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석 아닌 목석

4

 

찬수는 그후 2~3일이 지나도록 용세의 사무실에도 또 그의 집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용세는 찬수가 어디서 무엇을 하기에 나타나지 않는지 자못 궁금하기도 했다.

혹시 그동안 자기 힘으로 어디 하숙을 구하지나 않았는지? 만일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되였다.

지용세는 요즈음 년말이 박두해진 관계로 집안에 붙어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리저리 다니며 전에 일해주고 받지 못했던 돈을 받기도 하고 또 새로운 상표도안이나 광고도안 등 주문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을 나가면 밤이 늦어서야 돌아올 때가 적지 않았다.

은숙은 아직도 취직이 결정되지 않았기때문에 낮에는 대개 용세의 일을 거들어주기 위하여 점포에 나갔고 그러는 한편 형무소로 넘어간 아버지에게 침구와 의복 등을 차입하려고 보퉁이를 들고 형무소에 찾아가는 날이 적지 않았다.

어느날이였다. 지용세는 오래간만에 일찍 집에 들어와서 집안식구와 한자리에 앉아 저녁상을 받았다.

때마침 은숙이가 들어왔다.

《아니, 너 정말 한집에 있으면서 요새는 통 얼굴을 보기가 힘들구나.》

지용세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늘 아저씨가 밤늦게 들어오셨다가 식전에 일찍 나가시니깐 그렇죠.》

은숙이도 방그레 웃었다.

그들이 저녁식사를 마치고나서였다.

《참, 너 홍씨 온거 알지?》

《참, 아저씨두… 요전에 이야기허구두 물으세요?》

《음, 참 했구나. 얘, 지금 내가 정신있게 됐니? 너의 아버지 석방운동 할라, 홍씨 하숙문제 해결해줄라, 네 일자리 구해볼라, 집안 살아갈라… 년말이 되니깐 어찌되는 셈판인지 머리가 뱅뱅 도는구나.》

지용세는 담배를 붙여물며 은숙을 건너다보았다.

《그런데 참, 아저씨! 홍선생이 지금 어디 있어요?》

《글쎄, 그건 나두 자세히 모르겠다. 아마 일정한 곳에 붙어있지 않을게다. 결국 내가 하숙을 정해주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니깐…》

《만나시거든 저 좀 만나게 해주세요.》

은숙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대답은 선선히 했으나 지용세는 은숙이에게 찬수를 만나게 한들 자기가 소개했던 그들의 결혼문제해결에는 아무런 성과가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우선 찬수에게서 들은 얘기가 사실이라면 차라리 이 문제를 꺼내지 않았던것만 못했다고 후회되였다.

역시 너무 성급하게 서둘렀던것이 졸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였다는 뉘우침이 갈마들었다. 그런것을 모르고 은숙이가 찬수를 만나려고 간곡히 부탁하는것을 보자 용세는 슬그머니 립장이 거북해지기도 했다.

《매사는 너무 성급하게 서둘것이 아니다. 홍씨를 만나더래두 너무 조급하게 굴진 말아.》

지용세의 이 말에 은숙은 《아이유, 아저씨두… 오해마세요. 홍선생주소를 알구싶어하는 사람이 있어 그래요.》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응? 누군데?》

《요전에 점포에 찾아왔던 젊은 녀성이 오늘 또 왔어요.》

은숙은 낮에 점포를 지키다가 얼마전에 왔던 그 젊은 녀성이 또 찾아와 찬수의 소식을 묻던 일이 회상되였다.

《젊은 녀성이구 누구간에 공연히 함부로 홍씨주소를 가르쳐줄 생각말아. 너나 나나 홍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두 똑똑히 모르는 판에 어름어름해서는 안된다. 공연히 주소가 남에게 알려지면 홍씨에게 화근이 미친단 말야. 너두 알겠지? 홍씨가 집행유예중에 있는것을… 그리구 지금 미국놈들이 잔뜩 노리고있는 판이야. 절대루 주소 가르쳐주지 말아. 서울에 왔다는 이야기도 하지 말구. 그리구 홍씨를 만나더래두 그런 젊은 녀성이 찾아다닌다구 말할 필요도 없다. 나두 홍씨헌테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깐… 알게 뭐냐? 요즘 놈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을 탐지해가지고 체포하는 판이다.》

지용세는 도리여 은숙에게 퉁을 주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런 인물은 아닌것 같아요. 어떻게든지 홍씨와 만나게 해주어야겠어요. 나는 같은 녀성의 립장에서 그저 모른다구만 할수 없어요.》

은숙은 이렇게 자기 의견을 말하면서 몹시 안타까와했다.

《글쎄, 덮어놓고 그러라는건 아니지만 잘 생각해서 해라. …》

지용세는 거듭 주의를 주고 인차 밖으로 나가버리였다.

은숙은 오늘 장치사 사무실안에서 그 젊은 녀성과 두번째로 만나던 일을 더듬어봤다.

선생에 대한 제자로서의 의리와 존경심과 사랑을 그처럼 지니고있는 처녀가 과연 어디에 또 있을것인가?

은숙은 선뜻 이런 생각이 또 솟아올랐다.

그 처녀와 찬수와의 사이는 이미 단순한 사제지간이 아니라 그 한계선을 넘어선것이 아닌가? 이러한 추측이 만일 자기의 지나친 독단이라면 잘못이지만 그러나 앞으로 반드시 그들의 사이가 평범한 사제지간에 그치지 않고 변화하여 딴 형태로 발전되여나갈것만 같았다.

이렇게 보더라도 지용세가 자기에게 암시해준 찬수와 자기와의 문제는 한낱 성급한 주관과 공상에 불과한것이라고 은숙은 생각했다.

따라서 그 문제는 깨끗이 백지로 해버리는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말았다.

이 순간 은숙은 고향마을에서 맺어졌던 리준호와 자기와의 관계가 선뜻 눈앞에 떠올랐다.

그곳에서 리준호와의 사이에 구체적으로 장래를 약속해둘만 한 어떤 애정관계가 조성되였던것은 아니였으나 그는 자기를 무척 믿어주었고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이 아니였던가?

자기가 고향마을에서 교원노릇을 할 때 이 마을, 저 마을로 늘 가정방문을 다니면서 학부형인 농민들의 억울하고 기막힌 사정들을 위로해주며 앞으로 반드시 좋은 세상이 온다는것과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미제와 리승만을 반대해 싸워야 한다고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승리에 대한 신심을 북돋아주는 일을 하게 된것도 리준호의 지도가 있었기때문이 아니였던가?

일주일만 만나지 않아도 보고싶어 뛰여가 만나군 하던 그때의 자기의 감정…

지금 와서 따져보면 그것이 리준호에 대한 일종의 존경과 련모의 감정이 아니였다고 어찌 확실히 말할수 있을것인가?

리준호가 마을을 떠나던 날 밤 비내리는 산모퉁이의 아무도 없는 밭두렁길에서 그가 뜨거운 손으로 자기의 손을 꼭 쥐고 부탁하던 말이 새삼스럽게 귀전을 울리는것이였다.

《은숙씨, 서울에 올라가거든 부디 내가 하던 말들을 잊지 마시오.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은 멀지 않습니다. 나는 은숙씨가 반드시 잘 싸우시리라고 믿습니다.》

은숙은 그날 밤 그 자리에서 리준호의 손을 한참이나 놓지 못했고 준호 역시 자기의 손을 오래동안 꼭 쥐고 걸음을 떼지 못하던 생생한 기억이 머리속에 그림처럼 떠올랐다.

《그럼 언제 또 뵈여요, 네? 어서 떠나세요. 부디 무사하셔야 할텐데… 어떻게든지 서울로 소식을 전해주세요. 네?》

거의 목멘 소리로 말하며 그와 작별하기를 무척 서운하게 여겼던 자기가 아니였던가?

《너무 념려마십쇼. 자, 이제 병원에 들렸다가 곧 떠나십시오. 내 쉬 소식을 련락해드리죠.》

리준호는 침착하게 말하며 자기의 손을 놓고 물러섰으나 몇걸음도 못 가서 돌아다보고 또 돌아다보며 자기에게 빨리 들어가라고 어둠속에서 손짓을 해주지 않았던가?

은숙은 이런것을 생각하면서 리준호에게도 자기에 대한 신뢰감이 결코 적은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뿐만아니라 남성으로서 자기에 대해 가질수 있는 련모의 감정이 전혀 없다고 누가 선선히 말할수 있을것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은숙은 이런 명상에 잠기자 가슴이 더욱 설레였고 리준호의 소식을 모르는것이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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