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여진 꿈

1

 

눈이 제법 깊게 쌓였다. 우이동 별장이 있는 산골에도 흰눈이 뒤덮여 산비탈 신작로는 자동차래왕이 꽤 불편하게 되였다.

동지가 가까와진 해볕은 얇을대로 얇았고 추위는 본격적인 고비에 올라섰다.

찬수가 그리다가 중단된 벽화 《청룡황룡도》는 아직도 그대로 미완성인채 남아있었고 복도에는 얇은 먼지까지 덮여있어 별장 내부는 매우 스산하고 쓸쓸하였다.

스틸맨의 만행사건이 발생된 이후 한달이 훨씬 넘었건만 이 별장에는 미라가 별로 붙어있지 않았던 관계로 자주 들랑거리던 웰톤도 스틸맨도 김치선이도 거의 발걸음을 끊다싶이 했다.

미라는 스틸맨과 웰톤을 한편으로 멀리하면서 찬수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보려 하였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한때 그에 대한 증오심까지 일어났었지만 이제는 심경의 변화를 느꼈음인지 여러날째 우울한 기분으로 별장에 처박혀있으면서 노래련습만 하고있었다.

그는 며칠 남지 않은 성탄절을 앞두고 마리야녀학교에서 열리기로 된 경축음악회에 특별찬조출연을 해달라는 김치선의 간청을 받고 련습에 착수한것이였다.

그는 노래를 련습하다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자동차발동소리에 놀라 노래를 멈추고 실내로 들어갔다.

승용차는 별장마당으로 미끄러져들어오더니 박춘식을 내려놓았다.

년말이 되면서부터 자연히 사업이 복잡해졌음인지 별장에는 별로 나오지 않던 그가 오늘은 웬 일로 대낮부터 들이닥치는것인지 미라는 약간 이상스런 예감이 머리에 떠올랐다.

더구나 박춘식의 얼굴에는 전에 볼수 없던 수심이 가득차있었다.

《아니, 아버지! 웬 일이세요? 어디가 불편하세요?》

《…》

박춘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외투를 벗어 미라에게 맡긴 다음 담배를 피워물고 의자에 덥석 앉아서 한숨을 후우 하고 내쉬고는 《그래, 넌 애비 일이 망하는지 흥하는지도 모르고 별장에 나와 노래만 부르면 제일이냐?》 하고 퉁명스럽게 그를 흘겨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어요?》

미라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박춘식을 유심히 살피였다.

《무슨 일이 생겼냐구? 놀라지 말아. 어제 새벽 강도단이 회사창고를 털어갔다.》

《네? 어느 회사말이예요?》

《무역사 창고말이다.》

《그래, 범인은 잡았어요?》

《범인이 그렇게 쉽게 잡히겠니? 지금 한창 혐의자를 체포하기는 한다만 애매한 녀석들만 경치게 됐지.》

《그래 물건은 얼마나 도난당했어요?》

《시가 3억환어치나 된다.》

《경비원들은 없었나요? 그런 큰 사고가 일어나도 몰랐나요?》

《경비원이 있으면 뭘 해. 그놈들도 공모해가지구 했겠지.》

《도난현장에 가보셨어요?》

《가봤다. 창고문을 열고 감쪽같이 두 트럭이나 실어갔더라. 물건도 모두 요즘 도착한 알토란이 같은 고가의 상품들만… 허허허…》

박춘식은 서글프게 웃으며 침대에 그 육중한 몸을 철퍽 던지였다.

《얘, 내게 혹시 전화오더래두 대지 말아. 한숨 좀 자야겠다.》

그는 이불을 덮고 잠을 자려다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허둥지둥 전화가 놓인 탁자로 가더니 의자에 절퍽 앉아서 전화통을 끌어당겨서 어디로엔가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는 걸리지 않았다. 그는 수화기를 탁 내던지고 다시 쏘파에 와앉으며 《흥, 도난책임을 날 보고 지라구? 허허허… 주금에서 공제하겠다구?》 하며 한바탕 싸늘한 웃음을 웃어제끼였다.

《아니, 누가 그래요?》

《오늘 긴급중역회의에서 웰톤이 그러더라. 그래 웰톤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야 좋겠니? 아는 도끼에 발등찍고 믿던 나무 고목된다더니만…》

박춘식은 별안간 또 벌떡 일어나 침대우에 몸집을 던지더니 잠에 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 있어 또다시 일어나 전화통곁으로 옮겨갔다.

그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며 허둥대는것이였다.

그는 어디로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잘되지 않자 수화기를 홱 내던지고 일어서며 《얘, 술 가져오너라.》 하고 미라에게 소리쳤다.

《세상일이 이렇게 될줄 알았더라면 주주총회때 차라리 사표나 내고말걸.》

박춘식은 또 속으로 중얼대면서 얼마전 주주총회가 있었을 때의 일을 불쑥 회상하였다.

웰톤이 자기에게 나누어준 주권의 힘까지 합쳐져서 그동안 사장자리를 확보해온 그는 지난번 주주총회에서 까딱했더라면 사장자리에서 떨어질번 하였다.

그것은 바로 회사 자본금증액을 위한 주주총회가 있기 며칠전의 일이였다.

《미스터 박! 당신 우리 회사 사장공로 많습니다. 당신에게 내 주권 더 나누어줄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 개인주 더 많이 있어야 사장자리 튼튼합니다. 당신 한국산업, 대한공익 두 회사자금 우리 회사에 더 투자하시오. 고리대금회사 앞으로 되지 않습니다. 고리대금 리용하던 중소상공업자들 대부분 망하지 않았습니까?》

웰톤은 그날도 늘 해오듯 박춘식을 가장 위하는체 하고 투자를 강요했던것이다.

박춘식은 웰톤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였다. 민간중소상공업자들이 이미 다 망해버린 오늘에 와서 자기의 고리대금업도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했기때문이였다.

박춘식은 곰곰히 생각하였다. 역시 오늘의 부귀영화를 유지하려면 무역사 사장자리를 확보해두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결국 《한국산업》, 《대한공익》을 소규모의 고리대금기관으로 개편하는 한편 거액의 자금 1억 5천만환에 달하는 주금을 새로 불입했던것이였다.

이리함으로써 박춘식의 주권은 웰톤의 주권보다 적지 않았다.

박춘식은 이제는 웰톤의 앞에서도 버젓이 사장행세를 할줄 알았으나 그것은 한낱 어리석은 꿈에 불과하였다.

웰톤은 어느 틈에 군소주주들의 주권을 매수, 탈취해서 일약 박춘식을 릉가할만 한 대주주가 되였다.

박춘식이 거액의 주금을 새로 불입하고도 사장자리는 다시 위태롭게 되고말았다.

《미스터 박, 당신 사장자리 위태하지 않기 위하여 자금 더 불입하시오. 지금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 미군 원자무기 들여왔습니다. 북벌전쟁 시작하면 곧 북한 점령할수 있고 우리 회사 상품 북한에 얼마든지 판매할수 있습니다. 당신 주권 지금 많이많이 사서 모아두어야 합니다.》

웰톤의 요구는 이렇게 점점 강경해졌던것이였다.

박춘식은 웰톤이 하는짓이 심상치 않다는것을 그제야 깨달았으나 그의 비위를 거슬리는 날에는 당장 중역회의가 열릴것이고 웰톤의 주권을 양도받아 다른자가 대신 사장으로 취임할것은 빤한 일이기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또다시 자금을 긁어모아 5천만환이나 더 불입했던것이다.

전후 두차례에 걸쳐 불입한 2억환의 거액의 자본은 박춘식이가 피땀을 흘려 번 돈은 아니였다. 미제침략자본에 눌리여 파멸일로를 걸으면서도 살아보겠다고 바둥바둥 발버둥치던 민간중소기업가들의 피땀어린 재산들을 고리대금의 갈퀴로 긁어모아 경매, 차압의 지게로 져나른 돈이지만 그 돈을 대부분 투자하고나니 한편 대견스럽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어쩐지 허전할 때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자기의 지위와 부귀영화를 그 회사의 륭성발전에 다 맡기고있는 오늘날 갑자기 상품도난사건이 발생된것은 실로 그에게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더 큰 타격이였다.

비록 도난당한 상품의 총 가격인 3억환의 거액을 그에게 변상시키지 않는다치더라도 그가 가진 주금에 해당된 리익배당에 있어 막대한 손실이 아닐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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