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야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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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락맥 비탈진 언덕배기에는 한길이 넘는 돌담으로 넓게 둘러싸인 대여섯채의 검붉은 벽돌 서양집들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있다.

세운지 거의 반세기가 넘어보이는 중고식건물들은 그 건축양식이 낡고 구식이긴 하나 돌담밖으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게딱지같은 양철지붕들과 다 찌그러진 궤짝과 같은 판자집들을 내려누를듯이 너무도 크고 웅장하며 위엄있게 보이였다.

돌담안에는 뺑 돌아가며 쭉쭉 뻗어올라간 말쑥한 뽀뿌라나무들이 늦은가을 아침바람에 단풍든 나무잎을 한잎두잎 휘날리며 넓은 마당우에 긴 그늘을 던져주고있다.

돌담 정문에는 파란 뼁끼를 칠한 쇠창살문이 활짝 열려져있고 바른편 돌기둥에는 《마리야녀학교》라는 붓글씨로 쓴 구형청동간판이 걸려있다.

회가루로 줄을 쳐놓은 운동장에서는 륙상경기훈련을 하는 학생들의 경쾌한 모습이 눈에 띄우고 본관옆에 붙은 음악관에서는 피아노소리가 둥당둥당 울려나왔다.

음악관과 나란히 선 특별관내 미술교실에서는 여러명의 녀학생들이 그림을 들고나와 본관 강당으로 운반하고있었다.

본관 교실들은 아래층, 웃층 할것없이 일제히 유리창들을 닦으며 책상과 의자를 들어올려놓고 수선스럽게 청소를 하는 등 전에 볼수 없는 대청소가 이른아침부터 시작되였다.

설립 60년 기념식을 앞둔 이 녀학교에서는 벌써 여러날째 정식 수업을 중지하고 학생이나 교원들이 총동원되여 기념행사준비에 바삐 서둘렀다.

미술교원 홍찬수는 학생들과 함께 그림틀들을 본관 강당으로 옮겨놓고나서 전람회장을 꾸리려고 미리 작성해둔 작품배치계획표를 가져오려고 다시 미술교실로 돌아왔다.

미술교실에서는 학생 하나가 창문앞에 화판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고있었다.

그는 찬수가 교실에 들어오자 붓을 멈추며 가볍게 인사를 한다.

《아니, 영옥이! 그 그림에 더 손질을 해?》

찬수는 의외로 놀란 표정을 하였다.

《암만해두 음영관계가 잘 나타나지 않아서 그래요. 여기 좀 봐주세요, 선생님!》

영옥은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전교 900여명 학생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미술실력을 가진 영옥이가 자기 그림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전람회장을 꾸리는 날에까지도 자기 작품에 붓을 더 대고있는 모습에 찬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는 어느덧 영옥이곁으로 다가갔다.

《음, 역시 좀 부족한데가 있어.》

찬수는 붓에 채색을 묻혀들고 자기 손으로 몇군데를 가필해주면서 설명하였다.

《목적물의 음영관계는 기후, 광선, 주위물체들의 반사관계를 잘 고려해야 되니깐…》

《그렇지만 선생님 필치처럼 돼야 말이죠. …》

영옥은 찬수의 채색다루는 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내 필치처럼 돼서야 되나, 내 필치보다 훨씬 우수해야지.》

《아이유, 선생님두…》

영옥과 찬수사이에는 잠간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

《음?》

《전… 어떻게 했으면 좋아요? 네?》

영옥이의 얼굴에는 약간 불안과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왜?》

《…아버님께서 미술을 전공하는데 대해서는 여전히 반대하시니 말이예요.》

《글쎄, 아버님께서 계속 그러신다면 그것두 곤난한 일이야. 그러나 문제는 영옥이의 결심여하에 달렸어! 모든 난관을 뚫고 전공하도록 해야지. …》

찬수는 붓을 움직이면서 점잖게 말했다.

《그렇지만 상급학교는 더 못 갈것 같아요.》

영옥의 말소리는 이 순간 실망에 잠기였다.

《…꼭 미술학교를 가야 미술가가 되는건 아니니깐 실망할것은 없어.》

찬수는 부드럽게 영옥을 격려해주었다.

《언제 한번 선생님께서 저의 아버지한테 말씀 좀 해주세요!》

영옥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간청하였다.

《음.》

이때 별안간 문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교실문이 왈칵 열리며 하얀 앞치마를 입은 녀선생 하나가 나타났다.

《아니 영옥이, 너 여기 와있었구나. 오늘 상급생은 가사실습인줄 알면서 왜 여기 와있니? 어서 가지 못해? 실습비를 못 냈으면 일하기로 된걸 모르니? 왜 땡땡이를 부리니? 어서 가!》

녀선생은 화를 왈칵 내며 표독스럽게 고함을 꽥 질렀다.

영옥은 당황한 태도로 찬수앞을 물러났다.

앞치마를 입은 녀선생은 가사선생 최보배였다. 피둥피둥 살이 찐 그는 수다스럽고 또 변덕스러워보이였다. 기름이 지르르 흐르는 그는 얼굴에 웬 일인지 오늘 하얗게 분을 발랐고 머리까지 새로 파마를 해서 언뜻 보아도 30대전후의 젊은 녀자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40고개를 넘은 중년녀자였다.

최보배는 잠간동안 그대로 서서 찬수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찬수는 그런줄도 모르고 태연스럽게 그대로 서서 붓만 놀리고있었다.

《아니, 선생님도 딱하세요. 오늘은 보통 가사실습이 아닙니다. 저녁에 연회가 있는줄 번연히 아실텐데 왜 영옥이를 붙잡아놓고 가사실습을 못하게 하십니까?》

최보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붙잡아놓은 일 없습니다.》

찬수는 슬그머니 불쾌하였다.

《그럼 뭡니까? 실습시간에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미술교실에 처박혀있으니… 안됩니다. 더구나 선생님은 아직 미혼이시죠? 우리 학교는 녀학교란걸 아셔야 합니다.》

최보배는 악의에 찬 목소리로 쏘아붙이면서 교실밖으로 휙 나가버리였다.

왈칵 닫혀지는 문소리에 찬수는 다시 불쾌하였고 무슨 큰 모욕이나 당하는것처럼 몹시 분했다.

영옥이가 자기 그림에 가필을 하기 위하여 잠간 교실에 들어온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고 마치 자기가 무슨 영옥이를 고의로 붙들어둔것과 같이 속단을 내리면서 《너는 미혼이니 녀학생과 단 둘이 교실에 호젓이 남아있어서는 안된다.》는것과 같이 빈정대면서 떠벌이고 간 최보배의 수작이 너무도 저속하고 해괴하고 망측스러웠기때문이다.

말하자면 최보배가 자기를 싫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인격을 모욕하는 수작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찬수는 이 녀학교에 취직한지가 불과 반년밖에 되지 않았고 또 교원간에 덥적덥적 붙임성있게 사교적인 처세술을 갖지 못했기때문에 30여명이나 되는 교직원들가운데는 아직 한번도 한자리에서 담화를 못해본 사람이 많았으며 더구나 최보배와 같은 녀교원들과는 개인적으로 접촉할 기회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최보배가 그렇게도 자기를 몰라주고 지나치게 빈정댄 그 언행을 따져보면 섭섭하기보다도 오히려 반발할노릇이였다.

찬수는 영옥의 그림을 떼여 틀에 집어넣고 작품배치계획표를 서랍에서 꺼내였다. 그리고는 영옥의 그림틀을 들고 교실을 나섰다.

미술교실과 복도를 같이한 가사교실에서는 앞치마를 입은 상급생들이 들락날락 혼잡을 이루고있었다.

《선생님, 저 주세요. 제가 가져가겠어요.》

가사교실쪽에서 영옥이가 뛰여나왔다. 영옥이는 하얀 앞치마를 교복우에 걸치였다.

《그만둬. 어서 영옥인 실습해.》

《아니예요, 제가 가져가게 인 주세요.》

영옥이는 찬수의 손에서 자기의 그림틀을 빼앗아들고 앞장서서 본관쪽으로 향하였다.

《선생님, 최선생님허구 다투셨어요?》

《아니.》

《다 알아요. 너무 불쾌히 생각마세요. 최선생님은 원래가 그런 선생님이신걸요 뭘.》

영옥은 찬수의 표정을 살피며 상냥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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