 말인가?

박춘식은 생각할수록 서글프고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수만석군이 갑자기 수백석지기로 떨어져버릴 때에 느끼는 환멸과 비애! 아득히 높은 정자에서 흥겨워 놀던 취객이 별안간 실수를 해서 비류직하 3천척의 낭떠러지로 꺼꾸로 떨어져버린것 같은 아찔하고도 절망적인 심정이 그의 머리를 더욱 괴롭게 했다.

자기 재산을 거의다 털어넣어 겨우 확보한 사장자리가 이렇게까지도 억울하고 허무하게 몰락될줄이야 누가 꿈이나 꾸었던가?

과연 누구때문에 이렇게 일조에 망하게 되였나 생각해보았지만 웰톤과 스틸맨사이에 벌어진 더럽고도 악랄한 금력쟁탈전에 애매하게도 자기가 희생물이 된것임을 알수 없었던 그는 딸 미라가 원망스럽고 밉기만 했다.

미라가 자기 말을 잘 듣지 않고 스틸맨을 멀리하기 시작했기때문에 그 화근이 바로 자기에게 미친것이라고만 생각되였다.

미라가 웰톤에게 가깝게 굴었던들 웰톤이 그렇게까지 자기를 몰락시키지는 않았을것이며 또 스틸맨이 아무리 악랄한자라치더라도 자기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창고를 그렇게도 잔인하게 습격해 털어갈리 없지 않을가? 그는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마다 미라를 집에 붙잡아놓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제는 미라를 믿고 그를 앞장세울게 아니라 자기자신이 웰톤에게 애걸복걸해서 다만 얼마라도 공제를 적게 당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은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든지 다음 민의원선거에서 재선이 되여야 할 자기가 아닌가?

어떻게 해서든지 선거때까지는 사장자리를 확보해야만 할 자기가 아닌가?

어떻게 해서든지 도난물품을 다만 얼마라도 찾아서 손해를 보충해야 할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두서없이 용솟음쳐오르자 그대로 별장에만 누워있을수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옷을 주어입고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그가 《한미무역사》정문앞에 이르렀을 때 상품을 차압당한 상인들이 수십명이나 모여서서 그를 면회하려고 기다리고있었다.

박춘식이가 사장실로 들어가자 뒤미처 5~6명의 상인들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래, 나를 면회할 리유는 무엇들이요?》

박춘식은 거만하게 상인들을 내려다봤다.

《아니, 대체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경찰은 덮어놓고 들이덤벼 상품궤짝들을 압수해갔는데 귀사에서는 얼른 그것이 귀사의 물건이 아니란것을 립증해서 돌려주어야 할게 아닙니까?》

한 상인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글쎄, 그건 우리 회사의 립장으로서는 곤난하외다. 경찰에서 그런 요구가 아직 없는 이상 우리가 먼저 그것을 요청할수는 없쇠다. 경찰에 가서 잘 말해보시오.》

박춘식은 랭정하고 강경하게 말했다.

《글쎄, 그건 당신네 회사측만 생각한것이지 우리 상인들의 립장두 생각해줘야 할게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닌밤중에 홍두깨두 분수가 있지… 강도질은 딴 놈이 하고 물건은 딴데다 처분했는데… 왜 하필 만만한 우리 장사치들만 녹이려드는겁니까?》

상인 하나가 화를 내며 쏘아붙이였다.

《좌우간 당신네 회사에서 누구든지 한두사람 나가 우리 물건 다 찾아 돌려주구려.》

한 상인이 또 요구해나섰다.

《나는 당신네 요구대로 그렇게 할 권리도 없소. 경찰에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는 압수한 물건을 반환하지 않을것이요.》

박춘식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들의 손해쯤이 무슨 큰 손해냐라는듯이 그의 태도는 더 교만하고 랭정하였다.

《아니, 물건 못 찾아주겠단 말이요? 어디 봅시다. 만일 당신네 상품이 아닌데두 당신네 상품인체 하고 인수하거나 립증을 회피한다면 문제는 더 악화될테니깐 알아서 처리하시오. 당신네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우리 몇사람뿐인줄 아시우? 힝.》

한 상인이 암팡지게 을러댔다.

그러나 박춘식의 귀엔 그 소리가 무섭게 들리지 않았다.

상인들은 좀처럼 물러가지 않고 계속 따지기 시작했다.

정문밖에서 기다리던 상인들까지도 하나둘씩 모여들어 박춘식의 방문앞에는 형세가 자못 험악해졌다.

박춘식은 슬그머니 일어나 상인들을 피하여 웰톤의 방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웰톤은 박춘식이가 들어가자 류달리 반가운 표정을 보이며 《오오- 미스터 박, 어서 오시오.》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웰톤선생, 미안합니다. 이틀동안이나 몹시 앓았습니다.》

《오오, 당신 몸 조심하시오. 당신 몸 매우 피곤해뵙니다. 당신 계속해서 우리 회사 나오십시오. 당신 사표낼 생각마시오. 당신에게 새로 다른 높은 지위 주겠습니다.》

웰톤은 인간미가 있는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박춘식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얼굴이 화끈해올랐다.

이렇게 자기가 모욕을 당해보기는 비로소 처음인것 같았기때문이였다.

《… 새로 다른 높은 지위를 주겠다.》는 말은 벌써 자기를 사장자리에서 파면시켰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주권이 없어지면 중역이 될수 없고 따라서 사장이 못되는것이지만 이렇게 벌써 변상액을 자기 주권으로 바꿔 정리한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예견했던 일이지만은 전신에 맥이 홱 풀리고말았다.

《웰톤선생, 너무 억울합니다. 나는 이제 파산입니다. 낯을 들고 세상에 다닐수 없습니다.》

박춘식은 비명을 올리며 애원했다.

《미스터 박, 당신 념려마시오. 당신 우리 회사 위해 일 많이 했습니다. 당신 걱정없습니다. 높은 자리 주겠습니다.》

웰톤은 여전히 박춘식을 어린아이 달래듯 달콤한 말로 달래였다.

박춘식은 그 소리가 달갑게 들릴리 없었고 도리여 일종의 모욕감을 느꼈으나 그 기색을 얼굴에 나타낼수는 없었다.

박춘식은 거의 생기를 잃은 표정으로 웰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웰톤선생, 나 높은 자리보다도 미라를 선생이 데려다 지도해주시오. 그것이 웰톤선생에게 드리는 나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뿐만아니라 그것은 미라의 유일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웰톤선생은 미라를 사랑하시지요? 미라도 웰톤선생을 잊지 않고있다는것을 알아주십시오.》 하고 애걸했다. 최후수단으로 미라를 웰톤에게 아주 제물로 바치려 한것이였다.

그러나 웰톤은 의외로 랭정해지며 《미스터 박, 당신 그 마음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미라 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미라 우리 미국사람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나, 미라 사랑할수 없습니다. 하하하…》 하고 싸늘하게 비웃었다.

《웰톤선생, 그렇지 않습니다. 미라가 선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니 그건 말이 안됩니다. 스틸맨대좌와 접근하기를 피한것은 선생을 사랑하기때문입니다. 미라는 지금 선생이 부르기만 기다리고있습니다.》

박춘식은 이미 망하게 된 판이니 미라도 아비의 말을 들어주려니 생각하고 웰톤의 마음을 사려 한것이였다.

그러나 웰톤은 그 말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고 시계를 들여다보고있었다.

박춘식은 더 앉아있을수 없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상인들은 여전히 버티고 서있었다.

《사장어른, 어찌할 셈판입니까?》

한 상인이 흥분된 어조로 따졌다.

《나는 이미 이 회사의 사장이 아니요. 내게 그런걸 묻지 마우.》

박춘식은 침통한 어조로 말을 하더니 책상우에 놓인 전화기를 들고 어디로엔가 전화를 걸었다.

《… 서장이요? 나요. 그래 얼마나 되오? 뭐 터무니없어? 대부분을 어떻게 했다구? 돌려주었어? 그래, 뭐? 1할두 못돼? 흥, 그만두.》

박춘식은 화를 왈칵 내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는 부리나케 외투를 입더니 모자를 집어썼다.

그러나 전신의 맥은 이미 풀려버렸고 눈앞은 캄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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